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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69화 (69/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69화

24. 권력의 정점 (3)

나는 조용히 침을 삼켰다.

거절할 수 있다 했지만, 실제로도 그럴 수 있을지 의문이었으니까. 설마 영의정이라는 사람이 고작 시답잖은 제안이나 하겠는가?

과연 권철은 벌써부터 기대한 대답이라도 들은 듯 미소 짓고 있었다.

조금은 짐작이 간다.

나는 무척이나 젊은 나이에 사품 관리가 되었으며, 나아가 짧은 담화 끝에 호의적인 인상도 샀다. 이런 상황에서 권철이 보일 행동은 대체로 포섭이 아니겠나.

하지만 어쭙잖은 제안으로는 나를 회유할 수 없다. 권철도 이를 잘 알고 있겠지. 그러니 기대감마저 들었다.

과연 무슨 생각을 했기에 나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겠다는 것인지 말이다.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권철이 입을 열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는 말만으로는 믿을 수 있는 우군을 만들기 어렵지. 물론 옛날이라도 다르지는 않아. 그래서 선인들께서는 좋은 제도를 만드셨다네.”

아.

알겠군.

권철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제안을 밝혔다.

“내가 듣기로 첨정은 아직 혼례를 올리지 않았다고 들었는데. 그게 자네 춘부장의 뜻은 아니겠지.”

과연.

예나 지금이나 우군을 만들기는 어렵고 상대방을 마음 편히 신뢰하기는 더더욱 어려웠다. 그래서 집안들은 양가의 혼인을 통해 동맹을 만들었다.

권철이 제안하는 것도 바로 그것.

문중의 여인과 혼례를 치러 나를 얻겠다는 것이다.

“예상하시는 바가 맞습니다. 이전에 매파가 여럿 아버지의 댁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만, 저는 아직 이르다는 생각에 모두 거절했습니다.”

“그때는 일렀겠지. 막 관직에 제수되었고 임지는 동북면 끝인 회령이었으니까. 거기가 갓 혼례를 치른 여인을 데리고 갈만한 곳은 아니지.”

“예.”

“하지만 지금은 여유가 있어 다행이로군. 사직을 했으니……. 당분간은 중대한 일정은 없지 않겠나.”

마다하지 말고 자신의 제안을 받아들이라는 소리였다.

과연 권철이 거절할 수 없으리라 호언장담할 만했다.

혼례란 부부가 백년가약의 연을 맺는 의식이기도 했으나, 양가의 동맹으로서의 의미가 더 컸다. 그만큼, 혼례를 거절당했을 때 오해를 사기 쉬웠다.

하물며 이런 제안을 하는 자가 영의정이라면 더더욱.

“궁금한 게 하나 있습니다.”

“말하게.”

“어째서 저에게 혼례를 제안하시는 겁니까? 지금의 저는 관직도 내려놓아 뭣도 아닙니다. 조만간에 도성 자체를 뜰 생각도 하고 있고요.”

“세상만사가 어찌 사람의 바람대로만 흘러가겠나. 하다못해 자네가 무능하기라도 했다면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의 바람대로 편히 잊힐 수 있었겠지만, 그렇지도 않지. 비상한 사람으로 유명한 첨정이 언제까지고 재야에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나?”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권철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완전히 무명으로 살기란 쉽지 않다. 많은 성과와 그보다 더 많은 명성을 얻어낸 나로서는 더더욱.

어디를 가더라도 시선을 살 터였다. 그리고 그 시선들이 모두 왕의 시야가 되어주겠지. 게다가 선조라면 적극적으로 잊히려는 시도에 더 관심을 드러낼지 몰랐다.

“자네 같은 사람이 능력을 발휘하지 않고 묻힌 채 살아가겠다는 것도, 바람직한 일은 아니야. 물론 지금은 관직을 지내기에는 좋지 않은 시기이지.”

“…….”

“하지만 영원히 그렇지는 않을 걸세. 지금의 나에게는 아니지만, 자네에게는 시간이 아직은 관대한 편이지 않나?”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나에게도 자네 같은 시절이 있었네. 젊었고, 관직 생활하기 힘든 세상이었지. 하지만 보게. 당시를 주름잡았던 외척들은 모두 늙어 죽었네. 그리고 지금 나는 영의정이 아닌가?”

권철은 음미하듯, 그리고 아쉬움이 담긴 어조로 말을 이었다.

“첨정이 걸어갈 길도 나와 크게 다르지는 않을 걸세. 시간은 능력 있는 자의, 그중에서도 젊은 자의 편이니까.”

“……조언 감사드립니다.”

“이제 내 생각을 알겠나?”

어찌 모르겠나.

아무리 지금이 가혹한 시기라고는 해도 권철은 선조의 폭압적인 치세가 영원하지 않으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동안은 나를 지켜줄 터이니, 나의 시대가 오면 안동 권씨를 지켜달라는 것이겠지.

그때가 되면 나의 의사가 어떻건 안동 권씨와는 뗄레야 떼기 힘든 사이가 된다. 나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안동 권씨를 돌볼 수밖에 없다.

그것이 권철이 원하는 바였다.

그러나 꺼림칙한 부분이 완전히 해소된 것은 아니었다.

“저는 어디까지나 외부인입니다. 전하와의 사이도 좋은 편은 아니고요. 영입할 가치가 없지는 않더라도, 위험부담 역시 없지는 않을 텐데요.”

“첨정은 호기심이 많은 편이로군. 적당한 탐구심은 처신에도 좋은 편이지만 과하면 해가 되는 법이라네.”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우위에 선 상황이라면 어느 정도의 호기심은 발휘해도 무방함을 알고 있지요.”

혼사의 제안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말한 위험부담의 요소가 있음에도 먼저 제안한 쪽은 권철. 달리 말해 지금 상황에서 아쉬운 쪽은 내가 아니라는 뜻이다.

“……자네 말이 맞네. 으음, 이런 이야기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안동 권씨는 그다지 세가 강한 가문은 아닐세. 시조께서 처음 권가 성을 하사받으신 이래로 유능한 사람이 없지는 않았지만, 당당하게 명문가의 반열을 자처할 정도는 아니지. 특히나 요즘에는 말이야.”

“가문의 후학을 믿기 어렵다는 말씀이군요.”

“정확하네. 세력과 자질 모두 애매한 가문이 가진 한계이지. 이따금 유능한 사람이 나오지만, 백여 년에 한두 명 정도로는 절대로 명문가의 반열에 들 수 없어. 그렇다고 포기하기에는 너무나도 아쉽지 않겠나.”

워낙 쓸 사람이 없어 외부에서라도 인재를 구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었다. 후일 문중에 인재가 탄생한다면 조력자 역할을 해줄 사람도 필요했고 말이다.

그의 제안은 합리적이었다.

적어도 그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그리고 조금은 절박하기도 했다.

물론, 그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관직을 포기하고 진짜 이순신이 있음을 알게 된 나에게 영의정의 호의란 그다지 빛을 발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섣부른 거절은 화를 사게 될 것이며, 내가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건 영의정 정도 되는 사람의 적의는 절대 좋은 영향은 끼치지 않을 터였다.

“……생각해보겠습니다.”

“내가 경험해본 바로는, 긍정이 아니라면 대체로 부정이더군. 많이 겪어봐서 알고 있지만, 분명하게 해주는 편이 내가 이해하는 데 도움 되지 않겠나?”

“좋습니다. 영의정 대감의 제안은 무척이나 감사합니다만, 저에게 혼례란 누군가와 백년가약의 연을 맺어 한평생 함께 살아가는 것입니다. 정치적 이익만을 생각해서 받아들이기는 힘들군요.”

이 역시 거절과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권철은 태연히도 물었다.

“여식이 안동 권가의 사람이라는 것만으로는 눈에 차지 않는다는 말인가?”

흠, 안동 권가와의 동맹이 내키지 않느냐고 들리는군.

입에서 나오는 말과 귀에서 들리는 말이 어찌 이리도 다른지. 뭐, 권철을 대하는 나의 화법도 그와 다르지는 않았다.

보아하니 권철은 나를 놓아줄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이고…….

그가 절실하면 절실할수록 제안을 거절했을 때의 후폭풍은 커진다. 영의정이라는 자리에 불만족도 크지만 자부심도 큰 권철이다. 그는 이중적인 감정 사이에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고, 누군가에게는 적대적이기까지 했다.

그 화살을 굳이 나에게로 돌릴 필요는 없지 않겠나.

“……좋습니다.”

권철은 그제야 만족한 듯 미소 지었다.

“하지만 저에게도 조건이 있습니다.”

“무슨 조건이 더 필요하단 말인가?”

“영의정께서는 정치적 이익만 생각하고 계십니다만, 제가 제안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조정으로의 복귀를 각오한다는 것. 그리고 한평생 달고 다녀야 할 사람이 생김을 의미합니다. 가급적 신중한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이해했네.”

“적어도 반려 정도는 제가 고르고 싶습니다.”

“……내가 첨정에게 소개해야 한단 말인가?”

“마다하시겠다면 저는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대신 나는 보다 편한 마음으로 혼사 제안을 거절할 수 있겠지.

과거에 수많은 매파를 거절할 수 있었던 것도, 곧 회령으로 떠나기 때문이었다. 정당한 명분이 있으니 거절하더라도 상대방은 연연할 수 없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내 조건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뭐 파토가 나더라도 어쩌겠나.

권철에게는 꽤나 까다로운 주문이었을 거다.

혹시라도 내가 여러 문중의 여인들을 두고두고 만나면서 모두 퇴짜를 놓아버리면, 권철이나 안동 권가로서도 심각하게 명예에 손상을 입는 것이기에. 그보다도 정치적 이익을 위해 그동안 꽁꽁 숨겨놓았던 여식들을 외간 남자들에게 돌려가며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심각한 평판의 상실이 있을 터였다.

“영의정에게까지 이렇게까지 하려는 사람도, 자네밖에 없네.”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 아이들 중에서 첨정의 입맛에 맞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군.”

“영의정 대감의 자제분이라면 저에게는 꽤나 가혹합니다만.”

어쩌면 증손주도 있을 나이의 권철이었다. 그런 권철의 딸이라면…….

“자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나에게는 아직 혼례를 치르지 않은 딸은 없네. 당연히 손녀들을 말하는 것이지.”

“그렇다면 다행이지요.”

“……나에게는 아들이 넷 있는데, 손녀가 없지는 않네. 하지만 대부분은 출가한 상황이지. 유일하게 막내에게 아직 출가하지 않은 딸아이가 있어. 마침 혼기도 찼네.”

“그 손녀분이 저에게 맞아야 할 텐데요.”

“사주단자를 보내겠네.”

“어찌 사주단자만 보고 사람을 알겠습니까?”

“직접 보겠다는 말인가. 다 큰 아녀자가 외간 남자에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한 행동은 아니지. 자네에게도 말이야.”

조금은 소극적으로 변한 권철이었다.

나의 제안을 섣불리 거절하지는 않았으나, 지금 빼는 모습을 보면 역시 부담은 느끼는 것 같았다. 고작 나 하나 얻으려다 초가삼간을 다 태워먹는 수가 있으니까. 걸린 것이 자신은 물론 가문 전체의 명예와 평판이라면 그 누구라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시원스레 거절하지 못하고 미련을 보인다는 점에서,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누가 나를 얻고자 이렇게까지 위험을 감수하겠나.

누구는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데.

“저는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솔직하게 말씀 드리지요. 이 시점에서, 저는 영의정 대감의 두터운 후의에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굳이 혼례를 올리지 않더라도 뜻을 함께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영의정을 아군으로 둔다면 두고두고 얼마나 도움 되겠나.

물론 나 역시 아군으로서 최소한의 역할은 해내야겠지만, 어쨌거나 선조가 존재하는 한 나에게 영원한 안식이란 없다. 사직을 한 김에 한동안은 쉬겠지만 결국에는 다시 조정으로 불려오겠지.

그때가 오면 자연스럽게 영의정에게 보답하면 된다. 그가 나에게 바라는 것은 안동 권가의 보호와, 싹수 있는 동량이 나타났을 때 성장의 단초를 마련해주는 것.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권철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만일 자네가 나와 마음을 함께하고 싶다면, 혼례에 응해주는 것이 서로에게 좋겠지.”

“안동 권가에 엮이게 되는 저로서는 그다지 좋을 건 없습니다만.”

“대신 내가 자네를 챙겨줄 수밖에 없지 않겠나.”

권철은 말을 이었다.

내가 나름 호의적으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게 돼서인지, 이전보다 적극적인 어조였다.

“막내의 딸아이를 보러 가세. 만약 큰 하자가 없다면 자네도 좋게 받아들이지 않겠나.”

“그럼 길일을 알려주십시오. 찾아가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 없네. 바로 보러 가도 되니까.”

“흐음……. 일언반구 없이 급작스럽게 방문해도 되겠습니까? 저쪽에서도 준비는 필요할 텐데요.”

“어느 아비가 자식을 보러 가겠다는데 준비를 바라겠나. 그리고, 막내는 신경 쓰지 말게. 자네가 배려할 가치도 없는 녀석이니까.”

의외의 말이 이어졌다.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예뻐한다는데, 아비인 권철이 정작 자기 자식인 막내보고 가치가 없단다. 누군지는 몰라도 권철에게 단단히 찍힌 모양이다.

하기야, 문중의 미래가 걱정되어 외부인사를 굳이 영입하려는 영의정이다. 누군가는 자존심까지 꺾어가며 가문의 안위를 위하는데, 정작 자기 자식은 아비의 마음을 모르고서 실망만 시켜왔다면 누구건 좋게 볼 수는 없겠지.

“먼저 나가 있겠습니다.”

“그러게.”

* * *

잠시 후.

나와 권철은 ‘막내’의 집으로 향했다.

우리를 맞이한 자는 삼십 대 중반의 아저씨. 그의 아버지인 권철이 도저히 좋은 말은 안 해주었던 것처럼, 그는 피부도 짙었고 몸도 좋았다. 밖을 나다나는 방탕한 생활을 오랫동안 영위해온 모양이다.

“아, 아버지께서는 어인 일로…….”

“한심한 놈. 입에서 술 냄새가 진동하는구나!”

“그것이…….”

막내가 말을 잇기도 전에, 집 뒤편에서 우당탕 소란이 일었다. 함께 술을 마시던 사람들인가.

막내는 그저 허리를 숙일 뿐이었다. 죄스러운 얼굴이었으나 권철의 노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에게는 질리도록 보았을 아들의 구차한 모습이었다. 반성이나 변화로는 단 한 번도 이어지지 않은.

“그런데 이분은…….”

막내가 조심스럽게 나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눈동자에는 굉장한 의문이 담겨 있었다. 제 아들 뻘인 새파란 청년이, 급작스럽게 방문한 아버지의 곁에 서 있었으니까.

“군기시에서 첨정을 지내다 최근 사직한 이 가(家)다.”

“아.”

“멍청하게 있지 말고, 인사드려라.”

권철의 딱딱한 명령에, 막내가 나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만나서 반갑네, 나는…….”

“놈!”

막내는 채 말을 잇지도 못하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그를 향해 권철이 훨씬 엄해진 어조로 꾸짖었다.

“쓸데없이 나이만 먹은 주제에 선인이라는 이유로 첨정까지 지낸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이냐? 제대로 인사드려라!”

“대감, 저는 괜찮습니다.”

“첨정, 저런 한심한 녀석에게는 잘 대해줘서는 안 돼! 앞으로 살살 기어오를 것이 분명한데 어찌 초면에 여지를 주려 하는가?!”

자칫 장인이 될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가혹하군……. 만일 혼인이 성사되기라도 한다면 내가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건지.

그러나 권철은 나나 막내의 입장이라곤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런 불편한 관계가 만들어지길 기대하는 것 같았다. 막내가 자존심 상하는 상황을 만들어 어떻게든 지금의 처지를 고치도록.

덕분에 나만 부담스럽게 됐지만.

막내도 서슬 퍼런 아버지 권철의 태도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인사를 올렸다.

“첨정 나리께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소인, 안동 권가의 율이라고 합니다.”

“……권율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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