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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74화 (74/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74화

26. 낙향 (2)

“병마절도사가 움직일 수 있는 명분을 말해보게. 효정의 존재와 그의 행동이 어떻게 조선에게 해가 되나?”

나는 연락책이 한동안 고민할 거라 생각했다. 어쩌면 말을 지어내야 할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연락책은 생각할 필요도 없다는 듯 금세 대답했다.

“효정은 일대의 다른 여진족 부족들과 경쟁하는 대신, 조선을 접하고 있는 회령 일대의 부족들을 흡수하기로 했습니다. 이건 조선을 우습게 생각한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

조선과 여진족 영역 사이에는 두만강이라는 명백한 자연 국경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조선과 여진족은 항상 충돌해왔다.

양측 사이에는 국지전이 아닌 전면전이 벌어진 적도 많았다. 조선은 명나라와 마찬가지로 통일된 기마민족의 저력을 잘 알고 있었고, 강대한 부족이 발생할 경우 선제공격을 통해 분쇄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갈 곳이 없어 어디라도 정착해야 하는 군소부족도 아닌 효령이 조선과 국경을 마주한다는 것은 대담하면서도 오만한 선택이었다.

“그를 제거할 필요성을 상주 드릴 수는 있겠군.”

마침 최근 영의정 인맥이 생겼다. 그가 힘을 쓴다면 조선의 입장에서 별것도 아닌 여진족 부족 따위는 능히 없애고도 남았다.

물론 그에게도 정적은 있겠지만, 고작 여진 부족 하나를 없애는데 권철이 무슨 이익을 보겠나? 별다른 견제도 받지 않을 터였다.

“그래도 물증이 있다면 확실할 텐데.”

“부족장들은 효정에게 자신과 자신의 부족들이 조선의 관리인 첨정 나리의 휘하임을 이미 밝혔습니다. 그럼에도 효정은 압박을 거두지 않았지요.”

“조정에 전해줄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 입장은 확실하게 됐군.”

조선을 우습게 생각하고 국경을 맞대기로 한 효정에게, 조선 관리의 이름을 팔아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지만 조선은 업신여겨도 나를 업신여기면 안 되지.

기분 나쁘잖나?

안 그래도 도와줄까 싶던 차에, 결정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좋아. 나서보도록 하지.”

“……!”

여진족 연락책은 눈이 동그랗게 떠지더니, 황공하다는 표정으로 무릎을 꿇었다.

“감사합니다, 첨정 나리. 부족장들은 물론, 부족민들까지 나리의 인의와 배려에 감사드릴 것입니다.”

“듣기는 좋지만 아직 확실한 건 없네. 말했듯 이 일은 나 혼자서 해결할 수는 없어. 만일 요주 인물들의 설득에 실패하면 그걸로 끝이야.”

“나서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뿐입니다.”

“쉬고 있게.”

나는 빈 별방을 가리켰으나 연락책은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지금 당장 회령으로 돌아가, 부족장들에게 이 희소식을 전할까 합니다.”

“헛물 들이킨 게 될 수도 있어. 다급한 마음은 알지만, 행동만 앞선다고 쌀이 밥이 되지는 않지. 돌아가더라도 일의 경과를 보고 돌아가게.”

“……알겠습니다.”

연락책은 조금 진정된 채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별방으로 향했다.

그와의 대화가 끝나자 곁에서 듣고 있었던 을룡이 나섰다.

“다 공자님께 심모원려가 있음은 압니다만, 영의정의 손녀와 혼례가 성사되지 않았습니까? 만일 지금 자리를 비우신다면 영의정이 어떻게 반응할지…….”

“안 그래도 직접 찾아가서 부탁할 일이 있는데, 곤란하게 됐어. 하지만 나를 꼭 붙잡고 싶어 했으니 어지간하면 들어주겠지.”

“그렇다면 다행이겠습니다만.”

“너도 갈 테냐?”

“회령은 위험한 곳입니다. 이번에는 관리가 아닌 개인으로서 방문하는 것이니, 호위도 안 붙겠지요. 이런 때에 제가 밥값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을룡은 허리춤에 차고 있던 환도를 탁탁 두드렸다. 아직 누군가를 베어본 적은 없지만, 나와 함께 고생길을 썩 걸어봐서인지 실력은 남달랐다.

“든든하구나.”

“떠나실 것으로 알고 준비해두겠습니다.”

“천천히 해 둬.”

* * *

며칠 뒤.

나는 다시 권철의 저택을 방문했다. 당연하지만 그에게 한동안의 출타와 조정에서 힘 좀 써달라는 일 때문이었다.

아무리 소흡을 앞세워 효정을 격파할 필요성을 설파하더라도, 영의정이 작정하고서 편을 들어주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중대한 차이를 만들어낼 테니까.

설령 이 때문만이 아니라도, 혼례를 올릴 길일만 잡는 이 시점에서 신부 될 사람을 남겨두고 훌쩍 떠나는 것도 예의는 아니었다.

-쿵, 쿵.

가볍게 문을 두드리니 일전에 봤던 문지기 선비가 나를 반겨주었다.

“오셨습니까.”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니 문지기가 말을 이었다.

“대감께서는 사랑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곧 다과상을 내어올 터이니, 말씀 나누시지요.”

“예.”

한 번 방문했던 장소라 문지기는 굳이 안내하지는 않았다. 대신 다과상을 준비하기 위해, 주방이 있을 집 뒤편으로 나아갔다.

그동안 인기척을 느낀 권철이 사랑방 문을 열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썩 반가운 표정이 아니었다.

처음 방문하겠다며 연락할 때도 조금은 운을 떼어놓았지만, 애초에 이런 시점에서 굳이 방문한다는 것 자체가 희소식은 아니기에.

권철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일은 실현되어야 했다.

“왔나?”

“인사드리겠습니다.”

“인사는 무슨……. 안으로 들어오게. 중요한 할 말이 있는 것 같으니.”

나는 마다하지 않고 사랑방으로 들어섰다. 그의 방은 여전히 크고 넓었으며 담백했으나 가치 있는 장식이 즐비했다.

처음 봤을 때는 꽤 놀랐지만, 몇 번이나 봤다고 벌써 별 감흥이 없었다. 권철이라고 다르지는 않겠지.

과연 그는 나에게만 시선을 준 채, 그리고 여전히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을 한 채로 입을 열었다.

“말하게.”

“이미 짐작하고 계신 듯하니,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회령으로 갈 일이 생겼습니다. 송구스럽지만 양해해주셨으면 합니다.”

“…….”

권철은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

권철은 지금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다.

“대감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만, 혼례는 부차적인 일일 뿐이니까요. 이미 서로를 위해 힘쓰기로 약조한 사이가 아닙니까?”

“이럴 때만 말인가?”

“언제나지요. 단지 지금도 언제나의 한순간일 뿐입니다.”

“능구렁이 같으니. 지금도 느끼고 있는 바이지만, 자네 같은 사람은 대하기가 참 피곤해. 조금이라도 실리 대신 윗사람에 대한 예의를 생각해주면 안 되겠나?”

“그렇게 되면 전하께서는 저를 더 어려워하지 않으시겠지요.”

“……흥.”

권철이 나를 포섭하려는 가장 큰 이유는 자신이 사라진 뒤에도 안동 권씨의 세를 보전하기 위함이지만, 동시에 선조를 견제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의 말로는 선조가 나를 어려워한다는데…….

솔직히 선조가 면전에서 지랄하는 것만 기억하고 있는 나로서는 놈이 어려워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권철 본인은 그렇게 생각한다는데 어쩌겠나.

“뻔뻔해지려는 김에, 한 가지 부탁도 더 드리고자 합니다.”

“말하게.”

“제가 떠난 뒤 오래지 않아 함경북도 병마절도사가 조정에 인가를 요청할 일이 생길 겁니다. 그때 편을 조금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함경북도 병마절도사? 소흡?”

“맞습니다.”

“그도 자네와 연이 있나?”

“예.”

“……도대체 어디까지 손을 뻗어두고 있는 건가, 자네는?”

질렸다는 표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흥미롭다는 기색이기도 했다. 장차 손녀사위가 될 사람이 발이 넓다면 희소식 아니겠나.

물론 소흡처럼 영양가 없는 사람을 알아둔다고 좋을 건 없지만, 나는 그와 처음 연을 맺을 때는 일개 첨정이었고 지금은 종사품을 찍고서 사직한 몸이었다.

그런 위치에서 병마절도사를 움직이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다. 스스로 생각해봐도. 권철도 그걸 읽은 것이겠지.

“부탁드리겠습니다. 돌아올 때 기념품이라도 하나 가져오지요.”

“흥……. 하지만 혼례를 미룬 대가는 각오해야 할 걸세.”

“만일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면 저에게서 손을 떼신대도, 할 말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잘 풀린다면 각오는 대감께서 하셔야 할 겁니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발언이었지만 권철은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는 듯, 그 주제는 넘기고서 말했다.

“아들 녀석은 어떻던가? 일전에 다시 만났다면서.”

“별다른 일은 없었습니다. 그가 지금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되리라는 것은 알고, 또 계기가 필요하다는 것도 알지만 지금은 이르니까요.”

일단은 나에 대한 오해를 푼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권철이 워낙 내 앞에서 권율을 깐 탓에……. 시작은 좋지 못했지만, 다시 만나서는 자존심을 조금 세워주는 정도로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권철은 여전했다.

“자네 말대로 지금보다야 더 못날 수는 없겠지. 이미 밑바닥이니 말이야.”

최대한 빨리 권율이 밥값을 해야 할 텐데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는데, 문득 권철이 말했다.

“이번에 자네가 가는 곳에 율도 데려가지 않겠나?”

“……갑작스럽군요.”

“방해가 된다는 건 알지만, 자네가 말했다시피 우리는 서로를 위해 힘쓰는 사이니까. 아직 사람 됨됨이가 덜된 아들 교육을 도와주는 것도 괜찮겠지?”

권철은 무척이나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번에 혼례를 미뤄놓고 부탁까지 걸어놓은 것을 복수하고 싶었나 보다. 나의 명분을 그대로 읊은 것이라, 마다할 수도 없었다.

“크흠.”

“이래서 평소에 말의 근거를 댈 때는 조심해야지. 그래도 마냥 자네 고생하라고 붙이려는 게 아닐세. 비록 한량에 불과하지만 재주가 아예 없지는 않을 테니까.”

활은 좀 쏘겠군. 몸도 잘 놀릴 테고.

하지만 이 정도로는 안 된다.

“제가 이번에 할 일은 무척이나 위험합니다.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만.”

“세 아들놈 다 합쳐도 자네만 못해. 그리고 막내인 율은 그중에서도 제일 못났지. 만약 율이 죽어서라도 자네를 지킬 수 있다면, 그것대로 나쁘지 않아.”

“여전히 가혹하시군요.”

“아비의 고생을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으려는 못된 자식놈들 이뻐할 나이는 지났네.”

“좋습니다. 막내 분과 동행하지요. 이번에는 단단히 주의를 시키십시오. 자칫 죽을 수도 있다는 건 농이 아닙니다. 그가 죽어서 저를 지킨다면 고맙겠지만, 실수해서 저를 죽인다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무려 여진족을 상대하는 일이다. 싸움이 났을 때 현장에 있을 경우는 최대한 피하겠지만, 무엇도 약속할 수 없었고 어쩌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일이 몇 번은 있을지도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는 질서가 똑바로 잡혀야 했다. 별생각 없이 저지른 실수로 죽음을 재촉할 수 있으므로.

설령 권율이 아니라 충무공 이순신이 한 트럭 딸려오는 일이 있어도 상하 관계는 분명하게 해둬야 했다. 나도 주의시키겠지만, 미리 권철이 압박을 해놓으면 좋겠지.

“알겠네.”

거래에 조건이 붙었지만, 권철이 이것으로 만족한다면 나쁠 것 없었다.

“대감마님.”

그때 방문 너머에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권철이 방문을 여니, 비자 둘이서 각자 다과상을 하나씩 안은 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고 가게.”

“예, 마님.”

비자들이 쪽마루 앞에 상을 내려놓자, 권철은 내가 나서기도 전에 다과상을 안으로 들였다.

있는 집이라 그런지 진귀한 한과가 접시 한 가득이었다.

“들게.”

“감사합니다.”

나는 마다하지 않고 도라지로 만든 정과(正果)를 집어 들었다. 재료에 설탕을 입혀 달콤하게 만든 것.

조선에서 만들어지지 않는 설탕을 쓰는 간식이라 무척이나 진귀한 것이었고, 과연 기대대로 황홀한 단맛이 혀끝에서 느껴졌다.

“어떤가?”

“맛있군요.”

“다행이로군.”

“돌아갈 때 좀 챙겨가겠습니다.”

뻔뻔한 소리를 했지만, 권철은 코웃음이나 한 번 치고 말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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