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79화
27. 옛날처럼 (3)
며칠 뒤.
조정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나는 쓸데없는 분란은 만들지 않기 위해, 객사에 남아있었다.
외부인은 제법 오랫동안 감영에 남아있었다. 무슨 잡다한 소리를 하는지 궁금했으나…… 소흡에게 물어보면 답해주겠지.
깍지 낀 손을 뒷머리에 대고 누워있으니 잠이 솔솔 왔다. 조만간 실컷 고생할 예정이니 지금은 느긋하게 쉬어두는 것이 좋았다.
눈을 뜨니 밖은 어두웠다.
나를 깨우는 사람이 있었다.
“공자님.”
“……을룡이냐?”
얼굴을 쓱 닦고 일어나니, 곁에 을룡이 서 있었다.
“병마절도사 영감이 찾습니다.”
“바로 갈게.”
의복은 이미 갖춘 채라, 갓만 챙기면 그만이었다.
한동안 휴식을 취한 나는 쏙 들어갔던 볼도 다시 나오고 수염도 정리됐지만, 갓만큼은 여전히 망가져 있었다.
돌아가는 대로 멀쩡한 것 하나 구해야겠군. ……전쟁이 끝난 다음에.
객사를 나와 뜰을 가로지르니 밤하늘이 나를 반겨주었다. 새카만 하늘에 은하수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져 있었다.
아름다웠지만 감상할 때는 아니었다.
관사에 들어서니 횃불이 어렵사리 복도를 밝히고 있었다. 소흡은 집무실에 있었다. 그는 나를 마주하자 즉시 반색했다.
“오셨군!”
“웃으시는 걸 보니, 좋은 일이 있으신가 봅니다.”
“물론이네, 선전관이 조정의 명령을 전해주었어. 효정이 회령 인근의 번호들을 타격하기 전에 제거하라는군.”
“……다행이군요.”
“다 자네 덕분일세. 함경북도의 병마절도사가 되어서 공을 세울 기회는 항상 자네 손으로 만들어졌지. 언젠가 보답을 해줄 수 있다면 좋겠군.”
“부담 가지실 필요 없습니다. 사람이 좋아서 사귀는 것이지, 보답을 바라서겠습니까?”
내가 김자강과 다른 여진족 족장들의 구원에 응답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소흡이 함북 병사였기 때문이다.
일면식도 없는 다른 사람이었다면 개입할 여지는 없었겠지. 그가 나에게 무언가를 해주겠다면 마다할 생각은 없지만, 바라는 것은 없었다.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충분한 보답이 되어주었기에.
“말만이라도 고맙군. 하지만 도움을 거듭 받고도 모른 체하기에는 내가 염치없는 사람은 아니라서 말이야.”
“하하.”
“명령이 떨어졌으니 나는 따를 일만 남았네. 곧 인근 고을에 파발을 보내 병사들을 모을 생각이야. 그들의 편제에는 내가 개입할 여지가 없지만, 내 휘하의 군사라면 다르지.”
“괜찮으시다면 현장에서도 영감을 보필하고 싶군요.”
“바라던 바일세.”
소흡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 역시 가볍게 웃어주고는 말했다.
“이번 전투로 공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우리 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입니다.”
“그렇네.”
나는 나와 인연이 있는 여진족 군주들을 구원하기 위해 왔지만, 그렇다고 조선 백성들을 희생시킬 생각은 없었다.
“회령 일대의 여진족들을 설득해 이전처럼 선봉에 세워 보겠습니다. 길잡이의 필요성을 감안해서라도, 그들의 협조는 절실하지요.”
“부탁하겠네. 만일 그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 있다면, 내가 전적으로 지원해주지.”
“약간의 노자만 주십시오. 그것만으로 충분합니다.”
그들에게는 부족의 존속이 걸린 일이다. 그러니 설득이랄 것도 없다.
“판관은 능력이 좋아. ……너무 좋지. 이전에 자네 근황을 듣고서 안타까운 마음이 컸네. 무능력자들은 항상 능력자를 시기하는 법이야.”
언젠가, 견제를 의식해 사직했다고 대충 둘러댄 적이 있었다.
선조가 또라이처럼 굴어서 부담스러워 사직했다고 할 수는 없잖은가?
그런데 소흡은 내가 적당히 내뱉은 변명을 아직 담아두고 있었나 보다.
“저는 괜찮습니다.”
“내 가까운 사람 중에 혼기가 찬 여아가 없어서 아쉽군. 만일 자네만 괜찮다면, 조정에 복귀할 때까지 곁에 두고서 중히 쓰고 싶네만.”
“마음은 감사드립니다. 조정보다야 영감의 도량이 넓은 건 사실이지만, 어차피 이번 일로 저는 다시 불려갈 테니까요. 잠깐 머물러봐야 잠시 머무르는 손님 노릇 이상은 못 해드릴 겁니다.”
“으음…….”
소흡은 침음을 쓰게 흘렸다. 아쉽다는 기색이 역력했으나 더 붙잡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주머니를 꺼내 책상에 놓았다.
“노자로 쓰게. 오가는 와중에 여비가 많이 들었을 텐데, 이 정도는 해주고 싶군.”
“감사합니다.”
나는 마다하지 않았다. 주머니를 챙기고서 말을 이었다.
“바로 떠나겠습니다. 여진족 족장들을 설득한 다음에는 그대로 회령에 남아서 영감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날이 늦었는데 한숨 자고 가지 그러나?”
“이제 일어났습니다. 눈을 떴으니 이제 고생해야죠.”
“음.”
소흡은 아쉽다는 듯 잠시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식사 정도는 하고 가게. 빈속으로는 고생하는 게 아니야.”
“알겠습니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소흡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꾸벅 허리를 숙이고는 발길을 돌렸다.
객사에서 한동안 기다리고 있으니 일전에 보았던 기녀가 다시 찾아왔다. 하지만 그녀가 내온 상은 술상이 아니었다.
“나리…….”
“그대가 왜?”
“떠나신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음, 상만 들고 바로 떠날 예정이긴 하지요.”
“배웅해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녀가 하는 말을 들어보니, 소흡이 보낸 느낌이 아니었다.
직접 면대한 적이라고는 단 한 번뿐인 그녀가 어째서 나를 찾아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호감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여자의 마음을 넘겨짚는 건 총각의 특징이라.
나는 깊이 생각하지는 않기로 했다.
“원하신다면.”
내가 허락하니 기녀가 미소를 지었다. 같이 식사하는 것도 아니고 가만히 맞은편에 사람을 앉혀두려니 눈칫밥 먹는 느낌이 나기는 하는데…….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다. 산해진미는 없었으나 부족함은 없었다. 정체 모를 고기로 만든 산적도 짭조름하니 밥도둑이었다.
약간 배가 부를 정도가 되어서 나는 수저를 내려놓았다.
“더 드시지 않으시고요?”
기녀가 물었다.
“이게 이 사람에게는 보통입니다. 원래 식사가 많은 편이 아니에요.”
국그릇에다 고봉밥을 담아주는 요즘 세상과는 달리 나는 반 주먹 정도의 양으로도 배가 부른 세상에서 왔다.
시대에 따라 식사량이 달라진 요인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내가 조선에 떨어졌다고 고봉밥이 당기지는 않았다.
아마 밥만 먹어도 배가 터질걸.
“이제 떠나시겠군요.”
“예. 밤하늘이 맑으니 느긋하게 풍광을 감상하며 가도 되겠군요.”
“…….”
기녀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한동안 침묵을 지킨 채 나를 바라보다, 가까스로 입을 뗐다.
“소녀는 매화라고 합니다.”
“좋은 이름이군요.”
“어머니께서 지어주신 이름이에요. 지금은 어떻게 생기셨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쓰게 웃을 뿐이었다.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는지, 아니면 단지 충동적인 행동에 불과한 것인지.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더니, 점쟁이처럼 여러 사람의 속내를 짐작해온 나도 매화의 마음만큼은 조금도 짚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럴 필요조차 없는지도 모르지.
기생을 대하는 원칙에는 ‘무슨 말을 하더라도 믿지 말라.’는 것이 있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르지.
“이것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나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주머니를 건넸다. 소흡에게서 받은 것이지만, 어차피 여비는 나에게도 충분하기에.
그녀가 원하는 것이 이런 것이라면 내주어도 무방하리라. 고작 재물을 원하는 자에게 귀중한 시간을 뺏기고 싶은 생각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이런 것을 받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단지, 나리께서 소녀를 다시 찾아오시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이 사람이 오해를 했군요. 죄송합니다.”
나는 주머니를 거두었다.
“그런 부탁이라면 어렵지 않습니다. 조만간 싸우러 나갈 예정인데, 거기서 죽지만 않는다면 다시 돌아오지요. 그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매화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른 일행들을 깨우기 위해 객사를 나섰다.
* * *
회령에 일군이 당도했다.
소흡과 선발대다.
무능하지만 잔머리는 특출난, 부사 한기는 이제 출정하는 군대와 소흡을 마치 개선군이라도 된 듯 환영했다.
바쁜 와중에 마지못해 모인 백성들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지만 말이다.
군을 이끌고 대로를 가로지르던 소흡은 주변 반응을 의식하지 않고서, 어깨에 잔뜩 힘을 준 채 나아갔다.
그 끝에서 회령 부사 한기와 판관, 아전들이 반겨주자 소흡은 주변을 쓱 둘러보더니 한기에게 물었다.
“이 공(公)은 어디 계신가?”
나를 찾는 건가.
나는 여느 회령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인파에 묻혀 있었다. 굳이 한기와 같은 자리에 설 이유는 느끼지 못했으므로.
직접 판관을 지내봐서 알지만 회령은 가난한 고을이다. 애초에 존재하지 않던 고을을, 군사적 요충지를 수비하겠다며 강제이주로 형성한 것이니까.
이런 고을에 화려한 환영식이란 지나친 것이었다. 그래서 보이콧의 뜻도 있었다.
처음부터 나의 존재를 모르던 한기로서는 멍청한 표정이나 지을 수밖에.
“……이 공(公)이라니요?”
한기는 마치 여기에 부사인 자기보다 더 중요한 사람이 있기야 하냐는 표정이었다.
물론 고작 한기 따위나 보자고 회령을 찾은 게 아닌 소흡으로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는 반응이겠지.
“무슨 멍청한 소리인가? 이순신! 내 친히 서찰까지 보내, 그가 하는 일에 토 달지 말고 전적으로 협조하라 일러두기까지 했잖은가!”
“어, 아아…….”
한기는 곤란한 표정을 짓더니 우물쭈물 답했다.
“수소문도 해보았으나 이순신이라는 자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
실로 어쭙잖은 거짓말이다. 정말로 수소문을 해보았다면 여기서 감부를 지내는 석탈리가 한 마디도 안 했겠는가.
나서기 참으로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영감.”
인파를 뚫고 나서니, 거리의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물론 한기와 소흡을 포함해서 말이다.
소흡은 언제 화를 냈냐는 듯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았다.
“거기 계셨군!”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아, 조용히 있었습니다.”
“자네가 다른 사람들처럼 여기에 있을 몸인가?”
소흡은 툭툭 어깨를 두드리고는 발을 돌렸다. 따라오라는 투라, 나는 그를 쫓았다.
원치 않게 한기와 초면을 갖게 되어 나는 가볍게 예를 표했다. 그는 나의 존재가 썩 탐탁지 않다는 듯 눈가를 찌푸리더니 소흡에게 물었다.
“이 공은 어떤 중차대한 일을 하시고자 회령을 방문한 것인지…….”
“자네가 시간만 죽이고 있을 동안 이 공이 대신 회령의 일을 봐주기로 했네!”
“조정에서 파견된 분입니까?”
“아니. 하지만 일 처리는 조정에서 파견된 자네보다 훨씬 낫더군. 지금 효정이라는 자가 일대의 번호를 모두 흡수하겠다고 야욕을 비치는데, 어떻게 현지 부사인 자네는 도성에서 온 사람보다 아는 게 없나?”
“소, 송구합니다…….”
한기는 슬쩍 나를 보더니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숙여버렸다. 아마 자기 딴에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내는 느낌이겠지.
나를 적대하는 한심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야겠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