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88화
30. 신고식 (2)
“딱히 놀라지 않는군.”
권철이 말했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예상했습니다. 당상관이 되건, 간만에 조정에 복귀했건, 대감과 연을 맺어서건…….”
무엇이 계기가 되었건 말이다.
언젠가 공격을 받으리라곤 생각했다. 예상이라기보다는 당연한 사실이다.
조정이란 왕이 먹다 남긴 부스러기로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공간이다. 거기에서 한자리하려면, 당연히 혼란에 휘말릴 것은 각오해야지 않겠나?
하물며 선조의 치세는 격변의 시기다.
왕부터 혼란을 좋아했으므로.
신하들 사이의 불협화음과 상호파괴에서 발생하는 권력의 공백을 주워 먹는 것이 그의 특기니까.
이런 시대에 평화로운 관직 생활을 기대하는 것은 몰염치한 발상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잔챙이들이 저와 비빌 생각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다면 좋겠군요.”
나는 존재감에 비해 정쟁은 거의 겪어본 적이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잘 지내며, 사소한 충돌은 받아주는 쪽으로 넘어가기에.
그래서인지 나를 만만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홍문관에 처음 입성했을 때도 말단 관리들이 신참례를 강요하지 않던가.
이이처럼 미친놈으로까지 낙인찍힐 생각은 없지만, 오겸을 굴복시킨다면 앞으로 이런 일은 조금이라도 줄어들겠지.
“전 좌의정과의 충돌을 오히려 바라는 것 같군.”
“아무리 좌의정까지 지낸 사람이라도 가문이 한미하고 이제는 반 사직이나 다름없는데, 그럼 할 일 없는 늙은이밖에 더 되겠습니까?”
“나처럼 말인가?”
권철이 짓궂게 웃으며 묻자,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대감께서는 처지가 나으신 편이지요. 적어도 제가 손녀사위이지 않습니까.”
“하하! 응교 말이 맞군.”
농을 농으로 받았을 뿐이거늘, 권순은 불쾌하다는 듯 눈총을 보냈다.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권철은 그렇지 못한 듯했다.
“어허.”
권철이 권순을 향해 엄히 일렀다. 권순은 억울하단 표정을 지었지만 권철은 그마저도 못마땅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애초에 내가 권 가의 사위로 존재하는 이유부터가, 권순을 포함해 권철의 자식들이 제값을 하지 못한 탓이기에.
그렇다고 오만할 생각은 없었다.
“사과드리겠습니다.”
고개를 숙이며 말하니, 권순은 됐다는 듯 음, 짧게 침음을 흘렸다.
상황이 정리되자 권철이 말했다.
“기대하는 것도, 각오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도 대비해야 하네. 내 근처에서 무언가를 잃을 사람은 오직 자네뿐이야.”
권순은 음서로 말직이나마 겨우 지내는 중이었고, 권율은 이제야 공부를 시작했다.
반쯤 원수가 되어버렸을 권철을 직접 노릴 수도 있겠으나 너무 노골적이다. 설령 오겸이 그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나오더라도, 권철은 능히 대비해낼 사람이었다.
문제는 잃을 건 많은데 정쟁의 경험은 없는 나다.
“조언해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오겸 주변에는 사람이 많지만 그를 위해 위험까지 감수할 자는 없어. 아마 오언후(吳彦厚)가 나서겠지.”
“아들입니까?”
“그렇네. 하나뿐인 아들이지.”
“들어본 적은 없군요.”
“문음으로 출사해 고작 말직이나 지내고 있을 뿐이야. 지위를 이용해 자네를 공격할 수는 없을 걸세.”
오언후와 마찬가지 처지인 권순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그가 미쳐서 직접적으로 위해를 가하지 않는 한, 트집을 잡아 탄핵이나 시도하는 게 일반적이겠군요.”
“대체로는. 자네는 별종이라 남들과는 다른 구석이 많으니 조심해야 할 걸세.”
“말씀 감사합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알아서 잘 대처하리라 믿네.”
본론이 끝나자 분위기가 탁 풀렸다. 권철은 한결 가벼운 어조로 물었다.
“점심은 들었나?”
“아니요.”
“여기서 들고 가게. 근래에 사람이 많이 찾아와 특별히 정성을 들여서 준비하고 있거든.”
권철에게는 불청객이겠지만 말이다.
먼 친척조차 가족이나 다름없는 시대라지만, 상경까지 해가며 권철의 안부를 묻는 건 과했다. 관직을 내려놓고 며칠 되지도 않아서는 더더욱.
그럼에도 별채는 방마다 삼사오오의 무리들로 꽉꽉 차 있었다.
‘뻔하지.’
사돈의 팔촌이라도 관직을 지내고 있으면 그 사람의 이름을 앞세우는 게 가능한 세상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권 가의 식솔들이 권철의 이름을 앞세워 이익을 얻었겠는가? 이제 권철이 관직을 내려놓았다니 호들갑을 떠는 거다.
사정을 듣고도 어떻게든 구슬려 다시 관직에 앉히려는 자도 한둘이 아니겠지.
“고생이 많으시겠군요.”
심심한 위로에 권철은 피식 웃었다. 분명 이해한 것 같은데, 정작 나오는 말은 딴판이었다.
“나야 무슨 고생을 하겠나. 오히려 노복들 고생이 크지.”
일부러 말을 돌린 것일까? 의외의 철저함이다. 권철은 말을 이었다.
“어쨌거나 점심은 들고 가게. 실망하지 않을 걸세.”
“그러도록 하지요. 감사합니다.”
권철은 권순을 향해 말했다.
“응교는 귀한 손이고, 마침 별채가 찼으니 빈 사랑을 안내해드리거라.”
“사랑을 말입니까?”
“그래.”
“……예.”
사랑방이라.
권순이 놀랄 만도 했다. 사랑방은 가장과 그의 손님에게만 허용되는 자리이며, 머무르는 것은 같은 가족조차 쉽지 않은 공간이었다.
그럼에도 나에게 사랑방을 권한 것이다.
‘단순히 우대는 아니지.’
밖에는 수많은 사람이 있다. 대부분은 권 가의 친인척들이었고 권철과 어떻게든 관계와 인연이 있는 자들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범접하지 못한 공간을 손녀사위가 차지하게 된다?
당연히 외부로 말이 샐 수밖에 없다. 나의 존재감은 더욱 커지겠지. 특히 권철을 노리고 있을 오겸의 시선이 집중될 터였다.
‘불상사를 대비해 나를 전면에 내세우려는 속셈이다.’
불쾌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이런 때를 위해 영입된 처지 아니냐.
단지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능히 역할을 해낸다면 앞으로도 사랑방을 차지할 수 있겠지. 이건 가치를 증명하는 일이었다.
권순은 꾸벅 허리를 숙여 아버지에게 물러나는 예를 표했다. 나와 권율 역시 마찬가지로 예를 표하고 일어났다.
사랑방을 나서자 권순이 말했다.
“응교.”
“예.”
“대감께서 그대를 높게 사기는 하지만, 방금은 무례가 심하셨소.”
오겸을 할 일 없는 늙은이라 불러놓고 권철에게는 그보다 낫다는 농을 말하는 거겠지.
“죄송합니다. 처숙부와 장인이 계심에도 경망스러운 언동을 흘렸습니다. 앞으로는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오.”
권순이 딱딱하게 반응하자 나는 화제를 돌렸다.
“편하게 대해주셔도 됩니다.”
“……아니오. 응교는 아버지께서 우대하는 분이니 설령 처숙부의 처지라 하더라도 가벼이 대할 수는 없소. 게다가 응교가 함께하는 이유도 장남인 내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탓이니까.”
“…….”
“나 대신 권 가의 미래를 위해 힘써주길 바라오. 그것이 우리 집안의 사위가 된 응교에게 드리는 유일한 부탁이오.”
“예.”
권순은 발을 돌리고 나아갔다. 이미 사랑채에 있는지라, 빈 사랑방까지는 금방이었다.
“여기요.”
방문을 열자 널찍한 공간이 드러났다. 권철이 머무르는 공간에 필적할 정도.
자주 쓰이는 공간은 아닌지 가구와 장식은 뜸했으나 먼지는 없었다. 지금처럼 우연히 쓰일 때를 위해서라도 꼼꼼히 관리해온 듯했다.
“때가 되면 비자가 갈 터이니 쉬고 계시오.”
“감사합니다.”
안으로 들어가니 권율이 뒤따라 들어섰다. 일행이니 함께 머무를 생각일까.
장인인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눈치 볼 구석은 없어졌으므로 나는 벌러덩 드러누웠다.
쉬던 와중에 불려 나와 피로감이 극심한 상태였다.
‘돌아가는 대로 대비해야겠군.’
오겸과 그의 하나뿐인 아들, 오언후.
두 사람이 어떻게 나올지 가닥은 잡혀 있으나, 확실한 건 없다. 트집을 잡자면 무엇이든 트집거리가 될 수 있었다.
특히나 나 같은 별종이라면 더더욱.
많이 돌아다녔고 한 일도 많았다. 고작 약점 몇 개를 떠올려 그것만 틀어막으면 되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럴 때 적절한 격언이 있다.
‘최선의 방어는 공격이다.’
진입로가 많다고 사방에 나의 힘을 분산 배치하는 것은 하책이다.
먼저 공격을 들어가서, 상대방이 힘 쏟을 곳을 제한하는 것이야말로 역설적이게도 최선의 방어가 되는 것이다.
물론 저들이 공격하리라는 예상은, 어디까지나 예상에 불과하다. 선공도 효과적일 수 있지만 명분 싸움이 중요한 정계에서 내가 먼저 나서는 건 좋지 않았다.
권철이 자신을 끌어내린 오겸을, 물귀신한 것도 모자라 보복까지 하려 들었다…… 는 식으로 여론이 형성되면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까.
그렇다고 선제공격에 당해줄 필요는 없다. 저들이 공격하겠다면 먼저 징후를 포착해 선공의 증거를 확보하고 빠르게 진압하면 된다.
어디까지나 이상적인 바람에 지나지 않지만.
“나리.”
밖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방문을 여니 비자들이 상을 끼고 있었다.
차림은 심플했다. 커다란 대접 하나뿐. 기름기 동동 뜬 육수에는 쇠고기가 느릿느릿 떠다니고 있었다. 중심에는 새하얀 국수 면발이 이쁘게도 말려 있었다.
“호화롭군.”
수제로 일일이 면발을 뽑아야 하는 국수와 조선에서는 특히나 귀한 소고기의 조합은 사치의 극이다.
권철의 가정에서 자랐을 권율도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였다.
더욱 기대되는걸…….
* * *
기방.
대낮이었지만 노는 날이어서인지 주변은 소란스러웠다. 남자와 여인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번갈아 터졌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
경성부에 있을 때 나에게 관심을 드러낸 관기가 있었지.
-드르륵.
방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여인이 입장했다.
기녀는 아니었다. 한때는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사십대가 넘은 인상을 가진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녀는 마담이다.
“나리.”
그녀가 교태어린 목소리로 불렀다. 나를 유혹이라도 할 생각은 아닐 테고, 단지 그런 어조가 입에 붙어버렸기 때문이겠지.
“내가 방만 차지하고 있음은 아네.”
“아신다니 다행입니다. 찾아오신 지 한 식경은 지났는데 사람도 아니 부르시고 술상도 들이지 않으시니, 저희로서는 부담스럽습니다.”
“선불하지.”
“선불이라면…….”
나는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쇄은 몇 조각을 꺼내 내밀었다.
마담은 한눈에 가치를 알아보고는 잽싸게 쇄은을 낚아챘다. 조금은 추하기까지 한 행동이었지만 기방은 그 어디보다도 현실을 살아가는 곳이다.
마담은 자신의 행동에 연연하지 않고는 다시 교태어린 목소리를 냈다.
“감사합니다, 나리……. 때가 되면 부르시어요. 바로 아이들과 상을 내어가겠습니다.”
“그러게.”
“하지만 이렇게 아무것도 들이지 않으시고 시간만 축이시려면 삯이 더 필요하답니다. 방을 비워두는 건 그만큼 수익을 잃는다는 뜻이니까요.”
내가 제공한 것은 순도 높은 ‘진짜’ 쇄은들. 얼치기 장사꾼들을 속이기 위한 하품과는 판이한 가치를 지녔다.
마담이 챙긴 양 정도면 도정한 백미로 몇 섬은 된다. 도성 한복판에서도 집 반 채 정도는 살 수 있을 정도다.
그런데 뻔뻔하게도 더 달란다. 이유야 붙여놓았지만 말이다.
“적잖이 준 걸로 아는데.”
“사례를 표하신다면 저희들도 더 성의를 표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생각해보지. 이번에 큰 손님이 올 예정이거든. 자네들 입단속이랑, 손님을 대하는 정성에 따라서 나의 사례 여부가 달라질 거야.”
마담의 시선이 흥미로 물들었다.
얼마나 대단한 손님이 온다는 것일까, 하고. 하지만 이 이상의 불필요한 호기심은 드러내지 않았다.
“……명심하겠습니다.”
“좋아.”
마담이 나가고 반 식경 뒤.
내가 기다리던 손님이 뒤늦게 등장했다. 을룡이 동행한 채였다.
을룡은 지금 기분이 편치 않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로, 귀한 손님을 방 안으로 밀어냈다.
“들어가시오.”
전혀 ‘귀한’ 손님을 대하는 태도는 아니었다. 사실, 그 귀한 손님이란 정확히 40분 전 쯤에 좋게 대우받을 자격을 잃은 채였다.
이 친구가 시간을 너무 많이 끌었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