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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86화 (86/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86화

29. 적지로 귀환 (3)

“으.”

뒤늦게 숙취가 몰려왔다. 곁에서는 부인이 자고 있었고, 반대편에는 술상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이래서 첫날밤에는 술을 들이는 것이로군.

상 너머의 문풍지에는 구멍이 송송 뚫려 있었다.

“…….”

뒤늦게 부끄러워하기에도 한참은 늦어, 나는 메마른 입이나 쩝 다시고 말 뿐이었다.

방문을 여니 해가 중천이었다. 옷을 갈아입고 먼저 나오니 고향집 노복들이 반겨주었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요.”

무척이나 밝은 표정이었다. 과거에는 생기 없이 살아가던 자들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다.

아버지께서는 나의 방식을 존중하기로 했다. 이제 그들에게도 충분한 생필품과 질 좋은 식사가 제공되었으며 약간의 급료도 주어졌다.

노복들은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해했으며 특히 나에게는 더 감사해했다. 그들의 표정에서 드러나는 고마움에는 일말의 가식도 없었다.

“덕분에요. 잘 잤습니다.”

나 역시 가볍게 웃어주며 답하니 노복이 물었다.

“바로 식사를 내오라 할까요?”

“때가 되면 하지요.”

“이제 점심입니다, 공자님.”

해가 중천이더니 벌써 그렇게 됐나. 평소 새벽에 일어나는 나로서는 상당한 늦잠을 자버린 셈이다.

달밤에 체조를 너무 열심히 해서 그런가?

“……크흠!”

“예?”

“아, 아닙니다. 마침 점심이라면 마다할 이유도 없군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노복은 황송하다는 듯 깊게 허리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간만의 고향이다.

잠기운은 달아났으므로 사랑방을 찾았다.

“아버지.”

“들어오거라.”

나는 방석에 자리한 뒤 예를 올렸다.

“강녕히 주무셨습니까.”

“그래. 너는 잘 잤느냐?”

“예.”

“다시 관직을 얻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내정일 뿐입니다.”

“조정에서 나온 말이 손바닥 뒤집듯 뒤집히겠느냐. 필시 관직에 제수될 거다.”

아버지는 잠시 침묵하셨다. 그리고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만일 이번에도 너를 시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에게 말해주거라. 영의정 대감 덕에 많은 분을 알게 되었으니 어떻게든 도움이 되어주마.”

“아버지.”

내 단호한 부름에 아버지는 조금 놀란 듯했다.

“소자의 사직 이유는……. 과장된 면이 있습니다. 풍문이란 항상 과장이 더해지기 마련이지요. 저의 경우가 특히 그렇습니다.”

“사실이 아니라는 말이냐?”

“많은 부분에서 사실이 아닙니다. 소인배와 연관된 것은 맞지만 소인배‘들’과 관련된 것은 아니고, 시기 때문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사직까지 결심하였느냐? 이 아비에게는 일언반구도 없이?”

나는 잠시 고민했다.

왕이 또라이처럼 굴어서, 라고 한다면 명쾌한 답이 되겠지만 좋은 답은 아니다.

“아버지께서도 공부를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하지만 너만 한 자질은 없었다. 좀 더 열심히 해보지 못한 것이 아쉽구나.”

“아버지께서는 어떤 관리가 되고 싶으셨습니까?”

“내가 한창 공부할 때는 조정에 간적들이 많았지. 그들과는 다른 존재가 되고 싶었다. 진심으로 전하께 충성하고, 백성과 나라를 위해서 일하는.”

“대과를 준비하는 사람 태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 않겠느냐.”

“한데 어찌하여 관리들 대다수는 올챙이일 적 생각을 못 하고 직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습니까?”

“음, 관직을 희망할 때와 관리로서 지내는 것이 다르기 때문 아니겠느냐.”

“아버지…….”

나의 부름에 아버지는 침을 삼켰다. 나의 대답이 예상되었겠지. 맞았다. 정확했다. 그것이 내가 드릴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확실히 관직을 희망할 때와, 관리로서 지낼 때는 다르더군요. 제가 사직한 것은 초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포부가 큰 자는 자신이 숙명을 타고났다고 믿는다.

고작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일 사람 중 하나가 되고자 세상에 태어나지는 않았으리라고.

나의 본질은 평범한 소시민이었으나, 내가 가지고 태어난 지식은 그렇지 않았다. 시기적절한 시기에 미래의 지식과 경험을 갖고 태어난 것은 그만한 이유기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마침 이름도 이순신이었지만…….

나의 정체가 진짜 이순신이냐, 아니냐는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무엇이건 나는 조선을 구원할 사람이었으므로.

하지만 선조는 나의 생각, 결심, 그간의 행보를 무의미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종잡을 수 없는 광기와 편협함, 망상의 극치를 드러냈다. 내가 느낀 선조란 정당한 군주가 아닌 망해 마땅할 나라의 전형적인 폭군이었다.

그래서 관직을 내려놓았다.

잠시.

이제, 나는 돌아왔다.

버렸던 관직도 되찾았다.

선조가 다시 나를 찾을 것을 알기에. 궁지에 몰리면 스스로를 구하고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을 알기에.

미리 돌아왔다.

힘을 축적하고자.

내가 느끼는 숙명은 임진왜란의 방어가 아니다. 그 이상이다.

다행스럽게도 화근을 없애는 법은 직관적이다. 화근 그 자체를 없애면 된다.

나는 권철에게 말했다.

이건 내리막길을 질주하는 수레와도 같다고.

만일 선조가 여전히 나를 적으로 생각한다면. 그래서 앞을 막아선다면.

미안하지만 이번에는 피할 생각이 없다.

“…….”

나는 침묵을 지켰다.

아버지는 상실감이 묻어나는 묘한 표정을 지었다. 분명 내가 처한 상황을 모르고 있음에도, 공감할 수 있다는 듯.

“이 아비는 관직을 지내본 적이 없어 모르겠구나……. 네가 어떤 심정인지. 아비로서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앞으로도.

언제까지고.

나는 괜찮을 거다.

이제는 흔들리지 않을 터이니.

“알았다. 내가 너를 오래 붙잡고 있었구나. 이만 돌아가서 일 보거라. 권 가네 여식은 잘 대해주고. 앞으로 백년해로할 사람 아니냐.”

“그럴 생각입니다. 그럼. 소자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나는 꾸벅 허리를 숙여 물러나는 예를 취했다. 밖으로 나오니 선선한 바람이 맞아주었다.

마침 마당으로 소반을 껴안은 비자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점심이 다 된 것일까.

식사를 앞둔 아버지께 괜히 입맛 없어질 소리만 한 것 같아 죄송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드려야 할 말이기도 했다.

나중의 오해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공자님, 식사는 별방 앞에 두면 될까요?”

“아니요. 마침 나온 김에 소반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두 분이 드실 거라 무겁습니다.”

“괜찮습니다.”

나는 비자에게서 소반을 받았다. 비자는 그저 죄송하다는 듯 연신 허리를 숙이고는 물러났다.

괜찮은데.

별방으로 상을 들이니 부인은 이미 깨서 옷도 갈아입은 채였다.

그녀는 나의 등장에 놀라워했다.

“상을 직접 옮기십니까?”

“집이 가난해서.”

“노비는 많던데요.”

“하하……. 적당히 둘러대고 말 생각이었습니다만, 별종같이 보여도, 이 사람은 이편이 좋습니다. 남 고생시키는 성격은 못 되어서요.”

부인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싱겁게 납득해버리니 오히려 이쪽이 의아해졌다.

“부인께서는 이런 가풍에 익숙하지 않으실 터인데. 앞으로 불편하실까 우려스럽군요.”

“아니에요. 지아비가 될 분이니 전부터 말씀은 어깨너머로 많이 들었으니까요. 인지하고 성품이 좋아서 주위에 사람이 많고 아랫사람들이 존경하며 따른다 들었습니다.”

“그 이상이지요.”

자랑스러워하는 게 아니었다. 솔직히 노비에게 나처럼 잘 대해주는 사람은 없다.

적어도 도성에서는 확실하다. 그뿐인가? 갈 곳 없는 사람들까지 거두어서 저택까지 세워 머물 장소를 마련해준 적도 있었다.

이만하면 별종이다. 그리고 이런 별종 곁에 있는 사람은 피곤하기 마련이다. 특히, 가족이 될 경우에는 더더욱.

“괜찮습니다. 지아비의 인품이 뛰어나다는데 어느 여식이 마다하겠습니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서로를 자세히 알고서 만나지는 못하였으나, 한 번 만나 각별한 사이가 되었으니 좋은 인연을 이어나갑시다.”

나는 두 손으로 부인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부인이 다른 손으로 나의 손 위를 감쌌다.

* * *

“자네가 새로 온 응교로군?”

“예.”

첫 홍문관 등청.

정철과 이이 같은 익숙한 얼굴도 있었지만 나머지는 죄다 초면이었다. 가장 상석에 있는 사람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다만 예상과는 달리 친절하다. 아래쪽으로 갈수록 복잡한 심경이 드러났지만.

“나는 부제학을 지내고 있는 박응남이라고 하네.”

“만나 뵈어 영광입니다, 영감.”

박응남은 영광까지야, 라는 듯 웃으며 손을 저었다.

“정식으로 제수되어 여기에 왔으니 앞으로는 응교라 부르겠네.”

“편하신 대로 부르십시오.”

아랫사람들의 얼굴이 당혹으로 번졌다. 처음으로 지낸 관청에서는 누구나 신래(新來)가 된다. 심지어는 사실상의 장관인 부제학마저.

그런데 박응남은 마땅히 신래여야 할 신입에게 응교를 허락한 것이었다.

갖은 고생으로 신참례를 버텨낸 자들로서는 용납하지 못할 일.

“부제학 영감, 그래도 신참례도 없이 응교라 직책을 허락해주는 것은…….”

말미에 있던 사람 중 하나가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박응남은 반응하지 않았다. 그보다 이이가 먼저 나섰다.

“자네, 건방진 소리를 다 하는군. 이 공(公)에게 응교를 제수한 건 전하일세! 그런데 고작 박사 따위가 직책을 허락하니 마니 망발을 지껄인단 말인가?”

뒤이어 정철까지 맞장구를 치고 나섰다.

“홍문관 관리로서 저런 불충한 소리를 지껄이는 걸 보니 교육이 덜 된 듯하오, 이 교리.”

누군지는 몰라도 교육이 덜 됐다는 소리를 듣는 걸 보아 홍문관에 입성한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었다.

관직도 참하관인 박사에 불과하다면 홍문관에서의 첫 관직인 모양이고…….

신참례를 막 치른 참이라 내가 그냥 넘어가는 것이 배 아팠나 본데, 이해는 하지만 상대를 잘못 골랐다.

“김 박사가 한 말은 신경 쓰지 말게.”

박응남도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홍문관 중진인 두 교리에 부제학까지 나의 편을 들자 말단 관리들은 입을 꾹 닫았다.

아무리 패기를 높게 치는 삼사의 일원이라도, 상관은 하늘이기에.

마침 김 박사가 찍히기도 해서, 나도 찍히겠답시고 나서는 바보는 없었다.

분위기가 정리되니 박응남이 말을 이었다.

“처음 자네가 판관에 제수될 때, 솔직히 나는 반대하는 입장이었네. 아무리 회령의 판관을 자처했다지만 특채로는 과한 감이 있었거든.”

“저라도 다르지 않았을 겁니다.”

“이해해준다니 고맙네. 단지 이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때의 내가 잘못 생각했음은 오래전부터 인지하고 있었다고.”

박응남은 나를 인정하고 있었나.

그다지 접점이 없었던 그가 우대를 해주기에 사유가 궁금하던 참이었다. 이이처럼 공인 미친놈으로 명성이 높지 않고서야 신참례를 면하기는 어려우므로.

박응남은 과거 나를 오해했던 것을 이렇게 사과하고 싶은 것 같았다.

나야 좋지.

홍문관에서 쓸데없는 고생은 안 할 테니까.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해를 피하고 싶었을 뿐이네.”

박응남은 빈자리를 향해 팔을 뻗었다.

“저기가 응교의 자리이네. 첫 등청이라 어색하겠지만 금방 익숙해질 테고, 여기서 해낼 일이 있으면 내가 체직되기 전에 해주게. 개인적인 부탁이야.”

박응남이 웃으며 농을 건네기에 나 역시 웃음으로 답해주었다.

“명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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