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84화
29. 적지로 귀환 (1)
“…….”
선조는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어전에 시립한 대신들의 표정은 좋았다. 희소식이 있었다. 소흡이 극히 적은 사상자를 내고서, 근래에 준동한 효정을 소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조에게만은 희소식이 아니었다.
그에게 저열하고 야만적인 여진족의 소탕 따위는 당연히 성공해야 할 일이었다. 실패한다면 직무유기고 무능이고 배신이고 내란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내란은 벌어지지 않았다. 적어도 선조의 기준에서는.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이순신은 어찌하여 경성에 있었단 말인가?”
선조는 불쾌했다.
대답하는 자는 없었다. 영의정 권철을 바라보니, 권철은 단지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이순신이 영상의 손녀사위가 된다는 말을 들었는데. 어찌, 들으신 바가 없소?”
“송구하옵니다. 어딘가로 간다고는 들었으나 자세한 바는 듣지 못하였나이다.”
“…….”
거짓은 아니로군. 선조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세간에서는 이순신의 사직이 주변의 시기 때문이라 말했다. 선비들은 뛰어난 인재가 소인배들에게 날개가 접혔다며 탄식했다.
그런 소식이 선조의 귀에도 닿을 때는……. 선조는 애써 안타까운 척을 했다. 그게 언젠가부터 진짜가 되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아는 법이기에.
‘함북병사가 장계를 보내왔을 때는, 이순신이 그 자리에 있었으면 싶었지.’
소흡도 명성이라는 게 있는 자였다.
조만간 볼일 없을 사람으로서.
그는 유능함과는 거리가 멀었고 능동과는 더더욱 거리가 멀었다.
율호 원정이 완벽한 성공을 거둬낼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이순신 덕이었다.
누가 여진족을 치는 데 여진족을 선두로 쓸 수 있단 말인가?
적어도 소흡은 아니다.
그러니 이번 원정에서도 이순신이 있었으면, 하고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진짜로 거기에 있었을 줄이야. ……마치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일전에도 이순신은 마치 자신의 마음을 읽은 것처럼 행동한 적이 있었다. 어렵사리 대과 초시와 복시에 붙어놓고 전시에는 건성으로 답한 것이 그러했다.
‘이순신은 과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단 말인가?’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소위 관심법을 행한다는 자들은 많았지만 선조는 괴력난신을 믿지 않았다. 유학을 배운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단지 허무맹랑한 탓으로.
하지만 이순신은 논외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설령 그가 관심법을 할 줄 알더라도……. 감히 왕의 마음을 들여다보다니?
안 될 일이다.
“…….”
선조는 불쾌감으로 침묵했다. 겉으로는 최대한 드러내지 않고서.
“전하.”
예조판서 박영준이 입을 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말하라.”
“세간에 떠도는 말로는 이순신이 여러 사람에게 시기를 당하여 관직을 버렸다 합니다. 실로 통탄한 일이 아니옵나이까? 그 같은 인재를 어찌 소인배들에 의해 잃을 수 있겠사옵니까?”
“……맞다.”
선조는 쓰게 긍정했다.
분명 세간의 소문은 그랬다. 사실은 다르다는 것을 선조는 잘 알고 있었다. 당사자로서.
그가 바로 이순신 사직의 원인이었으니까.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는 군주다.
군주의 역할은 사람을 가려 쓰는 것이다. 그리고 선조는 이순신을 쓸 생각이 없었다.
세상은 이순신의 사직이 비극이라고 한다. 선조는 떳떳하게 그가 자신을 못 이겨 사직했다고 밝힐 수가 없었다.
다만 지금처럼, 자신의 잘못이 아닌 양 애써 긍정할 뿐.
마음에 없는 소리임은 스스로도 알고 있으나, 그럼에도 거짓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 불쾌했다.
……이순신을 사직하게 만든 것이 잘못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 같아서.
그런 선조의 복잡한 마음을 알 리 없는 박영준이 말을 이었다.
“이순신을 크게 중용하시옵소서. 뭇 사람들이 그의 사소한 트집거리를 잡아 시기할 수 없도록 말이옵니다.”
“예판의 말이 옳사옵니다.”
이번에는 대사헌 노수신이 나섰다.
“신이 군기시 정을 지냈을 당시, 직접 이순신을 대할 기회가 많았는데 그는 실로 위인의 풍모를 가지고 있었사옵니다.”
선조가 답했다.
“위인의 풍모라니?”
위인이라는 말은 쉽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태종처럼 나라를 세울 정도로 영웅은 되어서야, ‘훌륭한 사람’이라는 뜻을 가진 위인(偉人)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선조 그는 자신을 위인이라 평가하는 말을 아직 들어본 적이 없었다.
모두가 칭송하고 충성할 절대군주가 될 자신조차 듣지 못하는 극찬을 신하 따위가 듣다니?
안 될 말이었다.
“대사헌은 과장이 심하구려.”
“전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신이 느낀 이순신은 진실로 위인의 풍모가 있었나이다.”
“…….”
“사내라면 무릇 공을 세워 이름과 가문의 명예를 드높일 생각을 하기 마련입니다. 때문에 예로부터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관리들은 물론, 일개 백성들까지 누가 더 공을 세웠는가로 다툼하기 일쑤였나이다.”
“이순신이 아랫사람들을 지극히 보살폈다는 건 나도 알고 있다.”
기형적인 존재였다. 노수신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사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하는 것이 바로 공명심이었다.
그러나 이순신만큼은 예외였다.
관직을 지내며 수많은 장계를 올린 이순신이었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이름을 앞세운 적이 없었다.
심지어는 논공행상을 위한 장계에서조차 부하들과 관련자들의 이름과 공훈만 있을 뿐. 지극히 천박한 공노비의 이름은 있어도 정작 이순신 세 글자만큼은 어디에도 없었다.
선조의 눈에 그런 기행은…….
‘더러운 위선자 같으니.’
위선자로만 보일 뿐이었다. 선조로서는 그런 의도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그래서 이순신은 대단한 인망을 얻고 있었지만 선조는 인정하지 않았다.
“내 이순신의 능력이 비상함은 알고 있으나 위인의 풍모는 느끼지 못했다.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을 보살피는 일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 아닌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해낸다고 위인이 된다면, 이 세상에 위인이 아닌 자가 어디 있겠는가.”
“할 수 있음에도 하지 않는 자가 즐비한 세상이옵니다. 오직 그만이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면 오직 그만이 위인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사옵니까?”
-쾅!
선조는 팔걸이를 내려쳤다.
최대한 감정을 숨기고자 했으나……. 노수신의 지적은 지극히도 불쾌했다.
오직 그만이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 라니? 마치 왕인 자신은 거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말과 다를 바 없잖은가!
지극히 무례했고 용서 못할 불충이었다. 난언이고 난언이었다.
“저, 전하?”
바로 곁의 도승지가 당혹한 듯 말했다.
선조는 입술을 깨물었다. 노수신은 자신이 지금의 자리에 앉혀놓은 자. 그는 은혜를 저버리고 원수로 갚은 역적과 다를 바 없었으나 죄를 묻기는 어려웠다.
목숨을 거둘 정도는 아니기에…….
“대사헌은 말을 너무 쉽게 하시는구려. 이순신을 아끼는 마음은 잘 알겠지만 이 자리는 사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곳이 아니요.”
“……송구하옵니다.”
노수신이 사죄하며 물러나자, 선조는 빠득 이를 갈았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사적인 감정을 누구보다도 강렬하게 표출하고 있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은 의식하지 않았다.
선조는 윗사람은 당연히 아랫사람을 보살펴야 한다고 했지만 스스로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지극히 이중적인 태도였으나 감히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그는 군주였으니까.
“……제신들의 입장을 들어보니, 이순신은 다시 기용하겠소이다. 어느 자리에 제수하면 좋겠소?”
이에 박영준이 나섰다.
“예조참의가 어울릴 듯합니다.”
박영준은 병조판서를 지낼 당시, 이순신의 자질을 읽어내고 전폭적인 지원을 보냈다. 비격진천뢰와 조총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공이 컸다.
하지만 정계에서 맹목적인 후원이란 없는 법.
그는 이순신을 자신의 세력 하에 둘 생각이었으나, 권철이 선수를 치고 말았다. 통 크게 손녀를 내준 것이다.
‘자식 농사에 실패해 대신 가문을 지켜줄 자가 필요하단 거지. 그 덕에 영의정 자리에 오른 것은 생각하지도 않고서 욕심이 많아…….’
사직한 전임 영의정, 이준경의 후임으로 권철이 들어온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어서다.
권철은 당대 누구와 비교하더라도 특별한 명성은 없었다.
오히려 어중간한 인물이라는 점과 한미한 가문으로 덕을 본 감이 있었다.
세력을 갖추기 힘들기에, 모든 신하를 찍어 누르고 그 위에 올라타 황제 놀음을 원하는 선조에게는 이상적인 인재상이었다.
하지만 권철은 고작 선조의 눈에 드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생각이 없어보였다.
‘애를 쓰는 건 좋다만 남이 먼저 손댄 것을 뺏는 건 도리가 아니지.’
이순신을 되찾으려면 권철보다 더 가까이 이순신을 곁에 둘 필요가 있었다. 그런 차원에서, 같은 관청에 소속되는 것만큼 가까워지는 길도 없었다.
“예조참의라.”
선조가 가볍게 받아주자 박영준이 서둘러 말을 이었다.
“마침 공석이옵니다. 종사품 첨정을 지낸 이순신을 정삼품 참의에 제수하는 것은 지극한 영전이긴 하오나, 사직 직전 대과에 갑과 삼등으로 급제하였으므로 우대라고 볼 정도는 아니옵니다.”
“흠…….”
선조는 별 감흥은 받지 못했다는 듯 침음을 흘렸다.
“더욱이 일개 선비의 몸임에도, 나랏일을 성사시키고자 함북병사를 도와 효정 소탕에 주축을 맡았으니 적절한 포상을 내려야지 않겠사옵니까. 그가 정당한 보상을 받는다면 수많은 관리와 백성들이 보고 배울 수 있는 귀감이 될 것입니다.”
틀린 말은 없었다.
적어도 말 만큼은.
전제가 틀려서 그렇지.
선조는 이순신의 위신이 더 높아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박영준이 제안한 예조참의는 핵심 기관인 육조의 차관보. 이순신에게는 날개가 될 터였다.
“전하.”
권철이었다. 선조는 슬쩍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말씀하시오, 영상.”
“예조참의 자리도 좋지만 신은 그보다 이순신이 더 크게 쓰일 수 있는 관직에 제수함이 옳다 생각하옵니다.”
“……손녀사위가 될 사람이라고 편애할 생각은 아니길 바라겠소.”
“단언컨대 아니옵나이다. 애초에 이순신은 신의 의사가 어떻건, 낭비되기에는 너무 아까운 인재가 아니옵니까?”
선조는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이 곧 긍정이었다. 그럴 생각이 있건, 없건.
권철이 말을 이었다.
“이순신이 사직하게 된 원인이 시기 때문이라면, 이대로는 설령 예조참의에 제수되더라도 금방 사직하지 않겠사옵니까.”
즉, 예조참의가 아니라 다른 자리에 제수해야 한다는 뜻.
처음부터 이런 말을 할 느낌이 있긴 했으나 이번에 아주 쐐기를 박아버린 것이다.
이순신을 곁에 두려던 박영준으로서는 불쾌한 발언이었다. 그는 은근한 적의가 담긴 시선으로 권철을 노려보았으나 권철은 의식하지 않았다.
“요직에 나가기 위해서는 전통적으로 수행해야 할 자리가 둘 있사옵니다. 하나는 지방 관직인데, 이순신은 이미 판관을 지냈으니 이 요건은 충족되는 것이나…….”
“청요직은 아직 지내지 않았군.”
“그렇사옵니다. 만일 그가 청요직 관리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면 나중에 요직에 제수되더라도 이견이 줄어들지 않겠사옵니까?”
선조는 썩 달갑지 않다는 듯 턱만 매만졌다.
청요직 그 자체도 막강한 지위일 뿐만 아니라, 권철의 말대로 지내고 나면 요직으로의 진출에 정당성을 얻게 된다.
마치 처음에는 특채로 제수되어 ‘투명한 벽’이 있었던 이순신이, 대과 급제를 통해 높은 관직으로 올라설 자격을 갖게 된 것처럼.
권철이라고 영 불만족스러워하는 선조의 기분을 못 읽을 리 없었다.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