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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90화 (90/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90화

31. 가짜 이순신의 방식 (2)

“좋아.”

나는 상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박 가 역시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뒤따라 일어났다. 나는 그에게 손바닥을 내보였다.

“앉아 있으시게. 기방에는 삯을 충분히 주었으니 느긋하게 즐기다 가라고.”

“그럼 공께서는…….”

“알아볼 게 있어서. 바빠질 것 같으면 늦지 않게 연락하겠소이다. 그동안은 조용히 지내게. 쓸데없이 이 인간, 저 인간 눈에 띄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나는 미닫이문을 열고 나섰다.

복도에는 을룡이 환도를 쥔 채 우뚝 서 있었다. 제법 흉흉한 분위기를 풍기는지라, 주변에 감히 들러붙는 녀석은 없었다.

을룡이 입을 열었다.

“오른쪽 방은 손님들이 있는데 왁자지껄했고, 왼쪽 방은 비었는데 기녀 하나가 잠깐 들어갔다가 금방 나왔습니다.”

“엿듣는 것 같던가?”

“아니요. 그럴 생각이 있었어도 불가능했을 겁니다.”

대놓고 붙어서 감시라도 했단 말인가.

따로 일러둔 말도 없는데 충실하게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을룡이었다.

“고생했어.”

“아닙니다. 이게 제 역할 아닙니까.”

나는 을룡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주고는 복도를 나섰다.

“나리, 벌써 가시렵니까?”

마담이었다. 그녀는 휘황찬란하게 장식된 뜰에서 손님을 맞고 있었다. 제법 시간이 흐른 뒤라, 하늘은 어두웠으며 골목은 시끄러웠다.

기방 기준에서는 이즈음부터 제대로 된 영업시간이다.

“나는 가지.”

“손님은요?”

“조금 머물다 갈지도.”

알 바 아니었다.

마담은 기대하는 구석이 있어보였다. 은근히 교태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직 용무가 끝나지 않았다는 투다.

“왜?”

“혹시라도……. 약간의 사례만 더 해주신다면 다음에는 더 잘해드릴 수 있을 텐데요.”

“음.”

나는 살짝 웃어주고는, 한 걸음 나아갔다. 곁의 을룡은 수상한 기류를 느꼈는지 즉시 환도의 손잡이를 잡았다. 그 기세에 마담은 바짝 얼어붙었다.

“빈방에 기녀가 잠깐 다녀갔다지.”

“소, 소녀는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 아무것도 모른 채 봉변을 당한다면 억울하겠군.”

협박이었다.

어디 한 번 ‘억울한 일’을 당해보고 싶냐는. 쓸데없는 호기심에 벌인 일이건, 실제로 모르는 사이 벌어진 일이건 나로서는 알 바 아니다.

기방에서의 대화가 유출되는 것은 원인이 어떻건 용납할 수 없었기에.

“…….”

마담은 당혹스러워하며 침묵할 뿐이었다.

“농담일세, 하하. 심각한 표정 짓기는. 안에 있는 친구에게 잘 대해주기나 하라고.”

나는 쇄은 몇 개를 꺼내 건넸다. 마담은 그제야 어색한 미소나마 지어 보였다. 나는 피식 웃어주곤 발을 돌렸다.

* * *

며칠 뒤.

“공자님.”

신립이 방문했다. 이미 연락을 받아 예상한 바였으나, 서찰에서는 알리지 않았던 손님과 함께였다.

이순신.

나 같은 가짜가 아닌, 진짜 이순신.

“간만입니다.”

나는 환하게 웃으며 두 사람을 맞아주었다. 두 사람은 꾸벅 허리를 숙여 예를 표했다.

“그간 강녕히 지내셨습니까?”

“강녕까지야. 덕분에 잘 지내는 중입니다.”

“다행입니다.”

“들어오세요. 안 그래도 기다렸던 참입니다.”

내가 뜰로 물러나자 두 사람이 뒤따라 들어섰다. 그리고 형식적인 안내를 거쳐, 나와 지인들은 사랑방에 도착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신립이었다.

“늘상 보이던 친구가 안 보이는군요.”

“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을룡, 말입니다.”

“아. 일이 있어 잠시 출타한 상황입니다. 때가 되면 돌아오겠지요.”

박 가가 말한 소위 ‘비정기 지출’은 나의 예상과 다른 날짜에 발생했으며, 덕분에 나는 대략적인 감이나마 잡을 수 있었다.

누군가의 뒤를 밟는 것은 굉장히 눈에 띄는 일이다. 최대한 조심할 수밖에 없었고 한동안은 이렇다 할 소득을 건지지 못했다.

그러다 최근 을룡은 정보원 하나를 포섭했다. 그래서 나간 것이다. 내가 직접 나서기는 껄끄러운 상황이어서.

물론 이런 사정을 두 사람이 알 필요는 없다.

“그런데, 오셔서 제 이야기는 하지 않으시고 대뜸 을룡부터 찾으실 줄이야. 혹시 신 공께서는 이 사람이 아니라 을룡을 뵈러 온 것은 아니시겠지요?”

신립은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늘 보이던 사람이 안 보이니 눈에 띈 것이지요. 제가 그 친구를 좋아하긴 합니다만 공자님만 하겠습니까?”

“다행이로군요.”

“하하하…….”

“이제 와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이제 저에게 공자라는 호칭은 어색하군요.”

“아.”

신립이 짧게 탄식했다.

공자(公子)란 지체 높은 집안의 아들을 이르는 말. 한 가정의 주인이 된 가장이 듣기에는 민망한 표현이었다.

을룡은 여전히 나를 공자라 부르긴 하지만.

그건 을룡이 노비 출신인 데다 자신의 역할에 책임감도 생겼기 때문이다. 자신이 모시는 사람을 ‘이 공’이나 ‘이 형’으로 부를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신립은 나와 그렇게 수직적인 관계는 아니잖은가?

“송구했습니다.”

“아니에요.”

나는 가볍게 웃어주고는 이순신을 바라보았다.

“이 공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아직도 재미없게 지내십니까?”

“하하. 편하게 대해주십시오.”

이순신은 멋쩍게 웃었다.

첫 만남에 비하자면 놀랄 정도로 풀려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인연이 있는 사람들끼리 모였기 때문이라면, 실상 이순신은 크게 변하지 않은 셈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순신은 자신의 완고하고 원칙적인 태도로 갖은 불이익을 당했지만 원래의 모습에서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친한 사람들끼리 있을 때는 풀린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사료를 떠올려보면 변한 게 아니라 원래 이런 사람이었고.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지만.’

단지 세상 살기가 피곤해질 뿐이다.

진짜 이순신은 그런 피로함에 100% 내성이라도 가진 듯 보였으나, 미안하지만 이쪽 가짜 이순신은 그렇지 않았다.

나에게 적의를 품은 게 아닌 이상, 사람이 좋았고 인연이 좋았다.

원리원칙만 따지다간 적을 만들기 쉬웠고 아군을 만들기는 어렵게 된다. 그래서 융통성이 좋았고 어떻게든 말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을 좋아했다.

그래서 내가 선조를 싫어한다.

놈은 미쳐서 말도 안 통하는데 여차하면 날 해칠 기세를 풍겨대니까.

‘따지자면 나와는 정반대인가?’

나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자면 과한 면이 있었다. 사람을 가려 사귀지 않고, 사회통념을 거슬러 신분고하나 남녀차이를 의식하지 않으니까.

좌우, 앞뒤는 물론 위에서는 영의정부터 아래에서는 노비들까지 연을 맺고 있었다. 그것을 우려스럽게 보는 사람들도 없지는 않았다.

쓸데없이 방대한 인연들이 언젠가 화근이 될까 싶어서.

진짜 이순신은 가짜 이순신과는 정 반대다.

지나치게 원칙적이라 인맥이 좁고 어울리는 사람도 정해져 있다.

자발적 아웃사이더라 주변 사람은 답답해하겠지만 정작 본인은 문제의식도 없고 그래서 변화의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내가 혐오하는 선조도, 이순신에게는 누구보다도 더 불합리하고 비합리적인 대우를 강요했지만 이순신은 신하의 신분과 유교적 가치에 따라 최후까지 왕에게 충성했다.

‘이름만 같을 뿐이지, 이건 완전히 남남이로군. 아니, 정반대이니 눈앞의 이순신이 빛의 이순신이라면 나는 어둠의 이순신쯤 되려나.’

어둠의 이순신이라…….

“하하.”

지금 내가 하는 짓거리를 생각하면 어둠의 이순신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이 없다.

영의정과 결탁하고 그와 원수진 좌의정을 제압하기 위해 물밑에서 작업한다고? 빛의 이순신이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 할 짓이었다.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빛의 이순신이 묻는다. 갑자기 웃은 것이 의아했나보다.

“신 공에 더해, 오래 보지 못했던 이 공까지 같이 뵈어 기뻐서 웃는 것이지요.”

“흐음……. 진심이 아니신 듯합니다만.”

어설프게 말을 돌린 건 인정하겠다만, 적당히 넘어가줄 일임에도 제 성격 못 버리는 이순신도 어지간했다.

“이게 진심이 아니면 무엇이 진심이겠습니까. 설령 복심이 있다 하더라도 공께서 관심법을 하는 게 아닌 이상, 절대 모르실 텐데.”

“음.”

이순신이 짧게 침음을 흘리자 곁에서 신립이 말했다.

“공께서는 마음이 깊고 많은 것을 생각하시는 터라, 자네가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네. 하지만 그것이 자네 잘못되라는 뜻은 아니잖나.”

“알고 있습니다. 공께서는 예전부터 소인을 크게 아껴주셨기에……. 단지, 존경해 마지않는 이 공께서 다른 자들처럼 되어버리지는 않을까 하여.”

“다른 자들이라니?”

“육조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들 말입니다.”

“흠? 이 공께서는 이미 그러시지. 홍문관 응교시잖은가.”

“그 뜻이 아니라…….”

이순신이라고 눈치가 아주 없지는 않구나. 단지 신경 쓰지 않을 뿐이지.

부정할 수 없었다.

나는 변했다. 어쩌면 육조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인간 군상처럼 돼버렸는지도 모르지.

예전의 나라면 누군가의 약점을 잡고 명줄을 틀어쥘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하지만 상념은 이어지지 못했다.

“공자님.”

밖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침 하석에 앉아있던 이순신이 바로 옆의 문을 젖히니, 상을 든 비자들이 나타났다.

“다과 들면서 말씀 나누시어요.”

“아.”

비자들이 상을 내려놓으니 이순신이 하나씩 안으로 들였다.

나는 밖을 향해 말했다.

“그대들도 들지 않고?”

“쇤네들은 이미 들었습니다. 상을 준비하면서 두어 점씩……. 호호.”

“안방에도 같은 상을 보내주세요. 이 사람만 입이 심심하지는 않을 테니까.”

“예, 공자님.”

비자들은 꾸벅 허리를 숙이고 물러났다. 그동안 벌어진 일련의 광경이 신립에게는 무척이나 ‘나’ 같은 모습이라고 느껴졌는지, 이순신에게 웃으며 말했다.

“보게, 언제나의 공이 아니신가?”

“예. 그렇군요.”

이순신은 그제야 안도한 듯 다시 편한 표정이 되었다. 그 기대에 부응해주지 못해 미안하구만.

나와 두 사람은 간만에 만난 회포를 풀었다. 별다른 이유도 없이 찾아온 둘이었지만, 그래서 좋았다. 꼭 이유가 없어도 편히 볼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렇게 두런두런 말을 나누다 방문을 보니 어느새 새하얀 창호지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순식간에 저녁이 된 것이다.

‘시간 참 빨리 가는군.’

두 손님도 나의 시선을 쫓아 창호지 색의 변화를 알아채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벌써 이렇게 될 줄이야.”

신립이 아쉽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러게 말입니다. 만일 이후 일정이 없다면…….”

저녁이나 들고 가라 말하려던 찰나.

대문 소리가 나더니 저벅저벅 발소리가 다가왔다. 이 저택에서 이렇게까지 당당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둘뿐이었다.

나와…….

나의 뜻을 이행하는 을룡.

“자넨가?”

“예, 공자님.”

과연 을룡의 목소리였다.

조금은 상기된 어조였다. 들뜰 정도로 좋은 결과가 있었거나, 흥분할 일이 있었거나. 무척이나 관심이 갔다.

이순신이 문을 열어주었고 그와 신립은 을룡과 짧게 인사를 나누었다.

몇 마디 대화가 있은 뒤 을룡은 나를 향해 말했다.

“손님들이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물러났다가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부탁하지.”

을룡이 물러나려는 찰나 신립이 끼어들었다.

“아닐세. 중요한 일인 것 같은데 말씀드리게. 우리가 자리를 피할 터이니.”

괜찮다고 만류하기도 전에 신립이 먼저 일어났다. 이순신은 궁금한 기색이었지만 그라고 안 일어날 수는 없었다.

지금이라도 멈춰 세우지 못할 것은 없지만.

을룡의 상기된 어조를 생각하면 나라고 보고가 궁금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송구합니다.”

“아닙니다. 바람 좀 쐬다가 다시 찾겠습니다.”

“예.”

두 사람이 나서자 을룡은 그들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안으로 들어섰다.

사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을룡은 일의 막중함을 생각해서인지 두 사람이 완전히 멀어지는 것을 확인했다.

그런 다음에야 나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조용히 속삭였다.

을룡의 보고를 들은 나는 대소했다.

“하하하……!”

예상대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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