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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82화 (82/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82화

28. 맥박하는 전율 (2)

기마 갑사들은 모두 시위에 화살을 건 채였다.

-쉬시시시식!

위협적인 뱀 소리와 함께 나의 머리 위로 화살이 가로질렀다.

나의 시선은 자연스레 뒤편으로 향했다. 정신없이 나와 부하들을 쫓고 있던 적군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말의 비명, 사람의 고함. 기수와 짐승이 한 덩어리가 되어 벌판을 굴렀고 먼지를 피어올렸다.

부하들은 털옷을 벗은 채 조선군과 똑같은 원색의 갑주를 드러냈다. 그것으로 피아구분을 하고 있었다. 곧 조선군과 여진부족 연합군이 효정군과 뒤엉켰다.

말과 말이 부딪히는 폭음이 전장을 울렸다.

“공자님!”

전장을 가로지르며 달려오는 자가 있었다. 을룡이었다.

그는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내가 움켜쥔 어깻죽지를 보더니 입술을 말았다. 을룡은 옆에 이르러 입을 열었다.

“고, 공자님.”

을룡은 고개를 푹 떨구며 말을 늘어뜨렸다.

“송구합니다…….”

“됐다. 상처를 처치해야 하니, 바짝 붙어서 나를 지켜라.”

“알겠습니다.”

나는 언덕을 조금 넘어가서야 말을 멈춰 세우고, 털옷을 벗었다. 그러자 상처가 완연히 드러났다.

자상에는 털옷의 털들과 피가 엉겨 끈적끈적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팔은 움직이는데 문제없었지만 그럴 때마다 격통이 느껴졌다.

“흐!”

나는 이 사이로 고통을 흘려내고는, 안장에 묶어둔 주머니에서 붕대를 꺼냈다. 일단은 붕대로 손끝을 감고 상처의 이물질을 긁어냈다.

“윽!”

노출된 상처가 잠깐 쓰라리더니 피가 울컥 흘러내렸다. 나는 여전히 이를 꽉 문 채, 붕대를 을룡에게 건넸다.

을룡은 떨리는 손으로 나의 상처를 감쌌다. 묵직한 압박감과 함께 점차 출혈이 잦았다. 새하얀 천에 퍼진 핏물 자국은 더 번지지 않았다.

응급처치가 끝나자 나는 언덕 아래, 전장으로 복귀했다. 싸움은 이미 막바지였다. 극소수의 적병만이 남아 무의미한 저항을 이어가고 있을 뿐.

나는 오사를 피하기 위해 활을 내렸다. 여기서 나의 역할은 이미 끝났다.

“판관!”

김자강이 다가왔다. 그의 뒤로 면식 있는 족장 몇몇이 함께하고 있었다.

“판관의 승리입니다. 경하드립니다.”

모두들 무척이나 즐거운 표정이었다. 그들은 전장에서 자신의 용기와 무예를 증명해보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부족의 존속을 이뤄냈다.

효정이 무리한 추격으로 주력과 함께 이곳에서 전멸한 이상, 빈집이 되어버린 본거지가 조선군 과반인 좌군을 당해낼 수는 없으리라.

“이 사람만의 승리가 아닙니다. 모두의 승리지요.”

“아닙니다. 이 승리는 판관의……. 판관?”

김자강의 시선이 나의 어깨로 향해 있었다. 털옷의 털과 피가 새카맣게 엉겨 있었다.

“깊지 않은 상처입니다.”

나는 털옷을 들어 이미 처치가 끝났음을 보였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이번 전투가 아무리 중요하다고는 해도, 판관만큼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앞으로 더 큰일을 해내셔야지요.”

“나에게는 내 사람들을 지키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짧은 대화가 이루어질 동안.

조선인 무관이 다가왔다. 그는 나의 역습을 돕기로 한 아군의 지휘를 맡은 자였다.

“첨정 나리.”

그는 전신에 피를 묻힌 채였으나,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남들이 본다면 기겁할 모습이었으나 전장에서는 적의 피를 뒤집어쓴 것이야말로 군인의 제복이다.

“승리를 경하드립니다.”

“아, 이건 제 승리가 아닙니다. 첨정의 승리지요. 그보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번 전투에서 아주 중요한 전리품을 얻었습니다.”

“전리품이요?”

“예.”

무관은 따라오라는 듯 기수를 돌렸다. 그를 쫓아가니 익숙한 사람 하나가 죽은 말에 기대 거칠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후욱, 후욱…….”

그는 인기척을 느끼고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그러고는 가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냐는 듯.

이런 시선의 대화라면 한 차례 나눠본 적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효정은 웃었다.

“흐흐흐…….”

“이렇게 될 줄은 몰랐겠지. 하지만 무용만큼은 인정한다.”

“얕은 수작으로 나의 부족을 파멸로 몰아넣고는 무엇을 인정한단 말이냐? 승자로서의 우월감을 당당하게 만끽해라. 변명하지 말고.”

“적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건 나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지.”

“……틀린 말은 아니로군.”

효정의 상태는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렵사리 말을 이어갔으며, 사이사이 기침을 할 때마다 피가 가슴에 튀었다.

겉으로는 멀쩡한 것을 보니 낙마한 것 같았다.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진탕된 상태라면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

효정은 담담했다. 운명을 직감한 사람처럼. 애초에 자신의 운명을 거부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지만.

죽음 앞에서 냉정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는 나의 적이었지만 그 전에 전사였다.

“원하는 게 있나?”

“죽어가는 자가 무엇을 바라겠나.”

“적어도 죽을 방법을 고를 수는 있겠지.”

“……그렇다면 네가 직접 나를 베어라. 이렇게 비참하게 죽느니, 차라리 적수에게 죽는 편이 낫겠지.”

“좋다.”

나는 환도를 뽑았다. 효정을 고통스럽게 할 생각은 없었으므로, 단칼에 심장을 베기로 했다. 가슴에는 흉골이 있지만 그것이 일격을 막아낼 정도로 강하지는 않다.

“…….”

주변의 사람들은 조선인, 여진족 가릴 것 없이 잔뜩 긴장한 채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하지만 시선은 여전히 나와 효정을 향한 채였다.

그 속에서 나는 환도의 손잡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리고.

-카각!

뼈 긁는 소리와 함께 환도가 효정의 가슴을 가로질렀다. 깊숙한 자상이었으며 피는 한 번 울컥 쏟아지고는 더 흐르지 않았다.

효정은 감은 눈을 다시 뜨지 않았다. 고개는 옆으로 축 늘어진 채였다.

모두가 침묵했다.

그가 평소에 어떤 자였건 나는 그를 존중한다. 우리는 서로의 사람을 지키고자 목숨을 걸고 싸웠고, 한 사람만 살아남을 수 있는 상황에서 내가 운 좋게 살아남았을 뿐이다.

“여기서 일은 끝났습니다. 이제 좌군을 도우러 갑시다.”

나는 털옷을 벗어 효정의 얼굴과 상체를 덮었다. 여진족은 죽은 이가 해와 하늘을 보지 못하게 한다. 그것이 전통이고 의례였다.

무덤을 만들어줄 상황은 아니지만 이 정도는 해줄 수 있겠지.

내가 발을 돌리자, 무관이 쫓아와 물었다.

“수급은 취하지 않으시렵니까?”

“아니 취합니다.”

“하지만…….”

“만약 공의 말씀대로 이 승리가 저의 승리라면, 전리품을 어떻게 취할지도 저의 권리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무관은 주변 사람들에게 외쳤다.

“다들 물러나라! 이제 좌군을 도우러 갈 때다!”

이에 병사들은 굳은 표정으로 각자의 전마로 향했다. 조선군 병력은 먼저 무관이 이끌고 출발했다.

남은 사람은 나와 을룡, 여진족, 역습 이후 나에게로 돌아온 휘하 갑사들.

마지막으로 권율.

그는 무척이나 긴장한 채였다. 아직까지도 습격을 당한 순간의 공포를 떨쳐내지 못한 듯 보였으나, 정작 쓰러진 효정의 곁에는 그가 있었다.

다른 사람이 효정을 낙마시킨 것일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렇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우리는 한 번 더 싸우러 갑니다. 피곤하시면 후방에서 쉬고 계시지요. 멀지 않은 곳에 군영이 있습니다.”

소흡의 조처로 김자강의 부족 인근에 군영이 철거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이미 부상자들은 분류되어 해당 군영으로 이송되었다.

“아니. 아닐세. 첨정이 계속 싸운다는데 어찌 나라고 쉴 수 있겠나?”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만.”

목숨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없다. 하다못해 자신의 이익이 걸리지 않은 전장에서라면.

효정은 거대해진 부족의 존속을 위해 인근 부족을 흡수, 노예화하려 했다. 김자강 등의 족장들은 살아남기 위해 저항했다.

조선은 효정이 더욱 강해질 것을 우려했다. 선조의 공명심도 크게 작용했겠지만.

나는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을 지키고자 싸운다. 족장들에게 갚아야 할 빚 따위는 없지만, 절박한 상황에 처한 그들이 믿을 사람은 오직 나뿐이었다.

하지만 권율이나 을룡은 아니다. 이건 그들의 싸움이 아니었다.

“너도 쉬어. 피곤해 보이는데.”

내가 을룡을 바라보며 말하자, 녀석은 기겁하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제 역할을 전혀 다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저만 돌아갈 수 있겠습니까?”

“너는 살아있는 게 역할을 다하는 거야.”

“설령 죽더라도 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게 될까 두려워 그렇습니다.”

“정 각오했다면.”

“감사합니다.”

을룡이 고개를 숙였다. 이제 나의 시선은 권율에게로 향했다.

그는 단호하게 답했다.

“아버지께서는 공을 도우며 보다 넓은 세상을 배우라고 하셨지. 이 순간 나는 그 어떤 때보다도 넓은 세상을 느끼고 있네. 여기서 발을 돌리고 싶지는 않아.”

“음.”

두 사람은 개전부터 나와 함께 서기를 원했다. 지금이라고 생각이 달라지지 않은 것은, 특별한 일이라고도 할 수 없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럼 갑시다.”

* * *

우군의 진격은 나의 유인과 역습, 좌군의 합류와는 별개로 진행되었다. 그래서 진즉 효정의 본거지를 쳤으리라 기대했으나…….

현장에서는 반쯤 공성이 벌어지고 있었다.

‘개판이로군.’

목책 너머에서 끊임없이 병장기 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저항 중인가?

조직적인 저항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적장과 주력이 자리를 비운 상황이다. 사실상 빈집.

그럼에도 원정군 주력인 우군이 고전 중이라는 건 터무니없는 상황이었다.

“이 공(公)!”

“영감.”

소흡은 지휘관들과 함께 전장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각자 다급한 표정이었지만 목숨을 걸어볼 정도는 아닌 듯했다. 이런 순간에야말로 모범을 보여야 할 소흡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유인은 어떻게 되었나? 적들의 본거지는 아직도 항전 중이라네!”

난항에 부딪힌 이유를 나에게서 찾는 건가.

나는 단호히 답했다.

“효정은 죽었습니다. 그가 직접 이끌었던 수백의 기마대 역시 궤멸되었지요. 좌군이 합류한 시점에서 승기는 기울었으리라 기대했습니다만.”

“…….”

소흡은 입을 닫았다. 그의 기대와는 달리, 나의 성과는 분명하고 또 확실했다. 구차하게 변명을 시도하려던 것이 도리어 소흡을 부끄럽게 한 것이다.

“무의미한 소모전은 안 됩니다. 전황이 좋지 않다면 군대를 물려 주변을 포위하고 화공에 집중하십시오. 그럼 항복이라도 받아낼 수 있을 겁니다.”

“음!”

소흡은 별다른 수가 없었는지 침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전장을 보니 흩어지는 부족민들이 즐비했다. 조선군은 격렬한 저항에 그들을 쫓지도 못하고 발만 묶여 있었다.

실로 부끄럽기 짝이 없는 광경이었다.

소흡은 고개를 돌려 근처의 전령에게 시선을 보냈다. 전령은 즉각 ‘나’의 명령을 전달하기 위해 적진으로 달려나갔다.

이대로 구경만 해도 전장의 흐름에는 진척이 있겠지만…….

‘구경만 할 수는 없지.’

나는 손짓 한 번으로 여진족들을 이끌었다. 내가 향하는 곳은 효정의 거점.

전쟁에서 피해는 주로 추격을 당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조선군이 전장을 이탈하는 과정에서 저항군들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두두두두!

강렬한 말발굽 소리가 하늘을 울렸다. 전장에서의 싸움이 일순 멎은 듯했다. 마치 모두가 이쪽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진입로인, 무너진 목책이 코앞에 다다르자 나는 휘하 병사들에게 외쳤다.

“우군이 모두 전장을 이탈할 때까지 자리를 지켜라! 혹시라도 좌, 우군 병사들보다 먼저 전장을 벗어나는 자가 있다면 내가 친히 목을 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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