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62화
22. 자유의 몸 이순신 (1)
어전에 수십 명 대신들이 모였다.
그들의 관심사는 하나였다.
“내가 어떻게 해야겠는가.”
선조가 남에게 의향을 물어보는 경우는 흔치 않다.
항상 조정을 장악하는 데 혈안인 그로서는, 무슨 일이건 자신의 의향대로 좌지우지해야 했으니까.
그만큼 혼란스럽다는 방증이었다.
“전하.”
영의정 이탁(李鐸)이 입을 열었다.
“군기시 첨정 이순신이 비록 촉망받는 인재라고는 하나, 일개 당하관에 지나지 않는 만큼 그의 사직을 조정에서 왈가왈부할 가치는 없는 줄로 아뢰옵니다.”
언뜻 무관심한 어조였으나, 진심은 아니었다.
이탁 역시 이순신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전시 갑과 삼등은 여러 가지를 의미했다. 그의 재주, 왕의 관심 등등.
십 대 후반이라는 한창의 나이에 그만한 성과를 내고 주목받는 사람은 없었다. 이탁 역시, 앞길 창창한 이순신이 사직을 청했다는 소식을 처음 접했을 때는 진심으로 당혹스러웠으니까.
그럼에도 시큰둥한 반응을 내비치는 이유는, 왕의 태도가 달갑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촉망받는 인재라고는 하나 아직은 당하관인 사람이다. 그런데 사직소 하나 올렸다고 어전에서 의향을 묻다니.’
그동안 이탁이 접해온 왕의 성격을 감안할 때, 그가 순수하게 신하들의 의향이 궁금해서 지금 물어보는 것은 아니었다.
정해진 답을 눈치껏 외라는 것이겠지.
단지 고이 따를 생각이 없을 뿐이었다.
“영상…….”
“하문하시옵소서.”
“이순신이 비록 직품은 높지 않다고 하나, 재주가 있고 이번 대과에 급제함으로써 자질까지 증명한 사람인 만큼 그의 사직을 가납하느냐, 마느냐는 다른 관리들과의 경우와는 다르지 않겠는가?”
“신 역시 이순신의 자질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옵니다. 단지 나라의 중차대한 일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일개 신하의 사직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맞지 않다고 생각할 뿐이옵니다.”
“…….”
선조는 눈살을 찌푸렸다.
전 영의정인 이준경도 그러했지만, 이번 영의정 이탁 역시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주질 않았다.
그가 이번에 이순신의 사직소를 어전에서 공공연히 언급하고 신하들의 의향을 물어본 이유는, 여론을 만들어 확실히 못을 박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분명 자신은 이순신에게 ‘파직은 되더라도 사직은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순신은 당당하게 사직을 청한 것이다.
왕의 말을 무시한 처사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하지만 여론이 지금 따라주지 않고 있었다.
선조는 고개를 돌렸다.
“병판.”
이에 병조판서 박영준이 입을 열었다.
“말씀하시옵소서.”
“내 알기로 그대는 이순신이 주재하는 군기시의 내부 시연에 참석했다. 그때 이순신의 태도는 어떠했나?”
“특이한 바는 없었사옵나이다. 관원 하나에게만 시선을 주기에는, 조총이라는 신무기가 워낙 빼어났던지라.”
“그렇게 대단한 무기인가?”
“우리의 군사들에게 들려준다면 변방의 적병들을 보다 쉽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역시 이순신은 그냥 내보내기에는 아까운 자로군.”
선조는 어떻게든 여론을 유도하기 위해 애썼으나, 신하들의 분위기는 그저 그랬다.
신하들 역시 유능한 관리의 낙향을 바라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런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기에는 지난 몇 년 사이 왕의 폭거, 특히 인사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선조는 낙향을 거듭 요청하는 여러 관리들을 상대로 부득불 용납해주지 않았다. 그렇게 조정에 붙들어 두고도 중요하게 쓰지 않아, 병풍이나 장식처럼 있다가 천명을 달리한 사람 또한 한둘이 아니었다.
대표적으로는 이황이 그러했다.
마음 편히 쉬지 못하게 수도 없이 불러내었고, 가까스로 조정에 불러들인 뒤에는 낙향도 허용하지 않은 채 애매한 관직만 주고서 자리만 지키게 만들었다.
그러고서 유명이 다하자 단숨에 영의정으로 추증하여 자신의 권위에 보탰다. 이황과 같은 대학자를 기용하고 우대했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어느 누가 그것이 왕의 진심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이전부터 선조는 인사를 좌지우지했고 신하들을 조종해왔다. 그러나 신하들은 사람이지 인형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침묵을 지키며 미지근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분명 이순신은 유능하고 앞길 창창한 인재였으나 그렇다는 이유만으로 왕의 폭거에 동조해주었다간, 다음 차례에 당하는 것은 자신이 될지도 몰랐다.
“…….”
선조는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가, 그나마 자신이 우대하고 있던 대사간 이산해를 향해 입을 열었다.
“대사간의 생각은 어떠한가? 이전부터 군기시 첨정과 잘 알고 지낸 사이이니, 보다 정확한 평가를 할 수 있겠지.”
해준 것도 있지만 이산해는 냉정한 사람이었다.
본성이 그러하니, 유능한 사람이 사직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잘 알겠지.
“전하.”
“말하라.”
선조는 마치 맡겨놓은 답이라도 있다는 듯 팔짱을 낀 채 이산해의 말을 기다렸다.
“군기시 첨정 이순신이 사직을 청했다는 것은 신도 몰랐던 일인데, 이렇게 소식을 접하게 되니 무척이나 놀랍사옵니다. 옛 사람들은 조정에 인재가 가득해야 나라가 잘 운영된다고 하였는데, 이순신은 인재라는 표현이 과분하지 않은 자이옵니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
“이순신은 타고난 자질이 상당하므로, 어린 나이에 직품이 종사품에 이르렀으며, 최근 대과에 급제하고 신무기의 개발도 완수하여 더 높은 관직으로의 진출이 불가피한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게 부담이라도 된단 말인가.”
선조가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그러하옵니다. 지극히 젊은 사람이 드높은 자리에 앉게 되었으니, 자질을 떠나 아래에 자리하게 된 여러 관리들의 입장에서는 자연스레 시기와 질투가 일 수밖에 없사옵니다.”
“말도 안 된다. 어찌 유학을 배운 선비가 사사로이 연배를 따지며 질투를 한단 말인가?”
“……첨정이 은영연에 참석하지 않았을 때, 당시 세간에는 첨정이 장원인 유성룡에게 기분이 상해 그를 꾸짖고 먼저 발길을 돌렸다는 말이 돌았사옵니다. 그러나 사실과는 조금 다릅니다.”
“그렇겠지.”
선조는 이순신이 은영연에 빠진 이유를, 그가 오만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은영연이란 대과 합격자들을 위해 왕과 조정이 주재하는 연회.
어려운 시험인 대과를 급제했음을 축하하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조정과 왕이라는 복종과 충성의 대상을 인식시켜주는 자리이기도 했다.
그런 자리에 일부러 빠진 것은 왕과 조정을 능멸할 생각이 아니었겠느냐, 가 선조가 철석같이 믿고 있는 바였다.
“신이 마침 급제자 중에서 하나와 친분이 있어, 전말을 물었더니 류성룡이 처음부터 첨정의 존재를 부각시키며 위화감을 조성했다고 하옵니다.”
“…….”
“첨정은 다른 급제자들과 어울릴 생각으로 자신을 낮췄고, 또 가볍게 농도 하였으나 류성룡이 거듭 첨정이 현직 관리임을 강조하고, 또 자질이 뛰어나 어린 나이에 종사품에 이르고 갑과 급제한 사실을 밝히므로, 그제야 첨정이 참지 못하고 류성룡의 태도를 지적하고서 발길을 돌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선조로서는 예상치 못했던 전말이었다.
“나로서는 처음 듣는 말이다.”
“만일 이순신이 당시의 소문처럼 자신의 지위만을 생각하여 동기 급제자들을 일방적으로 업신여겼더라면, 어떻게 군기시의 관리들이 이순신을 드높이겠사옵니까? 그가 공문을 올릴 때에는 자신의 공을 일부러라도 밝히지 않으면서, 일개 공노비는 이름까지 일일이 기록하는 자임은 모두가 알고 있는 바이옵니다.”
“……맞다.”
선조로서는 크흐흠, 쓰게 침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첨정의 사직이 류성룡의 만행 때문에 벌어졌다는 뜻인가?”
“이순신의 인품을 보아 고작 그 정도의 일로 사직을 청하지는 않았을 것이옵니다. 다만 직품이 더 높아지게 되었으니, 스스로가 처한 상황을 경계하여 물러나려는 것이 아닐까 사료되옵니다.”
“음.”
이순신은 너무 어린 나이에 공을 세우고, 여러 사람의 시선을 받게 됐다. 당연히 부담감도 지대할 수밖에 없을 터.
그가 느낄 피로함은 선조 역시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 선조 역시 이순신과 비슷한 연배일 뿐만 아니라, 무척이나 젊은 나이에 왕이 되어 불가피하게 여러 사람들의 시선과 기대를 받고 있었다.
‘정말로 이순신이 거만하여 나를 거스를 자였던가?’
선조는 자신의 입장 역시 재고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자신이 사람에 대한 평가를 잘못 내렸으며, 또 잘못된 평가로 그동안 신하를 잘못된 태도로 대했음을 인정하는 것은 무척이나 불쾌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존재란 감정적으로만 대하기에는 중요도가 높은 자였다.
과거 자신이 선발했던 자들 중에서 이순신만큼 보답을 해온 자가 있던가? 만약 증오할 대상이 있다면 밥값하는 사람이 아니라, 밥값하지 못하는 자들이어야 했을 터다.
“…….”
선조는 다시금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이순신에 대해서는 여전히 꺼림칙한 부분이 있었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기가 불쾌했던 탓이었다.
그렇다고 일일이 트집을 잡으며 변명거리를 찾는 것은 추하게만 느껴졌다. 인간군상에서 흔히 찾을 수 있는 속 좁은 자가 되기보다는, 자비심 넘치는 대왕을 연기하고 싶은 그였으니까.
“알겠다. 첨정의 사직 건은 알아서 처리하겠다. 수많은 재상 중에서 그나마 대사간만은 도움이 되는구나.”
선조가 턱짓하며 말하자, 이산해는 허리를 숙이며 물러났다.
“망극하옵니다.”
* * *
“이게 또 통과됐네.”
나로서는 반신반의한 일이었다.
선조가 했던 말이 있었으니까. 파직은 되어도 사직은 안 된다……. 보아하니 그 때는 제정신이 아니어서 막 내지른 모양이었다.
하지만 안도할 수는 없었다. 선조는 믿지 못할 사람이었고 언제 변덕을 부를지 몰랐으니까. 아예 낙향을 해버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공자님.”
을룡이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녀석의 얼굴은 무척이나 상기되어 있었다. 잔뜩 기대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다 준비되었습니다.”
“그래?”
나는 쪽마루에서 일어나, 을룡의 안내대로 부엌으로 향했다.
이리저리 치이는 거지 같은 세상에서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미식뿐. 하지만 도성으로 온 이후 바쁘긴 또 무지하게 바빴다.
하지만 사직이 통과된 지금 나는 거칠 것이 없었다.
“이번에는 어떤 음식을 만드실 생각이신지…….”
회령에서 말젖과 꿀로 만든 라스말라이를 아직도 잊지 못하는 을룡이었다.
그러나 바쁜 공자님을 의식해 얌전히 지낼 수밖에 없었던 그동안의 나날……. 어쩌면 생고문이라 봐도 무방하리라!
최근 상전이 사직소를 올렸다. 걱정되는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관직이란 무척이나 명예로우며, 극소수에게만 허락되는 특권의 자리.
무슨 바람이 부셨는지 한동안 피로감을 호소하시다 결국에는 사직하고 말았다.
위로를 드리고 싶었지만 상전의 마음을 모르는 자신이 어떻게 위로를 한단 말인가? 어쭙잖게 몇 마디 건넸다간 도리어 안 하느니만 못할 터였다.
을룡은 차라리 이 순간을 순수하게 즐기기로 했다. 상전이 해주는 맛있는 음식이나 맛보면서 말이다.
준비한 재료들은 라스말라이와는 달랐으나, 이번 음식도 충분히 흥미진진했다.
손질한 생닭들과 물에 풀어놓은 밀가루, 소금을 포함한 향신료 조금과 가마솥에 한가득 채워놓은 기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