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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59화 (59/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59화

21. 완전히 미친 사람 (1)

선조는 손끝으로 서안을 긁었다.

오늘은 윤대(輪對)를 잡았다.

특정 관품 이상의 관리들을 불러 가지는 자리.

사실, 선조는 윤대를 그다지 선호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평소 공무로 바쁜 사람이었고 사람 한둘 불러서 잡담이나 나눌 여유는 물론, 그럴 생각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윤대관(輪對官)에게 특정 인물과 윤대를 잡으라고 명한 것도 즉위 이후로 처음인 일이었다.

누구와?

‘이순신…….’

처음 그의 이름을 접했을 때 선조는 이용할 생각만 가득했다.

이순신의 무식하기 짝이 없는 기행에, 그를 단순히 별종으로만 알았다. 그처럼 순진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라면 곁에 두고 자신의 왕권 기반으로 삼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이순신은 자신을 두려워하기는커녕 의식조차 하지 않았다.

왕으로서의 대우마저 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백성이라면 누구나 자신 앞에서 드러내는 공포와 경외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설령 의정대신이라도 최소한의 두려움은 드러내기 마련이다. 왕이란 그런 존재였다. 아무리 닳고 닳은 정객이라도 의식할 수밖에 없는 대상.

그러나 이순신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조선 사람이 아니라 별세계의 사람이라도 된다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

하나는 확실했다.

자신을 얕본다는 것. 왕위라는 자리에 있는 자임은 알고 있으나 자신의 주인인 왕으로 대할 생각은 없다는 거다.

‘건방진 녀석,’

최근에는 은영연의 자리에도 빠졌다.

대과 합격자들을 위해 왕과 조정이 주재하는 연회다.

그들이 난관을 극복했음을 축하하는 자리이기도 했지만 주재하는 측이 측인 만큼 앞으로 자신들이 받들어 모실 사람을 눈에 새겨두라는 뜻도 있었다.

그런 자리에 이순신은 당당히 불참해버린 것이다.

이미 관리 노릇을 하고 있는 만큼, 은영연의 자리에 빠지는 것이 마냥 인정 못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순신을 경계하고 있는 선조로서는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었다.

“전하.”

밖에서 내시가 말했다.

“말하라.”

“군기시 첨정, 이순신 입시이옵니다.”

“…….”

이순신이 왔나.

선조는 서두르지 않았다.

그는 오랫동안 이순신이 보일 행동과 반응을 예상해왔다. 녀석을 궁지로 몰아넣어, 보다 쉽게 본성을 끄집어낼 생각이었다.

짧은 침묵이 있었다. 기싸움이라 봐도 무방하리라.

신하란 왕이 부르면 와야 하는 존재이며, 그럼에도 왕이 원치 않는다면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바깥에서 기려야만 한다는 것을 인식시키기 위한…….

바깥에서 위화감을 느낄 정도가 되어서야, 선조는 입을 열었다.

“들라 하라.”

“예.”

정면의 미닫이문이 열렸다. 그리고 등장한 사람은 무척이나 익숙한 사람.

이순신.

직접 면대한 적은 손에 꼽을 정도이나 최근에는 크게 의식하고 있는 자였다.

그런 선조가 보이는 태도는 이순신에게…….

‘부담스러운걸.’

조회를 마치고 물러나는데 내시에게서 전언이 있었다. 윤대가 있으니 입시하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의아했다.

그동안 선조는 나를 한 번도 윤대에 부르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누가 윤대를 했다는 말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왕이 부른다는데 안 갈 수는 없다.

그래서 막상 찾아갔음에도, 선조는 나를 곧바로 들이지 않았다. 마치 기싸움을 하듯 한참이나 세워둔 뒤에야, 선심 쓴다는 듯 입장을 허락했다.

썩 반가운 사람은 아니다. 지금 하는 행동을 보아도 말이다.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나를 호출한 걸까.

‘짐작 가는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시에서 정말 터무니없는 성적을 거뒀다.

갑과 삼등.

전혀 예상하지 못했고 그래서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성적이었다.

나는 대과 급제가 확실시되는 시점에서 조총 제작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진즉에 진행했어야 할 일인데 대과 준비에 밀린 감이 있었고, 당시에는 더 미룰 이유도 없었고 그럴 상황도 아니었으니까.

그래서 전시 준비는 전혀 하지 않았다. 답안 역시 평이하여 영양가라곤 하나 없는,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뻔한 것이었다.

애초에 심력을 쓰지도 않았으니까. 단지 지면만 채울 생각으로 써 내려간 것이다.

그러니 나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갑과 삼등이라는 성적이 도저히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리고 전시의 책임자이자 최종 채점자로서 나에게 갑과 삼등을 안겨준 사람이 바로, 선조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가볍게 운을 뗀 선조가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이번에 직품을 옮기는 것을 미뤄달라는 청을 올렸더군.”

“예. 신이 일을 시작했으니 마무리 역시 신이 해야지 않겠사옵니까.”

“결자해지라.”

선조는 작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온화한 인상과는 달리, 속은 무덤덤하기 짝이 없었다. 애초에 이순신이 군기시에서 새 일을 시작했다는 것은 한참 전부터 알고 있었다.

오히려, 급제의 명분으로 이순신을 다른 직품으로 옮길 생각도 해뒀다. 놈이 결실을 거두어 공을 쌓기 전에 견제하려는 차원에서 말이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전시에서 이순신이 제출한 답안은 선조를 너무나 휘둘렀고, 한동안 선조는 반쯤 넋을 놓은 채 가까스로 공무만 처리해왔다.

그리고 이제야…….

“첨정의 자질을 고려해보면, 군기시에 그대로 두기에는 아까운데. 지금 일은 후임에게 맡겨두고 보다 중요한 일을 해내는 편이 좋지 않겠나?”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이번 일의 적임자는 소신이옵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할 수 있지?”

“신이 제작하는 조총은, 이전에는 없던 무기이옵니다. 만일 처음으로 무기를 설계한 신이 아니라면 누구에게 맡길 수 있겠사옵니까?”

“……그렇군.”

선조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조총, 확실히 처음 보고를 받았을 때도 생소한 이름이었다.

새-대포라니.

처음 이름을 들었을 때는 새에다가 세총통 따위를 매달기라도 할 줄 알았다.

왕인 자신마저도 처음 접했을 때는 완전히 문외한이었으니, 다른 놈들이라고 다르지는 않겠지. 신하의 공적이 곧 왕의 공적이 되는 이상 조총은 적절히 마무리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신하에게 설득을 당했다는 점이 불쾌할 뿐이다.

“하지만, 진심인가?”

“물론입니다.”

“자네도 알겠지만……. 조정에도 철칙이 있고 인사에도 원칙이 있네. 첨정의 마음을 나라고 모르는 것은 아니고, 또 이조에 몇 마디 해줄 수는 있겠지만 일이 끝날 때까지 첨정 자리를 지킬 수 있을지는 모르겠군.”

왕인 자신도 이순신의 직책 변경은 막아주지 못한다는 소리였다.

물론, 헛소리다. 즉위 직후부터 인사를 장악한 그다. 인사의 장악이 곧 조정의 장악이었으니까. 고작 첨정 따위, 원한다면 백 년이고 천 년이고 첨정 노릇을 시킬 수도 있었다.

선조는 단지 죗값을 치르게 하고 싶을 뿐이었다.

이순신은 그동안 오만했고 거만했다.

마치 자신의 권유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시답잖은 사유까지 들어가며 마다하는 이 순간처럼 말이다.

‘네 본성을 밝혀주마.’

만일 조총의 건이 그렇게나 이순신에게만 적합한 일이라면, 왕이 이순신에게 남아서 마저 하라고 해야 할 상황이지 본인이 자처할 상황은 아니었다.

자신의 출세가 걸린 상황이 아닌가?

적어도 선조의 기준에서, 제정신인 사람이라면 절대로 출세를 마다할 수 없었다. 인간이란 그러한 법이며 그들 중에서도 출세의 욕망이 강해 관문에 올라선 자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조는 확신했다.

이순신이 지금 보이는 행동은, 마치 여러 을사사화 희생자들이 그러는 것처럼 자신의 몸값을 높이기 위한 수작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이다.

지극히 불쾌한 일이었다. 감히 왕을 상대로 협상을 하려 들다니.

선조는 내심 코웃음 치며 물었다.

“만일 첨정의 의사가 분명하다면, 아예 대과 급제로 인한 직책의 변경 자체를 없애줄 수는 있네. 그리한다면 적어도 지금 하는 일이 끝날 때까지는 군기시에서 일할 수도 있겠지.”

자, 어떻게 할 테냐.

선조는 이순신의 반응을 즐기겠다는 듯, 아예 어좌에 늘어져서 등을 기대기까지 했다. 나아가 팔짱도 꼈다.

그러나…….

“그것이 최선이라면, 그렇게 하겠사옵니다.”

“……뭐라?”

“전하께서 인재를 아끼셔서 보다 중요한 자리에 소신을 두려는 지극한 은혜는 감사할 뿐이오나, 만일 출세의 기회가 있다 하여 자기 손으로 시작한 일을 자기 손으로 끝내지 않고 적을 옮긴다면, 어느 누가 소신의 일을 중요하게 여기겠사옵니까?”

“…….”

선조의 얼굴이 단박에 찌그러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아니, 아주 조금은 예상을 해뒀다. 단지 이순신이라는 자가 그렇게까지 철저하게 기만적인 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느 누가 자신의 출세까지 걸어가며 상대방을 속이려 들겠는가?

왕인 자신이 이렇게까지 유도를 해줬으면 호응을 해주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닌가? ……적어도 선조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진심은 아니겠지.”

참다못한 선조가 결국 속내를 드러냈다.

“고작 종사품, 게다가 속아문에 불과한 군기시에서 조정의 요직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고작 하는 일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마다해?!”

“…….”

“언제까지 그 고집을 꺾지 않을 생각인가? 내가 더 높은 자리를 제안해야, 그제야 어쩔 수 없다는 듯 받아들일 작정인가?!”

선조는 진노했고 분개했다.

그러나 이순신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어안이 벙벙할 일이었다.

‘이 인간이 왜 갑자기 불타지?’

인체 발화라는 전설이 있다.

사람이 아무 이유 없이 갑자기 불타올라, 뼈나 신체의 일부 그리고 잿더미만 남긴 채 사라져버렸다는 식의 이야기 말이다.

그리고 그건 조선에서도 있는 이야기였다.

마치 괴담처럼, 마을 주민 중 하나가 오랫동안 보이지 않아 찾아갔더니 새카맣게 그을린 이부자리만 남긴 채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식으로 말이다.

‘선조도 그렇게 되려고 하나?’

하고 있는 일이 있다는 점, 그 일의 적격자가 자신뿐이라는 점, 그리고 조총의 제작이 머지않아 발생할 임진왜란을 감안할 때의 중요성을 생각해보면 설령 억만금을 주더라도 지금 발을 뺄 수는 없었다.

선조의 의도를 보아 어떻게든 내가 공을 세우는 것은 막으려는 모양인데, 미안하지만 나는 처음부터 내 공에는 관심이 없었다.

비격진천뢰 때에도 관련자들 모두의 이름과 역할, 그리고 공로를 기록해서 제출하지 않았던가.

결과적으로는 공훈 인정과 포상의 분산을 일으켰지만, 나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런데도 어떻게든 손을 떼게 하려 들다니…….’

정말 나에게는 한 치의 이득도 주기 싫다는 게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상한 점은, 선조가 나에게 갑과 삼등을 최종적으로 인정한 자라는 점이다. 이제 와서 내가 잘 나가는 꼴을 못 보겠다고 악을 쓴다는 건 너무 이중적인 행태였다.

‘미친놈인가?’

물론 선조가 좀 미친놈인 건 맞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광증이 있는 정신병자가 아니라, 편협함과 뻔뻔함 그리고 강박적인 태도와 잔혹함, 종잡을 수 없는 행태가 선을 넘어서 미친놈인 것이다.

흠…….

어쩌면, 그래서 이러는 걸지도 모르지.

오래전부터 무관으로 일해왔음에도 잦은 상관과의 충돌로 초야의 사람처럼 묻혀 있었던 이순신(내가 아니라 진짜 이순신)을 크게 기용한 사람도 선조지만, 그 이순신을 가장 중요하고 위급한 시점에서 관직을 박탈하고 고문으로 거의 죽음까지 몰아넣었던 사람이 바로 선조 아니었던가?

그때 보여주었던 앞뒤 잴 수 없는 광기를 지금 나에게 보여주고 있는지도 몰랐다. 마침 나도 이순신 아닌가.

“…….”

그럼 얌전히 있을 수밖에.

선조가 또 어쩐 지랄을 할지 몰랐으니까.

하지만 그가 적당히 멈춰주기를 바란 것은 나의 무의미한 기대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침묵을 지키자 그것이 또 불만이었는지 선조는 씩씩거리며 다시 자연발화를 시작했다.

“그래……, 자네는 지금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거야! 아니면 어떻게 왕인 나의 앞에서도 뻔뻔하게 출세의 기회를 마다할 수 있단 말인가!”

-쾅!

선조는 애먼 서안을 때리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러고도 분을 삭일 수 없었는지, 그리고 여전히 침묵을 지키는 내가 싫었는지 눈을 이글거리며 따졌다.

“어째서 말이 없나?”

“소신은 전하나 스스로를 속이지 않았사옵니다. 출세는 분명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일이 될 수 있으나, 소신은 지금의 위치와 역할에 만족하고 있사옵니다.”

“너무 하군…….”

선조는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옆쪽의 문을 열었다. 그곳에서는 왕의 곁을 지키기 위한 궁인들이 배치되어 있었고, 선조는 툭 던지듯 명령했다.

“덥다. 문을 열어라!”

“예.”

궁인은 무기력하게, 그리고 기계적으로 답했다.

곧 연말의 추운 공기와 바람이 집무실을 가득 채웠다. 달아오른 열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가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공기가 뺨을 쓸었다.

맹렬한 추위에 선조는 이제야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는 듯 숨을 가다듬었다. 예측할 수 없는 광기와 이중적인 행태도 조금은 줄어들었을까?

그가 나의 뒤에서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점을 생각하면, 차라리 면전에서 다 해소해주는 편이 좋았다.

선조와 같은 자라면 차라리 눈치 보지 않고 면전에서 할 짓 다 해주는 편이 좋았다. 아마도, 선조도 그런 나의 바람을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한참이나 찬바람 쐬던 그가 내시들에게 명했다.

“닫아라.”

-드르륵.

바깥쪽 문이 닫히며 차가운 바람이 일순 멎었다. 선조는 등을 돌렸고 다시 어좌에 자리했다. 그리고 이전보다 더 적대감이 담긴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진실을 담아 말해라, 그 어떤 대답이라도 나는 개의치 않을 터이니. 정말로 첨정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출세를 포기할 만큼 중요한가?”

마치 궁예의 편집증적인 행태를 마주했던 왕건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당시의 왕건은 기지를 발휘해, 벌이지도 않았던 역모를 자인하며 궁예에게 안도감을 주었다고 한다.

어쩌면 나도 지금 그러한 기지를 발휘할 때일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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