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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87화 (87/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87화

30. 신고식 (1)

“쿨럭, 쿨럭…….”

선조는 거칠게 기침했다. 겨울이 되어 해를 넘기기 무섭게 고뿔이 들었다. 얼마나 단단히 들린 것인지 기침이 그치지 않았다.

“흐어어.”

지친 선조는 숨을 몰아쉬었다. 목이 갈라져서인지, 마치 깨진 틈 사이로 바람이 새는 듯했다.

그 광경에 신하들은 우려스러울 뿐이었다. 그들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아뢨다.

“근래에 옥음(玉音, 왕의 목소리)이 정상적이지 않으시니 모든 신하가 근심합니다. 부디 의관을 시켜 진찰하고 증세에 따라 약을 쓰시옵소서. 그리하여야 병이 깊어지기 전에 다스릴 수 있사옵니다.”

선조는 다만 손을 내저을 뿐이었다.

“알았다.”

따르겠다는 투는 아니었다.

옳으나 그다지 관심 없는 간언을 들을 때마다 흔히 나온 반응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다는 뜻에 지나지 않았다.

이에 우의정 오겸(吳謙)이 나섰다.

“전하……. 내의원의 도제조는 오로지 옥체를 보양하는 것을 직책으로 삼고 있는데, 나서서 문안하고 진찰하지 않으니 상하(上下)가 답답해하고 있사옵니다.”

마침 내의원의 도제조는 영의정 권철이었다.

“…….”

권철은 눈을 흘기며 오겸을 바라보았다.

새해를 넘기며 건강이 안 좋아진 것은 선조만이 아니었다. 권철 역시 급격하게 건강이 안 좋아져, 어렵사리 관직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예상한 일이었다.

살 만큼 살았으니 자신의 몸에 대해서 모를 수가 없다. 그래서 이순신도 영입하지 않았던가. 후일을 대비하고자.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신호가 된 모양이었다.

미뤄둔 혼례를 올리며 마침내 이순신이 손녀사위가 되자, 좌의정 오겸의 태도가 급변했다.

‘내 자리를 원하느냐?’

권철은 쓰게 콧바람을 내쉬었다. 그리고 선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전하, 황송하옵게도 신이 늙고 약하여 이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게 되었사옵니다. 좌의정의 말이 틀리지 않았사옵니다.”

오겸이 권철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죄를 순순히 인정하다니?

그가 아는 권철은 이렇게 무기력한 자가 아니었다. 분명 복안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지금, 오겸은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단지 불안 섞인 시선만 보낼 뿐.

권철이 말을 이었다.

“신이 돌아보니, 신을 포함해 정승 중에서 기력이 다하여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자가 몇 있사옵니다.”

“……!”

누구를 뜻하는지는 말할 것도 없다. 특히, 나이만 따지자면 오겸은 권철보다 연장자였다.

만일 권철이 ‘자신을 포함해’ 기력이 다한 늙은이라고 말한다면, 거기에 오겸은 원컨 원치 않건 포함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자리에서 청할 것은 아니나, 무례를 무릅쓰고 감히 사직을 청하옵니다.”

이에 선조가 턱을 살짝 치켜들었다. 여전히 거친 목소리였으나 그래서 더더욱 힘이 느껴졌다.

“……영상께서는 일전에도 정사(呈辭)를 여러 번 올리셨지.”

정사(呈辭)란 여러 사유를 들어 사직, 휴직을 청하는 공문이다.

권철 역시 한창 아플 때는 정사를 냈다. 하지만 선조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노신의 사직을 바로 받아주는 것은 예가 아니기에.

권철의 사직이 반갑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예전에는 별 볼일 없는 늙은이에 불과했던 권철이었으나, 여러 재상직을 역임하고 마침내 영의정에 오르자 태도가 변한 탓이었다.

더 버릇이 없어지기 전에 다른 인간으로 갈아야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던 참이었다.

“송구하옵나이다.”

“아니오. 영상께서도 편치 않은 마음으로 정사(呈辭)를 낸 것일 터인데, 과인이 제때 응해주지 못했소이다.”

선조는 그래서 미안하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런 기분인 척도 하지 않았다.

대신 이 상황을 음미했다.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영상의 사직은 받아들일 수 없소. 대신 휴가를 드리겠소이다. 그동안 나랏일을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도 노고를 피하지 않았으니, 공을 치하하는 차원에서 궤장도 하사하겠소.”

“망극하옵나이다.”

“……내 알기로 좌상께서도 연배가 만만치 않은 걸로 아는데.”

선조의 시선이 오겸에게로 향했다. 오겸은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고, 단지 고개만 숙일 뿐이었다.

선조가 말을 이었다.

“좌상께서도 잠시 쉬는 편이 좋겠소. 궤장도 함께 하사하겠소이다.”

“……망극하옵나이다.”

오겸은 거의 쥐어짜듯 답했다.

사실, 답하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과 다르지 않기에.

그동안 눈치가 보임에도 권철을 견제했던 이유가 무엇인가?

자신 역시 신하로서 다다를 수 있는 권력의 정점, 영의정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사직이나 다름없는 처지가 되다니?

영의정 자리는 물론 자신의 자리까지 다른 사람이 차지하게 될 터다.

언젠가 복귀를 시도한다 해도……. 고작 허울뿐인 중추부 관직이나 얻겠지. 궤장이란 그런 것이었다.

전제부터가 일평생 나라를 위해 헌신한 노신을 예우하는 것이기에.

달리 말하자면 이제는 더 쓰지 못할 폐품이라는 뜻이다. 궤장을 받은 자가 의정 대신으로 복귀한 경우는, 적어도 오겸이 알기로는 없었다.

‘젠장!’

하지만 왕의 결정이니 어쩔 텐가.

마다할 수도 없었다.

어전회의가 파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좌의정이 아닐 터이고…… 지금 오겸의 심정은 도살장으로 밀어지는 짐승과 다를 바 없었다.

* * *

간만의 일정 없는 휴일…….

나는 대(大)자로 드러누워 인생의 무료함을 만끽하고 있었다.

아무런 생각도 없으며…….

더욱 격하게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공자님.”

을룡의 목소리였다.

“…….”

격하게 무료하고 싶었던 나에게는 비극이었다. 하지만 어쩌겠나. 부르는데 무시할 수도 없고.

나는 누워버린 그대로 다리만 움직여 방문을 걷어찼다.

“무슨 일인데?”

“권 공께서 오셨습니다.”

“아.”

이 집에서 권 공이라 불리는 사람은 하나밖에 없었다.

권율!

이제는 장인이니 을룡은 빙장어른이라 부르는 게 맞다. 하지만 권율은 자신이 나의 장인인 것을 어색해했다.

첫 만남에서는 위에 있던 사람이, 수평적 관계도 아닌 역으로 수직적인 관계가 되려니 민망한 듯했다.

서로를 공이라 부르려니 한동안은 어색했지만…….

지금이야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졌다. 오히려 남들 앞에서 호칭을 고치는 것이 더 어색했다.

‘그나저나 연락도 없이 방문이라니.’

흔한 경우는 아니었다.

“곧바로 마중 나가겠다 전해드려.”

“예.”

나는 천근만근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서두르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느리지도 않게. 도포를 걸치고 갓을 썼다.

의복을 갖추고 나서니 을룡이 때맞춰 대문을 열었다. 솟을대문의 문턱 너머로 권율이 우뚝 서 있었다.

“이 공.”

“통기도 없이 무슨 일이십니까?”

“내 딸이 사는 집인데 일일이 보고해가며 찾아와야 하나?”

“그럴 필요는 없지요. 자, 안으로.”

나는 권율과 함께 마당을 가로질렀다.

마침 곁을 지나는 머슴이 있어, 잠시 멈춰 서서 일렀다.

“다과상 둘 내오겠나? 가볍게.”

머슴은 꾸벅 허리를 숙이며 응했다. 직후 권율이 반 발자국 나서며 손을 내저었다.

“그럴 필요 없네. 오래 머무를 생각은 없으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머슴을 돌려보냈다. 우리는 대청에 앉았다. 쌀쌀한 때였으나 금방 가겠다니 무방하겠지.

쌀쌀하게 식은 대청의 한기를 엉덩이로 느끼며, 나는 입을 열었다.

“본론을 말씀해주시지요. 이유 없이 찾아오지는 않으셨을 것 아닙니까?”

“자네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몰라서 묻는 겁니다.”

권율은 진심이냐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영의정 대감께서 궤장을 받고 관직을 내려놓지 않으셨나. 몸이건 마음이건 편치 않으실 터인데 찾아가서 문후를 여쭈어야지.”

“음, 공께서 효자이신지는 처음 알았습니다.”

“그동안 못난 모습을 많이 보였지만 패륜아를 자처하고 싶지는 않아. 게다가 회령에서 한바탕한 뒤로는 새 마음을 먹고 살아가는 중이라고.”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한 뒤에야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던 권율은, 나로 인해 바뀐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늦었지만 과거를 준비한다고 했다. 역사에서도 고작 몇 년을 공부하여 급제한 사람이니, 이번에는 훨씬 일찍 관문에 들어서겠지.

하지만 경험이 부족해서인지 감각은 떨어졌다.

“이런 시기에 대감을 직접 찾아뵈어도, 딱히 좋아하시지는 않을 겁니다.”

“그야 심신이 편치 않으시니 방문을 받아주는 것도 피곤하시겠지. 하지만 위로는 드려야지 않겠나?”

“……정 원하신다면 가도록 하지요.”

내가 웃어주며 답하자 권율은 영 찝찝했는지 입술을 핥았다.

“그런데 꼭 저와 동행할 필요가 있습니까?”

“자네는 나의 하나뿐인 사위 아닌가. 이 사람이 아니라면 누가 동행하고서 대감을 뵙겠나?”

“흠.”

나는 마루를 짚으며 일어났다.

“출타를 준비하겠습니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겁니다. 그동안 따님이라도 만나시지요.”

“그러지.”

권율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안채로 향했다.

그와 부인이 회포를 풀 동안, 나는 의관을 고쳤다. 어쩌면 영의정의 거처에는 다른 사람이 있을지도 몰랐으므로.

겉모습에 조금 더 신경은 써줘야 했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마지막으로 향낭까지 걸치고 나오니, 권율은 이미 마당에서 우뚝 선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따님과 좀 더 이야기를 나누지 않으시고요?”

“지아비나 잘 따르라고 할 뿐이지. 여아답지 않게 말괄량이 같은 구석이 있어서, 폐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야.”

“기우이십니다. 오히려 제가 폐가 되지나 않을까 걱정이지요.”

“그거야말로 기우로군.”

권율은 대문을 향해 턱짓했다. 이만 권철을 찾아가자는 뜻이었다.

* * *

간만에 찾은 권철의 저택.

내부에는 평소보다 많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리 오너라.”

권율이 대문에 서서 이르자, 문지기가 반색하며 맞아주었다.

“오셨습니까.”

“아버지는?”

“사랑에 계십니다. 마침 집안 어르신분들도 와 계시니, 겸사겸사 인사드리시지요.”

“알겠네.”

권율이 먼저 들어서자 나는 뒤를 쫓았다. 문지기는 나를 향해 가볍게 갓을 숙여 예를 표했다. 나 역시 갓을 살짝 숙여주었다.

마당으로 들어서니, 그동안 꾹 닫혀 있던 별채의 방문들이 죄 열려 있었다. 너머에는 중년의 사내들이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권 가의 어른들이로군.

그들 중 하나가 권율을 발견하고는 불렀다.

“율이 아닌가?”

지긋한 연배의 노인이었다.

“당숙 어르신.”

“딸아이가 혼례를 올렸다지? 내 그날 참석하지 못해 미안하게 생각하네. 워낙 날이 급박하게 잡혀서 말이야.”

“아버지께서 마음이 다급하셨지요.”

“음, 음.”

당숙이라 불린 노인은 마냥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동석한 사람들은 권율을 흘기며 무어라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좋은 말은 아니겠지.

권율의 얼굴이 금세 불편함으로 물들었다. 당숙과의 대화에 반응해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몇 있었지만 권율은 반응하지 않았다.

“아버지.”

권율은 사랑방 앞에 멈춰 섰다. 그에 답하듯 방문이 열렸다.

안에는 권철 외에도 일전에 보았던 중년인이 맞은편에 자리해 있었다.

‘권순…….’

권철의 형으로, 책임감이 컸으나 능력은 부족했는지 문음으로 출사했다. 그래서 나이는 불혹을 넘겼으나 품계는 여전히 참하(參下)였다.

“율이 왔느냐. ……응교도 왔군.”

권철은 밝지 않은 어조로 반응했다.

“소자, 인사드리옵니다.”

“안으로 들어오거라. 응교도.”

사랑방 내부는 열기로 후끈했다. 겨울부터 건강이 안 좋았던 권철이다.

그러나 한창 아픈 시기는 지났다는 듯 권철은 정정했다. 피로한 기색은 여전했으나 이 정도면 회복이라는 말도 과하지 않았다.

‘역시나.’

권철이 궤장을 받고 관직을 내려놓았다는 소식은 나 역시 진즉 접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영의정인데, 그만한 사람이 내려왔다면 누구나 알지 않겠는가?

특이한 점은 좌의정을 지내던 오겸까지 세트로 내려와야 했다는 점이었다.

오겸은 오래전부터 권철을 견제해왔고 그 의도는 너무나 빤한 것이었다. 절대로 자기 의지로 스스로 물러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대충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물귀신이 아니겠느냐, 하고 말이야…….’

훨씬 정정해진 모습을 보니 확실했다.

“아버지, 소자가 못나 힘이 되어드리지 못했습니다.”

“아니다. 설령 힘이 되더라도 나를 위해 할 일은 없었을 게다.”

“…….”

권율이 공부를 시작해서일까. 막내아들을 마냥 못난이로만 치부하던 권철의 태도는 훨씬 누그러져 있었다.

그가 걱정하는 것은 자신의 사직이 아닐 터다.

오래전부터 권철은 이러한 상황을 각오해두었기에. 오히려 권철이 걱정하는 것은 이 이후였다.

안동 권씨에는 권철의 지위를 이어받을 자가 없었다. 장남인 권순조차 음서로 말직이나 지내고 있을 뿐.

그가 일궈낸 가문의 부와 명예는, 이제 신기루처럼 흩어질 것이 분명했다.

세조의 수하이자 희대의 권신으로 유명했던 권람 이후로는, 위인은커녕 유명인조차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안동 권씨이기에.

그래서 나를 영입한 것 아니던가.

권철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전 좌의정이 싫기는 하지만,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야. 응교는 나주 오씨의 명성은 접해보았나?”

“아니요.”

전생 한평생 동안 나주 오씨는 듣지도, 접해보지도 못한 나였다.

조선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나주 오씨의 존재감은 극히 희박했으며, 오겸이 의정 대신으로서 존재나마 어렵사리 증명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오겸은 나성군(羅城君) 오자치의 손자지. 그도 어렸을 때는 나주 오씨가 지금처럼 세가 기울지는 않았을 거야. 그래서 더 절박하게 나의 자리를 원했는지도 모르지.”

“이번 일로 많이 분개하고 있겠군요.”

“그 나이 먹고도 성급한 것이 원인이겠지만, 내가 그동안 겪어본 사람 중에서 십중팔구는 원인을 외부에서 찾더군.”

“오겸이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뜻입니까?”

“장담할 수는 없지만,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겠군. 오겸이 이 일을 고이 납득하지는 않으리라는 것. 응교는 나의 손녀사위이고, 가까운 사람 중에서도 존재감이 큰 만큼 주의하는 편이 좋을걸세.”

“명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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