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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71화 (71/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71화

25. 아직은 보통 사람 (2)

나는 대문을 두드렸다.

불청객이라는 것은 안다. 꼭 권율에게만 아니라, 비정상적인 관계란 누구에게나 곤란할 테니까.

하지만 오해가 있다면 서둘러 풀어야 하지 않겠나. 두고두고 볼 일이 많을 텐데, 시간이 약이랍시고 미뤄두기만 한다면 독이 될 터였다.

-끼익.

대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노복이 나타났다. 무척이나 당황한 표정이었다. 마치 폭탄이 마당으로 굴러들어온다면 이런 표정이 나오지 않을까 싶다.

나는 졸지에 장인이 될 권율보다 상전이 된 사위다. 그렇다면 집주인인 권율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대문을 열어주어야 하나?

설령 그것이 맞다 하더라도 문부터 열었다간 권율에게 혼날 터였다. 노복의 주인은 권율이었으니까.

그렇다고 나의 기분을 탐탁지 않게 했다가 권철의 귀에 들어간다면…… 더 곤란한 일이 벌어지겠지.

노복에게는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격이었다.

“저, 저기…….”

주저하는 모습을 보니 짓궂은 장난이 하고 싶어졌다.

“어서 문 열지 않고, 가만히 서서 무엇 하는 건가?”

“소, 송구합니다. 서둘러 열겠습니다.”

노복은 기겁하며 대문을 열었다. 아무래도 자기 주인보다는, 그 주인의 아버지 빽을 가진 내가 더 무서운 모양이었다.

아니면 당장의 위세에 질렸다던가. 법보다 주먹이 가깝다는 말처럼, 지금은 내가 권율보다 더 노복과 가깝지 않은가?

“하하하…….”

썩 재미있는 상황이었지만, 노복을 정말로 곤란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이럴 때는 한 사람이라도 눈치가 있어야 하는 법이지. 그리고 그걸 상대에게 기대해서도 안 되는 법이다.

“농이었네. 막 열어둔 문은 살포시 닫아두고, 집 주인에게 나의 방문 의사를 전해주게. 내키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알고서 찾아온 것이니, 만남을 절실하게 바란다는 것도 전해주게.”

“아! ……가, 감사합니다요!”

노복은 감격스런 표정을 지으며 허리를 꾸벅 숙였다. 이제 권율의 뜻만 따르면 되니, 적어도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 일은 없었다.

그에게는 부처의 대자비가 따로 없는 배려였다.

“서둘러 다녀오겠습니다.”

“그러게.”

가보라는 뜻으로 가볍게 턱짓해주니, 노복은 재차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는 물러났다. 대문을 거의 닫아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노복은 오래지 않아 돌아왔다. 희소식과 함께였다.

“듭시랍니다.”

“다행이군.”

노복은 한결 편한 표정으로 다시 대문을 열었다. 나는 그의 안내를 받아 권율에게 다다랐다. 뭐, 여기가 권철의 저택처럼 휘황찬란한 것은 아니라서 사족 같은 일이었지만.

마당 바로 맞은편에 권율이 서 있었다. 그는 마당보다 높은 쪽마루에 서 있었으나, 나의 시선을 받자 떫은 표정을 지으며 슬금슬금 내려왔다.

역시 아버지 빽은 무섭구나.

“부득불 방문을 청한 듯하여 송구합니다. 직전에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인사드리지 못했습니다. 영의정 대감께서 조금은 유난이 있으시더군요.”

“…….”

마냥 떫은 얼굴을 하고 있던 권율의 표정이 달라졌다. 나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에는 이제 경계보다는 호기심이 가득했다.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전주 이가의 순신이라고 합니다.”

“음……. 이미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나는 안동 권가의 율이라고…….”

말의 끝을 어떻게 내야 할까, 아직까지는 조심스러워하는 권율이었다.

“영의정 대감께서 계실 때는 어쩔 수 없겠습니다만, 지금처럼 주위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경우에는 편하게 대해주십시오. 저는 그 편이 편합니다.”

“그런가? 그럼……, 알겠네.”

“감사합니다.”

“음.”

“첫인상이 안 좋았다면, 오해를 풀 수 있었으면 합니다. 길일에 대접을 해드리고 싶으니 부디 마다하지 말아주십시오.”

“……때가 되면 알려주시게. 약간의 여유는 가지고서. 시간이 나면 응하도록 하겠네.”

나는 고마움을 미소로 가볍게 표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 권율에게는 다사다난했을 오늘이다. 손님이라면 주인이 피곤하기 전에 물러나줘야지 않겠나.

“오늘 노고 많으셨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살펴 가시게. ……이 공(公).”

권율의 배웅에 나는 갓을 기울이며 발을 돌렸다.

* * *

성저십리, 한강변 남쪽.

주변은 온통 잡초로 무성했으며 강이 보이는 쪽에는 갈대가 듬성듬성 나 있었다.

주변에는 논밭이 없었으며 민가는 뜸했다. 비가 조금만 세차게 온다, 싶으면 금세 수몰되는 지역이라 그렇다.

조선시대에서는 흔한 활질하기 좋은 교외였다. 그래서 이순신과 신립을 여기로 불러냈다.

“공자님.”

제일 늦게 도착한 사람은 신립이었다. 그렇다고 약속 시각에 늦은 것은 아니다.

단지 나를 포함한 두 명의 이순신의 행동이 빨랐을 뿐.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신립이 물었다.

“저야 평소처럼 바쁘기 지냈지요. 사직하기 전과 달라진 게 하나도 없습니다. 하하하.”

류성룡 만나랴, 이순신 만나랴. 나의 사직 소식에 놀라워하며 찾아오는 사람들도 대접해야 했다. 그러다보면 약속도 새로 잡혔다.

오늘도 그 일환이라 할 수 있었다.

머지않은 미래에 권율의 여식과도 혼례를 올릴 텐데, 그때가 되면 얼마나 바빠질는지. 한동안은 편히 쉬기 글렀다.

“공자님께서는 성실한 분이시니까요. 항상 바쁘실 수밖에요.”

“하하하. 저는 신 공(公)께서 생각하시는 것과는 정반대인걸요. 마음 같아서는 보름이고 달포고 사랑방에서 등판만 지지고 싶습니다.”

“공자님…….”

신립이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실은 저 역시 그렇습니다.”

“하하하!”

“하하.”

신립은 나와 함께 한바탕 웃고는, 앞으로 가르치게 될 또 다른 이순신과도 통성명을 나누었다.

이순신은 무척이나 단호하고 건조한 사람이라, 신립은 꽤 당혹해했다.

“이 친구…….”

“왜요?”

“어찌 사람이 이렇게까지 재미가 없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하하하. 그 이순신은 이 이순신과는 정반대의 사람이긴 하지요.”

“쩝.”

신립은 곤란하다는 듯 입맛을 다셨지만, 이순신은 그저 돌덩이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시선이 마주치자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예의 바른 사람이다.

단지 자신이 하는 만큼 남들도 하기를 기대하는 사람이라, 대하기 어려울 뿐이지.

“서로 얼굴을 익혔으면, 이제 가장 중요한 일부터 해결합시다.”

두 사람이 모인 이유는, 바로 이순신의 무과 급제를 도와주기 위함. 그러니 잡담은 나중에 천천히 나누어도 되지 않겠는가.

나 역시 겸사겸사 시위를 당겨보고자 활을 가져왔다.

회령에서 여진족들과 함께 말 타고 날아다녔던 나지만, 도성으로 돌아와서는 좀처럼 시위를 당겨볼 일이 없었다.

이런 자리가 아니라면 또 언제 활을 쏘겠나.

“공자님, 그건…….”

신립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활로 향했다.

연한 금빛으로 반짝이는 철궁. 일전에 문중 어른으로부터 태종대왕의 활이랍시고 받은 것이었다.

뭐, 활의 정체성을 굳이 따지자면 태종대왕이 직접 쓰고 다녔던 활이 아니라, 세자를 박탈당한 양녕대군에게 경고하기 위한 하사품이었지만 말이다.

“어떻습니까?”

“때깔은 좋군요. 제가 직접 당겨봐도 되겠습니까?”

“안 될 이유 없지요.”

나는 순순히 집안의 가보를 넘겼다.

중요한 물건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애지중지할 정도로 신성한 물건은 아니었다.

신립은 건네받은 철궁을 촤악 당겨보고는 감탄했다.

“군에서도 놋쇠나 통짜 쇠로 만든 철궁을 다뤄볼 일은 많지만, 이 녀석은 아예 육량궁(六兩弓) 느낌이 나는군요.”

“그래요?”

육량궁은 육량전이라는 무척 무거운 화살을 날리는 활이다. 때문에 시위를 당기는 데만 상당한 힘이 필요했다.

이러한 특징으로 육량궁은 실전보다 무과에서 응시자의 완력을 시험하는데 쓰였다.

“잘 됐군요. 이 사람의 활이 육량궁과 느낌이 비슷하다면, 이 공(公)이 무과를 준비하는데 큰 도움이 되겠지요.”

내가 가볍게 턱짓하자 신립은 긍정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철궁을 이순신에게로 건넸다.

이순신은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철궁을 받아들었다.

“저도 한 번 당겨봐도 되겠습니까.”

“편하게 쓰십시오.”

“감사합니다.”

이순신은 가볍게 예를 표하곤, 자세를 갖추어 철궁의 시위를 당겼다.

평소 무덤덤했던 이순신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그럼에도 시위 당기는 속도는 한참이나 느렸으며 손을 떨기까지 했다.

육량궁은커녕, 철궁을 다루는 것조차 이번이 최초일지도 모르겠다.

별다른 말도 없이 끙끙대기만 하는 이순신의 모습에 결국 신립이 나섰다.

“고작 시위를 당기는 데 악쓰지 말게. 팔이 상하는 수가 있어.”

“…….”

신립의 단호한 경고에 결국 이순신은 아쉬운 표정으로 시위를 조심스럽게 놓았다.

“과에서 이런 활을 다뤄야 한다니, 많이 부담스럽습니다. 한동안 무예를 수련한 저마저도 버거운데, 이런 활을 첨정께서는 어떻게 가지고 계셨습니까?”

사실대로 말하면 두 사람 모두 기겁하겠지.

“우연히 얻게 된 겁니다. 나름 사연이 있는 물건이라……. 마냥 처박아두지는 못하고 애물단지와 애지중지 사이의 느낌으로 다루고 있지요.”

굳이 하지 않은 얘기지만, 이순신은 철궁을 나보다도 어려워했다.

내가 왕년에는 최전방에서 구른 몸이기도 하지만 이순신보다는 몇 살 어리다. 그 점을 감안하면 이순신의 무력은 정말 평균 이하였다.

과장 조금 보태자면, 일반인과 비교하더라도 강하다는 소리는 못 들을 정도가 아닐까?

물론 그가 가진 천재성을 감안하면 이 정도의 패널티는 오히려 최소한의 양심이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를 모르는 신립에게 이순신은 썩 탐탁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자네는 어쩌다 무과를 준비하게 된 건가?”

순전히 궁금해하기보다는, 고작 이 수준으로 무과를 노리냐는 책망과도 같았다. 그러나 이순신은 별다른 동요 없이 담담히 답했다.

“제 장인이 병서에 조예가 있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언젠가 저에게 말하기를, 특별히 문과를 준비하는 게 아니면 무과를 노려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더군요.”

“병서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 혹시 내가 아는 사람인가?”

“모르실 듯합니다. 오래전 보성군수를 끝으로 사직하신 분이라.”

“흠…….”

신립은 썩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군수가 낮은 관직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높은 관직은 아니기에.

하지만 여기에는 신립이 아직 모르는 반전이 있었다. 아마 나중에라도 알게 된다면, 이순신을 보게 되는 시선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신 공(公).”

나는 신립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예?”

“이 공(公)이 아주 배경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겠지만, 전 영의정 대감께서 직접 장인과 인연을 맺어준 사람입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보성군수 ‘방진’은 전 영의정 이준경이 병조판서 재직 시절 그의 밑에서 일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준경은 방진과 이순신이 연을 맺도록 적극적으로 도왔다. 달리 말하자면 이순신은 어렸을 적부터 두각을 드러냈다는 뜻이다.

물론 영의정이나 되는 사람이니 이순신이 가진 잠재력과 재능을 미리 읽을 수 있었던 것이겠지만…….

‘그것까지 직접 말하기는 조금 그렇네.’

신립에게는 미래 스포일러라서가 아니라, 나 역시 제법 젊은 나이에 영의정에게 큰 관심을 받고 있어서다.

불과 며칠 전에 권철과 직접 대면하여 만난 당일 혼사 약속까지 잡지 않았던가. 오히려 이순신보다 한 숟갈 더 뜨는지라, 내가 영의정 인맥을 가지고 더 왈가왈부하기에는 민망했다.

어쨌거나, 나의 비밀스런 전언에 이순신을 바라보는 신립의 시선도 조금은 누그러졌다.

“흐음…….”

영의정이 챙길 정도라면 이게 전부는 아니겠지. 그런 생각이라도 하는 모양인데, 정답이었다.

이순신은 망하는 게 정상일 나라를 기어코 살려낸 불세출의 영웅이다.

단지, 무과를 준비한다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자질이 드러나지 않을 뿐.

그래서 나와 신립이 모인 것이었다. 이순신이 무과에 급제하여 하루라도 빨리 그가 타고난 재능을 드러낼 수 있도록 돕고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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