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왜 이순신이죠-91화 (91/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91화

32. 안 아픈 손가락 (1)

오겸이 좌의정에 제수된 일은 까마득한 과거다. 당시에는 별다른 관심도 가지 않았고.

그러니까, 그가 좌의정이 되건 말건 나랑 무슨 상관이겠나?

지금에야 뒤늦게 관심이 갈 뿐이지.

덕분에 희미한 기억을 더듬어가며 당시의 분위기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시답잖은 일상일수록 잊기는 더욱 쉽기에.

‘그러다 깨달았지.’

사실 오겸의 좌의정 등극은 커다란 분란을 일으키고도 남아야 했다.

오겸은 을사사화 당시의 공신이고, 그가 좌의정에 제수된 시점은 이미 을사사화 희생자들이 복권된 후다.

그는 조용히 숙청당해도 모자랄 판에 영전한 것이다. 선조의 안배겠으나 그것을 신하들이 받아들일 수 있느냐는 별개의 문제다.

특히 삼사의 관리들.

‘놈들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겠지.’

한평생 유학만 공부한 자들이고, 대개는 실전 정치를 겪어보지 못해 맹목적이고 교조적이다. 나이대도 타 관청에 비해 젊어 혈기방장하다.

관청 내에서 흐르는 기류도 사명감을 강조하는 편이고, 정책적으로도 삼사의 관리들에게 과도한 보호를 보장한다.

근거 없이 탄핵을 해도 무방하다는 등의.

때문에 이들이 ‘미친개’들이라 불리는 것도 실상 특별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정작 오겸이 좌의정에 제수될 때 별다른 인상을 주지 못했다?’

불가능한 일이다.

상식적으로는.

그런데 정보원인 박 가가 초유의 힌트를 준 것이다. 오겸이 좌의정에 제수된 직후 지출이 있었다고.

오겸 역시 인사 자체에는 기대가 없었다는 뜻이다. 조정의 분위기도 뻔했으니까. 더 이상의 영전은 불가능하리라 생각했겠지.

그런데 뜬금없이 좌의정이 되어버린 것이다. 당연하지만 여론은 좋지 않았을 테고, 오겸은 이렇게 된 이상 수습하기로 했겠지.

일단 버티기만 하면 좌의정이라는 자리는 남는 셈 아닌가.

그리고 그가 회유해야 할 대상은 분명했다. 누구보다도 자신에게 반하며, 나아가 주장을 공론으로 만들 힘이 있는 조직.

삼사.

그리고 그들의 수장들.

‘결과적으로 오겸이 사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작전은 성공했지.’

당시의 삼사 장관들.

사헌부 대사헌은 노수신.

사간원 대사간은 이산해.

홍문관 부제학은 허엽.

아무리 거대하고 튼튼한 댐이라도 구멍 하나로부터 무너진다.

나는 이들 중 누가 오겸이 뚫어낸 구멍인지 알아내야 했다. 추적은 어렵지 않았다. 적어도 세 사람 중에서 둘은 내가 잘 아는 자들이었으니까.

일단 노수신.

말할 것도 없다. 그는 을사사화 희생자다.

오겸이 을사사화의 공신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당연히 노수신이 오겸에게 회유당했을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다음은 이산해.

나름 교분이 있는 사이지만 그가 청렴한 자인지, 혹은 적당한 융통성을 발휘하는 자인지는 모른다.

그런 쪽으로 닿은 연도 아니었고 공공연히 나눌 대화의 주제는 더더욱 아니었으니까.

다만 이산해는 유능한 사람이다. 그리고 자신의 유능함에 의심이 없었다.

그리고 자존심이 센 사람은 회유가 쉽지 않은 법이다.

설령 오겸이 접촉했더라도 그가 바라는 결과가 있었을지는 완전히 미지수다.

마지막은 허엽…….

앞선 두 사람과는 달리 인연도 없고 명성도 특별하지 않아, 조사가 필요했던 사람이었다.

알고 보니 그도 나름 거물이었다.

호가 초당이었으니까.

그러니까, 훗날 억울함을 성토하며 살점이 찢겨 죽은 허균과 명나라에서도 인정받은 허난설헌의 아버지인 초당(草堂) 허엽(許曄)이다.

나름 명성을 가진 의외의 인물이었으나 이 시대에서 그가 가진 명성은 달랐다.

-장령 허엽은 저택을 짓고자 일면식 없는 자에게 건축 자재를 상납하라 강요했다.

-간의대(簡儀臺, 천문기구)의 사령을 사사로이 저택의 하인으로 부려왔다.

-의정부 사인이었을 때 북평관(北平館)의 창고지기를 시켜 모직물을 무역하게 했는데, 눈에 나는 일이 있으면 구금하였다.

-이외에도 여러 고을에서 물건을 사사로이 징수하였다.

완장 찼다고 백성들 삥 뜯는 건 예나 지금이나 있는 일이지만, 타 관청의 관리까지 개인적으로 부려먹다니.

대한민국의 장교들도 당번병이나 부려먹지 기상청이나 외교부 말단 공무원을 하인과 보따리장수로 부려먹지는 않는다.

홍문관의 실질적 장관인 부제학이 이러한 역사를 가졌다는 것도 반전이지만…….

자.

만일 내가 오겸이라고 했을 때 누구부터 회유에 나섰겠는가?

하나는 나를 철천지원수로 생각하며, 다른 하나는 자존심이 세고 오만하다는 평가가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인간.

‘뻔하지…….’

을룡이 가져온 소식도 마찬가지로, 뻔했다.

“저택에서 일한 노복들에게 증언을 받아냈습니다. 두 해 전 소만(小滿, 5월 후반) 때 광이 갑자기 찬 일이 있었답니다.”

고작 증언에 불과하나 이만한 진전이 어디인가?

나는 만족스러워 대소했다.

“하하하……!”

이제 다음 절차를 밟아야 할 때였다.

나는 혹시나 싶어 물었다.

“물증은?”

“……송구합니다.”

“아니야. 물증이라면 장부뿐인데 그것이 쉽게 유출될 리 없지. 혹시나 싶어 물어본 것 뿐이니 연연하지 마.”

을룡은 죄책감이라도 느끼는지 고개를 축 떨어뜨렸다.

“진심이야. 오히려 미안해할 사람이 있다면 나니까. 고생하다 이제 돌아온 사람에게 시킬 일이 또 있어서.”

“아닙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오 부자의 행동을 감시해줘. 그들이 지금 나나 권 대감을 공격하려고 수작을 부리는 중인지, 아니면 그럴 생각이 없는지 알아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필요한 인원이 있다면 머슴 중에서 편히 뽑아가고. 노는 사람 많으니까.”

“예.”

을룡은 예를 표하고는 물러났다.

그리고 나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워주었던, 신립과 이순신이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귀한 분들 모셔놓고 이런 추태라니.”

“아닙니다.”

신립은 별것 아니라는 듯 손을 쓱 젓고는 물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었습니까? 괜찮으시다면 말씀해주시지요.”

“아. 마음 같아서는 알려드리고 싶습니다만 개인적인 일이라서요. 또 자랑스럽게 말씀드릴 만한 일도 아니고요.”

신립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무 아쉬워하실 필요 없으십니다. 일이 끝난 다음에는 알려드리지요.”

“그럼, 뭐.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흐릿하게 웃었다.

대화는 한동안 이어졌으나 나의 머릿속은 온통 앞으로의 계획뿐이었다.

* * *

“누구라고?”

허엽이 물었다.

“홍문관 응교 이 가(家)라 하였습니다.”

“흠. 홍문관 응교? 이 가(家)?”

허엽은 짧게 자란 콧수염을 매만지며 생각했다. 홍문관에서 자신을 찾아올 사람이 있었던가.

과거에 홍문관에서 부제학을 지내던 시절은 있었지만 그때 응교들 중에서 이 씨는 없었다.

완전히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연락도 없이 대뜸 찾아오다니.”

“대충 둘러대어 물릴까요?”

노복이 물었다.

“아니다. 일단 들여보거라. 이유 없이 찾아온 건 아닐 터이니.”

“예.”

물러가는 발소리가 들리자 허엽은 방문을 열었다. 쌀쌀한 봄바람과 함께 마당을 가로지르는 노복의 등판이 보였다.

하지만 품에 안은 아이가 추워하여 몸을 움츠리자 허엽은 다시 방문을 닫았다.

태어난 지 고작 삼 년밖에 되지 않은 아이. 나이는 네 살이지만 생일이 11월 3일이라 사실상 세 살과 다를 바 없었다.

대체로 부자 사이에는 관계가 엄한 편이나 허엽은 근래에 들어 생각을 바꿨다. 앞선 아이들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지 못한 것이 내심 후회스러워서.

머나먼 옛 시절, 아직까지도 잊을 수 없는 조부의 따뜻한 사랑과 아버지의 변화를 이제야 공감하는 허엽이었다.

-저벅, 저벅, 저벅

“여기 계십니다.”

방문 너머에서 손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 * *

-끼익.

“빨리 들어오게. 밖에 바람이 차니까.”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허엽의 인상은 특이했다.

그는 꼬장꼬장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반대로 금지옥엽처럼 조심스레 아이를 껴안은 모습은 이 시대에서 흔히 찾아볼 수 없는 인자한 아버지의 형상이었다.

“예.”

나는 빠르게 쪽마루를 넘어 방으로 들어선 뒤, 문을 닫고 돌아섰다.

맞은편에는 이미 자리가 내어져 있었다. 낡았지만 화려한 방석이 덩그러니 놓인 채였다.

“자리하게.”

나는 고개를 끄덕여 뒤늦게 예를 표하고는 방석에 자리했다.

허엽은 살짝 눈을 찌푸린 채였다. 일면식도 없는 자가 연락도 없이 대뜸 찾아온 것이 불쾌한 것일까.

하지만 그 정도의 불쾌함은 내게 아무 것도 아니다. 곧 나의 존재는 그에게 단순한 불쾌 이상을 상징할 테니까.

“인사드리겠습니다. 홍문관 응교 이순신이라 합니다.”

“흐음……? 이순신이라? 내가 알고 있는 그 이순신인가?”

“예전에 조정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람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예. 맞습니다. 소관이 바로 그 이순신입니다.”

허엽의 인상이 펴졌다.

유능한 사람을 마주하는 것은 마다할 일이 아니다. 이번과 같은 경우를 제외한다면.

곧 벌어질 일도 모르고서 허엽은 태연히 진도를 재촉했다.

“그래, 명성이 자자한 이 응교가 나의 누택은 무슨 일로 찾으셨는가?”

“이미 통기도 없이 찾아온 만큼, 사사로운 예절은 취하지 않겠습니다.”

“음……. 그러게.”

“몇몇 사람들은 융통성이 없어 사람 사이의 사소한 정의 표현도 국법을 들어 경계하곤 합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받을 때 의식해야 할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니지요.”

“……?”

뜬금없는 소리에 허엽은 마치 ‘무슨 말을 하느냐?’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누군가에게서 무언가를 받았다는 사실이 공공연하게 드러날 때 피아구분을 당한다는 겁니다.”

“……왜 그런 소리를 나에게 하는 건가?”

“전 좌의정 오 대감께서 이번에 영의정 대감과 함께 사직이나 진배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걸 아실 겁니다.”

허엽은 즉시 아랫입술을 말았다.

마치 무언가가 있기는 있다는 자백이나 다름없었다. 그새 그의 표정도 무척이나 어둡고 딱딱하게 변해 있었다.

“응교는 영의정 쪽 사람이지.”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나에게 뭘 원하나?”

“영감께서 좌의정에게 수뢰(受賂, 뇌물을 받음)하였다는 자필이 필요합니다.”

“…….”

허엽은 침묵했다. 한동안, 그는 입을 열지 않았다.

하기야 이런 증언을 자필로 작성해서 제공한다는 건 자신의 생명줄을 틀어쥐겠다는 뜻과 다를 바 없었다.

특히 허엽은 최근 대사간을 지내고 있었다. 뇌물을 받을 당시는 부제학이고 말이다.

청요직이자 감찰기관인 삼사의 수장 노릇을 하면서 이만한 추태를 저지른 것을 자백이라도 한다면, 당연히 처벌은 물론이고 인망까지 잃게 된다. 복귀조차 어렵게 되는 것이다.

“내가 응할 줄 기대라도 한 건가?”

“그렇습니다.”

“미쳤군.”

“그렇게 보이실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가능성 없는 일을 시도하고자 영감을 찾아뵌 게 아닙니다. 사실, 영감께서는 곧 제가 원하시는 것을 눈앞에서 제공하시게 될 겁니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허엽의 얼굴이 대번에 붉어졌으나 나를 쫓아내지는 못했다. 내가 고작 기분이나 나쁘게 하고자 찾아온 것이 아님을, 그 역시 알고 있었으니까.

잃을 것 많은 허엽으로서는 함부로 박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상황이 자네 뜻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갚아야 할 빚이 많아질 텐데.”

“그건 영감께도 해당하는 사항입니다. 제가 영의정 대감께 드렸던 말씀이기도 하고요.”

회령에서 일이 생겨 급히 북방으로 떠난 적이 있었다.

당시에는 권철의 손녀와 혼약이 잡힌 상황이었고 그래서 연기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신랑 없이 식을 올릴 수는 없으니까.

권철은 당연히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으며 함부로 식을 연기한 것을 경고했으나, 결과적으로 나는 손녀사위가 되었으며 권 가에서는 더더욱 무시할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이번이라고 다르지는 않을 테지.

“게다가 영감께서는 저에게 힘을 쓰기도 쉽지 않잖습니까. 어중간하게 칼을 들이대려다간 도리어 영감께서 피를 쏟으실 텐데.”

선조를 제외하고, 조정의 인사 중에서 나를 적대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오히려 알게 모르게 연이 닿은 사람도 있었고 개중에는 나의 편인 자들도 많았다.

후원자를 자처하는 박영준은 판서였으며, 이산해는 이조의 참의다. 오겸의 일이라면 기꺼이 끼어 들 노수신도 지금은 대제학을 지내고 있다.

나 스스로도 응교 직을 납득했다 뿐이지 명성이나 영향력은 당상을 웃돌고 있는데, 고작 정삼품 대사간 하나와 못 비비겠는가?

홍문관 중진인 교리 둘이 이이와 정철로서 나와는 호형호제하는 사이라 대신의 저격도 가능한 상항이었다.

“제 주변에는 힘이 되어줄 사람이 많은데, 영감께서는 그럴 여유가 되지 않으시는 걸로 압니다.”

“자만이 심하군.”

“영감께서 우의정 대감과의 사이만 좋았더라면 제가 이렇게 당당하지는 못했겠습니다만.”

삼의정 중 영의정과 좌의정이 공석이 되어버린 지금, 우의정이 사실상 영의정과 다름없어진 셈이다.

하지만 그 우의정마저도 하등극사(賀登極使), 즉 중국의 사신으로 떠난 와중이라 유일한 의정의 위치도 유명무실했는데 최근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만약 그가 여전히 허엽의 편이었다면 나로서도 감당하기 힘들었겠지.

하지만 우의정, 그러니까 ‘박순’은 언젠가부터 허엽의 편이 아니게 되었다.

본래 두 사람은 이황의 밑에서 동문수학하여 우애를 쌓은 사이이나 최근 당색을 달리하면서 거리가 벌어진 것이다.

깊었던 우애일수록 깨질 때 남는 적의 역시 짙어지는 편이라, 오히려 박순이 이 일에 개입된다면 허엽의 반대편에 설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공석이 된 의정 자리를 메우기 위해 이번에 복상(卜相)이 또 있다지요. 후보 자리에 전 영의정 이 대감과 대제학 노 영감께서 오르셨는데, 아시겠지만 이 대감께서는 최근 건강이 안 좋으셔서.”

전 영의정 이 대감은 이탁을 뜻한다.

한 번 체직되었던 인물이고, 또 연배가 많아서인지 최근 건강이 안 좋은 편이었다.

사실 그가 후보에 오른 것은 구색 맞추기에 지나지 않는다. 오겸의 좌의정 등극과는 별개로 선조는 그동안 노수신을 키워왔으니까.

그러다 최근 오겸이 빠진 김에 그와는 철천지원수인 노수신을 마침 집어넣으려는 생각일지도 몰랐다.

뭐, 설령 왕의 어심이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결과는 똑같을 터.

과거 허엽이 오겸의 뇌물을 받아 좌의정 등극을 눈감았다는 정황만으로도 칼을 빼 들고 나설 노수신이 의정까지 된다? 박순과 함께?

허엽으로서는 정말 개처럼 짖어가며 자비를 구걸해야 할 판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