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56화
20. 살아 있는 전설 (2)
당연하지만, 선조는 츤데레가 아니었다.
단지 사람의 심리와 진심을 읽으려는데 매몰된 편집증 환자일 뿐이지. 츤데레와의 공통점이라고는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이 전부였다.
지금도 선조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의 앞에 놓인 것은 전시 응시자들의 답안들.
주변에는 전시를 보조한 시험관들인 독권관, 영의정 권철과 다른 대독관들이 자리해 있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권철이었다.
“신이 일차적으로 등수를 매겨 순서대로 쌓아두었으나, 최종적으로 등수를 결정하시는 분은 전하이시니, 확인하시고 친히 우열을 정해주시옵소서.”
“알겠다.”
선조는 짧게, 무심하게 답하고는 답안들을 확인했다.
영의정 권철의 식견은 틀리지 않았다. 위쪽에 놓인 답안들은 신선하고 열의가 느껴졌다. 그리고 문제의 본질을 꿰뚫은 혜안과 함께 실질적인 해결을 위한 타협이 합리적으로 가미되어 있었다.
실직을 지내는 자들과 비교하더라도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다.
아래로 내려가자 부족한 점이 하나씩 드러났다. 적극적이나 실현 가능성이 부족한 답안, 근시안적인 판단과 해결책, 특이한 점이 없는 평범한 답안까지.
그중에 이순신의 답안이 있었다.
“…….”
선조는 일단 답안을 넘겼다.
그보다 아래에는 실망스러운 답안이 많았다.
너무 소극적이거나 보신적인 답안, 사안의 본질 자체를 읽지 못한 답안, 추상적인 답안, 비현실적인 답안 등.
각자 6만 명의 지원자 중에서 선발되고 또 선발된 33명의 인원이니, 사실 수준 이하는 없었다. 단지 몇몇 사람들이 너무 좋은 답안을 썼기 때문에 비교될 뿐이다.
그중에서, 이순신의 답안은 정말 딱 중간.
부족한 점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대단한 것도 아닌, 이도저도 아닌 답안이었다.
문제의 본질을 인식하지 못한 것은 아니나 적극적으로 파헤치려 들지는 않았으며, 그렇다고 너무 소극적이거나 보신적으로 구는 것도 아니었다.
길이는 여느 답안과 마찬가지로 아득히 넘었으며 구성하는 글자는 수천 개나 되었지만, 이 모든 것을 단 한 단어로 요약이 가능할 정도였다.
정론(正論).
너무나 뻔뻔한 정론이었다.
‘어째서냐.’
선조로서는 의아했다.
이순신이라는 자가 그동안 제출했던 답안은 모두 통념과 현실적 한계를 적극적으로 깨려 들었다.
거침없이 을사사화 희생자들을 다 늙어 곧 죽을 인간으로 취급하며 젊은 놈들이나 뽑자던가, 칠반천역으로 멸시 당하는 수군을 도리어 드높이자는 것이 대표적이었다.
녀석의 대책이란 그러했다. 이번에도 다를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반전이 생긴 것이다.
선조는 그 점이 수상했다.
사실, 선조는 이순신의 답안은 수준이 어찌됐건 을과라는 적당한 자리에 위치시키려 했다.
너무 눈에 띄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아쉬울 위치도 아닌, 그야말로 그냥저냥. 마치 정론의 답안을 제출한 사람이 최선은 못 되어도 중간은 가는 것처럼.
그리고 품계를 두어 단계 높여 다른 관직으로 빼낼 생각이었다.
이번에 녀석이 조총이라는 신무기를 개발한다는 소식이 있었다. 놈의 자질이란 재차 검증되었으니, 분명 조총의 개발에도 성과를 올리겠지.
여전히 비격진천뢰의 폭발 장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현장에서, 선조는 딱히 감흥을 느끼지 못했으며 이순신이라는 존재가 불편하다는 분위기를 풍기기 위해 ‘연기’까지 해야 했다.
이순신을 의식하게 됐다는 증거겠지.
과연 선조는 그가 또 다시 공훈을 세워 세간의 시선을 사는 것이 불쾌했다.
차라리 녀석이 적을 만들기 좋아하는 성격이라면 모르겠으나, 놈은 마치 초탈한 존재라도 되는 듯 그간의 공을 모두 부하들에게 돌려 수많은 지지자까지 양산했다.
이제는 이순신이 군기시에서 군기시정과 부정을 누르고 실세로 등극했다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군기시에서 빼내려는 것이다.
녀석이 자신의 일을 마치지 못하도록. 제도의 불쾌함을 느끼고, 가식의 가면을 벗어던지도록.
‘그런데…….’
녀석은 자처하듯 평범하고 별다른 감흥이 느껴지지 않는 답안을 제출했다. 마치 선조 자신의 의도대로 따라가겠다는 듯!
‘나의 마음을 읽었다는 것이냐, 아니면 스스로를 낮추겠다는 것이냐?’
어느 쪽이건 두려웠다.
일개 신하가 왕의 머리끝에 섰다는 것이. 그래서 마치 ‘그리 하고 싶으면 하라’는 듯이.
이래서야 마치 자신이 무얼 하건 이순신의 뜻대로 따라가는 것 같잖은가?
원하는 대로 해준다면 놈의 뜻대로 되는 느낌이고, 따르지 않는대도 다 읽힌 주제에 철부지처럼 반항하는 느낌이다.
어느 쪽이건 선조에게는 불쾌했다.
‘…….’
이제 그에게는 세 가지 선택지가 남아 있었다.
이 불쾌함을 솔직하게 드러내기.
이순신을 하위권인 병과(丙科)로 밀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그랬다간 잠깐은 기분이 좋을지라도 두고두고 불쾌해질 터였다. 후회도 하겠지.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결국 내가 졌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평이하기 짝이 없는 답안이나 병과로 밀어낸다고 의의함을 표할 사람은 없을 거다.
하지만 그 이유는 자신이 알잖은가!
인정하기 싫고, 또 그러지도 않겠지만 자칫 이 일은 망령이 되어 두고두고 자신을 쫓아다닐 게 분명했다.
결국은 일개 신하에게 심리 싸움에서 밀려 천박하게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말았다고.
그런 감정적인 대응은, 선조가 생각하는 절대군주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까지나 위대한 자로 남아 있어야 했다.
그리고 그런 위대한 군주들 중에서 졸렬한 자는 없다.
‘이마저도 놈에게 읽힌 것일까?’
당당하게 도발을 해도 병과로 떨어질 일은 없다는 것.
역시, 선조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순신에게 마음이 읽혔다는 생각이 들었다. 녀석은 자신의 머리끝에 있었다.
놈의 오만함이, 불쾌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군주의 심리조차 읽을 수 있다면 사람이 오만해지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니까.
‘건방진 녀석.’
다음은, 이대로 을과로 두는 것이다.
하지만 앞서 느꼈던 대로 을과로 두는 것은 놈의 의도대로 끌려가는 기분이 들게 만든다.
놈은 오만하고 거만했다. 만일 을과라는 평이한 성적으로 급제한다면, 자신의 의도대로 왕이 움직여주었다며 콧대를 높이겠지.
그리고 다른 수많은 관리들처럼 속으로 자신을 비웃을 것이 분명했다.
‘제기랄.’
선조는 이를 갈았다.
신하에게 얕보이는 왕은 절대로 절대왕권을 수립할 수 없다. 절대군주가 될 수도 없다.
왕임에도 신하에게 비웃음 당하면서 어떻게 절대왕권을 수립했다 할 수 있겠느냐? 신하의 뜻대로 움직이는 왕이 어떻게 절대군주란 말이냐?
‘으으으…….’
선조는 이순신의 답안을 움켜주었다.
정말로 한참동안의 시간이었다. 주위의 신하들이 의아함을 느낄 정도로.
독권관 권철이 곁눈질로 왕의 기색을 살폈다.
그는 오직 하나의 답안을 한 식경이나 쥔 채,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다 구멍이라도 낼 기세로 말이다.
‘이순신의 답안인가. 제출이 빨랐지만 예상보다 내용이 공허해서 을과 말석에 놓아둔 것인데…….’
왕은 홀리기라도 한 듯 이순신의 답안을 노려보고 있었다. 기이한 반응이었다.
물론, 눈앞의 왕은 공격적이고 신경질적이며 이따금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로 신하들을 자주 혼란시켜왔다. 그래서 썩 반가운 존재도 아니었고 말이다.
애초에 조정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명백한 그간의 행보 하나하나가, 자신의 능력만으로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영의정에게는 가소로웠을 뿐만 아니라 불쾌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새파란 주제에 벌써부터 권력의 맛에 중독되어 설치는 꼴은 누구라도 눈에 담기 좋아할 광경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왕이다.
놈의 명색이 왕인 이상 신하인 권철로서는 섬겨야 할 대상이었고, 또 개인적인 감정으로 공사를 망치기에는 자신의 역할이 너무나도 막중했다.
언젠가 낙향한 뒤에는 후학을 기르며 뒷담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것만을 위안 삼을 뿐이었다.
그러니 이 순간 권철 그가 할 행동도 정해져 있었다.
“……전하?”
조심스러운 물음이었다.
마치 홀리기라도 한 듯한 왕을 깨우려는.
이에 왕은 짐짓 놀란 듯, 답안을 내려놓고는 평소답지 않게 기운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 아니다.”
무엇이 아니란 말인가.
권철은 의아했으나 깊이 관여하지는 않았다. 그게 그가 감지한 이 순간 취할 최선의 행동이었다.
왕은 한동안 답안을 뒤적거렸다.
그동안 독권관 권철과 다른 당상의 대독관들은 약간의 의아함을 느꼈다.
대부분의 답안이 대체로 위아래 두어 칸만 움직일 동안 오직 단 하나의 답안만이 확 올라갔다가 푹 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이순신의 답안인가……. 그의 답안에 도대체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다고?’
권철은 일흔을 앞둔 노신이었고 한평생을 정계에서 구른, 닳고 닳은 사람이었다.
그동안 잃은 것도 많았지만 익힌 것도 많았으며, 그중 하나가 바로 혜안이었다. 무언가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본질을 읽어버린다.
그런 차원에서 이순신이라는 존재를 처음 마주했을 때 권철은 묘한 느낌을 받았다.
어전, 그리고 급제자의 우열을 가리는 전시의 장소에서도 그는 어떠한 부담감을 가지지 않은 기색이었다.
어쩌면 본심을 가리기 위한 위장일 수도 있지만 이순신은 왕과 비슷한 나이의 새파란 청년이었다. 아무리 허장성세를 부리더라도 자신이 읽지 못할 수는 없는 것이다.
녀석은 진심으로 어전과 전시의 자리에서 태연하고 당당했다. 처음 두각을 드러낼 때부터 자신에게 감흥을 느끼게 해주었던 녀석은 과연 보다 훨씬 성장할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녀석이 막상 제출한 답안이라는 것은 묘하기 짝이 없었다.
영의정인 이상 권철 역시 요주의 인물인 이순신에 대한 대과 답안 정도는 모두 한 번씩은 접해보았다.
그가 느낀 이순신이라는 인물은 과연 젊은 피의 혈기가 있었으며 진취적인 느낌이 강했다. 그런데 전시의 답안이라고 나온 것은 그야말로 무미무취의 정론이었다.
이게 녀석의 한계라고 치부하기에는 답안 하나가 주는 위화감이 묘했다.
이순신은 마치 미리 이런 답안을 처음부터 쓸 생각이었다는 듯, 가장 먼저 제출했다. 약간의 고민조차 없었던, 의도된 행동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녀석이 풍겼던 그 종잡을 수 없는 당당한 기색이란…….
권철은 결국 이순신의 의도대로 중간보다 약간 아래인 적당한 자리에 집어넣었다.
녀석의 의도가 어찌 됐건 그것이 답안만으로 평가할 수 있는 합당한 등수였으니까.
하지만 왕은 그것을 너무 의식하는 게 분명했다. 이순신이라는 자의 진의가 무엇인지에 매몰되어, 자꾸만 등수를 올렸다가 내렸다가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일을 당하는 이순신의 답안은 정작 무미무취의, 공허하기 짝이 없는 정론이라는 점에서는 오히려 역설적이기까지 했다.
마치 왕이 허공을 붙잡은 채 정신을 못 차리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자존심 강한 왕이 농락을 당하는 꼴이라니……, 그게 의도된 바라면 첨정은 확실히 보통 녀석은 아니겠군. 설마 그렇기야 하겠냐만.’
* * *
집안의 어른들이 모두 모인 자리.
아버지는 집안에 갑과 급제생이 났다고 기뻐하며 일가친척과 동네의 사람들을 모조리 불러모았다.
모두의 관심사는 당연히 내가 갑과 삼등, 탐화에 선발되었다는 그 자체였다. 도대체 어떤 명문을 써냈기에 그 정도의 성적을 거두었냐는 거다.
나는 진심을 담아 답했다.
“정말로, 별 생각 없이 적당히 썼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