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80화
27. 옛날처럼 (4)
강대해진 여진 부족은 항상 조선을 업신여겼고 때로는 침략해왔다.
단순히 눈에 뵈는 것 없는 야만족들이어서가 아니다. 이유는 단순하다. 식량 부족.
규모가 큰 집단일수록 소모되는 자원은 많아진다. 특히 식량이 그러했으며, 여진족이 사는 만주는 녹색 사막이라 봐도 무방하다.
땅은 메마르고 얼어붙어 개간에 드는 노력은 큰데 반해 소출은 적다. 때문에 수렵에 상당 부분 의존할 수밖에 없으나, 수렵이 제공할 수 있는 식량은 제한적이다.
결국, 생산할 수 있는 식량보다 소모되는 식량이 많아진다면 선택지는 많지 않다. 특히 이웃들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라면.
‘가난한 육진 지역들마저 여진족 기준에서는 부유한 곳이겠지. 어차피 효정은 제거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역사에서 여진족 골칫거리는 효정이 아니야…….’
니탕개.
내가 상대했던 율호, 그리고 내가 상대할 효정과는 달리, 니탕개는 정말 막강한 군세를 꾸려 조선을 대대적으로 침공했다.
그 규모가 가히 만 단위를 넘겨 조선은 한참이나 고전해야 했다. 나중에 팔천의 병력을 갖추어 보낸 다음에야 전란은 완전히 진압된다.
‘과연 니탕개는 이번 역사에서 어떤 행보를 보일까.’
효정과의 전투가 끝나는 대로 알아봐야겠군.
나는 허리춤에 찬 칼을 고쳐맸다. 여유는 나중에 부려도 되는 것이다. 일단의 군세가 강을 넘었고 정보력이 뛰어난 효정이라면 진즉 알아챘을 거다.
언제 지난번처럼 습격을 당할지 모른다.
“판관.”
밖에서 김자강이 불렀다. 그는 전속부관을 자처했다. 어중간한 조선인 하급 무관 따위가 여진족 지휘에 개입하는 것은 원치 않는다고 했다.
“무슨 일입니까?”
“함북 병사가 부릅니다.”
“바로 가지요.”
이미 한 차례 전언이 있었다. 회령에서도 작전을 수립하고 브리핑을 거쳤지만 전쟁에서 준비란 언제나 부족한 것.
소흡은 실제 상황에 돌입하기 전 다시 작전을 확인하기를 원했다.
평소에는 게으르면서 실전에서는 얼마나 성실한지. 이런 사람은 최대한 고생을 시켜야 했다. 그래야 지금처럼 밥값을 할 거 아닌가?
막사를 나서니 주변의 여진족 병사들이 예를 올렸다. 나는 연합 부족의 총 병력을 이끄는 지휘관이었다.
갑사의 병력 일부도 맡았으나 그들은 거리감 때문인지 여진족들과는 거처를 공유하지 않았다. 적어도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으니 다행이다.
잠깐 걸으니 금세 지휘부에 도달했다. 주변의 여느 막사보다도 훨씬 큰 막사가 중앙에 위치해 있었다.
입구의 천을 걷으며 들어서니 내부에는 이미 소흡과 몇몇 무장이 자리해 있었다.
“오셨나? 빈 곳에 자리하시게.”
나는 적당히 하석을 골라 앉았다. 이미 인사를 나누었으므로 나를 특별한 시선으로 보는 이는 없었다. 대신 시답잖은 잡담이나 나눌 뿐.
대부분은 함경도 험지의 수령으로서 가난한 조선인과 거친 여진족을 함께 다스리는 것이 얼마나 곤란한지에 대해서였다.
언젠가 다시 만나 술 한 잔 함께 걸치자는 공허한 약속도 빠지지 않았다.
그러는 와중 자리는 하나씩 찼다. 빈자리가 보이지 않을 때가 되어서 소흡이 입을 열었다.
“모두 알겠지만 이번 원정의 중요성은 전하께서도 친서를 통해 각별히 밝힌 바이네. 우리가 모두 전하를 대신해 여기에 자리한 것을 명심하고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게.”
“예.”
주변 사람들이 합창하여 답하자 소흡이 말을 이었다.
“다들 작전은 알고 있겠지. 하지만 수립된 작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이 공(公)의 역할이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로 모였다.
“이 공(公)이 여진족 부대로 적지에 진입하여 적병을 유인할 걸세. 만일 유인에 성공한다면 우군은 합류하여 상황을 정리하고 좌군은 적의 본거지를 장악하면 되네. 그게 가장 이상적인 상황이지.”
“…….”
“하지만 유인에 실패하거나 발을 묶는 데 실패한다면 양군의 군세를 합쳐 적의 본거지를 정면 돌파할 수밖에 없다.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힘 싸움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으니, 미리 각오들 해두게.”
소흡이 단호히 말했다.
물론 예상은 호의적이지 않다. 효정이 우리의 존재를 인식한 만큼, 호락호락 유인책에 당할지 의문이니까.
그럼에도 적의 병력은 어떻게든 빼내야 한다.
혹 적들이 근거지에 처박힌 채 요새화한다면 제압하는 과정에서 지리멸렬한 소모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아군의 피해는 최대한 지양해야 하는 것.
반대로, 적은 시간이 허비될 동안 모두 대피해 실질적 피해는 주지 못하게 된다.
설령 모든 가옥과 밭을 파괴하더라도 부족민을 확보하지 못하면 효정은 다시 일어설 터. 이 역시 최악의 상황이다.
그만큼 원정에서 나의 역할이 중요했다. 성패의 명운이 나의 손에 달렸다 봐도 과언이 아니다.
“다들 진격로는 숙지하고 있겠지. 그것까지 일일이 다시 되짚을 필요는 없기를 바라네. 자리가 파하는 대로 각자 부대를 무장시켜두고 진격 명령을 기다리도록.”
“영감.”
무장 하나가 소흡을 불렀다.
“무슨 일인가?”
“군영은 해산시킵니까?”
“아니. 최소한의 병력만 남기고서 유지한다. 어떤 상황이 발생할지 모르는데 굳이 해산시킬 이유는 없지.”
회령에도 주둔지는 있었지만 강 하나를 넘어가야 한다. 일어나서는 안 되는 상황이지만 추격당하는 와중에 도하는 전멸을 자초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만일을 위해서라도 몸을 피신하고 군을 재정비할 수 있는 방어 거점은 필수적이다.
“그럼, 이만들 일어나도록.”
소흡이 의자를 빼며 일어나자 무장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파와 함께 지휘부 막사에 나온 나는 즉시 부대를 찾았다. 여진족들은 항상 무장 상태였지만 갑사들은 달랐다.
“나리.”
쉬고 있던 갑사들은 나를 발견하자 일어나 예를 표했다.
“전원 무장하고 진격 준비하게. 다른 부대들보다 먼저 출발해야 하니 서두르도록. 주둔지는 해산시키지 않고 남긴다.”
갑사들은 즉시 흩어졌다. 그동안 여진족 부대들을 규합하니, 때늦지 않게 모였다.
소흡은 전령을 보내 먼저 출발할 것을 명령했고 나는 부대의 선두에 서서 가볍게 박차를 가했다. 뒤로 수백 명의 기수가 나를 쫓았다.
적들을 유인할 작전은 히트 앤 런이다. 달리 말해 일격 일탈.
한 번 적을 꾀어내면 여진족 족장들이 추천한 장소에서 역습할 계획이었다. 지대가 움푹 파인 장소로 시야 확보가 쉽지 않은 장소다.
적들이 아군의 증원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늦은 상황이다. 그러니 한 번만 걸린다면…….
“이 공.”
곁에서 함께 달리던 권율이 문득 불렀다. 그의 시선은 저 멀리 지평선을 향해 있었다. 거기에 몇 명의 소속 불명 기수들이 우뚝 서 있었다.
나는 손을 들었고 일단의 군세는 멈춰 섰다.
“다들 활을 꺼내라.”
적지인 이곳에서 마주하는 십 중 구 할은 적이다. 마침 저들 역시 활을 꺼내고 있었다.
정체를 파악할 필요는 있지만 선제공격을 방비할 필요도 있었다. 나는 패를 갈라 좌우로 흩었다.
두 군세가 우회기동을 하는 사이 나는 정면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여진어로 외쳤다.
“정체를 밝혀라! 즉시 답하지 않으면 공격하겠다!”
저들은 고이 대답해주는 대신 기수를 돌렸다. 도망칠 생각인가.
초면에 대뜸 공격부터 하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제는 도망치려 한다는 점에서 나는 그들이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이 됐건 효정에게 보고될 필요는 없었다.
“제압하라!”
나의 외침에 양측으로 흩어진 군세에서 단숨에 화살을 날려댔다. 양편에서 쏟아지는 화살은 그야말로 십자포화였으며, 적들은 칼 맞은 수숫단처럼 우수수 낙마했다.
하지만 모두가 일격에 절명한 것은 아니었다.
외곽의 동료들을 방패 삼아 살아남은 세 명의 기수가 빠르게 멀어졌다. 나는 박차를 가했다.
“하! 달려라!”
곧 풍압이 얼굴을 때렸다. 여기 벌판을 이처럼 시원하게 달려본 적이 언제였던가?
놈들은 어지간히도 담이 있었다. 산발적으로 화살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허리를 돌린 채 이쪽으로 화살을 재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화살을 재고 있었던 나로서는 빠르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서둘러 시위를 놓았고,
-팡!
적 역시 시위를 놓는 순간 활을 크게 휘둘렀다.
-콱!
둔탁한 소리와 함께 화살 하나가 활대에 걸려 떨어졌다. 정면으로 들어온 것이라, 혹 맞기라도 한다면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던 일격.
하지만 적은 나처럼 운이 좋지 못했다.
화살을 피하고자 몸을 틀긴 하였으나 그대로 낙마했다. 달리는 말 위에서 떨어진 그는 한참이나 데굴데굴 구르다 미동이 없어진 채로 나의 곁을 지나갔다.
그사이 도망하던 이 하나도 낙마했다. 유시가 말에게 꽂힌 것인지 달리던 말이 갑자기 멈췄고, 그대로 굴렀다.
수백 kg의 체중을 가진 말과 한 몸이 되어 구른다면 결말은 빤하다. 전신의 뼈가 모두 박살 나 장기와 근육을 찢어놓겠지.
살아남을 수 없는 치명타였고 그 역시 말과 함께 미동 없는 채로 곁을 지나갔다.
‘이제 하나…….’
놈은 추격을 뿌리치고자 활을 꺼내는 오만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화살을 피하고자 몸을 바짝 숙인 채 말에 붙어 달리고 있었다.
주변에서는 화살을 계속해서 날리고 있었으나 놈은 그야말로 기마술의 신기를 보이고 있었다.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을 지그재그 움직임으로 능숙하게 피해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거리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빌어먹을 놈.’
동개에서 시위에 화살을 꽂았으나, 맞출 확신이 없었다. 그렇게 도망치는 토끼처럼 좌우로 내달리는 놈의 등판을 겨냥했다.
-팡!
파공과 함께 화살이 번개처럼 쏘아져 나갔다. 직격이었다. 어깨에 깊숙이 박히다 못해, 관통된 화살은 분명 치명상이었다.
하지만 즉사에 다다를 정도는 아니다. 적은 고통에 몸부림쳤으나 말발굽은 멈추지 않았다.
‘제기랄!’
다시 시위를 거는 동안, 곁에서 화살 하나가 쉭 날아갔다. 오른편이다. 권율이다. 그가 맞출 수 있을까?
반신반의한 마음에 동개의 새 화살을 챙겼으나, 헛짓이었다. 적의 등이 활처럼 휘었다. 직격이다. 의식을 잃었는지 축 늘어졌다. 놈의 말은 더 이상 달리지 않았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이 멈췄다. 나와 수많은 병사들이 최후의, 그리고 실패한 도망자를 에워쌌다.
“아직 살아있습니다.”
여진족 병사 중 하나가 말했다.
의외였다. 도망자의 어깨는 화살이 꿰어져 있었고 등판 한중간에도 화살이 얕게 박혀 있었다. 각기 나와 권율의 작품이다.
하지만 치명상으로 따지자면 후자가 더 심각했다. 척수가 다치면 보통은 죽음, 최소가 하반신 마비이기에.
“끌어내게. 아직 숨이 붙어있을 때 심문해야지.”
“예.”
병사들은 도망자를 안장에서 끌어냈다. 그리고 양팔을 구속해 일으켜 세웠다. 정신은 나간 채였으나 깨우는 건 어렵지 않을 거다.
나는 한 차례 고문 기술을 선보였던 김자강을 바라보았다.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도망자에게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