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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75화 (75/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75화

26. 낙향 (3)

며칠 뒤.

대문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손님이 찾아왔다. 앞서 연락을 받은 대로, 권율이었다.

“오셨습니까.”

“…….”

권율은 쉬이 말을 꺼내지 못하고 고개만 깊게 끄덕일 뿐이었다.

이전의 만남으로 나와 권율 사이는 풀어졌으나, 권철에게 부탁해둔 것이 있어서인지 다시 나를 어려워하고 있었다.

피차 부담스러운 상황이지만 한동안은 이런 편이 나았다.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을 겁니다. 하지만 각오가 없다면 지금부터 해두시는 게 좋습니다. 첫 행선지가 경성이니까요.”

“경성이라면…….”

“함경도 경성입니다.”

“……!”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지는 권율이었다. 중요한 일을 한다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겠지만, 그렇게까지 멀리 간다고는 예상하지 못했겠지.

미안하지만 경성은 고작 첫 행선지에 불과하다. 거기에서 일이 성사되거나, 혹 필요하다면 다음으로는 회령을 방문할 테니까.

어쩌면 그 너머도…….

“도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 멀리까지 가는 건가?”

“누군가는 인의와 배려에 관한 것이라지만, 산뜻하게 몸 고생하러 간다고만 알아두셔도 무방합니다. 특별히 재미 볼 건 없어요.”

“으음.”

권율은 침음을 흘렸다.

고작 고생이나 하자고 조선 팔도의 절반을 횡단하다니……. 그로서는 이해하기 힘들겠지만, 나의 잘못은 아니다.

자원한 나와 을룡 둘이서만 고생하겠다는데 여기에 권율을 굳이 합류시킨 사람은 권철이거든. 그러니 마음 편히 부려먹을 생각이었다.

“멍청하게 서 있지 말고, 짐 챙기세요.”

나는 대청에 놓인 짐 보따리를 향해 턱을 돌렸다.

조선은 여행객을 잘 대해주는 문화가 있어, 노자만 충분하다면 필요한 것 대부분은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먼 길을 떠날 사람이라면 져야 할 짐이 있었다. 많지는 않았으나 한 사람이 몰아서 질 정도는 아니었기에, 나는 적당히 사 등분 했다.

나, 을룡, 그리고 여진인 연락책, 마지막으로 권율.

“내가…… 져야 하는 건가? 노복은 쓰지 않고?”

“놀러 가는 거 아닙니다.”

단호한 대답에 권율은 입술을 말고는 대청으로 나아갔다.

나는 을룡에게 말을 준비하라 일렀다. 권율이 폼을 잡기 위해 가져온 나귀는 도로 돌려보내고 말이다.

그동안 각자의 준비가 끝나자 나는 일행을 이끌고 거리로 나왔다. 간만에 안장에 올라타니 고향에 돌아온 듯한 익숙함이 느껴졌다.

“을룡, 네가 앞장서.”

“예.”

을룡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서 먼저 나아갔다. 그를 선두로 네 기의 말이 다그닥, 다그닥 발굽 소리와 함께 나아갔다.

환도로 무장한 선비는 흔하지만 말을 탄 채 환도에 활까지 무장하고서, 짐까지 진 사람이 넷이나 함께 가는 것은 흔치 않은 광경이다.

그래서인지 주변을 걷는 행인은 적어도 한 번쯤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렇다고 따라오는 사람은 없었지만.

숭신방을 나와 안암천을 가로지르니 광대한 논밭과 드문드문 세워진 인가가 일행을 반겼다. 이쪽으로는 정말 간만의 출타라 나는 주변 광경을 눈에 담았다.

* * *

까마득한 시간이 흘러.

일행은 경성 바로 아래에 있는 덕산천(德山川)에 이르렀다. 정면의 멀지 않은 곳에 세워진 성벽을 보며, 나는 일행에게 일렀다.

“내가 선두에 서지.”

으레 고을을 지나갈 때면 병사들이 일행을 붙들기도 했다. 일반적인 여행객의 차림새는 아니다 보니, 한 번이라도 눈길을 받은 탓이다.

그런 때에는 항상 내가 앞에 나서서 해결했다. 이번이라고 다르지는 않지만,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정지.”

경성 입구에 다다르자 과연 병사 하나가 한 걸음 나서며 제지해왔다.

“마침 잘 불렀네.”

“……?”

검문하려는 자신을 도리어 반겨서인지, 병사는 당혹감을 드러냈다.

“미안하지만 나와 이 친구들이 처음으로 경성에 와서 말이네. 여기, 병마절도사 영감을 뵈러 왔는데 길을 몰라서 말이야.”

“아.”

“괜찮다면 안내 좀 해주었으면 하는군.”

병사는 당혹스러운 눈길을 동료에게 보냈다. 병마절도사를 만나러 온 사람이라는데 어떻게 해야 하냐는 기색이다.

하지만 동료는 곤란한 상황에 함께 처하고 싶지는 않았는지 고개를 슬쩍 돌려버렸다. 매정한 사람 같으니라고.

결국, 옳은 일 하겠다고 나선 병사만이 다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슨 용무이시기에…….”

“중요한 일이니 알려줄 수는 없고. 회령에서 판관 노릇 하러 간 새파란 애새끼가 돌아왔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하는군.”

내가 회령을 떠날 때만 하더라도, 회령은 물론 일대에 나의 명성은 자자했다. 연배에 비해 능력이 좋고 친화력이 있어 상관인 장필무와 소흡이 크게 아꼈고, 여진족들의 지지도 높았던 탓이다.

그 명성이 벌써 꺼지지는 않았겠지.

과연 병사는 깜짝 놀라며 허리를 숙였다.

“모, 몰라 뵈었습니다.”

“됐네. 경성에 얼굴 비치러 온 것도 처음이니 알아본다면 오히려 이상하지. 그보다 길 안내에 대해서 대답을 듣고 싶네.”

“물론 안내해드려야지요. 따라오십시오.”

병사는 당혹 반, 부담 반으로 빨갛게 상기된 채 발을 돌렸다. 저벅저벅 걷는 것마저도 어색했지만, 차근차근 길은 나아가고 있었다.

“첨정께서는 함길에서 명성이 자자하신가 보오. 회령에서 일했는데 경성에서도 알아본다니…….”

권율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새삼스러운 소리라서, 오히려 김가화(여진족 연락책의 이름이었다.)가 대신 대답해주었다.

“지금까지도 첨정의 명성은 회령은 물론 강 너머의 여진족들에게도 드높습니다. 만일 이번 일이 잘 끝난다면, 첨정께서는 더욱 유명해지시겠지요.”

“그래서 곤란한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으니, 여진족 친구들이 입이 너무 싸지 않기를 바랄 수밖에.”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들 기본은 하는 사람들입니다.”

뭐, 기본도 못하면 냉혹한 여진족 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

“음…….”

권율은 짧게 침음을 흘리더니, 별 말 없이 다시 앞을 주시했다.

곧 일행은 무사히 감영에 도착했다.

길 안내가 끝나자 나는 허리춤 주머니에서 쇄은 몇 조각을 꺼내 병사에게 내밀었다.

“바쁜데 귀찮은 일을 맡아주어서 고맙네. 삯이라면 부족하지 않을 거야.”

병사는 황송하다는 듯 쇄은을 받아 품에 안았다.

“감사합니다, 나리!”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자 병사는 물러나면서도 재차 허리를 숙이며 떠나갔다. 나는 가볍게 웃어주고는 안장에서 내렸다.

이제 소흡을 볼 수 있겠군.

내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감영의 문지기들도 이해했는지, 그들은 섣불리 길을 막아서지 않았다. 아마 당당하게 문을 열고 들어가도 지켜보기만 했겠지.

하지만 여기서도 나는 안내가 필요했다. 경성과 마찬가지로 이곳 감영은 처음으로 방문하는 것이었으니까.

“지금 병마절도사 영감이 안에 계신가?”

“계, 계십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오셨는지…….”

“개인적으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 말이네. 부디 영감께 전해주시겠나? 회령 판관이 돌아왔다고 말이야.”

“알겠습니다.”

병사는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반각쯤 지났을까. 다급한 발소리가 나더니 감영의 문이 덜컹 열렸다.

“오, 이게 누구신가?”

소흡이었다.

그는 솟을대문을 나와 거리낌 없이 나를 껴안았다. 오랫동안 보지 못한 죽마고우를 대한다면 이러 할까? 예상 외의 친근함이었지만 나 역시 소흡을 끌어안았다.

“이렇게까지 반겨주시니 망극합니다, 영감.”

“망극할 것까지야! 내 간만에 자네를 보니 무척이나 기뻐서 그러네. 여기서 서 있지 말고 안으로 들어서게, 들어서.”

감영으로 들어서자 여러 사람의 시선이 모였다. 도대체 손님이 누구이기에 소흡이 이렇게까지 반기나 싶었나 보다.

소흡은 계속해서 마당을 가로질렀고, 나는 그사이 다른 일행들에게 손바닥을 내보였다. 여기서 기다리라는 뜻이었다.

감영 안은 크고 복잡했다. 골목을 몇 번이나 돈 뒤에야 나는 소흡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책상이 여럿 놓였으나 의자는 둘뿐이었다.

평소에는 개인 집무나 손님 응대에만 쓰나 보군.

“앉게, 앉아.”

“예.”

각자 자리하자 소흡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가 떠난 뒤로, 풀리는 일이 하나도 없었네. 자네를 만나기 전에도 그랬지. 이제 자네를 봤으니 일이 풀리려나 보군.”

“근래에 곤란한 일이라도 있으신가 봅니다.”

“모든 게 곤란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곤란한 것은 그중에서 마땅히 해낼 일이 없다는 걸세. 공 세울 일 없이 진만 빠지는…….”

소흡은 진절머리 난다는 듯 말했다.

내가 기억하는 그는 공을 세우기는커녕 도리어 탄핵만 거듭 당하여 진급에 정체되어 있었다. 그런 그에게 때마침 일방적 승리라는 공을 떠먹여 주었으니, 당연히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도 남겠지.

하지만 보아하니 그는 예나 지금이나 스스로를 위기에 몰아넣었다.

공무라는 게 원래 공 세울 일 없이 진만 빠지는 것 아닌가. 단지 영양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거들떠보지 않는다면, 자연스레 그 부담은 아래로 흘러내리기 마련이고, 윗선에서는 사람 갈아치울 생각을 하게 되는 거다.

뭐, 아직까지도 이러는 걸 보면 스스로의 문제점을 못 느꼈다기보다는, 천성 자체가 너무 게을러서 변할 수 없는 것이겠지.

그동안 요행으로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왔는데 어떻게 이제 와서 정공법에 충실하겠나?

다행스러운 점은 내가 마침 해주려는 말이 소흡의 성격에 딱 맞다는 거였다.

“참으로 곤란한 상황에 처해 있으시군요. 최전방이라지만 이렇게 공 세울 낙이 없어서야 많이 곤란하시겠습니다.”

“그래. 괜히 자원했어. 경상도에서 병마절도사를 지낸 후에는 관직생활이 간당간당하게 되어서 기사회생을 노렸지만 여기서 늘어난 건 주름살과 한숨밖에 없어.”

“회령에서의 승리는 도움이 되지 않았습니까?”

“당연히 도움은 되었지. 하지만 이후로 별다른 일이 없어서, 미봉책에 지나지 않게 되었네.”

“흐음……. 영감께서 이렇게까지 곤란해하시는데, 제가 도움을 안 드리는 것도 도리는 아니겠지요.”

“방책이 있으신가?!”

침울해있던 소흡이 단숨에 표정을 바꾸었다. 며칠 내리 굶었다가 가까스로 음식을 마주한 사람처럼 말이다.

“예. 최근 소인이 판관을 지냈던 회령은 요새 어떻게 돌아가나, 싶어서 수소문을 해보았더니 인근에 여진 부족 하나가 세를 확장하고 있다지 않겠습니까.”

“흠, ‘소인’이라니?”

소흡은 이야기에 집중하는 대신 삼천포로 빠져들었다. 구라……, 가 아니라 설득에 열을 올리기보다는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삼천포에 응해주었다.

“영감의 존안을 뵙고 싶어서 잠깐 사모를 내려놓았습니다.”

“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

“들켰습니까? 사실, 주위에서 시기하는 시선이 생겨 완급조절을 위해 사직했습니다. 군기시에서 첨정을 지내고 있었는데, 신무기 개발에 성공하고 대과에도 탐화로 급제하니 눈치가 보이더군요.”

왕이 싸가지 없이 굴어서라고 사실대로 말할 수야 있나.

적당히 둘러댔지만 사실이 아닌 것도 아니라서, 소흡은 얕게 감탄을 흘렸다.

“호오.”

그리고 그것만으로 나의 근황에 대한 궁금증은 해소됐는지 본론을 재촉했다.

“그래서, 여진족 부족이 어떻게 됐다는 건가?”

“예로부터 조선의 대여진족 정책은 일관적이었습니다. 특정 부족이 너무 강대해지면, 나라에 위협이 되기 전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파괴하는 것이지요.”

“그렇지.”

“때마침 회령에 그런 존재가 있다는 것은 영감께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관할 구역이니까요. 게다가 최근에는 바로 강 너머의 부족들을 흡수하려고 시도하고 있다더군요.”

“버러지 같은 놈들. 감히 국경을 마주하려 들어? 조선을 우습게 아는군!”

“맞습니다. 도발은 물론 선제공격과도 다르지 않은 행위입니다. 국경의 번호들은 일소되는 한이 있어도 그들이 충성을 맹세한 대상인 조선에 의해 일소되어야지, 어디서 굴러먹었는지 모를 개뼉다구가 그래서야 되겠습니까?”

“맞네. 맞아!”

소흡은 열을 올렸다. 하지만 진지하게 현 상황에 공감했다기보다는, 자신이 공을 세울 일거리가 생겨 기쁜 것 같았다.

만일 그 개뼉다구, 그러니까 효정을 칠 수만 있다면 그토록 목말라해 온 공을 세울 수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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