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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93화 (93/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93화

32. 안 아픈 손가락 (3)

“이거, 참.”

홍문관.

여러 관리들이 자리해 있었지만 정원은 갖춰지지 않았다.

일부는 도서 정리를 명분으로 어딘가에서 농땡이라도 피우고 있겠지. 사실 전담하는 행정업무라는 건 없어서, 관청의 비중에 비해 한가로운 편이었다.

나 역시 손톱 밑의 때를 긁어내며 시간이나 축내는 중이었는데…….

-드륵.

미닫이 소리와 함께 아전이 하나 들어와 부제학 유희춘을 찾았다.

유희춘은 아전에게서 짧게 보고를 받더니 나를 바라보았다.

“따라오게.”

짧고 간단명료한 명령.

상관의 부름이란 언제나 불쾌한 법이지만 유희춘은 그런 류의 상관은 아니었다. 특히 노수신과 마찬가지로 을사사화 희생자라, 오랜 유배 생활 끝에 깨달음이라도 얻은 것인지 초탈한 면이 있었다.

“예.”

함께 관사를 나서니 유희춘은 한동안 나아갔다. 그리고 주변에 인적이 드물어져서야 발을 돌렸다.

“응교.”

“말씀하시지요. 영감.”

“이번에 자네 이름이 상소문에 올라갔다는군.”

“그래요?”

“……별로 놀라지 않는군.”

“관직을 지내면서 어찌 공격 한 번 안 받겠습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이미 예상한 일이어서.

오겸이나 오언후가 나를 공격한다면 이즈음 어떻게든 반응을 보이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단지 예상이 실현되었을 뿐.

오히려 고맙기까지 했다.

을룡은 오언후에게서 별다른 이상행동을 감지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건 철저한 준비를 갖추고 시작한 공격이 아닌 개인의 충동적인 공격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리고 어설픈 공격일수록 역풍은 세차게 부는 법.

“무슨 내용이었습니까?”

“응교가 신분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다는군.”

“하하하…….”

신분질서 운운하기에는 너무나 오래된 일 아니냐.

기껏 생각해낸 게 철 지난 트집이라니.

‘오언후라는 친구가 그다지 현명한 사람은 아닌가 보군.’

물론 나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 트집 잡을 것이라곤 그뿐이다. 그 외에 무엇을 명분으로 나를 공격하겠나?

일의 경중을 감안해도 신분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은 대죄에 속하는 편이니.

굳이 사사로운 부스러기를 찾아 들춰낼 필요가 없는 거다.

‘하지만 나라고 그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한 줄 아느냐.’

순진하다면 순진한 인간이었다.

“소관이 당장 이행해야 할 명령이 없다면, 송구합니다만 잠시 자리를 비울까 합니다.”

“평소라면 용납하지 못했겠지만, 할 일이 있어 보이니.”

유희춘은 흐릿하게 웃었다.

말했듯, 그 역시 노수신과 마찬가지로 을사사화 희생자다. 오언후는 을사사화 공신인 오겸의 아들이었고.

“자네는 내가 상소에 성명이 언급된 책임으로 퇴청하고 자숙하기로 한 걸세.”

“감사합니다.”

“그럼.”

유희춘은 볼일은 다 보았다는 듯 선선히 발길을 돌렸다.

그가 멀어지자, 나는 밝았던 낯빛을 풀고서 미간을 찌푸렸다.

“귀찮게 됐군.”

이제는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당장 조정은 나에 대한 조치는 취하지 않았지만, 앞일은 모른다. 뒤늦게라도 청문을 위해 소환하거나 소란을 만든 죄를 물어 징계를 내릴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이럴 때를 대비해 보험도 들어놓았지만, 대가는 전면전이다.

내가 움직이기 어려워지면…… 을룡은 그동안 확보한 자료들을 지인들에게 뿌릴 테니까.

‘그렇게까지 요란하게 일을 벌이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오언후가 벌인 조잡한 짓거리를 보아, 다행스럽게도 오겸의 의사는 없는 듯했다.

적어도 전직 좌의정쯤 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근본 없는 공격은 안 할 테니까.

이 순간 내가 도움을 청해야 할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오겸이었다.

* * *

“나으리, 송구하오나 대감께서는 부재중이십니다.”

오겸의 저택.

나는 시급히 오겸을 찾았으나, 문지기 노복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돌아가라는 것이었다.

“오 대감께서 아직 여유가 있어 보이시니 좋구나. 댁의 아들이 나를 걸고넘어졌다는 건 알고 계시더냐?”

“…….”

“알고 계시다면 기꺼이 돌아가야지. 하지만 아니라면, 지금 오 대감은 실수하고 계시는 걸세.”

물론 어느 쪽이라도 실수하고 있는 거다.

하지만 전자는 적어도 각오라도 하지 않았겠나. 말년을 화려하게 불태우고 싶다면 정 못 놀아줄 것도 없다.

하지만 후자라면 억울하지 않겠나. 자식이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도 모르고 나와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말이다.

“대감께서 돌아오신다면 말씀 드리겠습니다.”

“지금 당장 말씀드리는 게 좋을 걸세. 오 대감이 늘그막에 맨발로 뛰쳐나오는 모습을 볼 생각이 없다면 말이야.”

“…….”

대문 너머는 한동안 조용했다.

아무리 나의 위세가 다른 정사품들과는 다르다지만, 오겸은 전직 의정.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우위에 선 듯 군다는 건 불쾌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고작 문지기 처지로 주인의 팔자를 시험할 수는 없었는지, 물러나는 발소리 끝에 소곤소곤 말을 나누는 잡음이 들려왔다.

잠시 후.

-끼익.

솟을대문이 열렸다.

휘황찬란한 솟을대문 너머 서 있던 녀석은, 딴에는 자존심이 꺾인 것이 불쾌했는지 작게 입술을 말고 있었다.

미관말직도 지내지 못해 문이나 지키는 처지에 호가호위(狐假虎威)라니.

쓴맛을 보여주고 싶었지만 사소한 복수를 남발하는 건 적을 만들기 쉽다. 한두 번이야 무방하겠지만 그 단맛에 취하지 않기란 힘들 테지.

맞은편에는 열린 사랑방 방문 너머로 오겸이 자리해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피로함이 짙게 깔려 있었으나, 아들의 만행을 막 접한 덕인지 놀란 기색도 흐릿하게 드러나 있었다.

반쯤은 설마 싶을 테고…….

나머지 반은 덮어놓고 일부터 저지른 오언후의 멍청함을 책망하고 있을 테지.

“인사드리겠습니다. 홍문관 응교 이순신이라 합니다.”

“들게.”

오겸은 짧게 말하고는 문가에서 멀어졌다.

나는 뜰을 가로질러, 단숨에 쪽마루를 넘어 방으로 들어섰다.

내부는 화려했다. 사방에 갖은 장식을 배치해 두어, 분명 넓은 방임에도 불구하고 압박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약간의 압박과 긴장감.

하지만 여유롭게 주변을 구경할 때는 아니었다.

“언후가 자네에 대해 상소를 올렸다고?”

“근본은 탄핵과 다르지 않다고 봐야겠지요.”

“……나에게 어쩌란 건가?”

오겸이 불쾌하다는 듯 물었다.

비록 오언후가 자신에게 말도 없이 이순신을 공격하긴 했지만, 거기에 자신이 끼어서 무언가를 할 이유는 하등 없었다.

가능성은 낮으나 잘만 풀린다면 권철이 지독히 아끼는 손녀사위, 이순신은 큰 타격을 입을 터였다.

물론 잘 풀리지 않는대도 멍청한 아들놈이나 고생하겠지. 그 피해가 자신에게까지 역류할 가능성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자식의 잘못은 전적으로 부모에 있다고 들었습니다. 훈육을 똑바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고를 치는 것이라면서요.”

“지금 나에게 책임을 묻는 건가?”

“그렇습니다.”

“……흥, 그래. 나에게 책임이 있다고 치세. 하지만 자네가 그 책임을 나에게 물을 위치는 아닌 것 같은데.”

자신은 전직이라고는 하나 좌의정까지 올라간 사람이었다.

부자가 망해도 삼대가 간다는 말이 있다. 그 말처럼 자신의 권세가 삼대를 가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일신의 수명이 다할 때까지 최소한의 힘은 드러낼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상대방은 고작 홍문관 응교.

정사품이 낮은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전직 의정과 정면 대결을 할 정도는 아니다.

“맞습니다.”

의외로 선선히 인정하는 이순신.

하지만 말장난이나 하고자 찾아온 것은 아닐 터였다. 오겸은 직감적으로, 지금 상황이 만만찮게 돌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대감께서 좌의정에 제수되셨을 당시, 한동안 소란이 일었던 걸로 압니다. 특히 삼사 쪽에서 말이에요.”

과연 미친개들이 자신의 선배이고 스승인 자들을 도륙한 오겸의 좌의정 등극을 얌전히 구경할 수 있겠는가?

당연히 복상 결과가 발표된 당일부터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이 순서대로 오겸의 체직을 주장했다.

“그런데, 공론은 격화되지 않고 빠르게 가라앉았습니다.”

“전하께서 직접 나서신 덕이지.”

“예, 삼사에서는 대감의 행보를 하나하나 들어 인사의 취소를 간언했지만, 전하께서는 ‘애매하게 논하지 말라.’며 거절하셨지요.”

정작 애매한 쪽은 선조의 답변이었는데도 말이다.

무엇을 애매하게 논하지 말라는 건가?

사림의 적인 오겸이 의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에 애매한 구석은 어디에도 없다. 선조는 단지 개소리를 하며 억지나 부린 것이다.

남들이 그러했다면 병신으로 치부하고 말았겠으나……, 선조는 그런 식으로 병신은 아니었다.

또라이긴 하지만 지적능력이 부족하지는 않다는 뜻.

삼사의 신하들은 선조의 개소리를 강력한 의지표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더는 간언하지 않았다……, 는 것이 외부에서 짐작할 수 있는 최대한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이상하리만치 분란이 빠르게 가라앉지 않았습니까? 삼사 입장에서는 도저히 용납할만한 대답이 아니었는데도 말입니다.”

“그때 삼사 관리들의 생각은 자네와 달랐을 뿐이지.”

“아니요. 저라고 당시의 선배님들과 생각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 같군요.”

“……?”

“두 상자의 은화에 누군들 굴복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허엽이 받은 뇌물의 양은 은화 두 상자.

쌀섬으로 치환한다면 족히 삼백 섬은 되는 거액이었다. 하지만 좌의정 자리를 지키기에는 너무나도 싸디싼 대가였다.

정확한 액수를 불러서일까.

그동안 남의 이야기하듯 건성으로 시간이나 끌던 오겸의 태도가 달라졌다.

“근본 없는 자신감은 아니었군.”

“고작 허세로 좌의정까지 지낸 대감을 설득하러 왔겠습니까.”

“설득?”

“예.”

“나를 설득해 어쩌겠단 말인가. 상소를 발한 자는 내가 아니야. 언후지.”

“언후는 대감의 아들이기도 하지요. 말했듯, 자식의 잘못은 부모가 책임져야 합니다. 방금 전 저에게 권한을 찾으셨던데, 이 정도면 없는 권한도 생길 듯하군요.”

나는 품에서 허엽이 친필로 작성한 자백서를 건넸다.

오겸은 그것을 받아들고는 거칠게 훑어보다, 두 손으로 꼭 쥐며 말했다.

“이 따위 것은 찢어버리면 그만이야.”

“예, 다시 구해도 그만이고요.”

사실 진품도 아니었지만, 진짜와 다를 바 없는 자백을 대놓고 건넨 이유는 자신감의 표출이었다.

설령 네 손에 들어가서 어찌 되더라도 나는 언제든지 다시 구할 수 있다는 뜻의.

달리 말하자면 당시 뇌물을 받았던 허엽이 이미 나의 편이 되기로 했다는 압박이기도 했다.

“놈을 어떻게 설득한 거지?”

“최근 새 사람이 되고 싶다던데요. 과거의 치부를 청산해야지 않겠냐고 긴히 말씀을 드리니 이해해주시더군요.”

“개소리.”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못 믿으면 어쩔 건데.

“대감께는 송구하지만 아직 저에게 패는 많다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이번에 공석이 된 의정 자리를 채우고자 복상이 있을 거라는데…….”

오겸도 알겠지만 허울뿐인 전 영의정 이탁과, 선조가 그동안 공들여 길러온 대제학 노수신이 경쟁한다.

누가 낙점될지는 불보듯 뻔했으며, 노수신은 이탁과는 원수진 사이였다.

“나를 겁박하는 건가?”

“아닙니다. 대감께서는 선인이시고, 또 저와는 접점이 없는 분이신데 겁박이라니요. 오해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겁박이 아니고서야 어찌 과거 일과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여 아들의 상소를 철회시키라 강요한단 말인가?”

“으음. 이 부분 역시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나는 턱을 살살 쓰다듬었다.

“반상의 법도 운운은 함부로 할 말이 아닙니다. 자칫 상대방을 파멸시킬 수도 있는 일인데요. 이만한 일을 고작 상소 철회 정도로 정리할 수 있겠습니까?”

“그게 무슨.”

“일을 크게 벌일수록 역풍은 거센 법입니다. 고작 물리는 정도로 정리되리라, 그 정도의 각오로 일이 마무리될 수 있겠습니까?”

“……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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