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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85화 (85/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85화

29. 적지로 귀환 (2)

“그럼…….”

도성에 다다르자 권율이 입을 열었다. 그는 무척이나 지쳐 보였다. 지저분해진 얼굴, 헤진 도포. 구부러진 갓.

한량에 불과했던 과거의 권율은 자신이 이렇게 될 줄 상상도 못 했겠지.

“권 공. 고생하셨습니다. 덕분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 사람이 고생한 건 사실이지만 자네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 도움이 됐다는 것도.”

권율은 가볍게 부정하고는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서는 대단하신 분이지. 처음에는 나를 공 곁에 붙이겠다는 말씀에 의문이 들었어. 달갑지도 않았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 덕분에 넓은 세상을 볼 수 있었네.”

“도움이 되었다면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이만 가보겠네.”

“예. 쉬십시오.”

“공께서도.”

권율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먼저 나아갔다. 그가 멀어지자 나는 나대로 을룡과 함께 저택으로 귀환했다.

솟을대문을 넘기 무섭게 저택 식구들이 반겨주었다.

“공자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덕분입니다.”

“많이 피곤해 보이십니다. 바로 쉬시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 목욕물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주세요. 몸을 뜨뜻한 물에 지져야 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머슴들이 물러가자 이제는 여인들이 달라붙었다.

“공자님, 식사하시겠습니까?”

“곧 씻어야 합니다만.”

“가볍게 내어오겠습니다.”

“알겠어요. 부탁드립니다.”

여인들까지 물러난 다음에야 주변이 조금 조용해졌다. 물론 을룡만큼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너도 씻을 거냐?”

“목욕통 안에서 잠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래? 그럼 한숨 자두고 일어나서 씻어. 사람들에게 말해둘 테니까.”

“알겠습니다.”

“고생했다.”

“공자님 노고만 하겠습니까. 그럼, 먼저 들어가서 쉬겠습니다.”

을룡은 예를 표한 다음에야 물러났다. 피곤하다면 바로 쉬어도 되는데.

반겨준 여인 중 하나가 소반을 가져왔다. 반 주먹 분량의 적은 밥과 무침으로 서둘러 준비한 가벼운 반찬들이었다.

공복이어서인지 밥이 달았다. 맛이 어떻냐는 기대어린 시선에 나는 엄지를 올렸다.

며칠 뒤.

충분한 휴식을 취한 나는 영의정 권철을 찾았다.

궁궐이나 다름없는 저택의 문을 넘어서니, 바로 맞은편에서 권철이 손을 들어 보였다. 열린 사랑방 방문 너머에서.

가볍게 허리 숙여 예를 표하니 권철이 오라 손짓했다.

“들어오게.”

“예.”

나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권철의 맞은편에는 방석이 깔려 있었다.

기꺼이 자리하니 권철이 말했다.

“함경도에서의 일은 막내에게 전해 들었네. 용케 죽지도 않고 살아 돌아왔군.”

질린다는 표정이었다.

“돌아오지 못했으면, 하는 느낌이로군요.”

“그런 생각도 없지는 않네. 자네는 골칫덩이야. 자네와 관련된 일이라면 뭐든지 고이 지나가지 않는다고.”

“마음 쓰실 일이 있었나 보군요. 조정에서 제 이름이라도 언급됐습니까?”

“뻔하지.”

권철은 흥, 하곤 콧바람을 내쉬었다. 선조가 얼마나 과민하게 나서던지.

제 손으로 대사헌 자리에 앉힌 노수신에게도 발광을 했었다.

이순신은 역린이었다. 왕의 심기를 언제라도 흔들 수 있는.

“대신 대감께서 바라시던 복귀는 쉬워지지 않았습니까?”

“부정하진 않겠네. 하지만 자네의 존재감이 왕을 불편하게 한다는 것도 알아줘야지.”

누구도 자신의 약점이 커지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선조는 이순신을 좋게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 자신의 역린을 뽑아버리려 들지 몰랐다.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으려면 쥐죽은 듯 조용히 살아야 하는데, 가능하겠습니까? 그러려면 애초에 복귀를 안 해야지요.”

“음.”

권철도 부정하진 못했다.

“기왕 복귀한다면 화려하게 복귀해주는 편이 좋습니다. 권력이란 내리막길을 질주하는 수레와도 같지요. 끝까지 가볼 생각이라면 죽을 각오 정도는 해야 하는 겁니다.”

“흥, 관직을 지낸 지 얼마나 됐다고 굼벵이 앞에서 주름을 잡는 건가?”

“전하의 관심도도 감안은 해주셔야지요. 짧은 시간이라도 정계의 흐름에 익숙해지기에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만.”

연습 30년보다 실전 3년이 더 알찬 법이다. 별다른 관심을 받지 못하는 대다수 당하관과는 달리, 나는 정말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종잡을 수 없는 왕의 만행들은 말할 것도 없지.

“잘 안다니 다행이로군. 전하께서는 자네가 어찌하여 경성부에 있었는지, 그리고 어쩌다 중차대한 역할을 맡게 되었는지 심히 궁금해하셨네.”

“대비해두겠습니다.”

“사실대로 말하건, 적당히 둘러대건 꼬투리 잡히지 않도록 하게. 자칫 불똥이라도 튄다면 여간 곤란한 게 아니니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권철은 잠시 뜸을 들였다.

별다른 미동도 없이, 손끝만 까딱이며 서안을 두들길 뿐이었다. 무슨 고심을 하는 걸까.

한참이나 지나 권철이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자네가 지낼 관직은 반쯤은 확정되었네. 홍문관 응교야.”

“의외로 짜군요.”

응교는 정사품 관직. 다음에는 당상관직을 지낼 거라는 짐작이 파다한 상황에 꽤나 끗발 떨어지는 자리였다.

“내가 그렇게 하자 권했네. 전하께서 자네의 성장을 내키지 않고 있으셔서 말이야.”

“전하의 사해를 아우르는 은총에 감복해야겠군요.”

“아쉽더라도 참으시게. 일단 청요직을 지내고 난 다음에는 날개를 달 터이니.”

“자리 욕심은 크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나는 의아해서 물었다.

“그런데 홍문관에 들어가려면 추천이 있어야 하는 걸로 압니다만.”

청요직으로 일컬어지는 삼사 관청들은 독보적인 편협함을 자랑했다. 내가 들어갈 홍문관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홍문관의 관원이 되려면 앞서 ‘홍문록’이라는 후보자 목록에 들어가야 했다. 결원이 발생하면 인사권을 가진 이조 관리나 홍문관 기존 관리들의 논의를 거쳐 홍문록에서 선발해 충원하는 것이다.

“절차도 없이 대뜸 홍문관 관리가 될 수 있는 겁니까?”

“영의정인 내가 권하고 전하께서 응하셨는데 무슨 절차? 그게 절차지.”

“적통이 아니라는 이유로 견제 좀 받겠는데요.”

“적통은 무슨. 오히려 성골이지. 영의정이 추천하고 전하께서 응하셨어. 새파란 철부지들이 고깝게 굴 수는 있겠지만, 윗놈들 대가리가 장식이 아니라면 자네가 시비 당하는 일은 없을 걸세.”

“그럼 다행이지만요.”

잡담을 이어가니, 밖에서 비자들이 다과상을 내어왔다. 뜨뜻한 찻잔을 기울이며 달콤한 간식을 들으니 그런대로 만족스러웠다.

권철이 차를 음미하다 입을 열었다.

“어떤가?”

“좋군요.”

“그뿐이야?”

권철이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딴에는 양품을 내놓았다고 자랑이라도 하고 싶었나 보다.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우전차 아닙니까.”

우전차란, 이름 그대로 곡우(穀雨) 이전에 딴 찻잎으로 우려낸 차를 뜻한다.

여린 차순으로 우려내 맛은 은은하고 순하다. 명나라에서는 이런 우전차를 최고급으로 쳤으며, 그 영향을 받은 조선도 다르지 않았다.

내 혀가 틀리지는 않았을 텐데…….

“그 정도야 누구나 아는 것이지.”

권철은 종류를 맞추는 걸로는 만족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 이상을 알 것 같으면 제가 다인(茶人)이나 하지 관직은 왜 지내겠습니까?”

애초에 맛만 좀 본다고 차 종류를 맞출 수 있는 인간은 흔치 않다.

명대의 차 끓이는 법은 무척이나 복잡해서 ‘삼대변’과 ‘십오소변’으로 나뉘어 있었다. 세 개의 똥과 열다섯 개의 오줌은 당연히 아니고…….

‘물 끓는 소리’, ‘물이 끓는 형태’, ‘물이 끓으며 나는 김의 형상’ 등으로 나눈 분류를 뜻했다.

실로 터무니없는 기준들이지만, 나아가 그딴 것들을 마실 때 구분할 수 있겠는가?

절대 미각도 못 할 짓이었다.

“쩝.”

권철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쩝 다시고는 툭, 말했다.

“오해를 살까 싶어서 미리 해두는 말이네만 예조판서는 자네를 예조참의로 추천했어.”

“오? 참의라면 종삼품 아닙니까.”

“그렇지. 자네를 높은 관직에 두어 환심을 사고, 겸사겸사 곁에 두겠다는 뜻이기도 하지.”

“예조판서가 누굽니까?”

“박 언이(彦而, 박영준의 자)일세. 자네가 군기시 첨정 지낼 때 병조판서로 있었던.”

“아. 그렇군요. 저에게 호감이 있나 봅니다.”

“호감? 흥.”

권철은 콧바람을 씩 내쉬었다.

“전하가 자네를 못 잡아먹어 씩씩대는 마당에 육조 참의직을 제수하다니, 무슨 사고를 일으키려고?”

“설마 두 분께서 절 두고 지분 싸움이라도 하는 건 아니겠지요?”

“……크흠.”

멋쩍게 헛기침을 흘리고는 나름 변명을 하는 권철이었다.

“예판은 자네에게 잘 보일 생각만 해서 화를 자초하지만 나는 자네를 생각했기에 마음이 상할 것을 알면서도 홍문관 응교를 추천한 걸세.”

“압니다, 알아요.”

“흠흠. 알면 됐네.”

권철이 무안해할 동안 나는 턱을 쓰다듬었다. 관직이 내정되었다면 복귀는 필연이다.

다시 전장으로 돌아온 느낌이로군.

회령에서도 시원하게 한 판 놀았지만 두려움은 없었다.

직관적이었으므로.

나는 도열한 창과 칼의 형상에서 공포를 느낄 수 없었다.

누군가가 나를 죽인다면 그것은 인과관계가 명확한 것이었으므로.

병사들은 적을 죽이기 위해 살해의 도구를 들었고, 어쩌다 거기에 당한다면 다만 죽을 뿐이다.

하지만 정계는 어떻던가?

적아의 구분조차 어려웠으며, 사람을 죽일 수단은 창칼만이 아니다. 교묘한 술책과 계략이 난무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진다.

공포란 무지에서 오는 법.

정계에 비한다면 전장에서 창칼을 맞대는 것은 오히려 유흥에 지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여기 도성이야말로 진정한 전장이었다.

영웅마저도 낙엽처럼 바스러지는 곳이기에.

얼마나 많은 위인이 고작 정치라는 이유로 아군의 칼을 맞고 죽었던가?

‘빌어먹을 선조 놈만 덜 설친다면 좋겠는데 말이야. 하지만 기대할 수는 없겠지.’

나는 찻잔을 살살 돌렸다.

문득 권철이 입을 열었다.

“혼례의 길일은 내 조만간에 정해서 알려주겠네. 이번에는 도망칠 수 없을 거야. 최대한 가까이 날을 잡을 테니까.”

“그렇게 말씀하시니 저 역시 최대한 일정을 알아봐야겠군요. 그래야 도망칠 때 명분이라도 서지 않겠습니까?”

“흥. 꿈도 꾸지 말게.”

* * *

권철은 진심이었다.

꿈도 꾸지 말라더니……. 며칠 되지도 않아 길일을 잡아버렸다. 덕분에 가까스로 연락을 돌리고는 바로 고향으로 와야 했다.

“어, 이제야 오셨군!”

정철이었다. 그는 나보다도 먼저 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주변에는 이이와 이산해, 김성일, 신립도 있었다.

차세대의 주역들.

나는 인연들에게 나아가 인사했다.

“도성으로 돌아온 직후에 연락부터 드렸어야 했는데 청첩장부터 돌려서 죄송합니다.”

“알긴 아는군. 언젠가 제대로 갚아야 할 걸세!”

“좋은 술을 구해두겠습니다.”

“흠, 흠.”

만족한 듯 헛기침하고 말아버리는 정철이었다. 그가 옆으로 살짝 비켜 앉자, 모두가 조금씩 비켜 공간을 만들었다.

내가 자리하자 정철이 잔을 건넸다.

“벌주일세.”

“청첩장 건은 술대접으로 봐주신 건 아니었습니까?”

“그거야 나에게만 해당하는 일이고. 게다가 자네는 말도 없이 경성으로 떠나지 않았나? 우리들은 실망감이 아주 커.”

정철은 잔이 넘치도록 따라주고는, 쭉 마시라 권했다.

마다할 수야 있나. 나는 단숨에 잔을 비웠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산해가 입을 열었다.

“조정에서는 자네를 홍문관 응교로 내정했는데, 알고 있나?”

“들었습니다.”

“나는 그게 최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 종사품이 과거에 갑과 삼등으로 급제했는데 고작 정사품이라? 그것도 공을 세운 사람에게? 아니 될 말이지.”

이산해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만한 사정이 있었던 걸로 압니다.”

“이 세상에서 봐줘야 할 사정이라는 건 없어. 최대한 빨리 보다 높은 자리로 옮겨가길 바라네. 졸지에 자네 아랫사람이 된 친구들을 위해서라도 말이야.”

이산해가 이이와 정철에게로 턱짓했다.

두 사람 모두 홍문관 교리. 응교보다 낮은 위치였다. 그래서일까. 이이는 썩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이었다.

“나는 자네가 홍문관에 응교로 오는 것을 반대했네.”

“왜요? 형님이 동생보다 밑에 있으면 궁색해 보여 그렇습니까?”

씩 웃으며 물어보니 이이는 침묵으로 긍정했다.

“크흠……. 자네가 응교보다 더 높은 곳으로 가길 바라서 그렇지. 다른 생각이 있어서는 아닐세.”

“아닌 것 같은데.”

“크흠, 흠!”

잡담은 이어졌다. 대부분의 주제는 내가 경성에까지 가서 무엇을 했느냐였다. 도성에서의 삶은 빤한 것이었으므로.

단기필마로 전장을 나다니던 나의 이야기는 옛 영웅들의 일대기 한 장면과도 다를 바 없었다.

특히 불타오르는 폐허에서 들려온 비명 소리에 멈춰 섰을 때는…….

“대감.”

맞은편에 있던 김성일이 다급히 일어났다. 모두의 고개가 돌아갔다. 거기에 권철이 있었다.

영의정이라는 까마득히 높으신 분의 등장이었다. 친우들은 서둘러 바닥을 짚었다.

“앉아들 있게.”

권철은 손바닥을 내보이고는 말했다.

“식의 주인공이 여기 숨이었으면 어쩌나? 또, 나를 무안하게 할 생각은 아니겠지.”

“설마요.”

“친구들에게 인사하고 이만 일어나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친구들에게 갓을 살짝 숙여주었다. 미안하지만 잡담은 여기까지.

직전까지만 해도 나의 이야기에 무척이나 몰입했던 그들이라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다.

“회포는 나중에 마저 풀도록 합시다. 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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