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89화
31. 가짜 이순신의 방식 (1)
“저는 물러나겠습니다.”
을룡이 이쪽을 향해 예를 표했다.
“같이 들지 않고?”
“아닙니다. 저는 바깥을 지키겠습니다.”
“나중에 자리를 마련하도록 하지. 기방 사람에게 술상부터 들이라 그래.”
“알겠습니다.”
-드르륵.
을룡이 물러나고, 나는 멀뚱히 선 손님을 바라보았다.
박 가.
그는 오겸의 저택에서 일했던 자다.
노비나 머슴은 아니고, 단지 가세가 기운 양반 떨거지로서 식객 명분으로 여기저기 얻어먹고 다니다 오겸에게 눌어붙은 경우였다.
능력?
과욕이나 없으면 다행이다. 그리고 다행스럽지 못하게도, 이 친구는 장부를 조작해 알음알음 해먹다 쫓겨났다.
하지만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오겸과 오언후 부자의 약점을 찾으려던 나에게는 적절한 포섭 대상이었다.
“자리하게, 박 공.”
맞은편으로 팔을 뻗으니 박 가는 주섬주섬 자리했다.
“조금은 놀랐을 거야. 실제로도 그렇게 보이는군. 비밀 하나를 알려주지. 나는 자네가 보는 것 이상으로……, 위험한 사람이야.”
박 가는 이미 직감한 듯했다.
“조언 하나 해주지. 그대가 참고하기에는 많이 늦었지만.”
“…….”
“무슨 조언이냐면, 배신을 선택했다면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걸세. 어물어물하다간 죽도 밥도 안 되거든! 마치 그대의 경우처럼 말이야. 용케도 나를 기다리게 했잖은가?”
실로 멍청한 행동이었다.
간을 보면서 자신의 몸값을 높일 수는 있겠지만, 그는 분명 협조의 ‘대가’를 받았다. 그걸로 끝이다.
대가를 받고 나서도 호출의 명령에 어물어물하는 것은 이중 배신의 징조다. 당연하지만 현명한 행동은 아니다.
고래 사이에 낀 새우로서는 더더욱.
밖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리. 술상을 내왔습니다.”
“들이게.”
허락이 떨어지자 곱상하게 생긴 기녀들이 상을 들고 들어왔다.
삯을 사전에 넉넉하게 줘서인지 술상은 제법 호화로웠다. 나는 입맛을 다셨으나 박 가는 그렇게 입맛이 도는 것 같지는 않았다.
뭐, 그럴 수밖에.
기녀들은 각자의 곁에 자리하려 했으나 내가 만류했다.
“나중에 다시 부르겠다. 중히 나눌 말이 있으니.”
“……알겠습니다.”
기녀들이 물러나자 나는 술병을 들었다.
“일단 잔부터 채울까.”
손님은 여전히 경직된 태도로 잔을 내밀었다. 나는 거의 흘러넘칠 정도로 채워주고는 나의 잔을 내밀었다.
손님이 나의 잔을 채웠다.
각자의 상이 이제야 구색을 갖췄다. 나는 서두르지 않았다. 막 내온 상이 조금씩 식어갔으나 ‘손님’은 감히 먼저 수저를 들지 못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나는 입을 열었다.
“내가 오겸이나 오언후에게 이렇게 말을 전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대가 과거의 주인을 고작 쌀 스무 섬에 팔았다고 말이야.”
“나, 나리!”
박 가가 기겁했다.
전 좌의정이라도, 좌의정은 좌의정.
아무리 한미한 가문의 전직 관리라도 식객을 전전하다 이제는 끈 떨어진 연이 되어버린 인간 하나 못 조지겠는가?
“그대는 내가 부를 때 째깍째깍 답하는 것으로 최소한의 신용이나마 증명할 수도 있었어. 하지만 그러지 않았지. 이제, 내가 자네를 믿으려면 더 큰 성의가 필요할 것 같군.”
“…….”
“말해보게. 그대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밖에 없으니까.”
나의 경고와 조언이 제대로 먹힌 것일까. 박 가가 서둘러 답했다.
“전 좌의정은 자잘하게 수입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걸 좌의정은 ‘비정기 수입’이라고 했지요. 거의 하루걸러 한 번 꼴이었습니다.”
“뇌물인가, 부정인가?”
두 가지는 사실상 같은 것이다. 단지 전자에는 ‘정(情)’이라는 좋은 명분 거리가 있을 뿐이다.
굳이 나누는 이유는 위정자들이 다방면으로 뇌물을 받고 대가성 비리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그것을 처벌하자는 주장에 동의하는 것은 자해나 다름없으니까.
썩어도 준치라고, 오겸도 딴에는 좌의정을 지낸 몸이다. 공론을 끌어낼 수 없다면 잡을 수도 없다.
“대체로 뇌물이었습니다만 부정도 있었습니다.”
“다행이로군. 약점으로 쓸만한 것을 말해보게.”
“예. 하지만 제가 말씀드리려는 일은 돈이 들어온 게 아닙니다.”
운을 그렇게 떼어놓고 정작 돈 들어온 일이 아니라니. 이 친구가 밀당을 아예 할 줄 모르는 건 아니었군.
“언젠가 큰 재물이 한꺼번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본래 그만한 재물이 쓰일 경우는 용처가 분명하기 마련인데, 장부에는 ‘비정기 지출’이라 기록되었지요.”
“힘쓸 일이 있었나보군.”
무엇을 위해서인지는, 솔직히 가늠할 수 없었다.
좌의정을 지내기 전에도 좌찬성이라는 나름의 요직을 지내고 있던 그였으니까.
호기심이 동했다.
천하의 좌의정이 무엇이 아쉬워서 남에게 도움을 구걸한단 말인가?
“자세히 말해보게. 일의 경중에 따라서 자네를 좋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군.”
“예……. 오 대감이 찬성을 지낼 당시, 좌의정이 공석이 되어 복상(卜相)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복상(卜相)이란 의정 대신을 선발하는 절차 중 하나다.
요 임금이 점(卜)을 쳐서 순 임금을 썼다는 것이 기원인데, 의정이란 중차대한 자리인 만큼 하늘에 맡긴다는 의미가 있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명분이다.
조선 시대의 사람들이라고 마냥 멍청한 것은 아니어서, 정말로 점을 쳐 의정을 뽑지는 않았다.
다만 한 나라에서는 하늘과 다르지 않은 왕이 직접 차기 의정을 고른다는 점에서는 조금 연관이 있을 수도 있겠다.
“한동안 시끄러웠지. 복상에서 오 대감과 전 이조판서 이 대감이 경쟁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오 대감이 뽑혔으니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예상치 못한 반전이로군.”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적을 알아야 붙어서 싸울 수 있는 법.
알아보니 오겸은 옛날 옛적 을사사화에 가담해 금양군(錦陽君)의 군호까지 하사받은 적이 있었다.
문제는, 조정을 장악한 소윤이 한 일이라곤 나라를 좀먹는 것이 전부였다는 거다. 그 과정에서 방해되는 사림들도 무자비하게 때려잡았다.
그런데 을사사화의 희생자들은 지금 어떤 대우를 받고 있던가?
‘영웅 취급이지. 그들의 후배들이 소윤을 몰아내고 조정을 장악한 영향도 있겠지만, 선조가 사림의 지지를 흡수하고자 노골적으로 밀어주기까지 했다.’
지금 돌아가는 분위기를 감안하면, 오겸은 당장 실각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도 좌의정까지 해먹은 것이다.
이쯤 오니 소위 ‘비정기 지출’이라는 것의 향방도 가늠이 잡힌다. 어디로 흘러갔는지는 모르겠으나 목적만큼은 분명하다.
설령 찬성 급이라도 이만한 상황에서는 힘을 쓸 수밖에 없다. 의정의 자리가 목전에 다다른 상황에서는 더더욱.
“복상 절차에 문제라도 있었나?”
짐작 가는 쪽은 이쪽.
오겸이 절차에 개입했을 경우.
그러나 박 가는 수비적이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소인은 장부만 맡았을 뿐이라.”
“어디에 재물을 썼는지는 정확히 모른단 말인가.”
“송구하오나……, 예. 단지 이렇게 짐작만 할 뿐입니다.”
오겸 입장에서도 박 가는 그렇게 신용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었군.
하기야 오겸에게는 자신의 운명이 걸린 일이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지 모를 놈에게 맡길 수는 없었겠지.
보안을 위해서라도, 존재감은 없으나 신용할 수 있는 자에게 맡겼을 가능성이 높다. 이중적인 조건이지만 충분히 충족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촌수도 멀고 지방에서 살지만 알음알음 자신에게 신세를 진 친척이라던가.
‘정말로 그렇다면 고생깨나 해야 하는데……. 시간이 많지 않아.’
오겸의 약점을 확보하려는 이유가 뭔가?
그가 선공하지 못하도록 억제하며, 유사시 신속히 반격하기 위함이다.
약점 확보가 지체되는 와중 공격을 받아버리면 잃을 것을 다 잃어버리고 만다. 그 과정에서 발언력까지 상실한다면 반격조차 할 수 없다.
‘이제 어찌할 것이냐?’
물리적인 증거가 없는 한, 지금까지 나눈 대화는 음모론에 지나지 않는다. 어설프게 음모 따위를 들이댔다간 본전도 못 건지는 수가 있었다.
아니면 쓰게 대가를 치르던가.
나는 마음이 다급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직까지는 잘 풀렸는데도 말이다. 단지 사소한 장애물을 만났을 뿐…….
‘어설프게 서둘렀다간 화를 부르기 마련이지.’
나는 일단 잔부터 기울였다.
알코올의 씁쓸함이 입술과 혀를 적셨다. 그새 미지근하게 식어버린 술이라도 풍취가 없지는 않았다.
‘이강고(梨薑膏)인가? 흉내만 낸 정도지만 나쁘지 않구나.’
배의 달콤함과 생강의 쌉쌀함이 식욕을 돋웠다. 나는 고기 안주를 한 점 집었다.
분위기가 풀려서일까.
뻣뻣하게 굳어있던 박 가도 살살 눈치를 보더니 젓가락을 움직였다. 쌓인 게 많았는지 단숨에 넘기는 술은 경쾌하기까지 하다.
배를 채우고 목을 축이니 정신이 돌아왔다. 적은 강하며 나는 그렇지 않다. 하지만 그 간극은 좁다. 그것도 많이 줄어들었다.
이제 아주 조금 남았을 뿐이다.
“그대의 협조가 큰 도움이 되었소이다.”
“……감사합니다.”
박 가가 빈 잔을 내려놓으며 허탈하게 말했다.
“그런 차원에서 내가 조언 하나 해드리지.”
“말씀하시지요.”
“오 대감이나 그의 자제가 뒤늦게 자신들의 치부가 드러난 것을 알게 되면, 곧 누가 외부로 정보를 흘렸는지 알려 들 거요.”
“……!”
박 가의 얼굴이 뒤늦게 경악으로 물들었다. 당연히 예상한 줄 알았거늘.
이대로 집에 돌아간다면 언젠가 저도 모르는 사이 변사체가 되어 발견됐을지도 모를 순진함이었다. 능력도 없이 쓸데없이 욕심만 많아서…….
“그, 그럼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생각해둔 방도가 없다면 내가 뒤는 봐드리지.”
어차피 이 친구가 오 부자에게 붙잡히면 이쪽의 정보도 흘러나간다. 시답잖은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마저도 치명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오 부자에게는 일말의 이익도 줘서는 안 된다.
“가, 감사합니다…….”
“감사는 성의로 표하시오. 예를 들자면, 나에게 도움 될 정보가 있다면 뭐라도 알려준다던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럼…….”
박 가는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짐작 가는 구석은 있습니다.”
“편히 말씀하시오.”
“지출은 복상 결과가 발표된 다음에야 있었습니다.”
“다음에? 이전도 아니고, 이미 결과가 끝난 다음에 있었단 말인가?”
“예.”
재미있군.
시답잖은 정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상당히 큰 단서다.
나는 전적으로 지출이 복상 이전에 있으리라고만 생각했으니까. 또 그것이 당연하기도 했다.
대가성 상납을 태평하게 ‘후불’로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자신의 도움이 절박한 자가 있는데, ‘잘 되면’ 보답을 하겠다고 한다. 미친놈인가 싶을 거다.
제가 아쉬운 처지라면 당장 배 까고 드러누워서 개처럼 짖으며 가진 걸 다 토해내야지. 그렇게 해도 도와줄까 말까다.
‘그런데도 오겸은 복상 후에 지출이 있었다…….’
그렇다면 복상 과정의 관련자들에게 재물이 들어갔을 가능성은 극히 낮아진다.
달리 말하자면 재물은 복상 자체와는 관련이 없는 곳으로 흘러갔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복상과 관련된 추측들은 헛고생에 불과했나?
그렇지는 않을 거다.
시기적절하게 복상 직후의 지출이 있었으니 관련이 아예 없을 수는 없다.
다행스럽게도 나는 가늠이 잡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