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왜 이순신이죠-60화 (60/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60화

21. 완전히 미친 사람 (2)

“왜 말이 없지? 왕인 내가 하문하지 않았나. 진실을 밝혀보라!”

“전하.”

내가 운을 떼자, 선조는 들어보겠다는 듯 다시 콧대를 높이며 팔짱을 꼈다.

나는 말을 이었다.

“명종 대왕의 치세 당시, 왜구들이 크게 난을 일으킨 적이 있사옵니다.”

“을묘왜변을 말하는 건가?”

“그렇사옵니다.”

명종 10년.

왜구들이 지금의 전라남도 해남군을 습격한 일이 있었다.

놈들의 규모와 기세가 얼마나 크고 강했는지, 결국 토벌되었으나 그동안 무려 10개의 진이 함락당했고 심지어 전라도의 방위를 담당한 전라병마절도사까지 전사하고 말았다.

“을묘왜변은 어째서 거론하는 거지? 자네의 진심과 관련 있나?”

“그러하옵니다.”

“…….”

선조는 내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말을 이어나갈 뿐이었다.

“한동안 왜구는 조용했사옵니다. 그러나 을묘왜란을 비롯해, 이전에 벌어졌던 삼포왜란이나 사량진왜변까지 감안하면 그들은 단 한 번도 조선에 평화를 보장해준 적이 없사옵니다.”

“…….”

“단지 왜란이 있었던 직후 조선에서 무역을 제한하면, 대마도주가 마음에도 없이 겉으로만 비굴한 태도를 보이며 자비를 청하는 일이 부지기수였으며, 그럴 때마다 조정은 장차 왜구들이 준동하는 일이 있을까 우려하여 다시 세견선의 제한을 풀어주어 왔습니다.”

“…….”

“어쩌면 과거에 벌어졌던 일들이, 마치 연례행사처럼 이어져 왔던 그 역사가 오늘날에도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사옵니다. 또한, 방위는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지, 변덕스러운 적들의 비위를 맞춰준다고 성사되는 것이 아니옵니다.”

그래서 정말로 임진왜란이 벌어지지 않았던가.

분명 선조의 치세나 가까운 이전의 왕들은 잊을 만하면 외침을 겪어왔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로 ‘잊을 만’하면 벌어졌던지라, 조선은 국가 방위에 특별한 정성은 기울이지 않았다.

그런 조선에게 임진왜란은 무척이나 예상치 못한 규모의, 치명적인 침략이었다.

방비를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경상도 지역에서는 감사가 백성들을 노역에 너무 많이 동원한다는 이유로 탄핵을 당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임진왜란에 영향을 끼칠 수 없었다. 넘치는 파도 앞에 갈대 몇 개 심는다고 수해를 막을 수는 없는 법이다.

‘이런 미래를 알고 있지만, 고작 그런 이유만으로 나라의 방비를 강화하자고 한다면 제정신 취급은 못 받을 터이니…….’

옛일을 언급해 합리적인 방향으로 우려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미래는 누구도 알 수 없지만, 과거는 누구나 알 수 있으니까.

선조가 반응했다.

“외침은 있을 수 없다.”

그는 마치 미래를 아는 사람은 이순신이 아니라 본인이라는 듯, 너무나도 단호하게 답했다.

정말로 미래를 아는 사람으로서는 어이가 없다 못해 출타하실 정도였다. 자기가 뭘 안다고 ‘있을 수 없다’ 호언장담을 한단 말인가?

선조가 말을 이었다.

“외침이란 아무리 대응을 하더라도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해. 그런 일은 선왕이나 후왕의 치세라면 백 번이고 일어나도 무방하지만, 나의 치세에서는 일어날 수 없어. 일어나서도 안 되고!”

“…….”

진짜 미친놈인가 싶었다.

어떻게 외침이 자기가 내키지 않는다고 안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어느 왕도 외침은 내키지 않는다. 그럼에도 외침은 항상 있어 왔다.

당연한 일 아닌가?

외침은 본인이 일으키는 게 아니다. 밖에서 쳐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외침(外侵) 아니냐? 이름부터 밖 외(外) 자가 들어가지 않나.

그런데 자기가 뭐라고, 내가 내키지 않으니 외침은 있을 수 없다고 호언장담을 한단 말이냐. 개또라이도 아니고.

‘이 미친놈을 어떻게 하지?’

솔직히, 내가 이순신이 됐을 때는 걱정도 많이 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원래의 이순신과는 길도 많이 달라졌지만, 과거에 제일 많이 걱정했던 것은 선조의 진상이었다.

물론 지금 하는 짓도 보아 진상은 여전했지만 진짜 이순신이 겪었던 진상은 한술 더 뜨는 것이었다.

기껏 박살 난 나라를 구해줬더니 이제는 세상 만만해졌다고 정치적인 의도로 숙청하지를 않나. 관직만 빼앗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아예 죽이려 들기까지 했다.

그래놓고 낙하산으로 삼도수군통제사에 앉은 원균이 해군 전력을 모조리 박살 낸 뒤에야,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부임시켰다. 공식적으로 존재하는 배가 한 척도 없었는데 말이다.

배설이 칠천량 해전 당시 열두 척의 전선을 데리고 피신했다는 것도, 그리고 적전도주의 처벌을 알면서도 이순신 곁으로 돌아온 기적이 없었더라면 설령 전신, 해신으로 추앙받는 이순신이라도 승산이 있었을까?

어쩌면 선조는 왜군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기 손으로 나라를 망하게 했다는 역사를 남기는 것이 두려웠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조선의 마지막 희망이었고 꺼진 불씨에 지나지 않았던 해군의 총대장이라는 직위를 이순신에게 돌려준 것 아니겠나?

조금이라도 망국의 책임이라는, 역사의 평가를 떠넘기기 위해서 말이다.

만일 내가 당시의 이순신이었다면 주저 없이 관직을 버리고 명으로 피신했을 거다.

한창 싸우는 중에 최일선, 그것의 최고 중요한 장군을 숙청한 것으로도 비분강개할 일인데, 이제는 적과 맞서 싸울 무기도 없었다. 그마저도 선조의 탓이었고 말이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딴 놈이 군주로 있는 나라에 무슨 미련이 있다고 폐허밖에 안 남은 수군 진영에서 버티고 있겠는가?

이순신이 초인이고 전설이 될 자였으며, 배설이 도주했음에도 다시 돌아오는 기적이 벌어지지 않았더라면 조선은 진즉 망하고도 남았다. 그렇지 않은 게 오히려 이상했던 역사였다.

‘그리고 지금도…….’

역사는 달라졌지만, 선조는 그대로였다. 그리고 선조는 원 역사의 이순신에게도 그러했듯 지금의 이순신인 나에게도 민폐를 끼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원 역사의 이순신 그대로가 아니었다.

‘그냥 때려치워?’

이대로 버티면서 꾸역꾸역 조총을 만들었다간 그 총으로 선조 대가리를 날려버릴 것이 분명했다.

나의 순정을 짓밟은 선조 때문에 결국 내가 조커가 되는 거지.

그렇다고 면전에서 사직을 청할 수는 없다. 그것이 선조가 바라는 일이긴 하겠지만, 자칫 감정적인 대응으로 비칠 수 있었으니까.

감정적인 대응이 맞긴 하지만 이 미친놈 앞에서 그랬다간 무슨 보복이 돌아올지 몰랐다.

“외침을 방비하겠다는 터무니없는 이유 말고, 자네의 진심을 말해보란 말이야! 설마 이게 첨정 자네의 전부는 아니겠지?”

전부 맞다, 이 또라이야.

입 밖으로 나오려는 말을 애써 참았지만, 선조의 또라이 짓은 그칠 줄 몰랐다. 그리고 갈수록 점입가경이 되어, 이제는 가관에 이르고 있었다.

“설마 그게 첨정의 진의라 하더라도, 내 앞에서 그래서는 안 돼! 내가 기억하는 첨정은 왕인 내 앞에서조차 오만하고, 거만하며, 기만하려 들었던 불순한 자였다!”

“…….”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별다른 의도는 없었다는 듯 태연하게 구는 것이냐! 내가 너의 본모습을 이미 알고 있거늘, 어찌하여 끝까지 뻔뻔하게 왕인 나를 기만하려 드냐는 것이야!”

그놈의 왕인 나, 왕인 나…….

갈수록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에게 참을 수 없는 심열(心熱, 울화)이 있다는 말은 어디에선가 들어보았다.

지금 하는 꼴을 보니 그 심열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 알 것 같았다. 강박적인 의심과 경계가 사람을 미치도록 몰아가는 것이다.

지금 당장만 보아도 속에서 소설을 쓰고 있었다는 게 드러나지 않았나. 완전히 제정신이 아니었다.

“전하, 사실이 그렇다고 믿고 싶으시다면 그리 믿으시옵소서.”

“……?”

선조는 후욱, 후욱 숨을 들이쉬다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만일 그편이 전하의 불안을 더는 데 도움 된다면, 신은 그것만으로도 만족하옵나이다. ……그리고 신을 내치시옵소서. 만일 신의 존재가 전하께 불안만 가중한다면, 눈에 띄지 않게 되는 편이 나을 것이옵니다.”

솔직히 면전에서 사직은 참으려고 했는데. 선조가 너무 미친놈처럼 굴어서 서둘러 발을 빼기로 했다.

게다가 분위기도 이상해졌다. 만일 내가 선선히 인정하지 않는다면 언제까지고 여기에 앉혀둘지도 몰랐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으니까.

“그걸 왕인 내가 아닌 첨정이 왜 결정한단 말인가?! 내가 첨정의 특채를 결정했어! 그러니 파직은 가능해도 사직은 있을 수 없다! 나가도 첨정의 발로는 나갈 수 없단 말이야! 내보내도 내가 내보내겠다! 나가! 나가란 말이다!”

선조는 서안을 쾅쾅 내리치며 발작했다.

그야말로 광인의 모습.

하지만 가까스로 고대하던 축객령이 떨어졌다.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그리고 복도에 이르러서야 안도할 수 있었다.

‘아무리 선조가 병신이다, 병신이다, 하는 말은 많이 들어보았지만 이렇게까지 또라이일 줄은 몰랐네.’

겪어보니 완전히 예상 이상이었다.

겁이 날 정도로 말이다.

나는 혹시라도 선조가 마음을 돌려 다시 나에게 들라 할까봐, 뒤도 돌아보지 않고 궁궐을 탈출했다.

거리로 나오니 사방이 한산했다.

날이 추워서 그런지 돌아다니는 사람은 거의 손에 꼽을 정도였으며, 그들 역시 금방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 귀에 들리는 것이라곤 거친 바람 소리뿐.

“춥다…….”

느껴지는 온기가.

* * *

“등청이 늦으셨군.”

군기시정 홍성민이 물었다. 그에게는 의아한 일이었다. 첨정 이순신은 스스로 일감을 만들어낼 정도로 열의 있는 사람이었다.

최근에는 전시 준비도 마다하며 조총 작업에 들어가지 않았던가? 더 놀라운 점은 그러고도 갑과 삼등에 들었다는 것이겠지만.

그래서 세간의 소문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마치 급제자들 앞에서 유세라도 떤 것처럼 말이 돌던데, 남들은 사람대접도 안 해주는 아전과 관청 소속 장인들에게도 공손한 그가 급제자들을 멸시할 리 없었으니까.

그런 이순신이 오늘따라 유난히 등청이 늦었다. 책망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유가 궁금해서 물어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것이다.

“전하와의 윤대가 있었습니다.”

“아, 윤대. 흠.”

대답은 들었지만, 홍성민의 의문은 한층 더해갔다.

“전하께서는 평소에 윤대를 보는 분이 아니신데. 특이하군.”

“예. 저 역시 굉장히 의아했습니다. 막상 입시하니 전하께서는 이번에 요청한 직책 변경 연기에 관해서 물어보시더군요. 답을 해드렸는데 그게 전하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나 봅니다.”

“음……. 안타깝군.”

금상인 선조의 평가는 홍성민도 많이 접해보았다. 그런 왕에게 나쁜 인상을 남겼다면 좋은 일은 아니지.

섣불리 개입할 일은 더더욱 아니었고 말이다.

홍성민은 일부러라도 관심을 끄기로 했다.

“크게 의식하지 말고, 오늘은 설렁설렁 일하시게. 정 필요하면 쉬어도 무방하고.”

“아닙니다. 진행 중인 일이 있으니 쉬어도 나중에 쉬어야지요.”

“……그러게.”

홍성민은 발길을 돌린 이순신을 바라보았다. 평소의 모습과는 달리 유난히 피곤해 보였다. 확실히 윤대 자리에서 좋은 일은 없었던 모양이다.

그럼에도 일은 해야겠다니. 실로 뭇 관리들의 귀감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인만큼 부디 좋은 결과가 있어야 할 터인데.

홍성민은 속으로 이순신을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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