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76화
26. 낙향 (4)
처음에는 소흡을 살살 긁어 유도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지금 벌어지는 상황은 유도가 아니라, 소흡이 나를 끌고 가는 수준이었다.
“당장이라도 군대를 이끌고 회령에 있다는 그놈을 치고 싶군.”
농담이 아니었다.
소흡은 진정으로 그러고 싶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공이 고프긴 고팠나보다. 하기야 이번 임기를 끝으로 옷을 벗게 된다면 누구건 안 그러겠냐만.
하지만 서두른다고 쌀이 밥이 되나.
“다른 곳도 아닌 함경북도의 병마절도사이시니, 재량의 여지는 있겠지만 돌다리도 두들겨보고 건너라는 말이 있습니다. 조정에 오해라도 산다면 본전도 못 건지는 수가 있으니까요.”
소흡이야 어찌 되건 내 알 바는 아니지만, 불똥이 튀거나 효정 제거에 차질이 생기는 것은 반갑지 않았다.
“아쉬워, 아쉬워. 만일 조정에 알렸다가 이전처럼 원정이 결정되어 다른 놈이 주워 먹을 가능성이 있지 않나?”
마치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볼하진 때는 병마절도사가 공석이라 후임 파견이 불가피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겸사겸사 원정이 결성된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잖습니까?”
“임기가 간당간당하네.”
그래서 더 급한 거로군?
“조정에 인맥은 있으십니까.”
“……없지는 않지.”
소흡은 영 자신 없는 어조로 말했다. 특별히 자랑할 만한 인맥은 없는 모양이다.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무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차라리 장계를 솔직하게 작성하시지요.”
“솔직하게?”
“예. 회령의 모 부족이 무척이나 강대해져 미리 제압할 필요가 있다고요. 그리고 임기가 끝나기 전에 확실히 정리해두고 싶다고 말입니다.”
“음……. 너무 노골적으로 보이지 않겠나?”
“살살 구슬려가며 조정을 설득할 여유는 없잖습니까.”
인맥이 빈약하니 수작을 부릴 수도 없다. 물론 간도 보지 않고 다짜고짜 들이받는 것은 위함 부담이 크지만, 이쪽은 권철이 있다.
영의정이 나서도 안 풀릴 상황이라면 소흡이 어쭙잖게 깝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알겠네. 그럼 바로 장계를…….”
“마음이 급하신 건 알겠지만 서두른다고 쌀이 밥이 되는 건 아닙니다. 설익기라도 한다면 낭패이지요.”
“그럼 장계는 언제 올려야 마땅하겠나.”
“먼저, 회령의 상황과 사정은 잘 아십니까?”
“…….”
소흡은 대답하지 못했다.
기본적인 공무마저 싫증을 내는 그가 어떻게 변방의 사정에 관심이 있겠나. 당연했고, 예상한 바였다.
뭐, 게으르지 않았어도 회령부사인 한기가 무능해서 몰랐겠지만.
“회령의 상황을 잘 파악한 상태가 아니라면 아직은 장계를 올릴 때가 아닙니다. 지금 상황에서 무엇을 근거로 조정을 설득할 수 있겠습니까?”
“음.”
무작정 효정을 쳐야 한다고만 해대면 누가 응해주겠나.
상황부터 철저하게 파악한 뒤, 이를 명분으로 필요성을 설파해야지.
마침 나는 소흡에게 볼일은 다 끝난 터였다. 그렇다고 그나 한기나 믿음직한 인물은 아니었으므로, 장계를 쓸 정보가 확보될 때까지 여기서 머무를 상황도 아니었다.
“영감께서는 바쁘신 분이니, 쓸데없이 일감을 늘릴 필요는 없겠지요. 또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하였으니 회령부사에게 보고를 받는 것보다야, 제가 직접 가서 확인하는 게 나을 겁니다.”
“그래 주겠나?”
소흡이 단숨에 반색했다. 밥상을 차려줘도 숟가락 뜨는 것조차 싫증 낼 그에게 일을 대신 해주겠다니, 천사가 따로 없겠지.
“인가만 해주시고, 또 상황 파악에 차질이 없도록 최소한의 조치만 해주십시오.”
“어렵지 않네. 회령부사에게 언질은 해두지. 시답잖은 인간이라 자네 일을 방해하려 들지는 않을 거야.”
“감사합니다. 그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의자를 밀어 넣었다.
“바로 출발할 생각인가?”
소흡이 아쉽다는 어조로 물었다.
“축배는 일이 성사된 다음에 들지요. 그리고 일이 잘 풀린다면, 조정에 제 이름만 살짝 언급해 주십시오.”
굳이 한성을 빠져나와 이역만리 타지에서 독자적인 행동을 하는 티를 낼 필요는 없다. 선조의 경계심을 살 가능성이 높으니까.
하지만 권철이 나를 위해서 힘을 써주고, 또 그것이 나의 복귀를 전제로 한 것인 만큼 나 역시 그의 바람에 부응해줄 필요는 있다.
어떻게든 공을 세우게 된다면 나의 복귀는 쉬워지겠지.
“물론이네. 자네가 이렇게까지 고생해주는데 내가 그 정도 배려도 못 해줄까?”
소흡은 맡겨만 두라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끄덕였다. 그가 욕심은 많지만, 적어도 남의 지분까지 탐할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그건 이전에 율호를 칠 때도 증명된 것이지만.
선조처럼 대책 없는 쓰레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소흡은 못날지언정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 다시 뵙겠습니다.”
내가 발길을 돌리자 소흡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급히 말했다.
“잠깐. 안내해주겠네.”
“영광입니다.”
소흡과 함께 감영 뜰로 나오니, 일행이 예를 표했다. 물론 내가 아닌 소흡에게.
소흡이 물었다.
“이자들은 누구인가?”
“친우입니다. 타지로 나간다니 세상 구경을 하고 싶다며 동행을 부탁하더군요. 마다할 수 있겠습니까.”
“좋은 친우를 두었군.”
“저와 영감 사이만 하겠습니까.”
“그런가? 하하!”
소흡은 만족한 듯 대소하고는 덧붙였다.
“말들이 지쳐 있을 터이니, 굳이 더 혹사 시킬 필요 없네. 감영에 말은 많으니 지금 말들은 맡겨두고 마사(馬舍, 마구간)에서 마음에 드는 녀석들로 꺼내 가게.”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소흡은 이만하면 됐다는 듯, 짧게 헛기침하고는 말했다.
“나는 돌아가서 회령부사에게 보낼 글을 쓰겠네. 그럼, 살펴 가게.”
“예.”
소흡은 발을 돌렸다. 일행만 남게 되자, 권율이 뒤늦게 경외어린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어떤 사람이 관직도 없는 상황에서 병마절도사에게 이렇게까지 후의를 입겠나. 물론 물려준 게 있으니 좋아하는 것이지만, 병마절도사가 아쉬워하는 부분을 충족시켜주는 것도 대단한 능력이지.
나는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권율에게 가볍게 웃어주고는, 이리저리 배회하는 아전을 붙잡아 마사로의 안내를 부탁했다.
* * *
“마치 고향으로 낙향이라도 한 기분이야.”
나는 일행과 함께 회령에 도착했다. 아직 입성하지 않았으나, 알목하에 이르렀으니 이미 회령이나 진배없었다.
“저기 돌담이 보이십니까?”
나는 권율에게 말을 건넸다. 왼편에 다 무너진 채 이끼만 잔뜩 낀 돌담이 듬성듬성 세워져 있었다.
“보이네.”
“옛날에 이풍이라고, 주둔지로 썼던 곳입니다. 두만강 아래의 여진족보다 그 너머의 여진족이 더 위험해서, 내륙 주둔지는 많이 버려졌지요.”
“흠.”
일행은 머지않아 회령에 도착했다. 성문을 넘었지만 길을 막는 병사는 없었다.
평화롭다기보다는 태만하다는 쪽이 맞으리라.
내가 회령의 평화와 조화를 위해 임기 내내 일궈놓은 것이 많기는 하지만, 회령부사는 그것을 지켜낼 위인이 아닌 듯했다. 돌아다니는 행인들의 얼굴에서 만족감보다는 피로와 권태감이 진하게 느껴졌으니까.
회령부사 한기는 무능하고 잔머리만 굴릴 줄 안다. 이런 사람은 가만히 있는 게 처신에 득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자리를 차지하고도 행정 공백을 일으킨다.
그런 측면에서 비슷하지만 건수를 잡으면 적극적으로 나서는 소흡보다도 무능하다.
“적어도 방해는 안 받겠군.”
입성한 나는 곧바로 석탈리를 찾았다. 내가 회령에 판관으로 부임했을 때 조력자로서 많은 도움이 되어준 자다.
토관직을 지내고 있으니 어디 가지는 않았겠지.
그리고 오래지 않아 나는 석탈리네 저택에 당도했다.
땅이 가장 흔한 회령에서 석탈리는 넓은 영역에 담장을 두른 채, 여러 채의 가옥을 올리고서 가문의 사람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러나 밖에서는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방문을 알리는 수밖에.
“감부! 지금 댁에 계신가?!”
나의 외침에 문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 익숙한 사람이 나를 반겨주었다.
석탈리였다.
“판관 아니십니까? 그런데 회령에는 어찌?”
일말의 단초도 없이 깜짝 등장한 나다. 그래서인지 석탈리도 굉장히 놀란 기색이었다.
“감부를 뵙고자 찾아왔지요.”
“실없는 소리를 다 하십니다. 분명 중요한 볼일이 있으신 것이겠지요.”
“하하, 들켰습니까.”
오랫동안 나와 함께 일해 온 석탈리였다. 당연히 나를 잘 알고 있었다. 마침 두만강 너머에 수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어서인지, 석탈리는 금세 짐작했다.
“혹시 효정 때문입니까?”
“예.”
직설적으로 물어보는데 굳이 돌려 말할 이유는 없지. 간만의 만남이었으나 여유롭게 회포를 푸는 것은 다음으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근래에 사람 하나가 찾아와 회령의 소식을 전해주더군요. 효정이라는 자가 급속히 세를 키워 회령 바로 위의 부족들을 흡수하려 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입니다. 판관께서 떠나신 뒤로도 한동안은 조용했으나, 새로운 부사가 부임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두만강 쪽으로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부사의 영향입니까?”
“그렇겠지요. 강 너머 여진족 사회에서는 판세를 읽는 안목이 가장 중요합니다. 그것이 갖춰지지 않았다면 하루아침에 부족이 사라질 수도 있으니까요. 그들 사이에서 정점에 오른 효정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부사의 성격을 읽고서 이런 행보를 보이는 게 아니겠습니까.”
이래서 무능한 사람이 일선에 서면 안 된다.
회령은 요충지다. 단순이 과거 임지여서 과대평가하는 게 아니다. 회령은 동북면 최전선인 육진에서 서쪽 측면을 담당하고 있다.
만일 이곳을 잃는다면 돌출부인 나머지 육진 지역 자체가 고립될 수 있었다. 내륙과 가까운 만큼 침략에도 엄청나게 취약해지고 말이다.
물론 한기는 실책조차 저지르지 않을 정도로 무능하고 소극적인 사람으로 보이지만, 최전방인 회령은 아무 것도 안 하는 것 자체가 실책이다.
보라.
효정이 이때다 싶었는지 회령의 여진족 완충지대를 모두 흡수하려 들지 않는가.
“대응은 없겠군요.”
“전혀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몇 번이고 보고가 올라갔고, 여진족 족장들 역시 대응을 촉구하고 있습니다만 부사는 요지부동이니까요. 책임자가 그러하니 회령 전체가 대응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흠……. 더 높은 사람이 나설 필요가 있겠군요.”
소흡이 나설 정당성이 생기는군.
“맞습니다. 하지만 부사가 무반응으로 일관하니, 누가 회령의 어려움을 알고서 도움을 주려 하겠습니까?”
“방금 함북의 병마절도사를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설마……?”
“이야기는 잘 됐습니다. 회령의 급박함만 잘 전달할 수 있다면 그가 나설 수 있을 겁니다.”
“아.”
석틸리가 안도를 드러냈다.
사실 윗사람이 무능하면 고생하는 건 아랫사람이다. 나서고 싶어도 그럴 여지가 없으니, 고문이라도 당하는 심정이었겠지.
그동안 가슴을 얼마나 졸였겠는가.
“고생은 이제 끝입니다. 이 사람이 돌아왔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