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64화
22. 자유의 몸 이순신 (3)
“……그 버릇없는 친구?”
예전에는 위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은 정이 뚝 떨어진 지 오래였다.
특별히 증오한다던가, 그렇지는 않았다.
단지 피곤한 사람이니 살면서 앞으로 다시 마주하는 일이 없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런데 부른 적도 없는데 찾아오다니. 불청객도 이런 불청객이 따로 없었다.
“일면식도 없으면서 연락도 없이 대뜸 방문하다니. 평소 같으면 몰라도, 지금은 손님과 함께하고 있지 않나?”
나는 물리라는 뜻에서 손짓했다.
을룡은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다시 대문으로 나아갔다.
곁에서 이이가 물었다.
“누군가?”
“류성룡입니다.”
“음……. 그래도 자기 발로 찾아왔다는데 설마 동생한테 나쁜 말이라도 할 생각이었겠나?”
“제가 두고두고 류성룡을 씹을 생각은 없지만, 그가 모두가 모인 자리에서 나를 애늙은이로 만든 건 사실입니다. 세간의 인식도 나빠졌지요. 이상하게 퍼진 소문을 접한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이이는 더 무어라 하지 못했다.
나로서는 지극히 불쾌한 일이었고, 말한 대로 류성룡을 두고두고 욕할 생각까지는 없지만, 다시 마주칠 일이 없기를 바라는 것은 진심이었다.
선조 하나만으로도 피곤하니까.
“공자님.”
“왜?”
“류성룡이 반드시 뵙고 드릴 말씀이 있답니다.”
얼마나 대단한 말을 하겠다고 부득불 나를 보겠다는 건가.
은근히 불편한 기분이 드는데 곁에서 이이가 청했다.
“한 번 봐주게, 첨정.”
“……좋습니다.”
나는 을룡에게 턱짓했다.
녀석은 눈치껏 예를 표하고는 물러났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류성룡과 함께 돌아왔다.
“첨정 나리.”
“무슨 일인가?”
“사직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렇네만.”
“사죄드리고 싶습니다.”
대번에 눈이 가늘어졌다.
사과할 것이라면 진즉 할 것이지, 이제 와서 한다는 말이 사직한다는 말을 들었단다. 혹시라도 자기 때문에 내가 사직한 줄로 아는가?
굉장히 불쾌한 착각이었다.
물론 직장 내 동료와의 불화는 일 맛 떨어뜨리는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류성룡은 나의 직속 부하도 아니었고, 같은 관청 소속도 아니었다. 지난날 한 번 봤던 이래로 이제 두 번째로 보는 것이었다.
“자네가 은영연 직전의 자리에서 했던 행동들 덕분에, 많이 불쾌했고 그 감정은 아직도 가시지 않았네. 게다가 소문도 퍼져서 나는 졸지에 아주 시건방진 사람이 되었지.”
“송구할 뿐입니다.”
“그다지 송구하지는 않을 테지.”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렇게 빨리 찾아온 것을 보면 말이야. 혹시라도, 나의 사직에 자네가 어떠한 공훈이라도 했다고 생각하나?”
“……아닙니다.”
“그래. 빈말로라도 나에게 존재감을 과시하고자 찾아왔다고는 못할 터이지. 너무 자만하지는 말게. 덕분에 팔자에도 없던 악명을 쌓았지만, 그게 사직에 영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니까.”
말은 조곤조곤 나오고 있었지만 감정은 다분히 실려 있었다.
옆에 자리한 이이도 무척이나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이런 식으로도 말할 줄은 몰랐다는 것처럼.
류성룡은 깊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오해이십니다.”
“죄책감이라도 느끼는 건가?”
“예.”
“빠르게 찾아온 죄악감은, 그만큼 빠르게 사그라들기 마련이지. 자네를 나의 집으로 이끈 것은 죄책감이 아닐세. 충동이지.”
류성룡은 부인하지 못했다.
“평소 같았더라면 자네의 난입을 굳이 타박하지는 않았겠지만, 지금은 손님이 있는 자리라서. 길게는 이야기하지 못하겠군.”
“……알겠습니다.”
“이만 돌아가게. 굳이 나를 놀리러 온 것이 아니라면, 지금 찾아온 것도 용기를 낸 것이겠지만. 시기가 적절하지 못해서 말이야.”
“알겠습니다.”
“다음에 보세.”
단호한 축객에 류성룡은 왈가왈부하지 못했다. 그리고 찾아왔을 때처럼 빠르게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소란이 가시고 마당이 조금 한산해지자, 곁에서 이이가 놀랍다는 얼굴로 말했다.
“동생이 이렇게까지 화를 내던 사람인가?”
“자리에 류성룡만 있었던 것도 아닌데 실망스런 모습 보여드려서 죄송합니다.”
“아닐세, 아니야. 그보다는 말솜씨가 보통이 아니던걸. ‘자네를 나의 집으로 이끈 것은 죄책감이 아닐세. 충동이지.’ 캬아아…….”
“무슨 감탄까지 하십니까? 듣는 사람 민망하게.”
“역시 자네는 보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게 느껴진다니까. 어쩌면 나보다도 더 연배가 많을지도 모르지. 혹시 나이를 속인 건 아닌가?”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쓸데없는 관심 덜 받게.”
“첨정 형님, 이 교리 녀석을 잘 좀 봐주십시오, 헤헤헤.”
이이는 나의 말은 듣지도 않았다는 듯 과장된 어조로 말했다.
“됐습니다, 됐어요. 술이나 마저 마십시다.”
“그럴까? 하하!”
* * *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류성룡이 연락해왔다.
이전에 제대로 사과드리지 못했으니 다시 한번 기회를 주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나로서도 류성룡과 두고두고 척을 진 채 지낼 생각은 없었고, 일전의 만남에서 너무 박대한 것 같아 응해주기로 했다.
그리고 약속 당일인 오늘, 류성룡이 찾아왔다.
“첨정 나리.”
다시 마주한 류성룡은 평소답지 않게 주눅 들어 있었다.
뭐, 봤으면 얼마나 봤다고 평소를 운운하겠냐만…….
내가 겪은 류성룡은 꿋꿋하리만치 뻔뻔한 사람이었으니까. 이래서 첫인상이 무척이나 중요하다는 거구나 싶다.
아마 나도 류성룡에게 생각보다 무서운 사람이라는 인상이 깊게 박힌 모양인데, 이미지 변신이 필요했다.
“일전에는 이 사람이 못난 모습만 보여드렸습니다. 너무 연연해하지 않으신다면 좋겠군요.”
“아, 아닙니다. 오히려 시기를 분별하지 못하고 무작정 찾아뵈어, 손님을 맞는 자리에 폐가 되어 죄송할 뿐입니다.”
류성룡은 질색하며 손까지 내저었다.
“안으로 듭시지요. 상을 봐두었습니다.”
“상, 말입니까?”
“예. 술상 말입니다.”
원래 남자들은 같이 마시면서 친해진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지난 은영연을 놓쳤다. 그걸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류성룡과 술자리를 가지기로 했다.
또 약간의 술이 들어가는 편이 서로를 편하게 대하기 쉬우니까.
지금 이렇게 딱딱한 분위기에서는 죽도 밥도 안 된다.
“그럼 염치 불구하고…….”
찬바람 쌩쌩 부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니 금세 몸이 따뜻해졌다. 그렇지만 방문은 닫지 않았다. 덕분에 하반신은 뜨뜻한데 위로는 시원했다.
이런 이중적인 감각이 좋았다.
마치 한여름에 에어컨 쌩쌩 틀어놓고 이불을 덮어쓰는 것처럼 말이다.
“한 잔 받으시지요.”
나는 어려워하는 류성룡을 대신해 먼저 술병을 들었다.
“아, 예.”
류성룡은 두 손으로 잔을 받들어 올렸다. 확실히 윗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첫 만남에서 그렇게까지 딱딱했던 것이 그에게는 특별한 행동이 아니었는지도 모르겠다. 류성룡은 정말로 나를 윗사람으로 생각한 것이다.
단지 때와 자리가 맞지 않았을 뿐이지.
“냄새가 좋습니다.”
“빚는 과정에서 솔잎을 썼지요.”
“그래서 소나무 냄새가 나는 것이로군요.”
다른 특징으로는 옅은 노란색, 약간의 단맛, 그리고 도수 높은 청주답지 않은 끈적끈적한 질감이다. 다 솔잎의 진액에 의해서다.
류성룡은 서둘러 맛보고 싶다는 듯 잔을 입으로 가져가다, 나를 의식하고는 잔 대신 술병을 들었다.
“자. 한 잔 합시다.”
“예.”
짧은 건배가 있었고 각자 잔을 기울였다.
솔잎주는 기대대로, 그리고 마셔왔던 대로 만족스러웠다. 입안에 감도는 짙으면서도 과하지 않은 소나무 냄새가 머리를 맑게 해주는 기분이었다.
취하기에는 한참이나 부족한, 고작 한 잔의 술이었지만 그 한 잔이 가져다주는 충족감이 남달랐다. 류성룡도 나와 다르지는 않았는지 입을 열었다.
“급제 동기였던 정여립이 알려주었습니다. 아, 기억하십니까?”
“알지요. 대과에서 갑과 이등으로 급제한 분 아닙니까.”
“예. 마음이 맞아 은영연 뒤로도 다시 볼 일이 있었는데, 처음 첨정을 뵌 자리에서 제가 얼마나 잘못했는지를 알려주었습니다. 깊게 반성할 수밖에 없었지요.”
류성룡은 앉은 자리에서 허리를 꾸벅 숙였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전부터 첨정께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는데, 차마 부끄러운 마음에 찾아뵙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최근에 사직하신다는 소문을 듣고, 어쩌면 다시 못 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찾아오신 거로군요.”
“예. 하지만 마음만 성급했습니다.”
“급할 만도 하지요. 또 다른 기회가 없을 수도 있다면……. 저라고 다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고 몇 번씩 더 잔이 오갔다.
다시 겪어본 류성룡은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주위에 있는 여느 위인들처럼 정말 대단하다 싶은 느낌은 없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편했다.
정철이나 이이, 이산해 같은 경우에는 성격이 너무 뻔하고 개성이 심했으며, 김성일은 스승이었고 신립은 나를 공공연히 공자님이라 불러댔다.
그러니 류성룡 정도면 양반이지.
다시 보니 천사 같다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건가?
멋쩍게 웃던 류성룡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소관의 만행으로 첨정께서 사직하신 건…….”
“설마요. 이 사람이 아무리 속이 좁아도 고작 그런 일로 사직까지 결정할 정도는 아닙니다.”
나는 단호하다는 느낌까지 들 정도로 분명히 말해두었다.
류성룡이 믿고 안도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지만, 실제로도 그러한 까닭이다. 내가 사직한 이유는 선조의 광기를 두 눈으로 목도한 탓이다.
그는 평소에만 기질을 드러내지 않을 뿐 확실히 미친놈이었다.
누구건 의심을 하고 지레짐작을 하지만 선조가 하는 의심과 짐작의 정도는, 개성이라고 치기에는 도를 넘은 것이었다.
거기에 가늠할 수 없는 행보는 위험성을 한 층 높여주었다.
일관적으로 편집적이라면 맞춰주기라도 할 텐데 선조는 이랬다가 저랬다가 지랄도 말이 아니었으니까.
“불가피한 사유가 있었습니다.”
“혹시 원치 않게……?”
“아닙니다. 원해서 한 사직이고, 원치 않는 일이 있다면 사직이 반려되는 것이겠지요.”
파직은 되어도 사직은 안 된다고 길길이 날뛰던 선조였다. 그래서 보복이 있을 각오도 했고, 아예 도성에서 남몰래 탈출할 생각까지도 있었다.
잘 되어 망정이지.
“그러니 옛일에 대해서는 더 왈가왈부하지 맙시다. 이미 지난 일이고, 이 사람은 개의치 않으니까. 오히려 서애와도 오해가 풀려서 지금은 가장 기쁠 때입니다.”
“예. 첨정께서 기쁘시다니 저 또한 기쁩니다.”
확언을 받아서인지 류성룡은 훨씬 편해 보였다. 그가 물었다.
“이제는 무엇을 하시렵니까?”
“글쎄요. 당분간 아는 분들께 감사와 인사를 표할 생각입니다.”
“감사와 인사라니……, 어디 가기라도 하십니까?”
“예. 정해둔 곳은 없지만 가급적이면 도성이 아닌 다른 곳으로 내려가고자 합니다.”
“하오나 첨정께서는 도성에서 하시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음.”
나는 술잔을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도성에서 하는 일.
없지는 않지.
“저에게 도움을 받으시는 분들이 몇 분 계십니다만, 특별히 예산이 들어가는 것은 아니어서요. 책임자도 뽑아뒀으니 알아서 잘 굴러가리라 믿습니다.”
숭신방에 백 명도 더 수용할 수 있는 커다란 저택을 세워두었고, 방비를 위해 요새형으로 지어 외부와는 격리된 상태였다.
구성원 모두가 성실하고 열심인 사람들이고 또 최근에는 늘어난 규모를 감당하기 위해 정식으로 귀생 아저씨에게 감투도 씌워주었다.
꼭 내가 있어야만 돌아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해가 중천일 때 시작한 자리는 하늘이 까맣게 물들 때까지도 이어졌다.
나는 문득 방문 밖을 보았다가, 밤이 된 것을 알아채고는 말했다.
“내일 또 지겹게도 등청하셔야 하는데, 이 사람이 바쁜 분을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군요.”
“아닙니다. 소관으로서는 첨정께 사죄드리고, 또 오해를 풀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래요?”
나는 작게 웃었다.
“서애께서는 훌륭한 재상이 될 겁니다.”
“말씀만이라도 감사합니다.”
“그냥 드리는 말이 아니에요. 서애께서는 정말로 훌륭한 재상이 될 겁니다. 이런 자리를 또 가지기에는, 귀한 시간을 뺏는 것이 미안할 정도로.”
“아닙니다, 아니에요.”
아직은 새파란 신참 관리인 류성룡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소관이 첨정 나리만 하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지내셨던 관직마저 조총을 완수하시기 위해 지키셨으니, 필경 사직만 하지 않으셨더라도 당상의 자리에 오르셨겠지요. 재상의 자리는 소관 같은 철부지보다는 첨정께 더 어울립니다.”
“하하……. 어째, 서로 입바른 말만 해준 격이 됐습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자리가 파해질 분위기가 되어, 나는 문갑에 넣어두었던 선물을 꺼냈다.
갈색의 딱딱한 직육면체 덩어리였다.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자, 류성룡은 대번에 관심을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