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66화
23. 진실의 순간 (2)
나는 이순신에 대해서 제법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가졌던 것은 아니나, 고작 그런 정도로는 이순신이 역사에서 가지는 존재감을 피해갈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정확히 몰랐다. 알려진 그의 업적과 행보는 말년의 임진왜란 시기에 집중되어 있었으니까.
성웅 이순신을 나름 알고 있는 나였지만 정작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인간 이순신에 대해서는 까막눈인 셈이었다.
“일단 한 잔 할까요.”
“예.”
나는 술병을 기울여 그의 잔을 채워주었다. 술병의 내용물은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짙은 대나무 녹음을 방에 한가득 흩뿌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순신을 처음으로 마주하고 대접하는 자리였으므로 준비한 술도 그만큼 각별했다.
죽력고(竹瀝膏).
한 다발의 대나무에서 고작 한 접시의 분량만을 추출할 수 있는 죽력을 주재료로 사용하는 술이다.
주재료가 귀하고 또 약재로도 사용되는 만큼 죽력고는 진귀하고 기품있는 약주로 명성이 높았으며, 또 대나무의 곧게 자라는 성질이 선비의 절개로도 비유되는 만큼 죽력고는 각별한 술이었다.
부족함 없이 사는 나로서도 이런 자리에나 가까스로 꺼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동요 한 점 없이 차분하게 자신의 잔을 내려놓고 술병을 들었다. 그는 술병을 두 손으로 받쳐 나의 잔을 채워주었다.
각자의 잔이 채워지자 그제야 이순신이 입을 열었다.
“죽력고입니까?”
“맞습니다.”
“고작 소인을 대하는 자리에서 너무 진귀한 술을 보여주십니다.”
“부담스러우십니까.”
이순신은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긍정의 느낌은 아니었다. 나는 말을 이었다.
“나는 사람을 대할 때 진심으로 대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몇몇 사람을 상대로는, 진심에 더해 전력을 다하고 싶지요. 부담스러울 수는 있겠지만 이 사람의 진심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첨정 나리.”
“말씀하세요.”
“첨정께서 소인을 우대해주시니 무척이나 감사하지만, 이제야 처음으로 본 사이가 아닙니까. 식견이 부족한 저로서는 첨정의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결국에는 부담스럽다는 뜻이었다.
이순신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죽력고는 비싸고 진귀한 약주 아닙니까? 아픈 구석 하나 없는 소인으로서는 사치한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습니다.”
역시.
한 가닥 하는 류성룡도 인정하는 사람다웠다.
누군가에게는 하늘 같을 첨정 앞에서도 못하는 말이 없었다. 아마 내 주위에 다른 지인이 있었더라면 면박을 주지 않았을까.
그래서 더 마음에 들었다. 이순신처럼 진솔한 사람은 흔치 않다. 류성룡의 때와는 달리 공개적인 자리가 아닌 덕이기도 했다.
아마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당사자들이 괜찮더라도 동석한 사람이 불편해지겠지.
많은 사람과 한꺼번에 자리를 가질 기회가 많은 윗사람들로서는, 설령 성격이 상충하지 않아도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이 사람은 먹고 마시는 것으로는 사치를 따지지 않습니다. 각박한 세상이고, 입의 호강을 유일한 위안거리로 삼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지요.”
“하오나 입의 호강을 위해서라도 죽력고란 과하지 않겠습니까. 한 병으로도 족히 수백 명을 먹일 수 있는 가치가 있다 들었습니다.”
“맞습니다. 물론 죽력고 두 병을 마셔 없애는 대신, 여러 사람에게 곡식으로 나누어 준다면 그만한 옳은 일은 없겠지요. 하지만 내 생각은 다릅니다.”
“…….”
“내가 만족함으로써 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편한 마음이 된다면, 그 이익이 고작 동리의 사람들에게 밥 한 그릇을 대접하는 것보다 훨씬 클 테니까요.”
가만히 듣던 이순신은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았다. 물론 무언의 항의 정도는 될 거다. 나는 당신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정도로.
참으로 일관적인 사람이었다.
“이해를 바라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이라면 저마다 세상을 보는 방식이 있기 마련이며, 그것이 꼭 하나이지만은 않지요. 그 점만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부정을 한다면 독선적인 사람이 되기 쉽기에.”
마치 선조처럼 말이다.
자신의 시선과 시야만으로 세상을 재단하고 그렇게 믿어버리는 광적인 편집증 환자.
이순신은 그에 비하면 훨씬 양반이었다.
“첨정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윗사람이 마련해주신 자리인데 부득불 마다하는 것도 예의는 아니겠지요.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혹시라도 다음에 또 자리를 가질 기회가 생긴다면 그때는 그대의 성향을 고려하겠습니다.”
“망극할 따름입니다.”
이순신은 허리를 꾸벅이며 재차 감사를 표했다.
나와 그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잔을 들었다. 그리고 가볍게 부딪힌 뒤 그 귀하다는 죽력고를 입에 담았다.
이전부터 코를 살살 간질이던 대나무 녹음이 혀끝으로도 느껴졌다. 응축된 대나무 진액이 들어가서인지, 일전에 마셨던 솔잎주보다 질감이 더 진했다.
그러나 질감과 상당한 도수와는 달리 진하거나 쓰지 않고 청아하다. 이율배반적인 감각에 놀라면서도 죽력고의 위명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음……!”
딱딱하기만 했던 이순신도 결국 자신이 사람임을 인정하듯 감탄을 흘렸다.
“마음에 드십니까?”
“예. 무척이나 마음에 듭니다. 첨정 덕분에 이런 귀한 술도 다 맛보게 되는군요.”
“하지만 굳이 찾는 일은 없겠지요?”
“예.”
이순신은 단호하게 긍정했다. 하지만 느낌이 이전과는 달랐다. 약간은 호의적으로 변한 기분이었다. 이순신을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먼저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린다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만.”
“편하게 말씀하세요.”
“예. ……대부분의 사람은 저를 대할 때 무척이나 어려워하고 거리를 두려 하였습니다. 알고 지내는 다른 지인들도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그야 성격이 이러니 어지간한 사람은 학을 떼겠지.
나야 이순신이 대단한 영웅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떠나서 솔직한 사람을 좋아하지만, 대부분에게는 그저 대하기 어렵고 재미없는 사람일 뿐이었다.
스트레스 풀려고 사람 만나서 놀고 마시는 건데 오히려 눈치 봐가면서 대해야 한다면 누가 좋아하겠나.
이순신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첨정께서는 처음으로 저를 보셨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어려운 기색 없이 잘 대해주셨습니다. 저 역시, 알고 지내는 그 누구보다도 첨정이 편하게 느껴집니다.”
“음, 그건 이 사람이 그대를 존중하기 때문이겠지요.”
이순신은 잠시 말이 없다 서둘러 마무리했다.
“……편한 기분에 실수하게 되더라도 용서해주시길 바라겠습니다.”
솔직하게 마음을 드러낸 것이 부끄럽기라도 했던 것일까.
그만큼 내가 잘 대해줘서 놀랐다는 뜻이기도 하겠지만, 잘 보였다면 나로서는 그만이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용서할 일은 없습니다. 그럴 이유도 없고 필요도 없으니까요.”
“혹시라도…….”
“나는 그대의 말대로 이제 처음 봤을 뿐이지만,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언제나 진심이고 최선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또, 그 성격이 어디 가지는 않겠지요. 그대는 인생에 굴곡은 많더라도 거기에 굴복하지는 않을 사람이니까.”
이순신은 그 특유의 곧고 원칙을 따르는 성격 때문에 여러 상관들과 잦은 마찰을 빚어왔다.
그래서 부당한 대우도 여럿 받아왔다. 그럼에도 이순신은 단 한 번이라도 불의와 타협한 적이 없었다.
“인생에 굴곡은 많더라도 굴복하지는 않을 사람이다…….”
이순신은 무척이나 감명받은 표정을 지었다. 나로서는 의외의 반응이었다. 생각대로 말했을 뿐이었으니까.
그가 말을 이었다.
“저에게 무척이나 과분한 말씀을 하십니다.”
“괜한 소리는 아니었을까 우려스럽습니다.”
“아닙니다. 첨정의 말씀이 헛되이 되는 일이 없도록, 항상 마음에 새기며 살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이순신은 짧게 허리를 숙이고는 술병을 들었다. 나는 잔을 내밀었다.
그렇게 각자의 잔이 채워졌고 다시 죽력고를 맛보았다. 새삼스럽지만 정적이기까지 한 분위기에도 무척이나 어울리는 명주였다.
“듣자하니 무과를 준비하고 계시다면서요.”
“예. 학문에 뜻이 없는 것은 아니나, 나라에 공을 세우는 방법은 학문 외에도 있으리라는 생각에 무과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올바른 마음가짐입니다. 사실, 조선에 옛 선인들의 말씀만 외는 사람은 차고 넘치지요. 가슴에 새기지는 않은 채로 말입니다. 그럴 바에야 한 자루 칼을 쥐고서 직접 나라를 지키는 편이 낫겠지요.”
나의 말에 이순신이 쑥스럽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사실, 학문에는 큰 자신이 없어서이기도 합니다. 첨정의 말씀을 들어보니 선택을 잘한 것 같아 다행입니다.”
“하하하……. 무과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으십니까?”
“마음 같아서는 벌써 백 번이고 급제했을 터임에도 아직 몸이 마음에 미치지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마와 사예(射藝, 궁술)이 그러합니다.”
실제로 이순신은 첫 무과 시험에서 낙마하는 바람에 탈락했고, 활 쏘는 실력 역시 좋은 편은 아니었다.
평소에 활을 잡기 힘든 왕의 위치에 있던 정조조차 50발을 쏘아 49발을 맞춰놓고는 한 발은 예의상 안 맞췄다는 일화가 있는 데 반해, 이순신은 일평생 무에 몸을 담았음에도 50발을 쏘고서 43발을 맞췄다며 특별히 기록한 적이 있었다.
물론 이순신은 신립과 같은 용장이 아니라 지장이니 일신의 무위가 부족하다고 해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무과는 일신의 무위를 보고서 뽑는 시험이었다. 지장 타입이어도 아주 지장 타입인 이순신으로서는 쥐약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이 그대를 도와줄 수도 있겠습니다.”
“어떤 도움이라도 감사히 받겠습니다.”
“음, 새파란 연배의 문관인 이 사람이 도와드린다는데 전혀 이상해하지 않으시는군요. 믿는 구석이라도 있어 보입니까?”
짓궂은 어조로 물어보니 이순신이 단호하게 답했다.
“깊은 생각을 가진 첨정이시라면 어떤 방도라도 있으실 터이지요.”
“내가 그새 심모원려가 깊은 사람이 되었군요. 착각이 아니기만을 빌어야겠습니다. 한 번 오해가 생기면 풀기는 어려운 법이니까요.”
“겸양이 과하십니다. 첨정께서는 실로 마음과 생각이 깊으신 분입니다.”
입에 발린 말이나 할 이순신은 아니니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기대에 응해줘야지 않겠는가.
“이 사람이 알고 지내는 분 중에, 신 공(公)이라고 비교적 최근 무과에 급제한 사람이 있습니다. 회령 원정 때 공을 세워서 지금은 분순부위(奮順副尉, 종7품)지요.”
신립 말이다.
무위는 약한 대신 지장으로서의 능력이 상한을 친 이순신과는 달리 신립은 전형적인 용장, 맹장으로서 일신의 무용이 무척이나 뛰어난 사람이었다.
대신 지략이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지만……. 무과 급제를 바라는 이순신에게 신립의 도움만큼 확실한 것은 없을 터였다.
“처음 회령 원정의 소식을 접했을 때 소인 역시 말단 병졸로라도 함께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항상 아쉬워했습니다. 현장에 계셨던 분을 알게 된다니, 무척이나 영광입니다.”
나도 현장에 있던 사람인데 말이야.
게다가 그냥 현장에 있던 사람 x번, 같은 것도 아니고 회령판관 겸 함경북도 병마절제도위로서 직접 여진족 지원병을 지휘하기까지 했다.
그때가 참 좋았다.
도성에서라고 마냥 썩어온 것만은 아니지만, 적어도 회령에서는 또라이 선조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은 없었으니까.
나는 잠시 장밋빛 청춘을 회상하고는 말했다.
“신 공에게 이 사람의 부탁을 전해놓겠습니다. 답을 받는 대로 그대에게 결과를 전해드리지요. 아직 정해진 일은 아니지만, 모쪼록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일신의 무용이라면 따라올 자가 없는 자이니.”
“첨정의 배려에 지극히 감사드립니다. 이 은혜, 뼈에 새겨두고서 항상 잊지 않겠습니다.”
“약간의 도움이라도 될 수 있다면 이쪽이야말로 고맙지요.”
“아닙니다. 소인, 이름 이순신 석 자를 걸고서 반드시 은혜를 갚아 보답하겠습니다.”
“지금은 함께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이순신이 눈치껏 술병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