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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55화 (55/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55화

20. 살아 있는 전설 (1)

“조총(鳥銃)이라……?”

군기시정 홍성민이 물었다.

생소한 형상의 도안이었다.

비록 그가 무기의 전문가는 아니었으나, 군기시의 장관이 된 만큼 최소한의 지식은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이 ‘새-대포’라는 정체불명의 물건은 종잡을 수 없는 그 이름만큼이나 종잡을 수 없는 무기로 보였다.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총통이라는 뜻에서 조총이라고 지었습니다.”

“흠……. 형상은 마치 세총통을 길게 늘어뜨린 뒤 받침을 단 것 같군.”

세총통(細銃筒).

조선 초 주로 사용되었던 총통 중 하나였다.

가는(細) 총통(銃筒)이라는 이름 그대로, 세총통은 무척이나 가늘고 작은 총통이었다. 한 뼘 크기에 불과해 받침을 달 수도 없어, 아예 세통총을 고정하기 위한 전용 집게까지 존재했다.

홍성민의 시선에 조총이란 이 세총통과 유사하게 보였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격발 방식이 총통과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겠군. 도대체 어떤 원리인가?”

피상적인 도안만으로는 잘 드러나지 않았다. 애초에 생소한 무기였으니 도면만 보아서는 바로 머릿속에 떠오를 수 있는 것이 아니기도 했다.

결국에는 친절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뜻이지.

“조총은 화승(火繩), 즉 불을 붙인 끈을 사용합니다. 사용자는 팔에 화승을 감아둔 채, 불을 붙인 끝을 용두(龍頭)에 고정합니다.”

“흠.”

“용두(龍頭)는 방아쇠와 기계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검지를 걸어 방아쇠를 당기면, 용두가 움직여 화승의 끝을 화문(火門, 화약접시)에 가져다 대지요.”

“그럼 내부에 있는 화약이 점화되는 것이로군?”

“정확합니다. 이 방식은, 총통의 기존 격발 방식과는 달리 원하는 순간 바로 격발이 가능하다는 막강한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기존의 총통류는 사실 조준이라는 것이 무의미했다.

대형 총통류는 애초에 받침의 각도가 고정되어 있고, 무거운 탓에 기동이 어려워 조준 자체가 불가능했다.

고정 표적이 아닌 이상은 말이지.

이건 가벼운 총통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았다.

팔전총통, 삼총통 등의 개인용 총통화기는 비교적 가벼운 편이었으나 뒤에 장대를 꽂아 드는 형태라 실제 총통보다 훨씬 무거웠을 뿐만 아니라, 무게중심이 1~2m 길이의 장대 끝에 있어 조준 자체가 불가능했다.

애초에 개인 총통화기가 조준을 크게 고려한 무기 자체가 아닌 탓이다.

정확도가 낮고 점화부터 격발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며, 발포의 순간조차 불분명하다는 점에서 총통류의 조준은 별 의미가 없는 행동이었다.

때문에 조선의 개인용 총통화기는 조준-사격의 효용을 기대하는 대신 중량을 이용한 근거리 타격의 효율을 높였다.

그래서 무식하게 긴 장대를 쓰는 것이다. 그걸로 근접한 적병의 대가리나 깨먹으라고.

하지만 조총은 달랐다.

견착이 가능해 시선의 방향을 총구와 맞출 수 있었고, 가늠쇠가 있어 더더욱 조준이 용이했다.

그리고 총통과는 달리 원하는 순간 즉시 격발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이건 조준이라는 행동의 효율을 높이는 막강한 장점이었다.

“흠……!”

홍성민이 감탄을 흘렸다.

조총에 대한 구구절절한 설명은 차치하더라도 지금 거론된 장점이 너무나 좋았다. 기존의 총통 화력을 일부 대체하는 용도로만 쓰이더라도, 이전에 비해 압도적인 효율을 낼 수 있을 터였다.

원하는 순간 격발이 가능하다는 장점 외에도 눈에 띄는 장점은 적은 양의 화약 소모였다.

탄환이 작고 가벼운 만큼 화약의 소모량 역시 자연스레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동안 수많은 총통류가 개발되고도 대부분 도태되고 퇴역한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화약 소모에 비해 화력이 비효율적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화약무기란 적병의 사살 그 자체보다는 투사체의 분사를 통해 적을 제압하고 적의 돌격을 저지하는 데 목적이 맞춰져 있었다.

그래서 화약을 무식하게도 써댔다.

조총은 달랐다.

1회 격발에 사용되는 화약의 양이 고작 3돈(11g). 그래서 홍성민은 거의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탄환이 작으니 화약을 적게 써도 된다고는 하지만, 과연 콩만한 투사체와 한 종지의 화약으로 적을 없앨 수 있을까?

그렇지 못한다면 조총의 장점들이 다 무의미했다.

적을 죽이지 못하는 무기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 조총이라는 물건이 적을 능히 제거할 수 있다면…….’

가히 혁신적인 무기가 되겠지.

그리고 무기에 대해서는 군기시 신입인 자신보다는 능력이 검증된 첨정 이순신이 훨씬 잘 알 터였다. 그런 이순신이 당당하게 내놓은 무기라면 홍성민이 감히 판단할 수는 없는 것이다.

“기대하겠네.”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 * *

프로젝트의 인가는 홍성민이 해결해주었다.

나의 이름이 올라가고 병조판서인 박영준이 응원해주는 이상, 조정의 반응이란 정해져 있는 것이었다.

인가가 떨어지자 나는 즉시 조총의 시제품 제작에 착수했다.

아이디어는 분명했지만 조총의 제원에 대해서는 일자무식인 나다. 하지만 비격진천뢰를 직접 만들어본 경험, 그리고 현대에서 대해보았던 총기에 대한 기억이 있었다.

피상적인 도안은 빠르게 구색을 갖추어 설계도로 전환됐다. 장인들은 즉시 부품 생산에 들어갔다. 비격진천뢰 때에 비하면 그야말로 쾌속이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전시의 때가 됐다.

별 수 없이 프로젝트는 하관들에게 맡기고 전시에 응시했다.

시각은 아침, 장소는 경복궁 근정전 앞뜰. 수많은 문무관 관리들이 시립한 가운데 치러졌다. 물론 주재하는 사람은 왕인 선조였다.

아무리 관리들이 초시와 복시에서 시험관을 담당하며 저들의 눈에 띄는 사람을 급제자로 올려두어도, 순번을 정하는 사람은 왕이었다.

마치 사품 이상의 관리는 왕이 교지를 통해 직접 임명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처럼, 다 왕권을 강화하는 수단인 셈이다.

‘하지만 나는 왕이랑 그다지 사이도 안 좋지.’

나는 선조를 싫어했고 선조 역시 나에게 호의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비격진천뢰 시연장에서 여전히 싸가지 없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뭐, 처음부터 큰 기대는 없었던 전시다. 빠지면 그간의 고생이 다 무위로 돌아갔으니 참석했을 뿐. 말석이 되어도 무방했다.

이미 관리였으니까.

왕의 곁으로 노회한 인상의 관리 하나가 등장했다.

초면이었는데, 풍기는 분위기만큼은 남달랐다. 이전에 보았던 노수신과 이산해를 압도하는 묵직한 분위기.

그러나 시선만큼은 온화했다. 장차 나라의 동량이 될 복시 합격자들이 모였다. 이미 관리나 진배없는 자들이기도 했고 말이다.

그가 입을 열었다.

“그대들, 모두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네. 나는 이번 전시에서 전하를 대신해 시험을 진행할 독권관, 영의정 권철이라고 하네.”

영의정!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존재였다. 사실상 왕이 세습직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영의정 타이틀은 이 나라에서 가장 유능한 자라는 증명이기도 했다.

권철이 말을 이었다.

“모두를 응원하겠네. 비록 등수 고하는 나뉘겠지만 여기 자리한 자네들은 모두 전국 팔도에서 시험에 응시한 육만 명의 선비들 중에서 뽑힌 정예 중의 정예이고, 등수가 어찌되건 존중받을 자격이 차고 넘치는 자들이니까. 단지 이번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앞으로도 그러기만 하면 된다네. 그럼 문제를 출제하겠네.”

이어지는 말은 최근 조정의 이슈 몇 가지였다. 하나가 아니라.

세심하게 자질을 가려 등수를 나누겠다는 건가?

덕분에 답안은 이번 시험에서 가장 길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그다지 피로하지는 않을 거다. 애초에 대과 급제는 따놓은 당상이니, 고생을 더 자처할 생각은 없었다.

또 나의 등수를 가려줄 왕 역시 나에게는 호의적인 편이 아니니까. 굳이 악착같이 매달릴 이유는 추호도 없었다.

그리고 한참 뒤.

나는 굉장히 정론적인, 그래서 특출날 기색 하나 없는 평범한 답안을 가지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제가 여럿이었던 탓에 답안의 길이는 족히 사람 키의 5배는 되고도 남았다. 아무리 건성어린 답이라고는 하지만, 왕이 직접 보고 채점하는 만큼 성의있는 척은 해야 했으니까.

정말로 재수 없게 전시에서 탈락하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거든.

실제로 그런 일이 간간히 벌어지기도 했고 말이다.

장막으로 나아가니 마침 영의정 권철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자네가 일등이로군.”

“자랑거리가 되겠군요.”

“흠, 능청맞은 편인가?”

권철은 사람을 평가하듯 나의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나쁘지는 않았다. 그의 시선은 굉장히 우호적이었다.

“근래에 들어 실전에 뛰어난 관리가 조정에 하나 들어왔다지. 집안이나 개인에게 특기할 점은 없으나, 사람 본은 굉장히 어질고 사람을 아낀다고 들었네. 일한 곳도 회령과 군기시 둘뿐이지만 두 곳 모두에서 인상적인 공훈을 세웠지.”

권철은 마치 내가 그 당사자임을 모르기라도 한다는 양 말했다. 하지만 은근히 장난기어린 눈가를 보면 정말로 몰라서 이러는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 사람이 이번 전시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면 좋겠군요.”

“음,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네.”

나는 권철에게 양해를 바란다는 뜻에서 꾸벅 고개를 숙인 뒤 답안을 장막 너머로 던졌다. 그리고 물러난다는 뜻에서 재차 인사를 올렸다.

권철은 씩 웃고 말 뿐이었다.

모든 응시자가 답안을 제출하자 권철은 모두에게 몇 마디 덕담을 해준 뒤, 곧 발표가 있을 것임을 안내해주고 해산을 명했다.

왕이 친림한 자리였지만 선조는 그다지 전면에 나서지 않았다. 자신이 나서는 것보다는 응시자들의 면면을 훑어보는데 더 적극적이었다.

아마 답안의 등수를 가릴 때에도 그렇게 철두철미하겠지?

* * *

며칠 뒤.

창방의(唱榜儀)가 열렸다.

근정전에서 열리는 일종의 의식으로, 전시 급제자들의 등수를 발표하고 그에 맞춰 합격 증명서인 홍패와 어사화를 받는 자리였다.

창방의 참석을 위해 입궐하려니, 거리가 무척이나 혼잡했다.

복시의 합격자가 발표됐을 때 누가 급제자인지는 판가름이 난 상황이었으나, 이번에는 그 다음으로 중요한 급제자들의 등수가 발표되는 날이었으니까.

지인이 전시에 진출하지 못한 사람들도 금시대의 지성이 누구인지, 또 그들의 순위는 어떻게 되는지 확인하고자 직접 나서거나 사람을 보내 전시의 결과를 파악하려는 것이다. 창방의와 함께 세간에도 급제자를 밝히는 방이 붙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세 번째나 같은 고생을 반복하고 있었다.

두꺼운 인파를 헤치며 가까스로 입궐해 근정전으로 들어서니, 전시 때와 비슷하게 문무관들이 가장자리에 모여 사람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전의 나는 대과 응시자였지만 지금의 나는 대과 합격자라는 점.

멀지 않은 곳에 익숙한 사람들이 많이 보였고 나는 하나하나 인사를 나눴다. 하지만 회포를 나눌 정도로 긴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뒤이어 다른 대과 합격자들도 모여들었고, 내시들은 번잡해진 근정전의 분위기를 절제시키기 위해 합격자들을 자리에 앉혔다.

“알겠습니다.”

내시의 지시에 따라 정해진 자리에 앉아 기다리니 곧 선조가 나타났다.

대신들과 내시들을 동원한 그는 근정전 바로 앞에서 합격자 33인을 하나씩 훑었다. 그다지 호의적인 표정은 아니었다.

너무 무미건조한 나머지 적대적인 느낌마저 들었다.

특히 나의 차례에서 선조는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노려보았다는 편이 옳으리라. 그러나 그는 마지막 합격자에게서 시선을 거둔 후 의례적인 덕담만 흘리고는 어좌에 자리했다.

‘나한테 불만 있나?’

그럴 가능성도 없잖아 있었다.

의외로 졸렬한 사람이더라고.

언제 적 일인데 자기가 도성으로 부를 때 바로 오지 않았다며 투정을 부리질 않나.

왕이라니 제 잘난 맛에 산다는 건 알겠는데, 나는 공무원이라는 책임만 다하고 싶을 뿐, 왕의 기분에 맞춰주는 딸랑이 짓은 바라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렇게 해주리라 생각한다면 착각하고 있는 셈이지.

곧, 전시에서 독권관을 맡았던 영의정 권철이 나섰다.

그 역시 적당히 덕담을 흘렸고, 아무개 관리가 그 뒤를 이이 합격자의 이름을 호명했다.

“경오년 식년대과전시 합격자, 갑과 일등, 장원, 유성룡!”

유성룡?

굉장히 익숙한 이름이었다. 아니, 모를 수가 있나.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이미지와는 달리 자리에서 일어난 사람은 이십대 중후반의 청년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어전으로 나아가 허리를 숙였다.

이에 선조가 입을 열고 무어라 말했다. 거리가 있어서인지 웅얼거리는 것 이상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아마 장차 나라를 이끌 재목으로 최선을 다하라는, 방금 전에도 들었던 얘기 비슷한 것을 또 하는 것이겠지.

덕담이 끝나자 관리 하나가 홍패와 어사화를 전달했다. 유성룡은 그것을 받아들고서 물러났고, 다음 사람이 호명됐다.

“갑과 이등, 방안, 정여립!”

정여립?

유명인이라면 유명인이다. 파급력만을 생각하면 앞전의 유성룡 이상이라고 할 수도 있으리라.

그 역시 유성룡과 비슷한 연배로 보였다. 이십대 중후반. 그리고 유성룡이 어전에서 밟았던 절차를 그대로 밟고서 돌아왔다.

다음은 탐화인가.

“갑과 삼등, 탐화…….”

어떤 사람이려나?

“이순신!”

엥?

전혀 생각지 못한 시점에서 나의 이름이 언급됐다. 그래서 굉장히 의아한 기분이 들었지만, 불렸으니 일단은 나설 수밖에 없었다.

어전으로 나아가니 선조가 말했다.

“고개를 들라.”

들라니 들었다.

선조는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영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이었다. 마치 똥이라도 마려운 것처럼 말이다.

그는 거의 ‘가까스로’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뜸을 들인 뒤에야 입을 열었다.

“군기시 첨정 이순신…….”

“예, 신 군기시 첨정 이순신이옵나이다.”

“…….”

“……?”

앞 사람들과는 달리 덕담조차 없었다. 이름만 달랑 부르고는 침묵만 지켰다.

지금 뭐 나보고 어쩌라는 것인지.

한참이나 분위기를 잡기에 무슨 특별한 소리라도 하려나 싶었지만, 막상 선조가 꺼낸 말은 굉장히 맥 빠지는 소리였다.

“……지켜보도록 하지.”

“망극하옵나이다.”

선조와의 대담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하급 관리가 다가와 홍패와 어사화를 건넸고, 나는 하사품들을 챙긴 뒤 선조에게 예를 표하고는 물러났다.

이후로도 차순위 급제자들의 이름과 등수가 호명됐다.

그동안 나는 미뤄두었던 얼떨떨한 기분을 한껏 느꼈다.

‘내가 삼등이나 했다고?’

기대조차 하지 않았던 성적이었다.

내가 선조를 너무 의식했던 건가?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기에는, 전시 때 제출했던 답안은 너무나도 평범했다.

다른 녀석들이 답안에다가 오줌이라도 갈기지 않은 이상 이런 성적이 나올 수는 없었다.

‘흐음…….’

도대체 어떤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근본부터 생각해보면 채점자는 왕인 선조다. 그가 나의 평범하기 짝이 없는 답안에 무려 삼등이나 매겼다.

비격진천뢰 시연장에서나, 방금 만난 선조는 딱히 나에게 호의적인 기색은 없었는데. 오히려 경계마저 느껴졌다.

일개 신하에게 풍기는 분위기 치고는 과할 정도로.

그런데 착각이었나?

……아니면 선조가 츤데레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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