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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94화 (94/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94화

32. 안 아픈 손가락 (4)

오겸이 서안을 내려쳤다.

거칠게.

-쾅!

낡은 서안이 굉음을 내며 울었다. 박살 나지 않을까 싶을 정도의 요란함.

이제는 수척해진 오겸이 쉬이 낼 만한 용력이 아니었다.

“대감께서는 여전히 소관의 진심을 몰라주시는군요. 이건 우려를 표하는 겁니다. 아드님께서 워낙 크게 지르셔서 말이에요.”

반상이 법도를 걸고넘어지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자칫 상황이 격화되었을 경우 대죄를 물을 수도 있기 때문에.

그것을 남발한다는 것은 멍청하거나 혹은 미리 자신의 무덤도 파두었거나 둘 중 하나다.

물론 오언후가 대책도 없이 다짜고짜 상소를 내지른 것을 보면 전자겠으나, 그렇다고 내가 살살 해줘야 할 이유는 없잖은가?

‘멍청해서 자기 혼자 손해를 보는 타입이라면 알 바 아니지만, 그 멍청함으로 남에게 쉽게 손해를 끼치려 든다면 봐줄 수가 없지.’

이런 놈들은 세상의 쓴맛을 분명하게 새겨줘야 했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철이 들어서 별생각 없이 남에게 위해를 가하려는 멍청한 발상은 덜 하지 않겠는가.

“대감께서는 오히려 저에게 감사하셔야 할 겁니다. 만일 저에게 신변의 자유가 제한되는 순간, 믿을 만한 사람이 이번 일에 힘이 되어줄 우군들에게 모든 자료를 전달할 테니까요.”

“…….”

“그렇게 되면 일은 커질 겁니다. 댁의 아드님 혼자서 고생하는 걸로는 끝나지 않을 테고요. 그 피해가 나주 오가 전체에 미치지 못하리란 보장도 없지요.”

나주 오가는 한미한 가문이다.

권가 이상으로.

때문에 오겸은 사실상 집안의 대를 잇는 장손과 처지가 다를 바 하나 없었다. 설령 장손이 따로 있더라도, 오가 내에서 오겸의 존재감은 그 이상이다.

이런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책임감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물론 자신의 지위를 망각하고서 막 사는 인간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요즘 시대가 또 어떤가?

문중의 명예에 죽고 사는 조선 시대 아닌가.

“그래서……. 내가, 내 스스로 아들의 처벌을 청하기라도 하란 말이냐?”

“대감께서 상황을 무마하시려는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주신다면, 전하께서나 조정의 중신들로나 대감의 진심을 받아주지 않겠습니까.”

“언후는 내 하나뿐인 자식이야!”

“송구한 말씀입니다만, 귀한 자식일수록 엄하게 기르셨어야 합니다. 남들은 불혹이라 일컫는 연배에 실수를 저질러 부친과 가문의 존폐에 누를 끼치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존폐’에 힘을 실었다.

존폐가 뭐냐.

보존될 수도 있고, 폐지될 수도 있음을 뜻한다. 일이 잘못 틀어지면 오겸과 나주 오씨는 사라질 정도의 타격까지 각오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적을 만드는 것을 싫어한다.

이건 기본적으로 상대방에게 잘 대해주며, 어느 정도는 당해줄 수도 있다는 뜻이지만 달리 말하면 ‘적 후보’를 아예 없애버려 적을 만들지 않을 생각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만일 오겸이 나에게 철저하게 항복하지 않는다면 나는 굳이 화근을 남겨둘 생각이 없었다.

“새파랗게 어린 주제에 위험하기는 독사와 다를 바 없구나.”

“그 이상을 경험하실 수도 있으십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긁어 부스럼을 만든 사람이 책임을 지는 거지요. 부디 알아주셨으면 합니다만, 소관은 증좌와 우군을 확보하고도 이 사달이 벌어질 때까지 참고만 있었습니다.”

“…….”

오겸은 무어라 하지 못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허엽의 때와 다를 바 없다.

명분은 내가 앞서 있었고 주변의 상황 역시 나의 편이다.

이 자리에서 원하는 것을 바로 얻어낸다면 좋겠으나, 어느 아버지가 제 손으로 자기 자식을 찍어내겠다 약조할 수 있겠는가?

무리해봐야 받아낼 수 있는 부류의 확언이 아니었다. 이제 어떻게 행동하느냐는 오롯이 오겸에게 달린 일이었다.

“당장 조정에서 내려온 명령은 없지만, 오늘 안으로 어떻게든 반응이 있을 듯합니다. 최상의 결과를 끌어내는 방법은 말씀을 드렸으니 현명한 판단 하시리라 믿습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오겸에게 예를 표했다.

오겸은 그런 나를 가증스럽다는 듯 노려보았으나, 말은 한 마디도 못하고 있었다.

“그럼.”

저택을 나서니 선선한 바람이 맞아주었다.

긴장이 조금 되는군.

조정에 불려가는 건 피할 수 없겠지. 오겸이 먼저 나서서 진화에 동참했으면 좋겠지만, 기대한다고 그리 풀린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청문이라…….’

빌어먹을 선조 놈 면상을 또 보게 되겠군.

* * *

선조가 처음 오언후의 상소를 접했을 때는 무척 당혹스러웠다.

분명 이순신이 귀환할 당시 선조에게는 불편하면서도 복잡한 감정을 느껴야 했으나, 막상 시일이 지난 지금은 반쯤 잊은 상태였다.

홍문관이란 조직은 특별히 정해진 일이랄 것도 없고, 번을 서는 두 명의 관리가 경연에 참석하나 선조는 경연을 거의 열지 않았다.

때문에 이순신이 두각을 드러낼 일도, 다시 마주할 일도 없었다. 품계가 낮지는 않으니 이따금 먼발치에서는 볼일이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갑자기 탄핵의 대상이 될 줄이야.’

선조로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이순신은 치부를 쌓는 사람이 아니었고 인망도 좋았으며, 하다못해 홍문관의 관원인 지금은 더더욱 공격받을 이유가 없었다.

사실 오언후의 등장조차도 선조에게는 의외였다.

‘오겸의 아들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변변찮은 관직 하나 지내지 못한 무능력자이니.’

선조로서도 관심이 없을 수밖에.

‘인상을 아예 못 받은 것은 아니지만.’

언후는 재상의 적자로서, 원한다면 음서의 혜택을 받아 관문에 진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언후는 그러지 않았다.

아마 본인의 의사보다는 아버지의 의사가 있었기 때문이리라.

별 볼일 없는 인물인 오겸이 재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을사사화 당시의 공훈 덕이다. 그때와는 많이 달라진 요즘 세상에서 오겸의 권력 기반은 사상누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랑스럽게 음서를 이용해 자식을 관문에 진출시켰다간 표적이 되었겠지.

아비로서나 아들로서나 냉정하게 현실을 직시했다는 점에서 선조는 오겸과 오언후를 아주 못난 인간은 아니구나, 싶었다.

단지 이렇게 존재감을 드러낼 줄 몰랐을 뿐.

난데없는 공격에 짐작 가는 바가 없지는 않았다. 그의 아비는 오겸이고, 오겸은 권철에게서 영의정 자리를 뺏으려다 함께 몰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순신은 권철의 손녀사위 아닌가.

“결정했다.”

선조가 말했다.

전조도 없이 흘러나온 뜬구름 잡는 소리에, 제신들의 시선이 모였다.

어전회의가 끝을 바라보는 시점이었다. 금일 보고하고 논의할 사항은 모두 지나가 자리가 파하기만을 기다리던 신하들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뜬금없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무엇을 결정 내리셨다는 말씀이신지…….”

우의정 박순이 물었다.

선조가 답했다.

“홍문관 응교 이순신을 불러오라. 오언후도.”

“대질을 시키려 함이옵니까?”

“그렇다.”

사실, 대질이야 알 바 아니었다.

선조는 궁금했다. 그동안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어떻게 변해있을지.

관문에 들어서고 몇 년 만에 크고 작은 상과를 거둬온 이순신이다. 유능함으로 따지자면 문무백관을 통틀어도 비할 자는 많지 않다.

덕분에 화려한 경력을 가진 이순신이지만……. 정계란 그리 친절한 세상이 아니었다. 이런 일은 앞으로도 즐비할 테고, 이순신이 높은 자리로 올라갈수록 강도와 빈도는 더욱 심해지겠지.

그러니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은 순진한 자인가?

아니면 그동안 독기를 감추고 있었을 뿐인가.

어느 쪽이라도 흥미로웠다. 전자라면 그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재고해볼 수도 있겠지. 하지만 후자일 경우에는…….

* * *

“홍문관 응교 이순신 입시요.”

대전 문지기의 외침과 함께 정문이 좌우로 열렸다.

이전에도 이따금 찾았던 장소였으나 지금처럼 긴장한 적도 없었다.

좌우에는 대신들이 시립해 있었으며 끝에는……, 선조가 자리해 있었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미세하게 끌어올린 채 흥미롭다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앞으로 나아갔다.

“신 홍문관 응교, 이순신 주상전하께 인사 올리옵나이다.”

“그대는 그대의 성명이 상소에 올라갔음을 아는가?”

“부제학에게 전해 듣고서 근신하던 중이었사옵니다.”

“죄를 인정했다는 뜻인가?”

이런 걸 걸고넘어지나.

몇몇 경우에서는 죄를 시인하는 것도 방책이 될 수 있다.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처럼.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아니옵나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근신하였는가?”

“불필요한 오해의 소지를 남겨 전하의 성총과 조정 대신들의 귀를 불편하게 해드렸으니, 그 잘못을 반성하고자 근신했을 뿐입니다.”

“반상의 법도를 어지럽혔다는 지적은 사실이 아니다?”

“그러하옵니다.”

내가 담담하게 단언하자 선조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오언후.

그는 나의 곁에서 고작 몇 보 거리에 서 있었다. 이런 자리에 불려 나올 생각은 하지 못했는지 무척이나 당황해하고 있었다.

“응교는 잘못한 바가 없다는데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오언후는 짧은 침묵 끝에 자신의 의견을 내놓았다.

“예로부터 존비의 등급과 귀천의 분수는 하늘이 세우고 땅이 설치한 것과 같아서, 질서정연하여 함부로 범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배워왔사옵니다.”

“그런데?”

“그런데 응교는 가노와 말을 나누는 것이 친우를 대함과 다르지 않고, 나아가 거처 밖에서도 경망스럽게 행동하니 반상의 법도를 어지럽힘이 이와 같고, 또 뭇 사람들이 보고 배우지 않을까 우려스럽사옵니다.”

“흠. 일리가 있다.”

선조는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대 생각은 어떠한가.”

“이 일이 오해에서 벌어진 침극임을 알겠사옵니다.”

“오해다?”

“신은 부친의 곁을 떠나 도성에서 살게 되었을 때부터, 물려받은 가노와 종복들을 모두 해방하여 백성과 다르지 않게 만들었사옵니다.”

몇몇 대신들이 눈을 크게 뜨며 관심을 드러냈다.

선조를 제외하고는.

“집에서 부리는 이들은 단순한 가노가 아니라 삯을 받아 일하는 머슴들이며, 노비가 아닌 백성으로서의 신분을 증명하고 영위하고자 세금 역시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납부해왔사옵니다.”

“…….”

“그들은 오래전부터 나라에서 맡은 바 역할을 다하고 있는 백성인데, 만일 삯을 주고 부리는 입장이라며 노비 대하듯 대한다면 그야말로 도리어 반상의 법도를 어지럽히는 일이 아니겠사옵니까.”

“판윤.”

선조의 시선이 판윤이라 불린 자에게 향했다.

한성부 판윤이란 수도인 도성을 왕을 대신해 다스리는 자리. 당연히 도성의 호구를 조사하고 세금을 거두는 역할도 이행했다.

“부르셨사옵니까.”

“응교의 말이 사실인가?”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신이 비록 판윤의 직을 지낸다고는 하나 도성에 사는 자 개개인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옵나이다.”

판윤이 어물어물 말하자, 이때다 싶었는지 끼어드는 사람이 있었다.

부제학 유희춘이었다.

“전하, 판윤은 전하를 대신하여 도성을 다스리는 막중한 직임을 맡고 있는 자리인데, 이와 같은 자리에서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니 심히 송구스럽습니다.”

“부제학.”

“판윤 임열(任說)은 경상 감사를 지낼 적에도 잘못이 많았으며 관기를 사랑하여 관기가 말하는 것은 다 뒤따르고 쫓아서 비루한 일을 많이 하였으니 남쪽 사람들은 아직도 더러워하여 침을 뱉는다 하옵니다.”

“흠.”

“하해와 같은 성은을 입어 판윤으로서의 기회를 얻었음에도 이처럼 소임을 다하지 못하니, 파직함이 옳을 듯하옵니다.”

유희춘이 기관총을 갈겨대듯 공격하자, 난데없이 저격을 당한 임열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두어 걸음이나 물러섰다.

나와 오언후의 일이 벌어지는 와중이라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

선조로서도 의외였는지 그는 잠시 고민하다 답했다.

“파직은 되었고, 판윤 자리에는 다른 사람을 쓰겠다.”

유희춘에게는 만족스러운 답변이 아니었을까.

“하오나…….”

쓰게 입을 연 유희춘이었으나 선조는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지금은 응교의 잘잘못을 논하는 자리가 아닌가. 정작 중요한, 응교의 말이 사실인지의 여부는 여전히 확인하지 못했다.”

“응교가 어느 안전이라고 감히 거짓을 고하겠사옵니까? 좌, 우윤 중에서 한 사람을 미리 불러놓으시되 일단은 믿어주심이 옳을 듯하옵니다.”

“……그러지. 좌윤에게 들라 하라.”

좌윤이 누군지는 몰라도 내가 그동안 성실납세를 했다는 것은 확실히 알아오겠군. 그건 나의 주장에 힘을 실어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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