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73화
26. 낙향 (1)
간만에 고향을 찾았다.
아버지는 무척이나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는 무척이나 하고 싶은 말이 많은 표정으로 나를 사랑방으로 안내했다.
‘무슨 얘기를 하실지는 너무 빤하지만.’
나는 권철이 제안한 혼사를, 아버지의 결정을 따르겠다는 식으로 돌려 긍정한 적이 있었다.
당연하지만, 나 같은 별종이 아니고서야 누가 영의정이 제안하는 혼사를 거절하겠나?
마침 아버지께서 호들갑을 떠는 것을 보니 최근 권철이 매파를 보낸 모양이었다. 그리고 흠흠, 헛기침을 하면서도 입에 미소가 가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은 오히려 귀엽기까지 했다.
‘내가 이미 권철과 합의한 일이란 걸 알게 되면 깜짝 놀라시겠군…….’
물론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 아버지 나름대로 행복한 착각에 빠져 계시니, 나는 한껏 어울려주기로 했다.
“해주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음, 그래. 듣고 너무 놀라지는 말거라.”
“알겠습니다.”
“일전에 네가 회령으로 떠나기 전에, 내가 너에게 부부의 연을 권했던 적이 있다.”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시에는 막 혼례를 올린 여인을 고향에 두고 떠나기도, 오지로 데려가기도 미안해서 불가피하게 마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 나도 당시에는 걱정이 됐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아주 잘한……. 크흠! 너의 뜻을 존중하고 있다.”
얼마나 좋으신지 말까지도 헛 나오는 아버지였다.
“망극합니다.”
“그래. 하지만, 지금은 사직도 했겠다, 달리 떠날 일은 없잖느냐?”
“아버지께 일언반구 없이 사직부터 해서 송구할 뿐입니다.”
“아니다, 아니야. 너는 똑똑한 아이이고, 또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을 테니 사직을 했다고 책망할 생각은 없다.”
“감사합니다.”
“흠흠.”
아버지는 헛기침을 하며 괜히 뜸을 들였다. 나 기대되라고 뜸 들이는 건 아니고, 아버지 스스로가 기쁨을 감당하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아들의 사직을 입에 담는 이 순간에도 입에 미소가 떠나지 않고 계시니…….
그렇게 한참이나 뜸이 들어가 쌀이 밥이 되고도 남았을 때가 되어서야, 아버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영의정을 지내고 계시는 권 대감께서 일전에 나를 찾아오셨다.”
매파를 보낸 게 아니라 직접 찾아왔다고? 혹시라도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고 싶었나 보다. 아들인 내가 워낙 별종이다보니, 그게 누구 영향인가 싶어서 겁이라도 난 모양이지.
하지만 이 집에서 비정상은 나뿐이고 아버지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권철은 의외로 잘 풀린다 싶어 좋았겠군.
“그렇습니까?”
“그래. 그리고 영의정 대감께서는 한동안 너에 관해 물어보시다, 자신의 밑에 아직 혼례를 치르지 않은 손녀가 있는데 연을 맺어주면 어떻겠냐고 물어보시더구나.”
“으음…….”
나는 괜히 고민하는 척을 했다. 그동안 아버지께서만 너무 좋아하셨으니, 나도 재미를 봐야지 않겠나.
보통의 집안이라면 영의정의 제안이란 부자(父子) 모두에게 고려나 고민 따위는 무의미했지만, 나는 달라서…….
아버지께서는 그런 나의 반응에 입이 바짝바짝 타는지 입술까지 핥으셨다.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아니, 혹시라도 네가 내키지 않는 부분이 있다면 들어보고 싶구나.”
결정권을 넘겼음에도 무척이나 조심스러워하는 아버지였다.
혼례도 좋지만. 양가의 동맹이라 할 수 있는 나와 권 씨네 여식 사이에 문제라도 생긴다면 그것대로 큰일!
하지만 기우였다.
내가 직접 본 권철의 손녀이자 권율의 딸에게 특별히 문제는 없었다. 오히려 놀랄 수도 있었던, 갑작스러운 외인의 방문에도 한 치의 흔들림이 없었던 것을 보면 보통 사람보다도 나았다.
그런 사람이라면 마다할 이유는 없지. 짓궂은 장난도 이만하면 충분했다.
“소자로서는 영의정께서 혼례를 제안하셨다니 무척이나 기쁘지만, 혹시라도 아버지께서 다른 생각이 있으실 수도 있으니까요.”
“아니다, 나 역시 영의정 대감의 제안에 어찌 다른 생각이 있겠느냐. 너도 좋다니 잘 되었다. 영의정께 좋은 소식을 드릴 수 있어 기쁘구나.”
아버지는 희희낙락한 표정으로 말했다.
“중요한 이야기는 다 끝났지만, 간만에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밥이라도 먹고 한숨 자고 가거라. 어머니께서도 많이 그리워하고 계신다.”
“알겠습니다.”
“그래. 이만 물러나거라.”
나는 허리를 꾸벅 숙여 예를 표하고는 나섰다. 그러자 뒤에서 들려오는 드르륵, 서안 소리. 권철에게 보낼 답장을 쓰려는 모양이다.
머잖아 결혼하게 되겠군.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 나는 도성으로 돌아왔다. 아직까지는 노는 몸인 만큼, 느긋하게 고향에 머물러도 무방하겠으나 을룡의 전언이 있었다.
손님이 찾아왔다고. 그리고 그는 보통 손님이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오니 저택 식구들과 함께 이국적인 용모를 한 사내가 나를 반겼다.
“판관 나리.”
판관이라.
나에게는 오래전의 직책이었다. 이국적인 용모를 한 사람이 나를 판관이라 부를 경우는, 오직 한 가지뿐이다.
“회령에서 오셨군.”
“예.”
여진족.
그는 날카롭고 굳센 인상을 하고 있었으며, 피부색도 조금 짙었다. 슬슬 봄철도 무르익어 날이 풀리는 요즘에 털옷은 과한 감이 있지만, 그에게는 잠깐 방문했을 뿐인데 굳이 조선의 복장을 구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나는 집에서 받아온 소소한 선물들을 저택 식구들에게 넘기고는 물었다.
“누가 보내서 먼 도성까지 다 찾아오셨는가?”
“김자강입니다.”
“간만에 듣는 이름이로군.”
강을 사이로 회령 맞은편에 있던 부족의 족장이다.
회령 주민이 소를 도둑 맞은 일로 그를 찾아갔는데, 경쟁자 숙청을 도와줌으로써 해결한 일이 있었다.
이후로는 조선이 회령 일대의 여진족을 소탕하려 들자, 내가 나서서 적절하게 중재하기도 했고 말이다. 그때 김자강을 포함한 여러 족장이 충성을 맹세했으나 지금의 나에게는 까마득한 이야기였다.
불과 반 각 전까지만 해도. 그리고 지금은…….
“김자강이 굳이 나를 수소문해서 연락하려는 걸 보면, 보통 일이 생긴 게 아닌가 보군.”
“예상이 맞으십니다.”
“자세히 말해보게.”
“오래전, 회령 일대의 여진족을 모두 몰살시키려던 율호를 판관의 기지로 처단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한동안은 평화로웠으나, 판관께서 사라지자 효정이라는 자가 거리낌 없이 세를 확장하기 시작했습니다.”
“흠…….”
세력 싸움이 복잡한 곳에서는 흔한 일이다.
일대의 강자 하나가 사라지면, 남아있던 자 중 하나가 새로운 강자로 등극하거나……. 옆 동네에 있던 녀석이 기어와 접수하려 들거나.
이번에는 단지 후자의 일이 벌어졌을 뿐이다.
어느 정도는 예견되어 있던 것이, 효정은 율호 이상으로 강대한 자였다. 회령 일대의 여진족들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효정이 마음을 먹었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심각한 상황이라는 건 알겠군. 하지만 나는 관직을 내려놓았네.”
여진족 연락책의 얼굴이 당혹으로 번졌다.
뭐, 그곳에서는 도저히 방도가 없으니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래전 떠난 나를 찾은 거겠지. 실망감은 이해한다.
그런데 정말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지금의 나는 일개 한 사람에 지나지 않네. 설령 관직을 내려놓지 않았더라도, 회령에 손을 쓸 수 있는 관직이 아니라면 거기 일에 간섭하는 건 월권이야.”
“판관 나리…….”
“미안하게 생각하네.”
연락책은 입술을 말았다. 그새 바싹 마른 채였다. 한동안 착잡한 표정으로 침묵만을 지키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러 부족장들이 함께 충성을 맹세하여 판관 나리를 따르기로 약조하였는데, 어찌 의지할 곳이 없어 찾아온 사람을 이렇게 박대하십니까?”
연락책은 여진어로 호소했다. 감정의 과잉인가, 아니면 익숙하지 않은 조선어로 말하기 힘들었을 뿐인가.
한동안 잊고 살았던 언어였으나 한 번 들어보니 나에게도 감각이 돌아왔다. 나 역시 여진어로 답을 해주었다.
“족장들이 충성을 맹세했다고는 했으나, 이후로는 나에게 충성을 증명하고자 한 것이 하나도 없는데 어찌 휘하로서 의무는 행하지 않고 권리만 찾으려 하는가.”
능숙하게 여진어로 말해서일까. 연락책의 당혹이 한 층 더해졌다.
“먼저 도의를 다하지 않고 상대에게 도의를 요구하는 건 예의가 아니지. 힘든 상황에 처했음은 알겠으나 억지를 부린다고 내가 못하는 것이 가능해지는 건 아닐세.”
연락책은 차마 더 할 말이 없었는지, 고개만 떨굴 뿐이었다.
나로서도 착잡한 상황이었다.
쉽사리 개입하지 못하는 이유는 지금의 내가 일반인이기 때문이지, 김자강이나 다른 부족장들에게 악감정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말한 대로 그들은 충성을 맹세한 자로서의 의무는 행한 적이 없지만, 내가 먼저 요구한 것이 없기에 그들로서 할 말이 없는 상황도 아니었다.
율호를 처단한 후에는 내가 임기가 되어 회령을 떠날 때까지 정말 평화로웠고 말이다. 그것도 다 부족장들이 나에게 협조해준 덕 아니겠나.
“후…….”
나는 쓰게 한숨을 토했다.
“말했듯 지금의 나는 어떠한 권력도 없네. 설령 회령에 가더라도, 단기필마 이상은 되지 못하겠지. 물론 단기필마로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지만 부족장들은 실망만 하게 될 거야.”
“……판관 나리.”
“그새 부사는 바뀌었겠군.”
나보다 먼저 회령에 부임했던 장필무가 나와 함께 2년을 보냈기 때문에 지금쯤이면 다른 사람으로 바뀌고도 남았을 터였다.
“누구인가?”
“한기(韓琦)라는 사람인데, 늙고 노쇠하였으며 잔머리만 조금 굴릴 뿐이지 자리보전에만 급급한 자입니다.”
“병마절도사는?”
“그대로입니다.”
소흡.
율호의 계략에 조선은 무식하게 회령 일대를 쓸어버리기로 했으며, 이때 지휘관이자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로 온 사람이 소흡이었다.
그는 욕심이 많은 자였고 덕분에 나는 쉽게 소흡을 조종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는 소흡 역시 만족할만한 결과가 나와, 소흡은 나에게 무척이나 호의적이었다.
“그것이 중요합니까?”
“소흡이 아직 남아있다면 도와줄 방도가 아주 없지는 않을 테지.”
“……!”
전전긍긍하던 연락책이 단숨에 반색했다. 마치 죽다 살아난 사람이 있으면 이러 할까.
“하지만 무턱대고 도와줄 수 있다는 뜻도 아닐세.”
연락책은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나설 여지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그에게는 다행이었다.
“일반인에 지나지 않은 내가 회령에 가더라도 해줄 수 있는 건 없네. 하지만 병마절도사라면 다르겠지.”
위치가 위치인 만큼 병마절도사가 변방의 일에 함부로 개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소흡은 욕심이 많고 귀가 얇으며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이다. 다시 이용하지 못할 것도 없다.
문제는 그것이 가능한 명분이 있느냐다. 고작 변방의 부족들을 살리겠다고 여진족 사이의 자중지란에 개입할 수는 없잖은가?
최전방의 병마절도사인 만큼 재량권이 없지는 않으나 조정의 인가 없이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반역의 낙인을 각오해야 했다.
소흡이 그것까지 감수하지는 않을 터.
“병마절도사가 움직일 수 있는 명분을 말해보게. 효정의 존재와 그의 행동이 어떻게 조선에 해가 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