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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54화 (54/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54화

19. 내일까지만 잘하기 (3)

거리는 과연 분주했다.

시험을 본 사람은 고작 이백 명인데, 육조거리에는 초시 결과가 나왔을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아마 자기가 아는 사람 중에 누가 합격을 했나 굉장히들 궁금했나본데, 미안하지만 형씨들 때문에 막상 당사자들이 자기 성적 확인이 안 된다고!

나는 끙끙대며 인파를 파고들었다.

“엿 드시렵니까?”

느닷없이 걸어오는 말에 고개를 돌리니 엿장수가 막대엿을 건네고 있었다.

사람이 있으면 역시 장사꾼도 있어야지. 마침 긴장이 바짝 된지라, 입에 뭐라도 물어야 할 것 같아 엿을 받았다.

“감사합니다요.”

“광관방에 흰 벽돌담. 그리고 숭신방에 새로 지어진 큰 집. 거기 식구들 다 먹어야 하니 넉넉히 파세요.”

“어?”

“예?”

“어어?!”

엿장수 아저씨가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워했다. 무슨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말이다.

“혹시 군기시 첨정나리가 아니십니까요?”

“맞습니다만.”

“이야. 하하하.”

엿장수는 만족한 듯 웃더니, 한동안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별다른 말없이 인사만 건넸다.

“좋은 결과 있었으면 합니다요.”

“나도 그러기를 바라고 있어요. 기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예엡.”

엿장수는 꾸벅 묵례만 올린 뒤 인파를 헤치고 사라졌다.

그의 반응이 썩 좋았다. 아마도 나를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모양인데, 만일 그가 진즉에 복시의 합격자 방을 먼저 보았다면…….

나는 벌써부터 안도하는 기분이 들었다.

“후!”

벌써부터 입이 빙그레 찢어졌다. 엿을 물고 있어서 천만 다행이지, 그렇지 못했다면 미친놈처럼 입에 귀에 걸린 채로 돌아다닐 뻔했다.

조선 조커가 되어버리는 거지.

나는 애써 입꼬리를 내리며 사람들을 뚫고 지나갔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고, 울고 웃는 시험 응시자들의 반응도 느껴졌다.

그리고 방의 내용이 가까스로 보이는 장소에서. 나는 까치발을 한 채 등수를 확인했다.

『庚午年 式年大科覆試 合格者 名單

……

三十一等 柳季聞

三十二等 李純信

三十三等 許京寧

……

…….』

“으아으!”

나는 발작 비슷한 감탄을 흘렸다.

삼십이등, 이순신.

정말 가까스로 붙었다. 합격자 정원이 딱 서른세 명이었으니, 만일 두 계단만 더 아래로 내려갔으면 탈락이다!

그야말로 턱걸이!

“어우……. 씨.”

내가 합격하지 못하면 다 나라의 그릇이 부족한 탓이라고는 했지만, 사실 쫄리기는 했다.

원래 시스템을 욕하려면 욕할 시스템 안에서 최소한은 해야 하는 거거든. 그렇지 않으면 신포도 운운하는 여우로 비칠 수 있으니까.

그런 점에서 나는 이제 조선의 시스템을 욕할 자격이 생긴 거다.

정말 이놈의 썩어빠진 나라는 정말 가까스로 나를 받아들일 자격이 있군! 조금만 그릇이 작았어도 위대한 나, 이순신을 놓칠 뻔했어. 어? 운 좋은 줄 알어…….

나는 그렇게 뻘생각을 하며 피식피식 웃었다.

복시에 합격했으니 이제 끝이다. 전시가 남아있긴 하지만, 일부러라도 못하지 않는 이상 과거 급제는 정해져 있었다.

게다가 이번 등수가 너무 낮아서, 전시에서는 오히려 더 높은 등수로 급제할 수도 있었다.

“하하……. 하하하…….”

나는 방방 뛰려다, 괜히 근처에서 절규하고 오열하는 탈락자들의 시선을 살까 조용히 발길을 돌렸다.

지금 나는 엿의 달콤함을 느끼고 있었지만, 저쪽에서 보이는 사람들은 단지 엿 같기만 할 뿐이었으니까.

* * *

저택으로 돌아오니 마침 을룡이 나와 있었다. 녀석은 나를 발견하기 무섭게 후다닥 달려와 허리를 숙였다.

“다녀오셨습니까요, 공자님.”

“어, 그래.”

“송구합니다. 출타하실 때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아니야. 바쁜데 항상 나만 보고 있을 수는 없지.”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을룡은 여전히 스스로에게 실망한 기색이었다.

“정말로 괜찮아. 사람 몸이 두 개일 수는 없으니까. 그리고 나 배웅 안 한다고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는 것도 아니니.”

“감사합니다.”

“좋은 소식이 하나 있다.”

“혹시…….”

을룡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근래에 들어 내가 ‘좋은 소식’이라고 할만한 것은 많지 않았다. 바로 대과 복시의 결과!

“이 형님께서 복시에 합격하셨다.”

“아!”

을룡은 마치 제가 합격하기라도 한 양, 화색을 띠며 허리를 숙였다.

“경하드립니다, 공자님!”

그의 외침에 집안 식구들이 모였다. 그들은 자신이 얼핏 들었던 말에 대해 조심스럽게 묻고는, 대답을 듣자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경하드립니다요, 공자님!”

“축하드립니다!”

“공자님이시라면 반드시 대과에 붙으실 줄 알고 있었습니다!”

저택의 소란에 금세 모든 식구들이 마당으로 나왔다. 그들 모두가 나의 일에 순수하게 기뻐해주고 있었다.

나는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느 누구도 저택의 식구 모두가, 이렇게 주인의 일을 자신의 일처럼 즐거워하지는 않으리라.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진심어린 지지란 가장 흔치 않은 것이었고, 그것을 가진 지금의 나는 그 누구보다도 기뻤다.

그리고 이 기쁨을 모두와 공유하고 싶었다.

“오늘은, 먹고 마시며 즐깁시다. 누구도 초대하지 말고, 우리 집 식구들끼리만 말입니다.”

“와아아!”

“와!”

저택 식구들이 환호성을 내지르며 방방 뛰었다.

* * *

그로부터 한참이 지나.

저택의 식구들이 모여 각자의 상을 낀 채 먹고 마셔댔다.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 사이에 놓인 화로에는 질 좋은 고기가 좋은 냄새를 풍기며 익어갔고, 주변에 즐비하게 놓인 술동이들은 여전히 바닥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딱 술과 고기뿐인, 무식하고 단순했지만 그래서 더더욱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자리였다.

손님은 받지 않았다.

복시의 결과가 난 뒤 여러 집에서 연회가 벌어진다. 급제는 따 놓은 당상이니 거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숟가락 한 번 얹어보려는 얌체도 많았다.

미안하지만 오늘은 그런 얌체들과 공유할 자리는 없었다. 오늘은 순전히 나와 식구들만을 위한 날이다.

물론 이 저택의 식구들만 나의 가족이 아닌 만큼 베 짜는 사람들이 지내는 북촌과 숭신방의 다른 저택에도, 그리고 성 밖에서 나의 땅을 일구는 소작들에게도 술과 고기를 한아름 사서 보내두었다.

지출이 꽤나 컸지만 이런 때가 아니라면 언제 지출을 하겠는가? 모두가 기뻐하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했고, 나 역시 즐거웠으니 그건 그것대로 충분했다.

“한동안 바빠지겠구나.”

대과 급제 전에도 나는 내 생각보다 주가가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당당하게 복시에 합격했으니, 과거 급제는 이미 이루어진 셈이었고 나는 더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시선을 받을 터였다.

많고 많으며 복잡한 시선들 말이다.

누군가는 경외할 테고 누군가는 존경하겠지. 하지만 누군가는 질시할 테고 또 질투할 터였다. 세상일이란 그런 법 아니냐.

그만큼 우군도 많아지고 적도 많아진다.

나날이 동서의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는 이 시대에서, 나는 양쪽 모두와 깊은 연이 있었다.

고작 정치적 이익 따위를 위해 그간의 연을 저버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나, 세상의 흐름이란 개인이 맞서기 힘들었고 자칫 당쟁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노수신에게 을사사화란 맛보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지난 스무 해 동안의 유배보다 더욱 힘든 상황에 놓여있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던 그는, 최근 들어 후회하고 있었다.

지금의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회령의 일, 군기시의 일, 대과란 모두 맛보기에 지나지 않았다.

과연 나는 내가 앞으로 겪을 일들을 얼마나 잘 견뎌낼 수 있을까.

한 가지는 분명했다.

나는 나의 역할을, 이순신의 운명을 위해 최선을 다할 거다. 어쩌면 원래의 이순신처럼 전설이 될 수도 있겠지.

* * *

전시는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

높은 등수를 받으리라고는 기대하지도 않았거니와, 과거 급제라는 목표는 이미 달성했으니까. 그리고 기존 관리가 대과에 급제하면 품계가 올라간다.

‘또 적을 옮기게 된다는 뜻이지.’

요사이 인선이 더러워져서 자리 옮기는 일이 흔해지긴 했는데, (물론 다 선조 탓이다.) 나는 아직 군기시의 일원으로서 해낼 일이 많았다.

사실 군기시의 일원이 되면서 궁극적으로 진행하려던 일은 바로 조총의 도입이었다.

원거리 화력을 활과 화포로 넉넉히 충당하고 있는 조선에서 조총이란 그다지 매력적인 무기는 아니다.

하지만 조총은 최소한의 연습으로 화기가 가진 화력을 다 발휘할 수 있었으며, 두꺼운 갑옷조차 꿰뚫을 수 있는 화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때문에 징집병이 대부분의 군대를 구성하며 중보병과 중기병이 가장 위협적인 이 시대에서, 조총이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은 활 이상이었다.

그 기능과 방법이 달라 완전히 대체할 수는 없겠지만, 이미 일본에서는 전국시대라는 마경을 거쳐 조총의 가치를 명백하게 납득하고 도입하지 않았던가.

녀석들이 대신 죽어가며 입증한 것인데 그냥 지나쳤다간 원 역사의 조선처럼 큰 코 다칠 뿐이었다.

그러니 중요도를 생각하면 진즉에 도입해야 했지만…….

‘이 방면에서는 내가 워낙 문외한이었으니까.’

과거의 나에게는 경력도, 경험도 없었고 입증된 성과도 없었다.

다짜고짜 조총을 개발해내려 들었다간 인가가 떨어질지도 미지수였거니와, 어렵사리 구현하더라도 조정에서 진지하게 대할 가능성이 적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지.’

화약의 가공법으로 초석을 깔았고, 비격진천뢰를 도입해 능력은 인정받았다.

특히 비격진천뢰란 용도가 제한적이긴 하나 폭발탄의 화력은 무척이나 인상적인 것이어서, 시연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비격진천뢰에 대한 호감을 잊지 않았다.

이게 내가 바라던 분위기였다. 조총을 도입할 수 있는.

결정적으로, 내가 대과의 급제가 확실시 되면서 몸값과 인지도가 상한을 쳤다.

그래서 때를 놓치지 않고 준비했다.

“어떻습니까?”

나는 준비해둔 도안을 군기시정에게 건넸다.

노수신 다음으로 들어온 군기시정은 홍성민(洪聖民)이었다.

그 역시 나의 스승인 김성일, 전전 군기시정이었던 심의겸과 마찬가지로 이황의 문인이었다. 학맥이 같으면 쉽게 뭉치는 요즘 분위기에서 나는 상관을 잘 만난 셈이었다.

하지만 설령 그렇지 않았더라도, 군기시의 대세는 나였다.

이미 굵직한 성과를 두 번이나 낸데다 전임 군기시정들 모두가 나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리고 공문에는 나의 공을 밝히는 대신, 관아의 사람이라면 아전은 물론 말단 장인들까지 성명을 기록하여 일일이 역할과 공을 밝혀 하관들 역시 나에 대한 지지가 압도적이었다.

결정적으로, 군기시의 상위 기관인 병조의 판서 박영준이 나를 후원하고 있었다.

윗사람도 내 편이고 아랫사람도 내 편인 상황.

새로 들어온 군기시정이 쪽이라도 쓸 수 있겠는가?

내가 진정한 군기시의 실세인데.

맞서느니 그냥 가만히 있다가 부하직원이 내는 공을 받아먹는 게 최선인 이상, 홍성민에게는 선택지 자체가 하나뿐인 상황이었다.

“흥미롭게 보이는군. 하지만 경력이 부족한 나로서는 왈가왈부할 수 없겠어. 그리고 신무기에 관해서라면 나보다야 자네가 더 잘 알겠지. 첨정께서 전담하고 진행하시게. 필요한 예산과 인력은 먼저 가져다 쓰고, 보고는 나중에 해도 되네.”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빙긋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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