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77화
27. 옛날처럼 (1)
“판관.”
김자강이 조심스레 말했다.
그의 부름에 눈을 뜨니 사방이 어두웠다. 오직 김자강의 인영이 보이는 복도만이 조금 밝을 뿐. 횃불이라도 걸어두었는지 빛이 일렁였다.
“부족장들이 모두 모였습니다. 준비되는 대로, 나와 맞이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전언을 다한 김자강은 복도에서 멀어졌다. 방문은 열린 채였고, 그 틈으로 시원한 바람이 잠기운을 몰아냈다.
얼마 자지도 않았을 텐데 몸이 개운했다. 나는 걸어둔 도포와 갓을 챙겼다.
밖으로 나오니 웅성거리는 목소리가 복도에서 울렸다. 많이 들어본 적 없음에도 친숙한 목소리들이었다. 전장을 함께 누볐던 부족장들이다.
“오!”
집 중앙의 응접실로 나오니, 족장 중 하나가 알아보고는 감탄을 흘렸다. 그러자 다른 족장들도 고개를 돌리더니 앞다투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판관 나리.”
“판관.”
족장들은 허리를 꾸벅 숙이며 예를 갖췄다. 마침 상석이 비어 있었다. 거처의 주인인 김자강조차 그 오른쪽 자리에 앉아있을 뿐이었다.
당연히 나를 위한 자리겠지.
나는 나를 바라보는 여러 부족장의 등을 지나 상석에 자리했다. 김자강이 입을 열었다.
“피곤하실 터인데 깨워 송구합니다. 다들 너무 기대하고 있어서요. 판관의 존안을 빨리 보자고 보통 난리가 아니었습니다.”
“괜찮습니다. 저 역시 간만에 여러분들을 뵙게 되어 무척이나 기쁩니다. 잠이야 나중에 자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하하.”
김재강이 뒤편으로 시선을 보내자, 곧 여진족 여인들이 들어와 음식을 날랐다.
가난한 여진족 사회에서는 흔치 않게 양념 된 고기들이 즐비했으며, 밥 역시 강 너머의 조선에서 수입한 것인지 푸석푸석한 잡곡이 아닌 기름진 것이었다.
그사이 잘도 연회를 준비했군.
족장들은 극히 사치스러운 연회가 펼쳐지자 환호를 내질렀으나, 서두르지는 않았다. 대신 기대 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실효가 있건 없건, 명목에 불과할 뿐이라도 군주라는 건가?
나는 기꺼이 아이락이 담긴 술잔을 들었다.
“각 부족의 무궁한 번영과 영원한 존속을 위하여.”
“위하여!”
연회가 시작됐다. 잠깐은 다들 먹는 데 정신이 없었지만, 금세 정신을 차리고 그간 각자의 소식을 전하느라 바빠졌다.
“사직을 안 하셨다면 당상관에도 오르셨겠군요. 제가 다 아쉽습니다.”
“빈말이 아니라, 이따금 족장들이 부럽습니다. 적어도 정수리 위에 서서 설쳐대는 인간은 없잖습니까?”
“이것도 오래 할 짓은 아닙니다. 만일 판관과 자리를 바꿀 수 있다면, 서로 나서서 바꾸려 들 겁니다.”
여러 족장이 긍정했다. 아예 하나는 이참에 잠깐 바꿔보는 것도 어떻냐고 농을 건넸다.
김자강이 말을 이었다.
“만일 조선에서의 삶이 정 피곤하시다면, 여기서 사셔도 무방합니다.”
일순 주변이 조용해졌다.
“말씀 감사합니다.”
“그냥 드리는 말이 아닙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러겠지만, 저를 포함한 많은 족장이 판관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
나는 피식 웃고 말 뿐이었다.
물론 여기 사람들은 호의적이지만, 언제까지나 순수한 마음으로 나를 대하지는 못할 거다. 간간이 보는 것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격이 다른 일이다.
마치 결혼처럼.
그리고 많은 사람이 결혼을 후회하지 않던가?
살아도 꼭 조선에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없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그럴 이유도 없고.
“그 제안은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언제든 기다리겠습니다.”
김자강의 느닷없는 제안 덕에 연회의 분위기는 가라앉은 채였다. 이걸 어떻게 살려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는데…….
“족장님!”
여진족 병사 하나가 난입하며 외쳤다. 여진어였다.
여러 부족장이 모인 자리임을 감안하면 썩 적절한 행동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미친 사람이 아니고서야, 이유 없이 이런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았겠지.
강 너머 여진족의 삶은 야생이었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짐승과도 같은 감각을 가져야 했다. 그저 다급한 부름 한 마디만 있을 뿐이었지만, 족장들은 모두 일어나 허리춤의 곡도를 쥐었다.
김자강이 외쳤다.
“무슨 일이냐!”
“적들의 공격입니다!”
말단 병사가 답하기 무섭게, 두두두두 대지를 때리는 말발굽 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효정인가!”
추측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을 노리는 효정이 아니고서야, 누가 습격을 시도하겠나.
김자강은 물론 족장들 모두 연회는 제쳐두고 다급히 자리를 빠져나갔다. 결연한 그들의 표정에서 대피라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싸우겠다는 것인가!’
어차피 그것이 최선이다. 모든 싸움에서 대부분 사망자는 한쪽이 패주할 때, 다른 쪽에서 추격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죽이 되건 밥이 되건 적을 마주하고 싸우는 것이 차라리 사는 길.
여기에 한 손 보태는 것이 내가 할 일이었다.
“무슨 일입니까?!”
“공자님.”
권율과 을룡이 소란을 느꼈는지 복도로 나와 있었다. 길게 말할 여유는 없었다.
“적들이 쳐들어왔어. 싸울 생각이 있다면 거들고, 그렇지 않다면 방에 콕 박혀 있어.”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의 방을 찾아갔다. 거기에 나의 무장이 있었다.
조정이 내린 고급 환도, 그리고 문중의 유물인 태종의 활. 실전에 최적화된 무구는 아니었지만 그동안 손에 익히고자 무던히 노력했다.
오늘 그 노력의 결과를 알 수 있겠군.
밖으로 나오니 주변은 이미 난장판이었다. 창황한 달밤 아래 수십의 말을 탄 기수들이 가옥 사이를 분주하게 뛰어다니며 화살을 날려댔다.
쉿, 쉿, 하고 뱀 소리가 한 번 날 때마다 사람 하나가 단말마와 함께 쓰러졌다.
주변에서는 족장들과 부족민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고서 적병들에게 대항하고 있었다. 성과는 있었으나 여전히 습격자들에게 압도당한 채였다.
“죽어라!”
습격자 하나가 나를 향해 달려왔다. 한껏 당겨진 곡궁.
-스팍!
숙인 머리 위로 바람이 느껴졌다. 적은 그새 시위에 다시 화살을 걸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 순서였다.
나는 일어남과 동시에 당겨놓은 시위를 당겼다.
-팡!
조준이랄 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감각에 맡긴 사격. 목숨을 걸고 할 짓이라기에는 무척이나 위험한 행동이다.
확실한 점은, 아직 내가 죽을 때는 아니라는 거다.
“……!”
기수의 가슴에 대살이 피어났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막 당겨놓은 시위를 풀었다. 화살은 완전히 엉뚱한 곳으로 날아갔다.
적은 통한과 고통이 뒤섞인 얼굴을 한 채 안장에서 떨어졌다. 털푸덕. 그가 몰던 말은 주인이 사라지자 돌진을 그치고 터벅터벅 나에게로 다가왔다.
마치 전 주인을 대신해 올라타라는 듯.
마다할 수야 있겠는가.
“하!”
펄쩍 뛰어 올라탄 나는, 즉시 박차를 가했다. 전마는 히힝! 하고는 내가 돌리는 기수를 따라 거리로 돌진했다.
여기저기에서 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골목과 골목에서 적 기수들이 나다니고 있었다. 바닥에 시체가 즐비했다. 말발굽에 차이는 물컹한 감각이 나에게도 느껴졌다.
감상을 즐길 여유는 없었다.
나는 적 기수를 향해 시위를 당겼다.
-팡!
화살이 적의 머리를 꿰었다.
-팡!
이번에는 목을 꿰뚫는다. 살을 헤집었는지 분명 명중했건만 화살은 온데간데없다. 적을 안장에서 떨어뜨리기에는 충분하다.
-팡!
그야말로 일격필살이었다.
철궁을 몇 번 당기니 시위를 쥔 손은 부들부들 떨렸으나, 폭음과도 같은 파공과 함께 적 하나가 즉사에 이르는 광경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압도적인 위력.
덕분에 시위를 놓을 때마다 손끝에 배인 굳은살이 깎여나간다. 서둘러 나오느라 깍지를 갖추지 못했다…….
-팡!
다시 한번 폭음과 함께 적이 고꾸라진다. 다음 적을 찾기 위해 기수를 몰았으나, 부족을 한 바퀴 돌 때까지 적은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나를 적대하는 존재는.
터질 것처럼 두근거리던 심장의 존재를 뒤늦게 의식할 수 있었다. 가파른 호흡이 점차 안정되기 시작했다.
나는 활을 천천히 내렸다. 주변은 여전히 소란스러웠으나 전장의 소강일 뿐이다.
“주군!”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김자강이 말을 탄 채 달려오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이 사람은 괜찮습니다.”
손가락 끝이 따끔거렸다. 분명 피부가 벗겨진 것이겠지. 하지만 이건 문제의 축에도 들지 못한다.
“그보다는 족장들의 안위가 걱정됩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떠합니까?”
“희생은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사답게 싸우다 죽은 것이니, 그리 걱정하실 바가 못 됩니다. 판관만 괜찮으시다면…….”
나는 답하지 않았다.
김자강이 말을 이었다.
“포로를 확보했습니다. 바로 심문할 예정입니다. 놈이 협조적으로 나온다면, 판관께서 하시는 일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쉬고 계십시오. 사람을 통해 부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거처로 돌아갔다.
거처에는 이미 여러 부족장이 한참은 식어버린 연회 장소에서 쉬고 있었다. 다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으며, 자신의 것인지 적의 것인지 모를 피를 뒤집어쓴 자도 있었다.
내가 도착한 뒤에도 하나둘 들어서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행인 권율과 을룡 역시, 다행스럽게도 크게 다친 곳 없이 무사히 귀환했다.
다들 새파랗게 질린 것이 반쯤 혼이 나간 것처럼 보였지만…….
하지만 한참이 되어도 귀환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불과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 자리에서 웃고 떠들며 함께 연회를 즐겼던 사람들인데, 듬성듬성 자리가 비어 있었다.
불쾌한 대조였다.
“…….”
김자강은 오래지 않아 돌아왔다.
모두의 시선이 돌아갔다.
“따라오십시오.”
사람들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나온 밖은 적막이 가라앉아 있었다. 언제 목숨을 건 혈전이 있었냐는 듯, 듬성듬성 핏자국만 있을 뿐 거리는 조용하고 한산했다.
일단의 무리는 김자강을 선두로 나아갔다. 그리고 머지않아 허름하게 세워진 창고에 멈춰 섰다.
주변은 몇몇 여진족 사내들이 긴장하고 분노한 채 아직까지도 무장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들 중 창고에 가장 가까이 선 자가 문을 열었다.
창고 안은 좁고 어두웠으며 이끼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풍겼다. 그 가운데 사내 하나가 묶여 있었다.
보복이 있었는지 몸은 만신창이였으나 눈빛은 여전히 거칠었다. 하지만 이제부터 우리가 할 일은 단순한 보복이 아니었다.
단순히 분노에 차거나 어중간한 각오를 해두는 것으로는 견딜 수 없으리라.
가장 먼저 나선 사람은 김자강이었다.
“누가 시킨 일이냐?”
답은 없었다.
김자강은 굳이 말로써 더 설득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칼을 꺼냈다.
* * *
포로가 사람의 형상에서, 찢어놓은 고깃덩어리의 형상이 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만큼 고문을 견뎌냈으나, 세상에는 죽지 못한 채로 영원할 것 같은 고통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효정……. 효정이 시켰다.”
결국, 포로는 항복하듯 증언했다. 몸의 형상을 지키기에는 많이 늦었지만…….
김자강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포로의 살갗을 저며냈던 곡도를 세차게 휘둘렀다. 베기 위함은 아니었다. 칼날에 끈적끈적하게 묻어있던 피와 지방 덩어리가 흩뿌려졌다.
힘으로 칼날을 닦아낸 김자강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미 짐작하고 있던 바다. 내가 궁금한 것은 효정이 어떻게 우리의 집결을 알고서 이토록 빨리 공격했냐는 거다.”
“일개 전사에 불과한 내가 그걸 어떻게 알겠느냐? 첩자라도 있었겠지.”
그 외에 달리 이유랄 것도 없었다. 부족장들의 결집을 확인하고서 효정에게 알린 자. 어디에나 있을 수 있었다.
“가치 있는 정보를 알려준다면 목숨을 살려줄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