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67화
24. 권력의 정점 (1)
“아니, 어찌 일언반구 없이 사직을 하셨습니까?!”
신립이 길길이 날뛰었다.
마침 이순신의 일로 연락하려던 차였는데 텔레파시라도 받았는지 문득 찾아와서는, 나의 사직을 언급하며 제가 화내는 것 아니겠나.
무척이나 난감했다.
“다 이유가 있어 한 것입니다.”
“공자님의 사직은 나라에 큰 손해입니다. 외람된 말이지만 은영연과 관련된 풍문은 저도 접해보았습니다. 혹시, 류성룡이라는 놈 때문은 아니겠지요?”
신립이 씩씩거리며 물었다.
“그렇다면 어쩌시려구요?”
“아주 작살을 내놔야지 않겠습니까!”
신립은 말해봐야 무엇하겠냐는 듯 주먹으로 손바닥을 팡팡 쳤다.
내가 류성룡과의 첫 만남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최근 오해를 풀었다. 뭐, 그렇지 못했더라도 폭행까지 사주할 이유는 없었다.
“신 공 앞에서 말 한 번 잘못했다간 저도 얻어터지겠습니다, 하하.”
가벼이 넘기려 농을 건네니 신립이 기겁하며 답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공자님께 손을 대겠습니까?”
“하하하…….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신 공께서 이 사람을 신경 써주신다니 무척이나 감사하지만, 사직은 류성룡과 관계가 없습니다. 주먹질이나 우격다짐으로 해결할 일도 아니고요.”
“무엇 때문인지 제가 알 수 있겠습니까?”
“직접적으로 말씀드리지는 못하겠지만, 약간 돌려서는 말할 수 있겠지요. 어디 가서 뜻을 물어보지만 않으신다면 말이에요.”
나의 조건에 신립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만약 누군가가 꼬아서 말한다면 신립은 그것을 해석할 사람이 못 됐다. 특별히 바보 같아서는 아니고, 단지 생각이 깊지 않고 급할 뿐이다. 이래서야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스스로가 쓰질 못한다.
“끄응.”
“약조를 지킬 자신이 없으시면 호기심은 잠시 눌러둘 수밖에요. 어차피 대단한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도발처럼 들린 걸까?
신립이 단호하게 외쳤다.
“자신이 없다니요! 저는 마음만 먹으면 섶을 지고도 불에 뛰어들 자신이 있는 사내입니다. 어디 가서 떠들지 않을 터이니 말씀 해주십시오. 궁금합니다!”
“알았어요, 알았어.”
나는 손바닥을 내보이고는 말을 이었다.
“제가 살아온 과거에는 공공연히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요즘 들어서는 못 하겠더라고요. 이 사람은 거기에 지쳤을 뿐입니다.”
선조놈을 죽도록 패주지도 못하는데 욕조차 시원히 못 날리는 세상이었다. 그러니 어쩌겠나. 볼 때마다 기분 나쁜 면상이라도 안 보도록 해야지.
그다지 꼰 것도 아니고 약간 흐릿하게 말했을 뿐임에도 신립은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
그리고 1분도 안 되어서 물었다.
“그래서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하하…….”
나는 흘리듯 웃어버리고는 주제를 돌렸다. 어차피 두고두고 할 얘기는 아니니까.
“이미 사직소를 올렸고, 가납까지 되었습니다. 쌀이 익어 밥이 되었는데 뒤늦게 왈가왈부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쩝.”
“그보다, 부탁드릴 일이 있습니다.”
“……!”
신립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그는 어느 때보다 더 적극적으로 물었다.
“무엇입니까? 말씀만 해주십시지요! 해결해드리겠습니다!”
“해결할 일까지는 아니고, 근자에 이 사람이 알게 된 분 중에 무과를 준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뻔한 이야기였다.
무관이 무과를 준비하는 사람에게 해줄 일이 무엇이겠나. 당연히 무과에 급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아니겠나.
딱히 짐작이 어려운 부탁은 아니어서, 자세한 얘기도 없었지만 신립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누구입니까?”
“이순신이라고.”
“이……, 순신이요?”
“예. 이 사람과 성명이 똑같은 사람입니다. 동명이인인데, 이전부터 그를 알고 있던 분에게 소개받았지요.”
“흐음. 길일을 정해 만나게 해주신다면 제대로 가르치겠습니다. 하지만, 제 교육을 따라올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
신립은 무예가 무척이나 뛰어난 사람이다.
기마술도 회령에 있을 때 직접 봐서 알지만, 여진족도 알아주는 수준이고, 활을 쏠 때는 과녁에 맞추는 것으로는 치지 않고 관곡(貫鵠, 과녁 한가운데의 점)을 맞춰야 점수로 친다고 했다.
언젠가 200발을 쏘아서 200발 모두 관곡을 맞췄다던가?
그런 신립이 몸치인 이순신을 본다면 무과 준비가 만용처럼 느껴질 터였다. 성격이 급한 그로서는, 이순신이 마음대로 따라와주지 못한다면 성을 낼지도 몰랐다.
“제대로 가르치겠다는 뜻으로 이해하겠습니다. 그래도 첫 자리는 이 사람이 직접 마련하는 편이 좋겠군요.”
“그럼 길일만 알려주십시오. 맞춰서 나가겠습니다.”
일정을 고려할 사람이 신립 한 명이라 다행이군.
예전 같았으면 과거 치르느라, 그 와중에 조총 연구도 하느라 내 일정부터 걱정해야 했는데 말이야.
이래서 자유의 몸이 좋다, 좋다 하나보다.
“신 공께서 이 사람의 부탁을 들어주셨는데, 이거, 도의상 대접을 해드려야겠군요.”
“대접이요? 괜찮습니다. 공자님께 도움이 된다면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나는 호의를 사양하는 신립에게 괜히 놀란 듯 물었다.
“허어, 그래요? 어렵사리 마련한 죽력고는 다른 자리에 내놓아야겠군요.”
“……!”
첫 자리에서도 내내 기품을 드러냈던 이순신마저 맛보고서 놀랐던 죽력고!
그 죽력고 소리에 신립의 눈이 화등잔처럼 떠졌다.
명성은 드높았으나 무척 진귀한 술이라 어지간한 사람은 보는 것조차 힘든 명주였다. 당연히 말단 군관 신세인 신립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크흐흠. 대접을 마다하는 것도 도리는 아니라고 배웠습니다.”
단숨에 비굴해지는 신립이었다.
* * *
평화가 찾아왔다.
관리들은 모두 등청해서 한창 일하고 있을 시간에, 태평하게 배를 깐 채 등판을 구들장에 지지고 있으려니 극락이 따로 없었다.
근심도 걱정도 없었다. 빌어먹을 선조의 얼굴을 안 봐도 됐으니까.
적어도 지금은 말이다.
‘계속 일정이 생겨서 낙향을 못하고 있는데, 설마 다시 부르는 건 아니겠지?’
일관성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게 선조였다. 당장은 나의 사직을 가납했지만 언제 마음을 바뀌어 실직에 제수할지 몰랐다.
어지간히 사이코 같은 놈이어야 말이지.
이순신, 신립과 만날 날도 앞당겨야겠다. 그래야 낙향도 빨라지지. 인연이 있음에도 아직 인사를 나누지 못한 사람이 많았지만, 계속 여유를 부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낙원이다.
간만에 맛본 게으름이란 무척이나 달콤했다. 이대로 영원히 빈둥거려도 생활에 지장이 없으니 아쉬울 것도 없다.
미동조차 없이, 등판을 지지는 뜨거운 구들장과 열린 방문을 통해 들어서는 찬바람의 이중적인 감각을 즐겼다.
아마 남들이 본다면 곤히 잠들었거나 명상이라도 하는 줄 알 거다.
‘이대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찰나!
“공자님.”
밖에서 을룡이 불렀다.
어지간한 일로는 굳이 나를 피곤하게 하지 않는 을룡이다. 그런데 직접 불렀으니, 나로서도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야?”
“방금 서찰을 받았습니다.”
“누구 서찰?”
“영의정 권 대감이랍니다.”
영의정 권 대감이라면……, 권철이다.
대과 전시 시험 때도 본 그 인간.
가장 처음으로 답안을 제출한 나에게 관심을 드러냈으나 대단한 관심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대화만 짧게 나누다 말았을 뿐.
이후로는 얼굴을 본 적도 없었다.
애초에 잠깐 보았던 당시를 제외하고는 어떤 인연도 없었던 사이니까.
‘그런데 왜…….’
나에게 연락한 걸까?
“별 말도 없이?”
“별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서찰을 전달한 사람도 단지 공자님께 전해드릴 서찰이 있다고만 했습니다.”
“흐음.”
의도야 있겠으나 짐작은 불가했다.
그의 입장에서 생각해봐도, 권철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영의정. 그에 반해 나는 고작 사품 관리에, 이제는 사직까지 한 사람이었다. 무엇이 아쉬워서 나를 찾는단 말인가?
종잡을 수 없었으나 알아내는 방법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직접 만나면 그만이다.
바쁜 사람이니 어렵사리 마련한 자리를 낭비하지는 않겠지.
물론 영의정인 그와의 만남을 마다한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권철을 찾아가야 할 거다.
귀찮게 됐군.
“답장을 쓸 터이니, 대감의 댁에 전해드려.”
“알겠습니다.”
……그리고 당일 저녁.
나는 권철의 저택을 찾았다.
여유도 없이 찾아가 이른 감이 있었으나, 상대방은 보통 고관도 아닌 영의정이었다. 조선에서는 왕 다음가는 존재인 만큼 그의 부름에 느긋하게 답한다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권철의 저택은 주인의 지위에 걸맞은 위세를 풍기고 있었다.
사람 키보다 더 높은 벽돌담 너머로 고래 등 같은 기와집 지붕이 드러나 있었다. 그런데 보통 기와가 아니라 극상의 최고급 청기와였다. 그래서인지 지붕 전체가 마치 유리 공예품처럼 옥색으로 번쩍였다.
기와라면 대부분 거무튀튀한 먹색, 또는 남색의 돌덩어리로만 생각한다. 그런 기와를 흔히 쓰니까. 하지만 기와 중에서도 진짜 기와로 먹어주는 게 청기와였다.
청기와란 도자기를 기와 형태로 구워내거나, 기와에 도자기 유약과 안료를 바르고 구워 도자기 빛깔을 낸 것.
그만큼 품이 많이 들어가고 만드는 과정에서 화약의 주재료인 염초가 쓰여 무척이나 값비쌌다.
‘저기 얹어진 기와 하나만 훔쳐다 팔아도 반년은 먹고살겠는데,’
솔직히, 최근 죽력고를 구해다 여러 사람과 돌려먹어서 어깨에 힘이 들어갔는데 저택의 위용을 보니 그 뽕이 바람 빠지듯 빠졌다.
쩝.
일정에나 집중해야지.
-쿵, 쿵.
대문을 두드리니 끼익, 하고 열리며 선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문지기 선비가 화색을 띠었다.
“첨정이시로군요?”
“……그렇습니다만.”
“안으로 듭시지요. 영의정 대감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선비는 대문을 활짝 열며 물러났다.
저택의 내부로 들어서자 또 한 번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청기와 지붕 아래에 동판을 박아놓은 게 아닌가!
동판. 이름 그대로 구리를 얇게 펴놓은 판일 뿐이다.
하지만 구리는 반 귀금속이라 해도 될 정도로 무척이나 비싼 금속이다. 그리고 아무리 얇은 판을 쓰더라도 건물 전체를 두르려면 엄청나게 많은 양의 구리가 필요했다.
원래 지붕 아래에 두르는 동판의 용도는 일반적인 기와와 나무가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인데…….
유약으로 코팅되어 상할 걱정 없는 청기와를 쓰면서 동판까지 두른다는 것은 순전히 돈지랄이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펑펑 돈을 써대도 무방하다는 자랑. 굳이 잘 몰지도 않는 스포츠카를 몇 대 쟁여둔 것과 다르지도 않다.
“시선이 가는가?”
권철이었다.
그는 사랑방 안쪽에서 나를 구경하고 있었다.
이전과는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인상.
세월을 피하지 못한 몸은 거의 앙상하리만치 말랐으나, 풍기는 기운은 중후했다. 관복이 아니라 평복을 입고 있어도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니까.
나는 허리를 숙였다.
“이 첨정입니다.”
“이렇게 일찍 올 줄은 몰랐네.”
“다른 사람도 아닌 영의정께서 만남을 청하시는데 어찌 느긋하게 누택에서 영의정께서 찾아오시길 기다리겠습니까?”
“그것도 그래.”
나의 겸양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이는 권철이었다.
“안으로 들게. 날이 추운데 손님을 밖에 세워두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감사합니다.”
권철이 있는 방으로 들어서자, 다른 집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널찍한 공간과 벽과 그 아래를 수놓은 장식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지붕도 그렇고, 반쯤 궁궐이라 봐도 무방했다.
권철은 놀라는 나의 반응을 은근히 즐기면서 입을 열었다.
“그다지 인연이랄 게 없는 내가 갑자기 방문 의사를 밝혀서 놀랐겠군.”
“아닙니다. 영상 같으신 분께서 귀한 시간을 내셔서 저를 보시겠는데, 보통 일은 아니겠지요. 일의 경중을 능히 짐작할 수 있으니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말과는 달리 꽤나 놀라긴 했지만……. 권철도 의례적으로 물어본 것에 불과하니까.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고맙겠군. 며칠 전, 첨정의 사직소가 어전에 올라왔네.”
“혹여나 폐가 되지 않았더라면 좋겠습니다.”
“아니야. 그럴 일은 없었네. 다만, 전하께서는 평소 인사를 전담하시고 사직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시지. 그런데 마치 나나 다른 신하들에게 바라는 것이 있다는 듯 어전에서 공공연히 언급을 한 점이 이상했을 뿐이네.”
짚이는 구석은 없냐는 소리였다.
고작 이런 것이나 추궁하고자 부른 것인가?
천하의 영의정이 궁금해할 것치고는 하찮기까지 했다. 그의 말마따나, 책임을 피하고자 덕 볼 일이 없는 결정에는 남에게 답정너를 강요하는 졸렬한 선조의 성향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단순히 떠보는 것인가.’
시답잖은 질문에 불과하지만, 상대방의 태도를 읽기에는 이만한 질문도 따로 없다.
만일 상대가 호의적이라면 가급적 많은 정보를 제공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피상적인 대답만 하고 말 테니까.
권철의 지위와 위치를 생각하면 차라리 그편이라 생각하는 것이 나았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그에게 부응해줄 이유는 없었다.
“언젠가 전하께서 저를 윤대에 부르신 적이 있습니다. 삶이 짧아 많은 것을 알지는 않지만, 전하께서는 그다지 윤대를 선호하는 편은 아님을 알기에 많이 의아했지요.”
“그때와 관련된 것인가?”
“맞습니다. 전하께서는 저에 대해서 오해를 많이 하고 계셨고……. 그것을 굳이 풀려 드는 것은 오만한 행동인 것 같아 차라리 사직하는 편이 이롭겠다 싶었습니다.”
권철에게는 잔소리처럼 뻔한 대답이겠지.
영의정인 그라면 왕이 평소답지 않게 윤대를 청했다는 것도, 그 대상이 나였다는 것도, 왕이 나를 마주한 자리에서도 그다지 좋은 모습은 보여주지 않았다는 것까지도 잘 알고 있을 테니까.
“흐음…….”
과연 권철은 별 감흥은 없다는 듯 건조한 침음을 흘리고는 물었다.
“자세한 얘기를 해줄 수는 없겠나?”
“전하와 독대한 자리의 일을 제삼자 앞에서 공공연히 이야기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인지 잘 모르겠군요. 부디 영의정께서 이해해주셨으면 합니다.”
“자네 입장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송구할 뿐입니다. 그래도, 영의정이시라면 오히려 저보다도 상황의 내막을 더 아실지도 모르지요. 굳이 말씀을 드렸더라도 별 도움은 되지 않았을 겁니다.”
“하하.”
권철은 가볍게 웃어주고는 밖을 향해 일렀다.
“다과상 둘 봐오거라!”
다과상이라, 아직은 보내줄 생각이 없다는 뜻이다.
역시나.
방금의 물음은 별것 아니었군.
권철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