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70화
25. 아직은 보통 사람 (1)
깜짝 놀랐다.
아버지에게 무능력자라 멸시당하는 그가, 행주대첩의 주인공이라니?
‘권철의 우려는 착각이었군.’
그는 안동 권씨에 자신 다음으로 문중을 이끌 인물이 없음을 걱정했다. 하지만, 권율 정도면 누구와 비교하더라도 꿀릴 위인은 아니다. 오히려 임진왜란 당시 육전에서 그만한 분전과 승전을 이뤄낸 사람은 흔치 않았다.
그러나 당시의 위인은 온데간데없고…….
“첨정께서는 어떻게 누택을 찾으셨습니까?”
권철 덕분에, 졸지에 아들뻘인 청년에게 쩔쩔매게 된 권율이었다. 이래서야 아비인 권철조차도 잘난 구석을 하나라도 읽어낼 수 있겠는가.
과연 권철은 여전히 염증어린 목소리로 권율을 대했다.
“네 딸을 보러 왔다.”
퉁명스러운 말에 권율은 무척이나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상황이 파악된 건가. 이제는 새파란 전직 관리가, 예비 사위까지 됐다. 하지만 예비 장인인 자신에게 여전히 윗사람이었다.
실로 당혹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이다. 권율은 정신을 못 차린 채 어버버 말했다.
“어, 으음, 음……. 안내해드리지 못할 것은 없습니다만…….”
“그렇다면 서둘러 안내하지 않고 무얼 하는 게냐? 손님을 들이고도 이렇게 행동이 굼떠서야. 안동 권가의 이름이 아깝구나.”
나 같아도 충분히 당혹스러울 상황인데, 권율에게 극딜을 박는 권철이었다.
덕분에 권율의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서른 중반에 아버지에게 혼나는 것도 민망한데 하물며 새파란 아들뻘, 그것도 예비 사위 앞이다.
그래도 어쩌겠나.
권철이 박대할 만큼 그동안 실망만 시켜온 권율이었다. 장차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 된다고 해도, 이 순간에서는 아버지에게 할 한 마디 항변거리도 없었으니까.
마당을 가로지르니 안채가 드러났다.
나와 권철이 기다릴 동안, 권율이 앞서나가 안채를 방문했다. 그는 문을 열고서 방 안의 사람과 짧게 대화를 나누었고, 곧 젊은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권율의 부인.
그녀는 먼저 시아버지인 권철에게 인사를 올렸다.
실로 예의 바르고 다소곳한 몸가짐이었다. 권철은 자기 자식인 권율보다도 며느리가 더 마음에 들었는지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가족인 두 사람의 인사가 끝나자 이번에는 내가 묵례를 올렸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전주 이가의 순신이라고 합니다.”
“예.”
여인은 적극적으로 반응하지는 않았으나, 얼굴에는 미소가 만연했다.
“딸아이를 보러 오셨다 들었습니다.”
여인은 가타부타 없이 자신이 있던 안채를 향해 일렀다.
“나오거라.”
어째서 어른이 아닌 내가 직접 찾아왔는지 물어보지도 않았다.
시아버지인 권철도 함께 온 것을 보고서 어느 정도 눈치챈 모양이다.
그에 반해 권율은…….
“아버지, 그런데 어찌하여 첨정을 직접……. 말씀도 없이?”
목소리는 주눅 들었으나, 할 말은 다하는 권율이었다.
그다지 눈치 빠른 행동은 아니어서, 며느리 앞에서 미소 지었던 권철이 순식간에 험악한 인상이 되었다.
“이놈, 집안에 믿을 사람이 오죽 없었으면 내가 네 집을 다 찾아왔겠느냐?”
“…….”
“첨정은 장차 안동 권가에 힘이 될 사람이다. 설령 첨정을 사위로 삼게 되더라도, 감히 하대할 생각 말거라.”
어우…….
나조차도 섬뜩한 경고였다.
권율은 여전한 아버지의 박대에 더 왈가왈부하지도 못한 채 고개만 푹 숙였다.
그 직후,
-끼익.
방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일순 시선이 모였다.
나타난 사람은 십 대 중반의 소녀.
미래라면 한창 천진난만할 나이였으나 조선시대에서는 혼기가 찬 처녀였다. 그래서인지 몸짓 하나하나가 섬세하고 조심스러웠다.
방정맞게 나서다 혼나는 권율보다도 나을 정도.
그녀는 평소 마주할 일이 없었을 외간 남자 앞에서도 어색함 없이 예를 표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나으리.”
손녀의 성숙한 태도에 권철이 흐뭇한 인상을 지었다. 그가 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떤가?”
“어딜 가더라도 소박맞을 일은 없겠군요.”
“자네에게는?”
“첫인상은 좋습니다.”
“다행이로군.”
의례적으로 한 말은 아니었다.
다른 건 차치하더라도 소녀의 태도는 깔끔하고 정갈했다. 아버지마저 어려워하는 나의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당당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물론 사람의 성정이 어떠한지는 다 알지 못한다. 그런 걸 가늠하기에는 고작 잠깐의 대면일 뿐이니까. 하지만 이런 자리에서라도 좋은 인상을 남기지 못하는 사람은, 그 이상을 기대하기 힘들기 마련이다. 그런 차원에서 소녀의 첫인상은 합격이었다.
적어도 나를 피곤하게 만들지는 않겠구나, 싶은 정도.
“그보다는, 영의정 대감께서 자칫 제 장인이 될지도 모르는 분을 너무 박대하셔서. 보다 긴밀한 관계가 만들어진다면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신경 쓰지 말게. 설령 자네 집안과 나의 집안이 연을 맺더라도, 당사자는 자네와 나니까. 이외의 것들은 의식할 필요도, 그럴 가치도 없네.”
졸지에 의식할 가치도 없어져 버린 권율이었다.
“정 불편하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자네 눈앞의 손녀만큼 하는 녀석이 있을지 모르겠군. 물론 마음에 들 때까지 소개해주겠지만, 나라고 안동 권가 아이들의 됨됨이를 다 아는 것은 아니라서 말이야.”
“저와 영의정 대감 사이의 중대사를 고작 수고를 덜고자 가벼이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의리를 지금부터 보여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지.”
세게 나가지 못하고 살살 달래는 권철이었다.
하지만 그의 우려는 어디까지나 기우였다. 장차 부인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도 첫인상은 좋았고, 결정적으로 장인이 권율이었다. 사이가 애매하게는 됐지만, 그걸 감수하더라도 권율은 가까이할 가치가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럼…….”
호의적인 대답이 나오려는 찰나!
권율이 나의 마음도 모르고서 발끈했다.
“첨정이 아무리 이른 나이에 성취를 이루었다고는 하나, 어떻게 영의정 대감 앞에서 이렇게까지 무례할 수 있는가?”
그야말로 뜬금없는 타박이었다.
나는 좋은 대답을 꺼내기 직전이었고, 권철도 그것을 읽고서 미소를 지은 참이다.
하지만 나의 느릿한 대답이 간을 보기 위한 뜸 들임으로, 아버지의 미소는 비위를 맞추기 위한 비굴함으로 비친 것일까? 그렇다면 나나 권철에게나 모두 기분 나쁜 오해였다. 덕분에 분위기가 단숨에 냉각됐다.
“…….”
권철은 진심으로 나를 포섭하고자 했다. 이런 상황에서 타박이란 국물도 못 찾을 언행이었다. 하물며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못난 자식이 오해까지 하며 초를 치면 권철이 어떻게 반응하겠나.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다!”
쩌렁쩌렁 외치는 권철이었다.
그 연배와 세월의 풍파를 피하지 못한 가느다란 체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
단단히 화났다는 증거였다.
“어디 감히 어른들 이야기하는데 끼어들려는 것이냐? 내가 언제 그리 행동하라 가르친 적이 있더냐! ……오늘도 어김없이 나를 실망하게 하는구나!”
권율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항변했다.
“어른들이라니요, 첨정은 아직 약관도…….”
“너는 이립을 훌쩍 넘기고도 소과 한 번 합격해본 적 있으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권율이었다.
“내가 직접 대해본 첨정은 그간의 세월을 헛되이 살아온 너보다도 한참 어른이다. 알량한 연배 따위로 자존심 세우지 말거라!”
음…….
내가 겉보기와는 달리 속은 삭을 만큼 삭았지.
하지만 그걸 누가 알겠나.
권철은 노회한 정치인으로서 가진 혜안으로 읽어냈으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런 혜안이 없었다.
그들에게 나는 아무리 잘 쳐주어도 능력은 좋고, 운은 더 좋은 애송이다. 좀 더 알고 지내면 애늙은이라는 것도 알겠지만, 권율과 나는 지금 초면이었다.
권율에게는 남 앞에선 보인 적 없는 귀한 딸을 보이고, 영의정을 지내고 있는 아버지가 간곡히 권함에도 나는 감사한 기색 하나 없었다. 꼭 그가 아닌 누구라도 분통이 터지겠지.
하지만, 정작 아버지인 권철부터 권율의 편이 아니었다.
“못난 놈.”
쐐기를 박아버리는 권철이었다.
그는 당장 벌어진 분위기가 뒤늦게 탐탁지 않았는지, 흠흠 헛기침하고는 발을 슬쩍 돌렸다.
“가세, 첨정!”
“예.”
그렇게 권율과 그의 가족만 덩그러니 놔둔 채 나와 권철은 집을 나섰다.
특별히 더 갈 곳도 없고, 또 침묵만 지키기에도 무안했던지라 먼저 입을 열었다.
“송구합니다. 제가 자제분 앞에서도 만용을 부려 대감께 폐만 끼쳤습니다.”
“첨정의 잘못이 아닐세.”
권철이 단호하게 답했다.
“만약 그 못난 놈에게 잘난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일이 그렇게 됐겠나?”
부정할 수 없군.
권율은 그다지 눈치 빠른 사람은 아니었다. 부인에 비해서도, 어쩌면 딸과 비교하더라도 말이다.
가만히라도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사람이랄까.
아직까지 영웅의 기색이라곤 좁쌀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그였으나, 실제 역사에서는 누구와도 비하기 힘든 업적을 낸 권율이었다.
그런 그가 아버지에게 말썽꾸러기 무능력자 취급을 당하는 건 썩 유쾌하지만은 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자리를 파토 내기까지 했으니 더더욱 경멸하게 되겠지. 나중에 권율이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해내더라도 지긋한 춘추의 권철은 그때까지 살아 있지는 않을 터라, 내가 나서지 않으면 권철에게 권율은 언제까지고 못난 놈으로 남을 터였다.
“제가 사람을 가려서 사귀는 편인데……. 마냥 안목이 없다고는 못할 것입니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권철은 별말 없이 듣기만 했다.
“적어도 제 눈으로, 대감의 막내 자제분께서는 그릇이 커 보이더군요.”
“대기만성이라도 된단 말인가?”
“예.”
“얼마나 대기만성이어야 그 나이에 아직까지도 집안의 재산이나 까먹으며 막돼먹은 자들과 어울린단 말인가?”
“오나라의 여몽이라는 사람도 한동안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유명하지 않았습니까.”
바로 괄목상대라는 사자성어의 주인공이었다.
어느 날 노숙이라는 사람이 간만에 여몽을 찾아가니, 어리석은 사람으로 유명했던 여몽은 없고 대단한 학식을 자랑하지 않겠는가. 노숙이 놀라 물으니 여몽이 ‘선비가 서로 떨어져 있다가 다시 대할 때는 눈을 비비고 대해야 한다.’고 답했다. 그 말을 짧게 줄인 것이 괄목상대였다.
“어리석은 사람들 대부분은 끝까지 어리석은 채로 죽게 되어있어. 그중에서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에 대해 반성할 염치가 있는 자들만이, 발전의 여지가 있는 것일세.”
“영의정께서는 막내 자제분은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로군요.”
“말해 무엇 할까.”
명문가로 성장할 기회가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안동 권가다.
이 시대에서는 권철이 영의정에 올라 안동 권가를 크게 부흥시켰다. 하지만 그 뒤를 이을 사람이 가문 안에 없었다.
아무리 위대한 정복왕이라 하더라도 후임이 그 땅을 지키지 않는다면 하루아침의 꿈으로 끝나는 법.
권철은 유능한 후계를 열망하고 있었으나 막내인 권율은 아비의 부와 명예에 기대 하루하루를 낭비하고 있었다.
그런 권율의 모습은 설령 아비인 권철이라 하더라도, 아니 오히려 아비이기에 더 혐오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 마음을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나…….
“대감께서는 저를 고작 한 번 보셨으나, 제가 일평생을 함께했던 아버지보다 저의 본질을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꼭, 자식이라고 더 잘 아는 것은 아닌 것 같더군요.”
“자네 안목이 맞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율은 나에게 단 한 번도 자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어. 그 세월이 삼십 년을 넘어 사십 년을 향해가고 있네! 아비가 두 눈 멀쩡히 뜨고 있는 지금에도 실망스러운 그 녀석이, 내가 죽은 다음에는 얼마나 한심하게 살아갈까?”
“기회를 주시지요.”
“무슨 기회를 준단 말인가? 내가 놈에게 못 해준 건 단 하나도 없거늘!”
“신뢰를 주라는 말입니다.”
권철은 한동안 말없이 발만 옮겼다.
그러다 툭 던지듯 말했다.
“……괜히 못난 꼴만 보여줬는데, 자네도 이런 집의 사위는 되고 싶지 않겠군.”
“약한 모습을 보이셔서 동정을 사실 수는 있겠지만, 제가 동정 때문에 대감의 제안을 따를 수는 없지요.”
“흥.”
권철은 성가시다는 듯 콧바람을 내쉬었다.
“말려먼 말게. 처음에는, 자네가 나의 제안을 거절이라도 한다면 두고두고 죄를 물을 생각이었지만 이제는 아니야. 너무 피곤해졌어. 어차피 나를 도와주겠다니 굳이 강요할 필요도 없지…….”
과연 첫 만남과는 달리 무척이나 기운이 빠진 권철이었다.
“기복이 너무 빠르신 것 아닙니까.”
“자네도 이 나이가 되어 봐.”
“……제안해주신 것에 대해서는 아버지께 알려드리겠습니다. 저보다는 현명한 판단을 해주시겠지요.”
권철의 얼굴이 밝아졌다.
얼핏 거절하는 것 같아도 실상은 뻔한 긍정이다.
나 같은 별종이 아니고서야 어느 누가 영의정의 제안을 거부하겠나. 게다가 나쁜 짓을 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무려 혼사를 제안하겠다는데.
조금은 기운을 되찾은 듯 권철이 들뜬 어조로 말했다.
“후회하지 않을 걸세.”
“그럴 겁니다.”
“복귀는 언제를 원하나?”
“여유는 주시지요. 혼사 직후에 성급하게 복귀한다면 세간의 시선을 받을 테니까요. 기왕 사직한 김에 당분간은 휴식하고 싶습니다.”
“알겠네. ……그럼. 음! 나는 먼저 가도록 하지. 첨정도 살펴 가게.”
나는 꾸벅 허리 숙여 권철을 배웅했다. 그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훌쩍 앞서나갔다. 언제 약한 모습을 보여줬냐는 것처럼 말이다.
거리는 한산했고 하늘은 그새 어두워졌다. 조금만 더 지나면 붉은 노을이 펼쳐지겠군. 마침 배도 출출해졌다.
“흠.”
짧게 콧김을 내쉰 나는 뒤편을 바라보았다.
권율의 집은 그다지 멀어지지 않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