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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83화 (83/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83화

28. 맥박하는 전율 (3)

“족장들은 흩어져 전장을 장악해라! 갑사들은 나를 따른다!”

골목과 골목이 이어졌다. 틈은 넓었으나 곳곳에서 난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런 전장에서는 뭉쳐 다닐 수 없다.

여진족들은 각자의 족장을 쫓아 사방으로 흩어졌고, 갑사들은 명령대로 나를 따랐다. 곳곳의 화재로 인해 매캐한 연기가 폐부를 찔렀다.

나는 거칠게 기침하고는 가늘게 뜬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적의 가득한 여진어가 들렸다.

“죽어라!”

외침과 함께 골목에서 일단의 조선군이 튀어나왔다. 그들은 쫓기고 있었다. 우리를 발견하자 반색하며 곁으로 달려들었다.

그 뒤를 쫓아오는 여진족 전사 몇몇들. 다들 크고 작은 상처를 입어 마치 다친 야수들처럼 보였다.

나는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드드득…….

여진족 전사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무리를 발견하고는, 기겁하며 물러났다. 하지만 죽음을 피하기엔 늦었다.

-탕!

폭음과 함께 화살이 쏘아졌다. 전사의 가슴에 대살이 턱, 하고 파고들었다. 뒤이어 몇 발의 화살이 연이어 박혔다.

주변의 다른 적군들도 비슷한 몰골이 되었다. 뒤늦게 등을 보인 자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들은 가슴 대신 등판에 화살이 꽂혔다.

우리는 골목과 골목을 질주하며 조선군들을 구원했다. 지휘관들이 후방에 남아 직무유기 중인 탓에, 대부분은 체계도 없이 난전을 겪고 있었다.

‘이러니 아직까지 점령하지 못했지.’

거리 곳곳에서 무의미한 희생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수효가 많지는 않았으나, 이해관계 없는 이역만리 타지에 끌려와 무능한 지휘관들에 의해 목숨을 다한 광경은 하나하나가 불쾌한 것이었다.

그렇게 일각 여를 질주하니 조선군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주변을 한 바퀴 더 돌았지만 마찬가지였다.

나는 목에 걸고 있던 호각을 입에 물었다.

-휘리리리릭!

호루라기 소리가 전장을 울렸다. 뒤이어 곳곳에서 호각이 울었다. 전장 전체에 신호를 전달하기 위함. 당연하지만 이탈 신호였다.

나는 기수를 반대로 돌려 내달렸다. 이제 도망 중인 자들은 여진족들이었다. 좌, 우군의 이탈이 끝나서인지 목책 너머에서 불화살을 날려대고 있었다.

‘성급한 놈들.’

아직 아군이 남아있는데 활질이라니. 실로 겁대가리 없는 만행이었다. 부하들 모두 중무장한 기수들이라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섬뜩한 광경이었다.

골목마다 겁에 질린 여진족들이 비명과 고함을 내지르며 도망치고 있었다. 이제 와서 저항하는 자는 없었다.

시위 당기는 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외쳤다.

“쏘지 마라! 저항하지 않는다면 죽이지 않는다!”

사격은 없었다.

한창 빠져나가는 중, 여인의 찢어지는 비명이 들려왔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돌아갔다. 곁을 지나쳐 빠르게 멀어지는 폐허 쪽이었다.

내가 들은 비명은 도망자들이 내는 것이 아니었다.

절박한 자 중에서도 극도로 절박한 자들만이 낼 수 있는 비명.

가볍게 고삐를 당기니 금세 곁으로 온 갑사 하나가 외쳤다.

“무슨 일이십니까!”

“먼저 이탈해라!”

“예?!”

“가라! 먼저 가 있어! 금방 따라가겠다!”

나는 기수를 돌려 폐허로 내달렸다.

부하 갑사들 모두 당혹한 시선으로 나를 지나쳐갔다. 하지만 멈춰서지는 않았다. 그들은 명령을 충실히 이했다.

뒤쫓는 이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을룡. 그리고 권율. 그들이라고 안전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시간을 낭비할 때는 아니었다.

내가 본 폐허는 불타오르고 있었다. 주위에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비명이 들려왔지.

“공자님, 피하셔야 합니다.”

곁에서 을룡이 권했다. 어느 때보다 진지한 표정이었다.

여진족들은 불타오르는 마을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정신없이 도망치고 있었지만, 우리는 소수고 그들은 많았다.

혹시라도 한두 사람이 복수심에 적의를 품는다면 단숨에 포위될 수도 있었다. 말에서 내리기라도 한다면 더더욱 위험했다.

하지만,

-털썩.

나는 안장에서 뛰어내렸다.

폐허의 앞이었다. 목재 건물은 반파된 채 불타오르고 있었다. 어느 누구도 남아있지 않을 것 같은 상황.

나는 외쳤다.

“거기, 누구 있나?!”

그러자 다시 찢어지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비명으로 한 번 들어본 목소리다.

“살려주세요!”

나는 즉시 폐허로 나아갔다. 불길과 매캐한 연기에 무엇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하나는 분명하다. 안에 사람이 있다.

-쾅!

기울어진 문을 힘껏 걷어찼다. 집이 기울어진 탓인가. 문은 열리지 않았다.

“첨정!”

권율이 뒤편에서 소리쳤다. 그는 사태를 짐작한 듯, 나를 제지하지는 않았으나 대신 칼을 뽑아 든 채였다.

주변에는 몇몇 여진족들이 도주를 멈추고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두 사람이 그러니 차츰 더 많은 사람이, 불타는 거리 한 가운데에 멈춰 섰다.

권율과 을룡은 위협을 느낀 듯했다.

“금방이면 끝나!”

나는 불타는 문에서 멀어졌다. 조금 더, 조금 더, 그리고 조금 더.

그리고 달렸다.

“비켜!”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쑥 들어갔다. 졸지에 나는 불타는 가옥 한가운데 몸을 던지게 됐다. 안에는 여진족 여인이 아이 하나를 껴안고 있었다.

“나와!”

서둘러 외쳤으나 여인은 애처로운 표정을 한 채 일어서지 못했다. 긴장 탓인가, 아니면 연기, 뜨거운 공기 탓인가.

어느 쪽이건 당장 그녀가 힘을 쓸 수 없다면 도와줘야 했다. 잠깐 안에 들어섰다 뜨거움에 도망치듯 나왔음에도, 나는 다시 가옥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함께 나가려는 순간

-꽈득! 꽈가각!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집이 주저앉았다. 천장은 반쯤 내려앉았고…… 위쪽 문틀이 내려와 한중간에 끼었다.

몸을 숙이더라도 지나가기엔 틈이 좁았다. 힘이 빠진 여인을 데리고서 함께 나가기에는 더더욱.

“공자님!”

을룡이 다급히 외치며 달려왔다. 그러나 그가 와도,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았다.

나는 여인의 품에서 아이를 뺏어 틈으로 밀어냈다. 체구가 작아 좁아진 틈으로도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을룡은 어쩔 수 없이 아이를 받아 안았지만 시선은 여전히 나를 향한 채였다. 어쩔 줄 몰라하면서 말이다.

“흐!”

나는 묵은 숨을 토해냈다. 그동안 참았던 호흡이 풀리며, 뜨거운 공기와 매캐한 연기가 폐를 찔러댔다.

정신이 아찔해지는 감각. 화재로 인한 사망은 대부분 호흡곤란에서 온다던가. 나는 이를 악문 채 문틀을 가로막은 장애물을 밀어냈다.

불타오르는 가옥의 일부였던 나무기둥은 당연히 무척이나 뜨거웠다. 지지는 듯한 격통이 손바닥을 쥐어뜯었다.

“으아아아!”

젖 먹던 힘까지 다하니, 뒤틀리는 소리와 함께 장애물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쑥, 하고 빠졌다.

나는 다시 여인의 팔을 잡고서 폐허를 빠져나왔다. 분명 불타오르는 마을 한가운데인데 호흡마다 청량감이 느껴졌다.

“후욱, 후욱!”

“공자님, 괜찮으십니까!”

“나가자. 탈출해야 한다.”

“예! 권 공(公)! 여인을 맡으십시오!”

을룡의 부름에 권율은 사태를 응시하던 자들을 마주한 채 뒷걸음질로 물러나다, 곁으로 다가와 여인을 부축했다.

그렇게 셋이서 폐허를 등지기 무섭게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불똥이 사방으로 튀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불타던 집은 완전히 쓰러져, 이제는 폐허도 아닌 거대한 모닥불이 되어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지친 몸을 이끌고 말에 다시 올라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을룡과 권율이 각각 아이와 여인을 맡은 상태로 다른 사람의 도움을 구할 상황이 아니었다.

가까스로 말에 올라타니, 용케도 구경하던 여진족들은 다 도망가고 없었다. 집이 무너지는 광경에 현실을 깨달은 듯했다.

나는 힘없이 박차를 가했다. 이번에는 을룡과 권율이 선두가 되어 앞을 뚫었다.

“판관!”

무너진 목책을 넘어서니, 밖에는 김자강과 여진족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찌 이리도 늦으셨습니까! 혹시라도 문제가 생긴 줄 알았습니다!”

“괜찮습니다.”

김자강의 시선이 을룡과 권율에게 향했다. 각자 아이와 여인을 맡고 있었다. 상황을 짐작하기 쉬운 광경이라 김자강은 한숨을 흘렸다.

“어찌 토벌해야 할 자들을 목숨 걸고 지키셨습니까? 살아남더라도 노예 노릇 이상은 못할 터인데!”

“그래도 살겠다고 도움을 바라는데, 이 사람이 어찌 지나칠 수 있겠습니까?”

나의 답에 김자강은 더 따지지 못했다. 그 역시 여인과 다르지 않은 이유로, 자신과 부족민들을 구원받은 처지였다.

“……돌아갑시다.”

좌, 우군 지휘부에 도착하니 다들 걱정과 환호 섞인 목소리로 나를 반겨주었다. 당연하지만 그중 압권은 소흡이었다.

“이 공! 내 그대의 귀환이 늦어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는가?!”

“심려를 끼쳐드려 송구합니다.”

“됐네. 성히 돌아왔으니 다행이야. 다음에는 몸을 사려가며 행동하게. 여기서 생을 끝내기에는 아쉬운 사람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소흡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물었다.

“부족민들은 확보되었습니까?”

“그래. 족히 천 명은 될 걸세. 우리는 엄청난 승리를 거뒀네. 과거의 원정을 모두 통틀어도 천 명에 달하는 포로를 잡은 적은 없으니까.”

“다행입니다.”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군.”

“족장들에게 맡기십시오. 그들이라면 기뻐하며 포로를 수용할 겁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노비로 쓰겠지만 말입니다.”

“놈들이 그걸로 만족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네.”

천 명에 달하는 포로를 도성까지 이송하는 것도 어렵지만, 데려간 후에도 문제였다. 처분할 길이 마땅치 않으니까.

과거 율호의 원정 때도 확보된 포로들을 족장들에게 나눠버린 적이 있었다.

고작 천 명의 공노비를 전국에 흩뿌리고자 갖은 고생을 감수하는 것보다야, 골칫덩이를 처분함과 동시에 용병 노릇을 한 여진족들에게 삯 치르는 것이 나았기에.

“자네……. 손을 많이 다쳤군!”

소흡이 경악하며 외쳤다. 그의 시선은 뒤늦게 나의 손을 향해 있었다.

“괜찮습니다. 물집이 생긴 다음에는 고생 좀 하겠지만.”

“미리 처치해두어야 고생이 덜한 법일세. 먼저 회령으로 가서 치료를 받게. 곧 따라가겠네.”

“음. 알겠습니다.”

소흡은 반쯤 나를 쫓아내다시피 했다. 지휘부에서 물러나니 피로에 절은 수많은 병사들과, 포로가 되어 한곳에 모여 앉아 절망하는 효정의 부족민들이 스쳐 지나갔다.

가벼운 처치 후 나는 안장에 올라탔다. 손이 아직도 후끈거렸다.

“이 공, 이제야 정신이 돌아와서 하는 말이네만. 어찌 위험천만한 만행을 벌이셨는가? 혹시 죽기라도 한다면 어쩌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살고 싶다며 도움을 바라는데 지나치고 싶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런 말하긴 미안하지만 자네 손에 죽은 여진족이 한둘이 아니야. 그런데 고작 여인네와 아이 하나를 구하고자 목숨까지 걸다니?”

“…….”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건 아니겠지.”

권율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수백 명이 죽고 다쳤습니다. 고작 어미와 딸 두 사람을 구한다고 의미가 있겠습니까. 살고 싶다니 살려주었을 뿐이지요. 해야 할 일은 끝났으니. 하고 싶은 일을 했을 뿐입니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가볍게 박차를 가했다. 권율은 더 이상 따지지 않았다. 세 사람이 들판을 가로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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