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92화
32. 안 아픈 손가락 (2)
“…….”
허엽으로서도 깝깝한 상황이었는지, 차마 더 항변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그는 오겸에게 뇌물을 받았다는 잘못을 안고 시작했다. 설령 상황이 공평하더라도 추는 내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환경까지 나에게 유리하니 허엽이 어쩌겠는가?
하지만 압박은 좋지 않다. 이미 승기는 이쪽으로 기울었으니 과도한 압박은 도리어 반발이나 부를 뿐이다.
“만일 제가 영감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이라면, 진즉에 그러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렇게 일신만 이끌고서 직접 찾아와 부탁을 드리고 있지 않습니까.”
“부탁이라고?”
허엽은 무슨 개소리냐는 듯 이죽거렸다.
“저라고 영감과 불편한 사이가 되는 것이 어찌 달갑겠습니까. 적을 만드는 건 제 성격에 맞지 않습니다. 그러니 최대한 조용하고 깔끔하게 끝내고 싶습니다.”
“자네가 조용하게 하건 시끄럽게 굴건 내 명줄은 달랑거릴 텐데 얼굴에 깐 철판 하나는 부럽도록 두껍군!”
허엽이 외쳤다.
그동안 조곤조곤 이어지던 대화가 단숨에 격해져서일까.
아비의 품에 안겨 꾸벅꾸벅 졸던 막둥이가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허엽은 그것을 뒤늦게 깨닫고는 몸을 옆으로 흔들며 아이를 달랬다.
“아니다, 아니야. 이 아비가 갑자기 소리를 질러 미안하구나.”
허엽은 아이를 한참이나 토닥인 뒤에야 나를 바라보았다. 상황이 일방적임은 그 역시 부정할 수 없었는지 시선에는 힘이 없었다.
“만일 일이 커진다면 가정에도 위해가 갈 겁니다. 설령 영감의 자필 문서를 확보하더라도, 가족에게 위해가 가지는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간곡하게 부탁하니 허엽도 더 이상 막무가내로 거절하지 못했다.
특히 일이 커진다면 가정에도 위해가 간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나아가 가문의 명성에도 누를 끼치게 된다.
한때 문중의 어른이었던 허자를 비호하다 파직까지 당했던 허엽으로서는 더더욱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약속을 해준다면…….”
“저는 거짓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영감께 위안이 갈 수는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배신감을 느끼게 된다면 저는 큰 죄를 짓는 것이니까요.”
“…….”
“대신 노력하겠다는 것만큼은 분명히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오 대감께서도 협조를 해주신다면 조용히 끝나겠지요.”
“그렇지 않는다면?”
“격해질 수도 있습니다.”
오겸은 권철을 밀어내고 자신이 영의정이 되고자 했다.
하지만 무리한 견제가 눈에 띄었는지, 결국은 권철과 함께 낙마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다.
사실 염치가 있는 인간이라면 섣불리 보복을 할 상황은 아니다. 먼저 시비를 붙이다 물귀신 당한 것인데, 그것이 억울하고 화가 나면 또라이지.
하지만 나는 그 또라이인 인간을 이미 겪어본 적이 있었다.
선조라고.
무엇 하나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내가 믿을 것이라곤 오겸의 약점이었다.
오겸이 보복할 생각이 없다면 묻어두겠지만 그가 실수라도 한다면, 나는 스스로를 방어하고 철저하게 복수를 이행해야 했다.
그래야 앞으로 오겸처럼 나를 상대로 실수할 인간이 줄어들지 않겠는가.
물론 나라고 후자를 바라지는 않는다. 적을 만들고 싶지 않은 나로서는 뭐든지 좋게좋게 넘어가자는 것이 모토였으니까.
그것을 허엽도 느끼긴 한 것 같았다.
“최대한 조용히 끝났으면 좋겠군.”
“저 역시 그렇습니다.”
“후…….”
허엽은 끓는 한숨을 흘렸다.
그러다 한참이 지나,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나는 막내를 본 뒤 스스로를 바꾸기로 했네. 아마 자네는 나의 추태를 잘 알고 있어 믿기 어렵겠지만…….”
부정하지는 않았다.
한때의 치부라 보기에는 워낙 또라이 같은 짓들이어서. 게다가 오겸에게 뇌물을 받은 것도 그다지 오래된 일은 아니었다.
막내를 본 것이 변화의 계기가 될 수는 있겠으나, 누가 알겠는가? 삼일천하의 변심에 불과할지. 하지만 마음이 기특했다.
“후.”
나는 짧게 한숨을 흘리고는 말을 이었다.
“영감의 말씀이 진심이라면, 저도 진심을 조금 보이도록 하겠습니다.”
“말하게.”
“일단은 자필과 서명을 받아내고요.”
“……음.”
허엽은 서안을 끌어당겨 먹을 간 뒤, 백지에 글을 써내려갔다. 자신이 모월 모일 오겸에게 백미와 은화를 받았으며 그 수량은 어떠했고, 또 오겸이 무슨 부탁을 했는지도 상세했다.
기대 이상의 부응에 나도 조금은 놀랐다.
마냥 억누르지 않고 좋게 풀어가자는 분위기, 그리고 명령이 아닌 부탁과 최대한 가족에 위해가 가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이 만들어낸 결과일까.
일필휘지로 백지를 채운 허엽은 자신이 저지른 죄과를 면전으로 대하고는 묵은 한숨을 토해냈다.
“후…….”
그리고는 그것을 말아 나에게 건넸다.
나는 공손히 받아들었다.
“부디 쓰일 일이 없었으면 좋겠군.”
“저 역시 그러합니다. 하지만 오 대감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이 문서의 존재를 밝힐 수도 있다는 점,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찾아온 것이기도 했으니까.
“그건 어쩔 수 없겠지.”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자네의 진심이란 건 뭔가?”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여기까지 왔는데 무슨 오해가 있겠나.”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막 허엽의 목숨줄과도 같은 중대한 치부를 얻어낸 참이다. 이런 마당에 무슨 오해가 있겠나.
“이런 말씀을 드려 죄송합니다만, 막내는 운수가 좋지 않습니다.”
“운수가 좋지 않다니?”
“관문에 들어서거나 관에 관여될 경우 비참하게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걸 자네가 어찌 안단 말인가?”
“관상을 보는 재주가 있다고만 하겠습니다.”
미래에서 와서 안다고 할 수는 없잖은가.
어쨌거나 내가 온 세상에서 허균은 정말로 비참하게 죽었다. 광해군 시기 북인의 영수였던 이이첨 밑에서 일하다, 토사구팽당하여 무언가 항변하려는 도중 거열형을 집행당한 것이다.
하지만 조선 시대에서 반가의 자식이 관에 들어서지 못하거나, 하다못해 관과 연관도 되지 않는 건 비참한 일이었다.
허엽은 믿을 수 없었는지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나, 나는 괴력난신은 믿지 않네.”
“증거가 부족하다는 뜻이라면……, 음.”
나는 최근의 일들을 떠올렸다. 빤하지 않아 반전이 될만한 추측을 해야 했는데, 선조 초반에 대해서 내가 아는 건 많지 않았다.
한동안 고민하던 내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따님분이 시재가 있군요.”
그나마 허엽에게 와닿을 수 있는 예언이었다.
허엽은 안도해하며 말했다.
“내 딸은 시를 짓지 않네. 그러기에도 너무 어리고, 글공부도 시키지 않았어. 게다가 관상을 본다더니 정작 내 딸아이 얼굴은 한 번도 본 적 없지 않은가?”
“글쎄요. 제가 알기로는 따님분 시집이 너무나도 유명해져, 명나라에서도 시집으로 출간되어 큰 명망을 얻을 텐데요.”
“말도 안 되는 소리. 이제 보니 실없는 소리를 하는 사람이었군. 내가 자네에게 내 명줄을 건넨 걸 후회하게 만들 심산인가?”
허엽은 별 시답잖은 농을 다 듣는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나중에라도 더 알려달라며 비셔도 더는 천기누설 못 해드립니다.”
“흥, 됐네. 자네 볼일은 끝났으니 물러가게.”
“그럽지요. 다음에는 희소식으로 찾아뵙겠습니다.”
나는 일어나서 짧게 예를 표하고는 물러났다.
-끼익.
* * *
-끼익.
이순신이 나가고.
허엽은 껴안고 있던 막둥이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이제 처음으로 본 사내에게 자신의 중차대한 약점을 남겼지만, 이상하리만치 불쾌함이나 두려움 같은 마땅히 느껴져야 할 감정이 없었다.
실로 신비한 사내.
짧지 않은 세월을 살아왔으나 그와 같은 기인이사는 처음이었다.
“흠…….”
그래서일까.
그가 툭 던지듯 놓고 간 소위 천기누설이라는 것이 신경 쓰였다.
글공부 한 번 시켜준 적 없는 딸아이가 시재라니…….
터무니없는 소리였으나 워낙 당당하게 말하니 믿기지는 않더라도 의식을 안 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사실여부에 따라서는 금지옥엽처럼 아끼는 막내의 명운까지 달라질 판이었다.
‘그래, 속는 셈치고 알아나 보자.’
허엽은 막내를 이부자리에 고이 뉘인 디 방을 나섰다.
딸아이 초희는 안채에 있었다. 안채를 찾은 허엽은 방에 들어서서 초희를 바라보았다.
“…….”
초희는 무척이나 평온한 얼굴로 자신에게 의문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볼일이라도 있느냐는 듯.
당연하지만 딸아이의 무릎에는 문방사우 따위가 아닌 바느질 도구와 옷감이 올라가 있었다.
“아버지?”
“음, 갑자기 이런 말을 해서 너도 당황스럽겠지만. 혹시 시문을 쓰느냐?”
허엽도 말하면서 민망하였으나, 그런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딸아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서 굳는 게 아닌가.
걸리는 게 있다는 듯…….
‘아뿔싸.’
허엽은 뒤늦게 이순신이 한 말이 실없는 소리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막내는 관문에 들여서는 안 되겠구나.
하지만 그의 딴에는 관상을 본다 하였는데, 얼굴 한 번 본 적 없을 딸아이가 글 쓰는 것은 어떻게 알았을까?
같은 집에서 사는 아비조차도 몰랐는데…….
이순신은 실로 기이한 인물이었으며, 그에게 순순히 항복한 것은 실로 천재일우였는지도 몰랐다.
* * *
“아버지.”
오언후가 말했다.
그의 맞은편 상석에는 전 좌의정 오겸이 자리해 있었다.
권력이 삶의 의욕을 가져다준다던가? 오겸은 그런 말이 사실임을 증명하듯 낙마 이후 핼쑥하게 살이 빠진 채였다.
그에게서 달아난 것은 살만이 아니었다.
한평생 앉은 자리에서는 몸을 앞으로도 기울여본 적 없는 오겸이다. 오죽 꼿꼿한 사람이었으면 가까운 사람들은 그를 대나무라 불렀다.
부러질지언정 휘지는 않을 것이라며.
하지만 오겸은 이제 몸을 반쯤 뉘인 채 팔걸이에 기대 어렵사리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살만이 아니라 기운도 모조리 빠져나가, 최근의 오겸은 반송장이나 다름없이 되었다.
“…….”
이런 아버지의 몰골은 오언후에게는 무척이나 마음 아픈 것이었다. 그리고 불쾌했다.
오겸이 자애로운 아버지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둘도 없는 아버지였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기운을 잃고 지쳐버린 몰골이 되었으니 자식으로서는 마음 편히 볼 광경이 아니었다.
‘권철, 이 원수 같은 놈. 사직할 생각이라면 곱게 혼자서 사직할 것이지 감히 아버지를 끌어들여!’
권철이 물귀신을 한 이유는 오겸이 먼저 그의 자리를 노렸기 때문이지만, 오언후로서는 알 바가 아니었다.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니까.
“아버지, 기운 차리시지요. 단지 잠깐 사모를 내려놓으신 것 아닙니까? 게다가 궤장도 받으셨으니…….”
이에 오겸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궤장을 받았으니 문제 아니냐…….”
조선 초까지만 하더라도 분명 궤장은 영광스러운 하사품이었다.
보통의 관리들은 일흔을 넘기면 연배와 건강을 이유로 관직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치사(致仕)를 하게 된다.
궤장이란 이렇게 물러나는 관리를 붙들고 더 일해달라는 부탁의 표현을 하사품으로 대신한 것이다.
의자와 지팡이를 내려, 거동이 불편하더라도 이 하사품을 받고 조금 더 일해달라는 차원에서.
하지만 건국 이후 무수한 시간이 흐른 지금 궤장의 의미는 달라졌다.
꼭 일흔을 넘기지 않아도, 치사할 상황이 되지 않아도 궤장은 이따금 내려졌다. 그리고 기로소로 재배치 되었는데, 기로소의 소속원들은 단지 시와 때에 맞춰 화합만 할 뿐이지 정해진 실무는 하나도 없었다.
즉 기로소란 노신들이 죽기 전까지 남아도는 시간만 축일 뿐, 무엇 하나 누릴 수 없는 공간인 셈이다.
많은 관리들은 재상과 의정의 자리에 올라 오랫동안 일하다 궤장을 하사받고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을 무궁한 영광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한평생 권력만 바라보았으며 지금도 마찬가지인 오겸에게는 사형이나 마찬가지였다.
실제로 그에게 내려진 궤장은 팽형과 같은 명예사형과 다를 바 없었다.
결과적으로 숙청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아버지, 기운 내셔야 합니다. 아직 관직 생활이 끝난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
“오래전 영의정 직을 사직했던 이 대감이 이번 복상의 물망에 올랐다고 들었습니다. 아버지께도 분명 기회가 돌아올 겁니다.”
오언후의 위로에도 오겸은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사실, 아들의 위로라는 것이 오겸에는 비아냥으로 들렸다.
조금만 세상 돌아가는 정국에 식견이 있는 자라면 전 영의정 이탁이 후보로 올라간 것은 구색 맞추기에 불과함을 안다.
상대가 다른 사람도 아닌, 그동안 왕의 예쁨을 독차지해온 노수신이니까.
게다가 이탁은 영의정 자리에서 내려올 당시 왕과 좋은 사이가 아니었다. 노수신과 나란히 놓인 지금 왕이 이탁을 뽑을 이유는 어디에도 없는 셈이다.
그러니 이탁이 물망에 올랐으니 희망을 가지라는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못한다.
정치 생명이 다해 구색 맞추기에 끌려다니는 신세가 어찌 희망까지 가져가며 바랄 일인가?
아들이 그동안 자신을 못났다며 박대한 아버지에게 복수하는 것이라면 차라리 기쁠 것이다.
그런데 하나뿐인 아들이 너무나도 멍청해 자신의 뒤를 잇지 못함을, 그리고 나주 오씨는 앞으로도 한미한 가문으로 남을 것임을 인정한다는 건 너무나도 원통하니까.
“물러가라. 쉬고 싶구나.”
“아버지.”
“물러가라 하지 않았느냐.”
오겸이 엄하게 이르자, 오언후는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온 그는 입술을 씹었다.
아버지의 비참한 모습을 마주한 것도 며칠째.
이제는 어떻게든 권철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비록 영의정까지 갔다고는 하나, 지금은 ‘전’ 영의정에 불과하지 않은가?
지금의 권철이라면 미관말직도 못 해본 자신이라도 어떻게든 복수할 수 있을 터였다.
게다가 꼭 그를 노려야만 할 이유도 없으니까. 때로는 상대보다 상대의 주위 사람을 치는 편이 더 효과적인 법이다.
그리고 오언후는 마침 생각해둔 표적이 있었다.
‘문중의 사람이 다 모였음에도 다른 사람들보다 앞서 손녀사위에게 사랑방을 내어주었다지?’
도성에서는 유명한 소문이었다.
몇몇은 남의 가정사라며 그러려니 싶었으나, 다른 누군가는 그럴싸한 가설도 내놓았다. 무능한 자식들보다야 유능한 손녀사위가 훨씬 예쁘게 보이지 않겠냐며.
그렇다면 오언후가 노려야 할 사람은…….
이순신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