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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52화 (52/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52화

19. 내일까지만 잘하기 (1)

도성이 다시 분주해졌다.

복시(覆試)의 때다.

초시에 합격한 240명이 모였다. 한평생 공부만 해온 수만 명의 선비들 사이에서 선택된 극소수의 관리 후보생들이다.

그러나 모두가 복시에 응하지는 못했다.

본격적인 시험에 앞서 전례강(典禮講)이 있다.

나라의 법전인 경국대전과 유교의례를 규정한 가례를 외우는 시험이다. 여기서 스무 명이 복시 응시 자격을 박탈당했다.

다음은 강경시(講經試)!

각 응시생은 출제자가 묻는 사서삼경의 단락을 외우고 해설해야 한다.

복시의 첫 관문이나 여전히 자격을 평가하는 단계로 인식된다. 탈락하면 본 시험인 회시(會試)에 응시하지 못한다.

스무 명이 강경시를 통과하지 못했다.

나는 살아남았다.

복시도 초시처럼 시험장이 갈린다.

내가 자리한 곳은 성균관 비천당(丕闡堂).

과장에는 백 명도 안 되는 사람만이 자리한 채, 조용히 출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겨울철 찬바람이 쌩쌩 불었다.

-꾸르륵!

뱃고동이 울었다.

강경시에 딱 턱걸이로 통과한 후, 나는 기쁨과 안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전날 밤 술상을 받았다.

원래 시험 있는 날에는 공부보다도 컨디션 관리가 더 중요한 법인데……, 긴장을 완화하려다 졸지에 항문의 괄약근 긴장만 완화하게 생겼다.

‘젠장!’

분명, 먼 옛날 시험을 보던 한 선비가 시험장에서 똥을 지렸다는 농담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어쩌면 오늘 내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판이었다. 또 하나의 레전드가 탄생하는 거지. 현직 관리, 시험 보던 중 즐똥하다.

‘씁, 빨리 출제해라.’

하늘이 나의 소원을 들어준 것일까?

그때 일단의 무리가 건물을 돌아 나왔다. 나에게는 익숙한 사람이었다.

대사헌 노수신!

얼마 전에 본 뒤로 연락이 없었는데, 아무래도 사직소는 반려당한 모양이었다. 참으로 씁쓸한 처지였다.

선조가 워낙 답정너라…….

이전에 노수신이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내려가겠다고 하자, 아예 사람을 시켜 그 어머니를 도성으로 이주시킨 선조였다. 같은 사유로는 사직소를 받지 않겠다고 원천차단을 시켜버린 셈이다.

자신의 공을 증명하는 존재인 을사사화 희생자들의 낙향을 고이 용납하지는 않겠다는 거지.

노수신은 피로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나는 이번 시험에서 상시관을 맡고 있는 대사헌 노수신이라고 하오. 다들 수많은 유생들 사이에서도 특별히 선발된 사람인만큼 반드시 좋은 성적을 거두리라 예상하지만, 불가피하게 정해진 사람만큼만 뽑을 수밖에 없어 아쉬울 뿐이외다. 설령 떨어진다 하더라도 회시에 오른 사람들은 이후 식년시에 기회가 찾아오기 마련이고, 또 급제한다 하더라도 선배보다 높은 품계를 가질 수도 있고 후배보다 낮은 품계를 가질 수 있는 만큼, 이번 시험의 결과에만 너무 일희일비하지 않았으면들 하오. 그럼, 문제를 출제하겠소.”

노수신이 시선을 돌리자, 바로 옆에 있던 시험관이 걸어둔 종이를 펼쳤다.

새하얀 백지에 커다랗게 쓰인 글자는 부(賦)!

글의 양식 중 하나로, 작자의 생각이나 느끼는 감상을 그대로 드러내는 부류를 뜻했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구성해야 했고, 또 낭송도 고려해야 했으므로 사람의 글재주가 가장 시험 받는 종류이기도 했다.

‘역시…….’

물론 대과를 열심히 준비한 사람이라면, 양식마다 몇 가지 글을 미리 모아두기 마련이다. 나 역시도 그러했고, 다들 회시에 올라온 인재들인 만큼 다른 사람들도 그러했다.

주제가 정해지자 모두의 붓이 움직였다.

나 역시 새하얀 답안 위로 세필을 올렸다.

『履莫夷於平地(이막이어평지)

걸어 다니기에 평지보다 더 평탄한 곳은 없으나

跣不視而傷足(선부시이상족)

맨발로 살피지 않고 다니다간 발을 상한다.

處莫安於衽席(처막안어임석)

거처함이 이부자리보다 더 편안한 곳이 없으나

尖不畏而觸目(첨부외이촉목)

뾰족한 것을 겁내지 않다간 눈이 찔린다.

禍實由於所忽(화실유어소홀)

재앙은 소홀히 하는 곳에 있는 법.

巖不作於谿谷(암불작어계곡)

위험은 산골짜기에만 있는 건 아니라네.

…….』

한참을 써내려가니 400자의 부(賦)가 완성됐다.

전반적으로 평이한 감이 있으나, 결국 그 뜻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더라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

하지만 딱 그 뜻만 있는 건 아니었다.

무수한 표현들 사이에서 나는 ‘대수롭지 않은 것’이 민심임을 드러내고 있었고 이를 대하는 자를 군주라 암시했다.

슬쩍 본다면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라는 소리 같지만, 자세히 본다면 군주는 민심을 잘 다스려야 화를 입지 않는다는 뜻을 품고 있었다.

딱히 선조를 힐난하려고 쓴 글은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이런 부가 나오게 됐다. 혹시나 선조가 나의 부를 접하고 히스테릭한 반응을 보이지는 않을까, 그런 생각도 없지는 않았는데 글이 너무 잘 나왔다.

어떻게 그냥 버릴 수 있나.

결정적으로, 급똥 상황이라 현장에서 작문을 할 수가 없었다.

“스읍!”

나는 답안을 말고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주위에서도 몇몇 사람들이 답안을 마무리하며 일어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헤치고 나아가 장막 위로 답안을 던져 넣었다.

-툭.

썩 든든한 소리가 났다. 회시 중장은 끝났으며, 종장은 내일 치게 되어 있었다. 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외치는 아랫배를 위해 서둘러 시험장을 빠져나갔다.

* * *

“휴!”

나는 무척이나 안도해하며 뒷간을 나왔다.

하마터면 길바닥에서 지리는 대참사가 벌어질 뻔했지만, 다행스럽게도 항문은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조만간 포상으로 뒷간에다 새 휴지를 가져놔야겠군.

고작 휴지 따위가 무슨 포상이 되겠냐 싶겠지만 요즘 세상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새끼줄, 식물의 잎, 짚 등으로 뒤를 처리한다.

그리고 치질에 걸려 무척이나 고생하지.

휴지 정도면 아주 큰 포상인 셈이다!

“아, 씨. 또 내일 시험 봐야 하네.”

종장이 남아있었다. 초시와 마찬가지로 대책을 써야 하는데, 굉장히 머리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결국 마음 내키는 대로 쓰기는 하겠지만 세간의 시선이 의식됐으니까. 도성 사람들이 공공연히 내 답안을 돌려다볼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기껏 해봐야 박순이 정치적으로 이용해 선조를 불편하게 할 줄 알았지. 그런데 생각보다 선조가 민감하게 대응했다.

대놓고 남의 답안을 가져가서 보다니…….

박순에게 자신의 불편함을 인식시키려는 행동이기도 했겠지만, 선조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즉위 직후부터 워낙 공격적으로 왕 노릇을 해온 탓에 자신을 지지해주는 신하도 얼마 없겠다, 게다가 본인도 신하를 존중하거나 신임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럴 바에야 본인이 직접 자신의 눈으로 보겠다는 거지.

덕분에 나만 유명인이 됐다. 얼마나 대단한 대책을 써냈으면 장원까지 하고, 왕이 직접 찾아볼 정도냐고.

‘제기럴.’

아마 이번 대책도 조리돌림을 당하겠지! 인기인의 삶이란 피곤하구나…….

영 공부할 기분은 아니라서, 나는 을룡에게 구들장이나 데우도록 하고 꿀잠이나 한 판 때렸다. 일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지만 심력을 많이 써서인지 금방 잠들었다.

* * *

“으.”

자리에서 일어나니 방문에 노란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벌써 저녁인가. 의외로 많은 시간이 흘렀다.

생각보다 많이 피곤했구나.

방을 나서니 찬바람이 몸을 감쌌다. 쌀쌀한 기온에 잠기운이 싹 달아났다.

“기침하셨습니까?”

을룡이었다.

“어, 그래. 귀찮겠지만 냉수 한 접시 떠와라. 입 좀 씻어야겠다.”

“예.”

곧 을룡이 돌아와 냉수를 가져다주었다.

“여기.”

“고맙다.”

대접을 받아드니 냉기가 손끝으로 전해졌다. 저릿한 차가움이 기분 좋았다. 정신이 번쩍 드는 느낌이었다.

겨울바람에 차갑게 식은 물도 완전 얼음장이었다. 가글을 하니 입안의 꿉꿉한 느낌이 싹 가셨다.

“후!”

“정신이 좀 드십니까?”

“이제 정신이 든다.”

“다행입니다.”

을룡은 짓궂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희소식이 하나 있습니다.”

“그래? 궁금하네.”

“숭신방에 올리던 건물, 완공됐습니다. 공자님께서 말씀만 해주신다면 바로 입주가 가능합니다. 몇몇 사람들은 이미 잔뜩 기대하고 있는 모양이더군요.”

베 짜는 사람들을 말하는 건가?

그들이라고 북촌의 저택이 부족한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주변의 시선이 있다보니 신체적 안락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했다.

그에 반해 숭신방에 올린 건물은 도성 한가운데인 북촌보다 인적이 드문 편이기도 했고, 또 사방이 폐쇄되어 있어 남들의 시선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같은 식구끼리만 지내면 되니까.

그들이 더더욱 사회와 격리되는 것 같아 우려가 들기는 했지만, 노출을 강요한다면 폭력이 된다. 저들끼리 잘 지낸다면 그것만으로 다행이었고, 그러다 이따금 출타한다면 더욱 바랄 일도 없었다.

“한 번 가보자.”

“바로 지금 말입니까?”

“걱정돼서 그래. 한동안 시선을 주지 못해서 사람들이 일을 똑바로 해놨을지 의문이다.”

“그렇다면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공자님께서 대과 준비로 바쁘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제가 눈치껏 감독하고 관리했지요.”

을룡은 숨길 생각도 없다는 듯 콧대를 높이며 말했다.

자랑스러워하는 기색이 썩 귀여웠다. 그리고 고마웠다. 바쁜 나를 대신해 자신이 노고를 자처한 것이었으니까.

안 그래도 저택에서는 나 다음 가는 사람으로 잡무를 총괄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베 짜는 사람들도 관리하고 있는 을룡이었다.

이미 바쁜 사람이 또 다른 일감을 자처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야……. 고생했다, 을룡아.”

“이 정도는 기본 아닙니까.”

“그게 기본이면 이 세상에는 기본도 못 하는 사람이 십중팔구다.”

“달리 말하면 제가 십중일이라는 뜻입니까?”

을룡이 짓궂은 얼굴을 하며 물었다.

“그래. 네가 최고다.”

“흠흠!”

을룡이 어깨를 으쓱이자 나는 피식 웃어주고는 말했다.

“자리 이전을 원하는 사람은 숭신방으로 보내도록 해. 원하는 사람 있으면 네가 걸러서 입주시키고. 규모가 크니까 숭신방 저택은 따로 책임자를 세워두는 편이 좋겠다.”

“귀생 아저씨가 제격입니다. 마침 숭신방으로 이전도 원하고, 책임감이 있는 사람이니까요. 이전부터 사람들 사이에서도 실질적인 대표 역할도 해왔지요.”

귀생.

내가 회령으로 떠나기 전, 그러니까 몇 년 전 우연히 만난 사람이었다. 그는 나에게 도움받기를 간절히 원했고 나는 그에게 숙식을 제공하되 일을 하라는 조건을 걸었다.

도움을 주는 나를 위한 일이 아니라, 그 스스로를 위해서 말이다.

그게 베 짜는 일이었다. 숙식비용과 세금을 제외한 나머지는 일 한 사람이 가지는 조건이었으나, 귀생은 단 한 번도 자신의 몫을 주장한 적이 없었다.

최초로 베 짜는 사람이라는 상징성보다도 역할과 마음가짐이 더 특별한 자였다.

“그 사람이라면 잘 해주겠지. 네가 가서 나 대신 부탁해줘. 가장 적격인 사람이라고.”

“알겠습니다. 그리고 공자님.”

“왜?”

“숭신방 저택의 규모가 꽤 큰 편이라, 정원을 채운다면 일손이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허락만 내려주신다면 제가 쓸만한 녀석들을 분별해 충원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줄래?”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공자님 마음에 꼭 맞는 자들만 골라 들이도록 하겠습니다. 문서는 어떻게 할까요?”

노비문서 말인가?

나는 주위의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한 사람은 대문을 지키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마당을 쓸고 있었다. 밥 때가 되어서인지 집 뒤편으로는 여인들의 말소리로 시끄러웠다.

분위기가 썩 괜찮았다. 모두가 자신의 역할을 기꺼이 수행하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졌지만 잃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

내가 집안의 노비들을 해방시키자 기행을 저질렀다는 평가가 줄을 이었다. 이유 없이 재산을 태우는 것과 다르지 않았으니까.

어차피 노비들은 재산이 없고, 그래서 해방을 시키더라도 주인의 집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재산이 아닌 개인이 되어 세금까지 내야 했다. 먹는 것은 똑같은데 말이다.

그러니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나는 그런 인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물론 어느 세상이건 사람의 위아래는 있다. 미래에는 재산과 능력이 기준이었고 이 시대에서는 신분이 그러할 뿐이다.

하지만 적어도 상대방을 개인의 물건으로 규정짓고, 짐승에게 통용되는 말을 쓴다는 것. 그것은 반인륜적인 폭거다.

내가 이런 세상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방관만 한다면 공범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나는 노예제의 공범이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앞으로도 달라질 생각도 없다.

“문서? 어떻게 하기는. 잘 알고 있지 않아?”

“잘 알고 있지요. 하지만 공자님의 재산이니, 허락 없이 처분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럼 내가 허락을 해줘야지. 처리해둬.”

“알겠습니다.

을룡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나 오늘 석반은 조금만 먹을 테니까, 이전의 반만 줘.”

“……그렇게 드셔도 되겠습니까?”

나의 식사량은 식구들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적은 편이었다.

거의 국그릇에다 고봉밥을 만들어 먹는 다른 식구들과는 달리, 나는 사람 주먹의 반 정도만 먹었으니까.

미래로 치면 한 끼 식사랍시고 한두 숟가락 뜨는 것과 다를 바 없었으니 사람들의 우려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먹어왔으니까.

“어젯밤에 한 잔 했다가 오늘 과장에서 지릴 뻔했다.”

“아……, 하하하.”

“그래서 일부러라도 적게 먹으려고. 시험이 있는 날만.”

“알겠습니다. 부엌 사람들에게 말해두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나는 안에서 책 좀 봐야겠다. 너도 들어가서 쉬어.”

“예.”

나는 슬쩍 손을 들어주고는 방으로 들어섰다. 한동안 밖으로 나와 있을 동안, 바깥의 선선한 바람이 방안의 꿉꿉한 공기를 모두 몰아낸 뒤였다.

상쾌했다.

공부할 기분도 들고…….

내일 종장에서 좋은 성적 거둬야지.

복시 다음에도 전시가 있지만, 전시는 어디까지나 급제자의 등수를 가리는 시험이다. 전시에 이르렀다면 이미 급제는 확정 사항이다.

그러니 딱 내일까지만 잘 하면 된다.

그러니 딱 내일까지만 잘 하자.

나는 여러 예비 책문들을 서안 위에 올려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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