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81화
28. 맥박하는 전율 (1)
“효정은 저희들이 판관의 지휘를 받고 있으라곤 생각지도 않고 있었군요. 애초에 조선이 이렇게까지 빠르게 반응한 것부터가 예상외인 듯합니다.”
“한기의 무능함만을 믿고 있었나 보군.”
족장들이 효정의 압박에서 벗어나고자 나의 이름을 팔았다지만, 효정은 무시했다.
정상적인 반응이다.
회령이나, 하다못해 일대에서 관직을 지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조정에서 요직을 지내는 것도 아니었다. 판관에 불과했던 전직 관리를, 도성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여진족 사회의 강자가 두려워할 이유가 있나?
하지만 그게 실책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불운이겠지.
하필이면 그 전직 관리가 돌아와서 병마절도사도 구워삶고, 조정에 영의정이라는 끈도 있어서 아예 원정을 일으킬 줄 누가 알겠나?
똥이라도 밟은 심정이겠지만 이게 세상 살아가는 맛 아니겠나. 이따금 쓴맛도 봐야지. 앞으로는 어떤 맛도 느끼지 못하겠지만…….
“멀리도 달려왔군. 하마터면 놓칠 뻔했어.”
지평선 너머, 강이 흐르는 저지대에 목책을 낀 커다란 마을이 있었다. 도망자가 본거지가 아닌 다른 곳으로 달리지는 않았겠지.
생각지도 못하게 전속전력을 해서인지 우리는 금세 적의 본거지에 다다랐다.
듬성듬성 피어오르는 연기들, 본거지 주위로 빼곡히 개간된 들판들. 목제 건물들이 대다수였으나 외곽에는 천막으로 된 집들도 즐비했다.
“물러나서 반 각 정도 쉬다가, 적들을 유인합시다.”
나는 기수를 돌렸다. 휘하의 병사들은 뒤편을 바라보며 침을 꼴깍 삼키고는 나를 뒤따랐다.
우리는 만일을 대비해 말에서 내리지 않은 상태로 휴식을 취했다. 전마들 역시 게거품은 전부 걷어낸 채로 여유롭게 들판의 풀을 뜯었다.
나는 말의 허리를 가볍게 쓸었다.
달콤한 시간은 언제나 잠깐이다. 휴식은 끝났다. 나는 가볍게 박차를 가하고서 병사들 사이를 돌았다.
“다들 무장해라. 그리고 각오해라. 적들이 조선군의 도하를 인지한 이상, 저들이 본거지를 비우고 나오게 만들기란 쉽지 않다.”
“…….”
“하지만 방법이 없지는 않다. 도발을 당한 적들이 우리를 쫓아내고자 일군을 내보내면, 목숨 걸고 싸우면 된다. 고작 헛발질로는 어찌할 수 없음을 알게 되면 다음에는 힘 좀 쓰겠지.”
그때 저들의 병력을 유인해 역습하는 것이다. 여유가 있으면 한 번 더 물리치고서 다음 병력을 유인해도 된다.
하지만 목숨을 건 전투란 골수까지 빨리는 피로한 일이다. 그리고 효정의 군대가 그리 만만하리란 보장은 없다.
“역할 분담에 따라, 불화살을 제공할 자들은 횃불에 불을 붙여라.”
목책 밖에서 아무리 일반적인 사격을 해봐야, 저들에게 실질적인 피해를 줄 수는 없다. 효정이 우리를 제거해야 할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껴야 했다.
그러려면 화공이 최선이다. 천과 목재 구조물이 많은 여진족 마을에 화공은 특히 치명적이다. 가만히 앉아서 모두 타죽을 생각이 아니라면 군을 내보내겠지.
나의 명령에 병사들이 기름에 절여놓은 횃불을 꺼내 각자의 부싯돌로 불을 붙였다. 화륵. 그들은 돌아다니며 각자의 불화살에 불을 붙여줄 거다.
원래는 화등잔을 쓰거나 기름으로 어딘가에 불을 붙여놓는 편이 훨씬 편하지만…….
유격하는 상황이라 구조물은 쓸 수 없다. 바닥에 불을 붙여도 말에 탄 상태로는 쓰기 힘들다. 불편하지만 지금은 이게 최선이다.
“한 번 들어가면 퇴각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도망칠 수 없다. 그러니 자신 없는 자는 지금 돌아가도 좋다.”
“…….”
돌아가는 자는 없었다.
“다행이로군.”
나는 손바닥을 들었다가, 효정의 부족에게로 향했다. 이에 여진족 병사들은 시위에 잰 화살에 불을 붙이며 차례대로 언덕을 내려갔다.
그 광경을 끝까지 볼 필요는 없었으므로 나 역시 화살에 불을 붙이고서 적진으로 달렸다.
세찬 풍압이 얼굴을, 그리고 화살촉을 때렸지만 기름 먹인 천을 두른 화살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일대에는 이미 소란이 벌어지고 있었다.
저들은 정탐을 미리 파견했으나 우리의 존재는 전해 듣지 못했으며 외곽을 지키는 소수의 초병으로는 사방으로 내달리며 접근하는 기수들을 막을 수 없었다.
-팡!
익숙한 파공과 함께 화살이 마을로 날아갔다. 주변에서도 바삐 불화살을 날려대고 있었다.
한평생 말 위에서 살아온 여진족들은 자신의 기마술을 자랑이라도 하듯, 서로를 향해 달려들며 불을 옮기고는 흩어져 다시 적에게로 화살을 날려댔다.
그야말로 곡예와 같은 광경.
천막에 불이라도 붙었는지 화염이 높게 치솟았다. 안에서는 비명과 고함이 즐비했으며, 곧 수많은 사람의 긴급한 인기척이 들렸다.
“전투 준비! 전원 전투를 준비하라!”
나의 짐작이 맞았다. 목책의 입구가 세차게 열리더니 상당한 수의 여진족이 몰려나왔다. 그러나 무기나 승마 상태를 가리지 않는 잡병들이었다.
여진족들은 기본적으로 전사들이지만, 준비도 편제도 없이 급히 나와서인지 일방적으로 사냥당할 뿐이었다.
이따금 위협적인 유시를 쏘기도 했으나 그뿐이다. 철궁을 통한 즉각 보복에 활을 들고서 까불던 자들은 두 번 다시 시위를 당기지 못했다.
“방심하지 마라! 아직 적의 본대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의 외침이 부름이라도 된 것일까.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여진족들 사이로 일단의 군대가 나타났다. 부족민들이 시간을 벌어준 덕인지 전원 승마한 채 곡궁과 곡도로 철저히 무장한 상태였다.
선두는 특히나 굳센 인상의 전사였다.
나의 곁으로 김자강이 다가와 아뢨다.
“저 험상궂은 놈이 효정입니다.”
“용케도 직접 나섰군.”
효정은 곧 나를 발견하고는 오만한 미소를 지었다. 마주친 시선에는 업신여김까지 느껴졌다. 그가 외쳤다.
“도대체 어디서 굴러온 놈인지는 모르겠으나, 커다란 전투에 앞서 사기를 고취할 제물이 되어주고자 직접 찾아왔구나! ……내 너의 목을 베어 제사상에 올려주마.”
겁대가리 없는 도발이었다. 놈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우리가 조선군의 첨병이라는 사실은 전혀 인지하지 못한 듯했다.
그렇다면 어울려주지. 뒈지기 직전까지는 말이야.
나는 친히 여진어로 답했다.
“네가 혀끝으로 벨 수 있는 건 오직 네 목뿐이다.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조만간 대가리와 몸뚱이의 생사이별이라는 게 무엇인지 알게 해줄 터이니.”
“하!”
효정은 재밌다는 듯 대소하곤 칼을 뽑았다. 그리고 즉시 박차를 가해 달려들었다.
당장이라도 베어들 기세.
나는 서둘러 기수를 돌렸다. 그와 함께 뒤편에서 효정의 기고만장한 외침이 들려왔다.
“입만 살았구나! 어디, 목을 베고도 끝까지 혀가 나불거리는지 한번 보자!”
나를 조금이라도 도발하고 싶은 모양인데 나에게는 목적이 있다. 이미 주변의 병사들도 기수를 돌려 도망치고 있었다.
혹 적들이 알아챌까 싶어 정해둔 신호 따위는 없었다. 모두 나의 움직임을 의식하라고만 했을 뿐. 한창 싸우고 있을 와중에 적이 아닌 다른 것에 신경을 쓰는 것은 가혹한 명령이다. 알고 있었지만 작전의 성공을 위해서라도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여진족 부하들은 잘 따라주었으며…… 그 노고가 아깝지 않게도 효정과 그의 군대들 역시 잘 쫓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바보는 아니겠지.
여진족들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는 호전적인 동족이지만, 그보다도 더 두려울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바로 조선의 원정군이다. 그 존재를 인지한 채 본거지를 비워둘 족장은 없다.
‘쐐기를 박아줄 필요가 있겠군.’
나는 활에 시위를 걸어 효정을 노렸다. 그는 어디 한 번 쏴보라는 듯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원한다면 해줘야지.
나는 시위를 놓았다.
-탕!
폭음과 같은 파공과 함께 빛살이 쏘아졌다. 효정은 즉시 곡도를 틀었다.
-챙!
귀 찢어지는 마찰음과 함께 효정의 몸이 휘청거렸다. 유능한 전사라면 정면으로 날아오는 화살이야 몇 번이고 쳐낼 수 있다. 어디까지나 평범한 화살일 때에는…….
효정은 고삐까지 놓아가며 자신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튕긴 화살이 그어버리기라도 한 것인지 그의 얼굴에는 사선으로 긴 자상이 나 있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으나 마침 그에게 해줄 말이 생각났다.
“못난 얼굴이 용케도 이뻐졌구나! 이참에 무기는 버리고 나의 밤 시중이나 한번 들어보는 게 어떠냐?!”
“……!”
효정의 면상이 찌그러졌다. 그는 더 이상 입을 놀리지 않았다. 대신 나를 노려보며 한껏 몸을 낮췄다.
한동안 견제를 피해가며 불화살을 날리느라 지친 나의 말과는 달리, 효정의 말은 무척이나 쌩쌩했으며 빠른 속도로 나를 따라잡고 있었다.
‘역습의 장소가 멀지 않았다. 조금만 더……!’
각오는 쉬운 법이다. 현실로 옮기는 것이 어려울 뿐이지.
세 발의 화살을 더 날렸으나 효정은 모조리 걷어냈다. 매 일격에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긴장과 부담감을 드러냈으나, 더 이상의 상처는 만들어내지 못했다.
그리고 네 번째 화살을 시위에 걸었을 즈음. 순식간에 가까워진 효정이 단숨에 곡도를 내질렀다.
-챙!
금속성 마찰음이 귀를 때렸다. 효정은 내 활의 재질에 놀라고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다시 곡도를 내질렀다.
-쨍!
여진족 족장의 자리란 거저 얻은 것이 아니었다.
놈의 일격을 가까스로 받아낸 손목이 저렸다. 거의 철궁을 놓칠 정도! 자칫 실수했다간 다음 일격에 목숨을 잃게 된다. 살얼음이 핀 듯 뒤통수가 싸늘하게 저렸다. 효정이 곡도를 내질렀다.
-크그그극!
깎아내는 소리와 함께, 곡도가 철궁을 타고 나의 목을 스쳤다. 풍압이 느껴질 정도로 위태로운 순간이었다.
“판관!”
멀지 않은 곳에서 김자강이 부르짖었다. 효정을 상대하느라 바빴던 나는 그제야 놈 주변을 재빠르게 훑었다. 익숙한 장소였다.
‘여기다!’
움푹 파인 지대. 그래서 사방이 언덕처럼 느껴지고,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곳.
절벽 아래나 숲속 샛길처럼 극적인 습격 장소는 아니었으나 대비하지 않은 자들에게는 치명적인 곳임은 분명했다.
“죽어라!”
효정이 외침과 함께 곡도를 내질렀다. 빛살 같은 찌르기. 철궁으로 걷어내고자 했으나 자세가 불편해 힘을 다할 수 없었다. 칼끝이 가슴께 갑주를 거칠게 긁다 푹하고 파고들었다.
“큭!”
나라고 고이 당해줄 생각은 없었다. 반대편 손이 막 동개에서 화살을 꺼낸 참이었다. 효정이 곡도를 회수하는 사이. 나는 화살을 내던졌다.
사람을 죽이기에는 무척이나 약했지만 적어도 말을 놀라게 하기엔 충분했다.
화살이 다트처럼 말의 목에 툭 박혔다. 그 순간. 곁에서 나란히 달리던 효정이 단숨에 뒤쳐졌다. 그리고 그의 비명 섞인 고함이 들렸다.
“이놈!”
효정의 말은 앞발을 높이 치켜든 채 거의 뒤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러나 효정은 가까스로 낙마하지 않은 채 말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나와의 거리는 엄청나게 벌어진 상황이었다.
원망과 증오 섞인 시선이 느껴졌다. 고작 잡스러운 짓거리로 목숨을 구차하게 연명하려 하느냐? 그가 굳이 입 밖으로 내뱉지 않아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멀찍이 떨어진 장소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당당하게. 마치 그가 그러했듯. 나는 말없이 시선으로 답했다.
‘아니.’
이건 결투를 회피하는 것이 아니다. 잡스러운 기술로 목숨을 연명하려는 짓거리도 아니지.
그 이상이야.
효정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쳐라!”
나에게는 무척이나 익숙한 조선어가 전장을 울렸다. 앞을 바라보니 붉은색, 파란색, 녹색의 갑주를 걸친 기마 갑사들이 두두두두 대지를 짓밟으며 언덕을 내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