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78화
27. 옛날처럼 (2)
“포로 놈이 큰일을 해냈습니다. 덕분에 판관께서 일하시기 훨씬 수월해졌습니다.”
나와 부족장은 모두 창고 밖에 나와 있었다. 포로는 김자강의 제안에 무척이나 중차대한 증언으로 답했다.
그는 효정이 부족장을 넘어 여진족 전체를 통합해 칸에 등극하기를 원한다 했다.
물론 군주가 야망을 품는 일은 일반적이다. 오히려 지배하는 자에게는 도리어 필요한 덕목이었다. 단지 군주 사이에서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야망이란 무척이나 경계 되는 것일 뿐.
“조선이 우리 여진족들을 잡아먹지 못해 안달났다는 사실이 이토록 반가운 적이 없군요.”
김자강이 씁쓸하게 웃었다.
나 역시 그저 씁쓸히 웃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조선은 명과 마찬가지로 여진족을 경계하고 견제하는 것이 중요 대외정책 중 하나였다.
특히 특정 부족의 세가 무척이나 커진다면 선제공격도 꺼리지 않았다. 야만적이지만 조선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여진과 같은 비문명 세력은 성장과 통합이 무척이나 빠르니까. 미리 밟아놓지 않으면 나중에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만다.
로마 이상의 초거대 제국이었던 몽골 제국 역시, 유랑자에 불과했던 시조 칭기즈칸에 의해 세워지고 단숨에 전성기로 발돋움하지 않았던가?
‘효정이 칸이 되려 한다는 증언을 조정에 알린다면…….’
내가 하려는 일은 일사천리가 되겠지. 어쩌면 기세를 타서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일이 벌어질지도 몰랐다.
그것을 김자강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기쁜 얼굴로 바삐 말했다.
“물증은 없지만, 애초에 누군가의 야망을 물증으로 입증하기란 어려운 법입니다. 대신 행보가 증명해 주지요. 최근 효정이 보인 행보라면 충분히 증명될 테고, 포로의 증언 역시 여기 있는 사람들 모두가 증인이 되어줄 겁니다.”
“이런 말을 하긴 우습지만, 효정의 습격이 오히려 고맙게 느껴지는군요.”
“판관께서만 그리 생각하시는 게 아닙니다.”
김자강은 물론 부족장들 모두 희희낙락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많은 목숨이 안타깝게도 스러졌지만 그들의 희생은 가치 있었다.
잔혹한 표현이지만 명백한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
“원래는 쓸모 있는 정보를 모두 불면 베어버릴 생각이었지만, 그러기는 힘들게 되었습니다. 장차 중히 쓰일지도 모르니 살려둔 채 억류해둬야겠군요.”
김자강은 포로가 갇혀 있는 창고 쪽을 향해 턱짓했다.
죽은 부족장의 목을 주겠다더니 애초에 거짓말이었나. 어느 쪽이건 야만적이었으나 포로의 대접에 내가 왈가왈부할 여지는 없었다.
“일이 어떻게든 풀렸으니…….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머무르며 기쁨을 공유하고 싶지만, 좋은 결과를 본 뒤에 보다 거창하게 즐기는 편히 좋겠지요.”
내가 이곳에서 할 일은 끝났다. 생각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얻었다. 현장의 현황도 현황이지만 그보다 포로의 증언이 주효했다.
이제는 이 수단들을 이용해 조정을 설득할 때. 하지만 그건 여기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김자강은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판관의 뜻을 제가 어찌 막겠습니까? 하지만 다음 자리에는 꼭 참석해주셔야 합니다.”
“약조하겠습니다.”
“그럼…….”
김자강은 나와 주변의 부족장들을 둘러보았다. 부족장들은 나에게 허리를 꾸벅 숙이며 정중하게 예를 표했다.
거의 다시는 못 볼 사람을 대하는 듯했지만, 그렇지는 않을 거다.
곧 우리는 과거처럼 함께 전장에 설 테지. 그리고 옛날처럼 적을 향해 함께 돌격할 거다. 어깨와 등을 맞댄 채로 말이다.
* * *
권율과 을룡은 아직까지도 습격의 패닉을 벗어나지 못한 표정이었다.
흐릿한 횃불의 빛에도 느껴질 정도로 눈이 시뻘겋게 충혈되어 있었으니까. 목숨을 걸고 싸워본 적은 이번이 처음이라 그렇겠지.
하다못해 마음의 준비라도 하고 당한 것이 아니라 정말 자다가 당한 것이라, 당혹할 만도 했다.
“도, 돌아가다 또 습격을 당하지는 않겠지?”
권율은 행주대첩의 영웅답지 않게 떨리는 목소리로 우려를 표했다.
“효정은 저나 권 공이 자리에 있었다는 건 모르고 있을 겁니다. 단지 공략 대상인 부족장들이 집결한다니 기회를 노렸을 뿐이지요.”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나는 짐을 갖추어 일행과 함께 말에 올랐다. 그리고 회령을 지나쳐 부령에 다다를 즈음 여명을 볼 수 있었다.
전투를 벌인 직후 밤을 새워서 달렸기에, 짧은 휴식으로 가까스로 회복한 체력은 다시 바닥을 기었다.
체력은 물론 심력까지 거덜 난 상황이라 경성에 다다랐을 때는 감영을 방문하는 대신 민가에서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집주인은 토관직을 지내는 자인지, 조선인의 복장을 하고 있음에도 여진족의 인상은 전혀 숨겨지지 않았다.
“…….”
그는 무장한 일행과 피 묻은 의복을 보고도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대신 노복을 통해 새 옷을 전달했을 뿐.
별방이 둘 있었지만 하나는 이미 집주인의 아들이 쓰고 있어, 나와 일행은 방 하나에 머물러야 했다. 좁지는 않아 문제는 되지 않았다.
다음날이 되어.
나와 일행은 경성에 입성하여 감영을 찾았다. 당연히 소흡은 나를 무척이나 반겨주었다.
“빠르게 돌아오셨군!”
소흡은 놀랍다는 듯 물었다. 고작 며칠 만에 국경인 회령을 다녀왔으니, 하기야 그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정이었다.
그새 강 너머를 찾아 한바탕 싸우기까지 했다는 사실을 알면 기겁하겠군.
“영감께서 기다리시는데 어찌 느긋할 수 있겠습니까. 서둘러 다녀왔습니다.”
“고생 많았네, 이 사람아.”
소흡은 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피곤하면 객사에서 조금 쉬게. 저 친구들 보니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구만.”
그의 시선이 잠깐 일행에게로 향했다. 과연 권율과 을룡은 한 번 쉬었음에도 여전히 피곤한 기색이었다.
특히 평소에는 놀기만 했던 권율은……. 거의 죽기라도 할 몰골이었다. 눈가에는 새카맣게 그늘이 꼈고 눈동자는 거의 풀려 있었으니까.
아마 보는 눈만 없다면 흙바닥에라도 드러누워 잘 기세였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친우들은 객사에서 쉬게 하지요. 저는 영감과 중차대한 일이 있으니 휴식을 취하더라도 일이 끝난 다음에 취하겠습니다.”
“너무 고생만 하면 몸이 상한다네.”
소흡이 할 말은 아니지만, 맞는 말이었다.
“돌아가는 대로 한동안 놀 생각입니다. 그럼…….”
나는 관사로 팔을 뻗었다. 일이나 보자는 것이었다.
소흡은 마다하지 않았다. 내가 쉬지 않는다고 그가 아쉬운 것은 아니었기에.
집무실에 이르자 소흡은 나름의 배려인지 따뜻한 차를 내오게 했다. 그동안은 잡다한 이야기를 나눴고, 차가 나오자 소흡은 그제야 본론을 꺼냈다.
“그래, 회령에서는 중요한 소식을 얻으셨는가?”
“물론입니다. 그러니 이렇게까지 자신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벌써 기대되는군.”
“가장 큰 희소식은, 효정이 간(干, 칸)이 되려 한다는 증언이 있었단 겁니다. 발언자의 신변은 확보되었고 증언을 함께 들은 증인도 많습니다.”
소흡은 게으른 사람이었으나 머리까지 직무유기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시 나의 뜻을 이해하고서 감탄을 흘렸다.
“오! 그게 사실인가?!”
“여부가 있겠습니까.”
“호오……. 조정에서 좋은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겠어. 일이 클수록, 세울 공도 커지는 법이지. 다른 것은 없나?”
“안타깝게도 이만한 것은 없습니다. 사실, 이 이상을 바랄 수도 없지요.”
마침 선조도 야망 있고, 또 오만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이런 부류의 사람은 동족을 극히 혐오하기 마련이다.
원래 여진족은 조선에게 견제와 경계의 대상이지만, 그마저도 선조에게는 조정을 설득할 명분이 되겠지.
이미 율호의 건으로 한 차례 원정을 성공한 적도 있어서, 자신감도 있을 거다.
“회령 일대의 번호들은 완충 역할을 하고 있는데, 이들이 극히 야망 있는 효정에게 흡수를 당한다면 조선에는 좋을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렇겠지.”
“이외에도 사사로이 도움 될 정보가 많습니다. 장계에는 다 올리기 힘들 정도로 말입니다. 그건 서면으로 작성해 올릴 터이니, 직접 보시고 필요한 것만 취하십시오.”
“…….”
소흡의 얼굴이 살짝 당혹으로 물들었다.
공무란 게을러터진 그에게는 부담스러운 것. 보고서라도 다를 건 없었다.
능히 예상했던 반응이다.
“만일 내키지 않으신다면, 다 알고 있는 제가 대신 장계를 써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래 주겠나?”
소흡은 반색하며 답했다. 참으로 알기 쉬운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최전방인 함경북도의 병마절도사를 지내고 있다는 건 조선에 있어 비극이지만……, 나에게는 희극이었다.
덕분에 효정도 차도살인하고, 조정으로 복귀할 명분도 얻고.
“그럼 저는 이만 객사로 돌아가겠습니다. 문방사우만 준비해주십시오. 장계 초안은 늦지 않게 보내드리겠습니다.”
“그러게. 오늘, 조반은 들었나?”
“아직 안 들었습니다.”
“식사도 보내지. 장계는 먹고 쓰게.”
“알겠습니다.”
나는 의자를 밀어내고 일어났다. 그리고 잔뜩 식어버린 차를 단숨에 들이켜고는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객사에서 쉬고 있으니 공노비가 찾아왔다. 그런데 상을 두고도 물러나지 않았다.
의복도 화려한 것이, 원색의 치마에는 무늬까지 수놓아져 있었다. 그녀의 정체를 짐작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르신,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동석해도 되겠습니까?”
그녀가 내온 상은 화려했으나 가짓수는 적었으며, 밥은 없었다. 대신 옥색의 술병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아침부터 술이라…….
“마다하지는 않겠습니다.”
대답과 함께 씩 웃어주니 기녀 역시 미소와 함께 곁에 자리했다.
처음은 안주였다. 참기름과 소금으로 가볍게 간한 콩나물무침은 그것대로 진미였다. 그리고 잔을 드니, 기녀가 술병을 기울였다.
-조르륵.
은은한 붉은빛의 술. 산수유? 지초(芝草, 지치)? 오미자? 보는 것만으로는 재료를 가늠할 수 없으나 코끝에 감도는 청아한 냄새는 분명 매력적이다.
나는 잔을 기울였다.
‘지초로군…….’
좋은 술과 여인이라. 그동안의 고생이 보답받는 기분이었다.
특히 기녀는 무척이나 매력적인 여인이다. 그녀는 청순한 외모와는 달리 한평생 누군가를 만족시키기 위해 가다듬은 자다.
행동 하나하나에 교양과 함께 유혹이 묻어났다. 은근슬쩍 내려간 저고리 너머 쇄골에는 관능미가 넘쳤다.
피식.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술자리는 한동안 이어졌으나 옷고름을 푸는 일은 없었다.
피곤한 몸이라, 거사라도 치른다면 그대로 곯아떨어질 테니까. 불타는 청춘이라지만 색이 고픈 것도 아니었다.
“이만하면 되었다. 상을 가지고 나가거라.”
“……예.”
기녀는 아쉬움을 드러내며 물러났다. 이대로 늘어져 한숨 잔다면 천국이 따로 없겠지만, 나는 객사의 방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술 냄새를 쓸어갔다. 은근한 취기 역시 냉기에 씻겨 나갔다.
한동안 쌀쌀함을 즐기며 정신을 가다듬은 나는 객사 한쪽에 구비된 서안과 문방사우를 챙겼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객사의 문풍지가 붉게 물들어서야, 나는 서안을 밀어낼 수 있었다. 장계 초안은 완성되었다. 너무 길지도, 너무 짧지도 않으며 정보는 과하지도 적지도 않게 갖추느라 꽤나 고생했다.
이제 소흡에게 전달해 초안의 감수를 맡기면 되겠지만, 사실 소흡은 똥과 된장을 분간할 능력이 없었다.
아마 글자 하나 수정되지 않은 채로 함북병사의 직인만 찍은 채 보내지겠지.
부디 조정에서 먹히기를 기대할 수밖에.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할 여지는 많았지만, 절대란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