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49화
18. 한성시 급제자 이순신(1)
마침내 결전의 때가 왔다.
반년!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긴 시간이었다. 그동안 열심히 공부했지만 늘어난 건 지식보다 아이템이었다.
정철이 쓰던 서안과 문방사우.
이이의 구도장원공 붓.
이산해가 친필로 작성한 사서삼경 해석본.
병조판서 박영준이 선물한 옥관자.
신립과 을룡이 건네준 부적.
게다가 듣도 보도 못한 인간들까지 어떻게든 인맥을 타고 급제를 기원해주었다. 그만큼 주위 사람들이 나에게 거는 기대가 많다는 뜻이겠지.
실로 인맥왕 이순신이었다.
덕분에 나의 부담감은 만빵이었다.
‘낙방하면 진짜로 인당수에 몸 던져야 되겠는데?’
심청이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주변에는 나만 아니라 수많은 예비 심청이들이 많았다. 육조거리에 모인 수백 명의 선비들.
그들은 모두 대과 초시인 한성시(漢城試)에 응시하고자 모였다. 나이대는 다양했으며 생긴 것도 천차만별이었으나 분명한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굉장히 진지한 표정을 하고 있다는 점.
가느다란 눈 수백 쌍이 여명의 빛을 반사하며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여기에 자리한 수많은 사람들 중 오직 사십 명만이 한성시에 통과하게 된다.
그렇다면 대다수를 누르고 자신이 생존하는 수밖에 없다. 전장을 앞둔 장수의 심정과 다를 것 없었다.
한성시 시험자들과 함께 대기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아침 해가 완연히 떴다. 남색 하늘과 새벽별이 모두 햇빛에 가려지고, 마침내 예조의 문이 열렸다.
-삐그덕.
경첩 비틀리는 소리가 적막을 깨뜨렸다.
모두의 시선이 일순 예조 앞으로 몰렸다. 그곳에 젊은 관리가 있었다. 그는 수백 명 사내들의 시선에도 아랑곳 않고 입을 열었다.
“한성시에 응시하신 분들, 이제 과장으로 입장을 시작하겠소이다. 신분을 확인해야 되니 입구에서는 묻기 전에 이름을 밝히시고 안에서는 아전들의 안내를 따르시오. 예조가 과장으로 이용되나 공무는 진행되는 만큼, 잡담으로 불필요한 소란을 일으키지도 말아야 할 것이오. 그리고 혹시라도 성균관 학당에서 시험을 쳐야 하는 사람은 학당에서 쳐야 하오. 다들 숙지하였으면 순서대로 입장하시오.”
관리는 안내를 끝낸 뒤 휙 등을 돌렸다.
응시자들은 도살장을 마주한 짐승들처럼 주춤주춤 예조로 들어섰다. 나도 그 대열에서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어디서 본 건 있어가지고, 대과라 하면 드넓은 궁궐에 모여 시험을 치는 줄 알았다.
하지만 한성시는 궁궐 안이 아닌 관청에서 시험을 쳤다.
이번 한성시가 주재되는 장소는 예조와 성균관이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예조에서 시험을 치르게 되었다.
앞줄의 사람들이 차차 빠지고 내 순서가 왔다. 예조로 들어서니 높은 책상에 앉은 사람이 고개를 까딱 들었다.
‘묻기 전에 이름을 밝히라고 했지?’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 일일이 입을 여는 것도 고생이겠지.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전주 이가 이순신입니다.”
“어?”
나의 소개에 앉아있던 사람이 놀라며 물었다.
“군기시에서 첨정을 지내시는 그분이십니까?”
“맞습니다만…….”
“아, 몰라 뵈어 죄송합니다. 지나가시지요.”
관리가 일어나 깍듯하게 인사했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아전이 과장을 향해 팔을 뻗었다.
설렁설렁 발을 옮기는데 뒤에서 고까운 투로 물음이 나왔다.
“바깥에서 안내 안 들으셨소? 이름을 밝히시오.”
고개를 돌려보니 나를 향한 소리는 아니었다. 나에게 깍듯하게 예를 표했던 관리는 어느새 굉장히 아니꼬운 얼굴을 한 채 다음 사람을 대하고 있었다.
첨정 이순신과는 판이한 대접이었다. 이래서 사람이 권력, 권력 하나보다.
과장으로 들어서니 앞서 들어온 사내들이 각자 자리를 하나씩 점하고 있었다. 나 역시 그들 사이로 파고들어 적당히 빈 곳에 자리했다.
나의 뒤로도 하나 둘 사람이 들어섰고 어느새 과장이 꽉 차자, 입구에서 보았던 예조의 관리가 다시 등장했다.
“모두가 알고 있겠지만, 제술시(製述試)의 경우에는 초장, 중장, 종장 세 단계로 나눠서 치러질 것이오. 정해진 시간 안에 답안을 작성하여 저기 설치된 장막 너머로 설치하면 되오.”
관리가 손을 뻗어 구석진 곳의 흰 장막을 가리켰다.
면대면으로 답안을 직접 제출하지 않고 장막 너머로 던져 넣는 이유는 제출자의 신분을 가리기 위함이다.
답안에도 응시자의 이름과 족보를 기재하게 되어 있는데 기본적으로 가려진 상태다. 채점이 끝나 등수를 매길 때 확인하게 되어 있다.
모두 부정을 방지하기 위한 절차.
과장에 찾아오는 사람치고 이러한 사실에 새삼 놀라워할 사람은 없었다. 예조 관리는 사무적인 어조로 말을 이었다.
“혹시나 시험 중에 부정을 저지르는 자가 적발된다면 즉시 과장에서 추방하고 장(杖) 일백을 칠 것이니, 명심하시고 실수하지 않기를 바라겠소. 그럼.”
예조 관리가 물러남과 동시에 여러 관리들이 들어섰다. 모두 감독관이라 봐도 무방하리라.
시험의 시작이었다.
선두는 상시관(上試官)이었다. 시험관 중에서도 제일 높은 총책임자. 그리고 직접 문제를 출제하는 사람이었다.
상시관은 나름 인맥왕을 자처하게 된 나에게도 초면인 자였다. 그는 무뚝뚝한 인상을 한 채 모두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는 이번 시험에서 상시학을 맡은 이조판서 박순이네. 내가 한성시(漢城試)를 전담한 이상, 불미스러운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될 것이네. 혹시라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범인이 누가 됐건 이 사람이 좋게 생각하지는 않을 걸세.”
부정을 저지른다면 찍어두고 증오하겠다는 소리였다.
정신 똑바로 박힌 사람이라면 정이품 재상에게 찍히고 싶지는 않을 테니 부정 방지는 확실히 될 것 같았다.
이제 초장의 문제를 밝힐 시간.
초장에서는 사서와 오경, 논술 세 가지 영역 중에서 두 가지가 출제된다.
사서와 오경은 모두가 기본적으로 익힌 학문이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
나 역시, 이산해가 슬쩍 힌트를 알려주고 갔지만 공부는 짜둔 커리큘럼에 따라서 철저하게 해둔 상태였다.
다른 사람이라고 다르지는 않겠지. 나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대과 준비에 쏟아온 사람들이었다.
문제는 논술이었다.
단순히 난이도가 높아서가 아니라, 채점자의 주관에 따라서 같은 답안이라도 다른 평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지난 한성시에서 세 번 연속 논술이 나왔다니 올해 한성시에는 빠져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었다. 과연 어떻게 될지…….
상시관 박순이 입을 열었다.
“초장의 문제를 출제하겠네. 첫 번째. 대학(大學)에서 말하는 명명덕(明明德)을 논하라. 두 번째. 문왕지습(文王之什)의 대명(大明) 전문을 쓰고 해설하라.”
아싸…….
나는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대학(大學)은 사서의 한 축이고, 문왕지습의 대명은 시경에서 나오는 시 중 하나였다.
즉, 사서와 오경에서 하나씩 나온 셈이다. 우려했던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출제된 문제들 역시, 나는 좋은 성적을 거둘 자신이 있었다.
나는 세필을 먹물로 적신 뒤 답지로 옮겼다.
-명명덕(明明德)이란 대학의 주제 중 하나로, 밝은 덕을 밝힌다는 뜻이다.
사람이라면 무릇 밝은 덕을 부여 받아 본질이 맑고 밝다는 뜻에서 명덕(明德)이라고 한다.
이를 밝힌다 함(明明德)은, 명덕이 인욕(人慾, 인간의 욕망)에 구애되고 가리어져 혼미해지므로 노력하여 본체를 보전함을 뜻한다…….
슥삭슥삭 세필이 움직였다.
주변의 사내들 모두 붓 소리만 내고 있었다. 이따금 터지는 기침만이 과장에 무겁게 내려앉은 침묵을 깨고 있었다.
첫 번째 답안을 작성한 나는 뒤이어 두 번째 답안도 써내려갔다. 대명(大明)이라는 시. 길지만 외우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야말로 일필휘지!
명명재하 혁혁재상(明明在下 赫赫在上)
천난침사 불이유왕(天難忱斯 不易維王)
……
세상에 계실 때는 현명하시고, 하늘에서는 빛나고 빛나신다.
하늘은 믿기 어려워, 임금 노릇 쉽지만 않도다.
문왕지십의 시들은 주나라 문왕의 덕과 그를 계승한 무왕의 공을 칭송하는 시들이다.
대명(大明)이라는 시 또한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의도가 분명하니 해석 역시 분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점에서는 편한 시였다.
답은 정해져 있다는 뜻.
나는 쉼 없이 빠르게 답안지를 채워 나갔다.
“후.”
묵은 숨을 토해내고 세필을 내려놓으니, 주변에서도 하나 둘 사람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다들 묵직하리만치 돌돌 말린 종이를 단단히 쥔 채 장막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침 답안 작성을 끝낸 나 역시 답지를 말아 일어났다. 초장의 문제들은 어렵지 않았다. 사대부라면 기본 소양인 사서와 오경에 대한 지식을 시험하는 것이었으니까.
달리 말해 초장에서는 성적 차이가 거의 나지 않으리라는 점이다. 초장의 의의는 응시자에게 최소한의 자격이나마 있느냐를 검증하는 것이다.
성적 차이는 중장에서부터 벌어진다.
* * *
반 시진 뒤.
나는 어렵사리 지은 글귀 두 폭을 장막 너머로 던졌다.
예상대로 중장에 들어서자 난이도가 대폭 올라갔다.
중장의 주제는 표(表)와 전(箋) 중에서 한 편, 부(賦), 송(頌), 명(銘), 잠(箴), 기(記) 중에서 한 편을 작성하는 것이었다.
각자는 글의 양식이다. 중장에서 시험하는 것은 문장력이다. 얼마나 글을 잘 지을 수 있느냐.
미래에서 배우는 실용적인 학문에 비하면 애매한 감이 있다. 고작 글을 짓는 것으로 어떻게 사람을 평가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 시대에서 중요한 것이 바로 글이다. 모든 행정이 글로만 처리되며, 외교에 있어서는 더더욱 문장의 수준이 중요했다.
의의는 이러했으나 과거 시험은 실전이었다.
동원할 수 있는 방도란 모조리 동원해야 했다. 창작이란 것이 마냥 쉽지만은 않으므로, 그동안 열심히 과거를 준비해온 사람이라면 양식과 주제마다 일필휘지로 써낼 몇 가지 패는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런 부류였다. 주어진 주제에 맞춰 쥐고 있던 패를 깠다. 약간 거슬리는 부분이 있어 현장에서 조금 손보긴 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썩 느린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주변에는 쉬고 있는 사람 천지였다. 다들 미리 장전한 총알을 진즉 쏘고도 남았다는 뜻이다.
‘빡센데…….’
하지만 아직까지도 답안을 제출하지 못한 사람이 즐비했다. 붓 소리도 여전히 분주했다. 나름 준비했으나 외워둔 것을 잊어먹거나, 준비해둔 부분에서 문제가 나오지 않는 자들이었다.
‘괜히 운도 능력이라고 하는 게 아니지.’
과장도 전장의 일종이다.
손에 쥔 게 창칼만 아닐 뿐, 그 끝으로 상대를 좌절시키고 본인이 생존하려는 것은 똑같았다.
말단 병사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쏘아 보낸 유시(流矢)가 대장군의 목숨을 거두는 법이다. 치사한 일이지만, 언제 세상이 치사한 일이 벌어졌다고 봐준 적이 있던가?
중장은 준비해둔 그대로 출제됐으니 나는 유시로 대장군을 잡은 셈이다. 하지만 종장에서도 대운을 맡겨둔 것처럼 굴 수는 없었다.
더욱이 종장의 난이도는 파격적이다.
단순히 격식에 맞춰 글을 짓는 정도를 떠나, 이번에는 아예 국가적 대책을 물었다. 그것이 바로 종장의 주제였다.
대책(對策)!
대책이 있느냐, 할 때 그 대책 맞다.
초장의 논술을 우려했던 이유도 종장에서 정확히 적용된다. 채점자의 주관이 많이 들어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채점자에 대한 이해도가 중요했다. 이번 시험자의 최고 책임자인 박순은 누구인가?
이황보다도 앞선 시대의 유학자로 유명했던 서경덕(徐敬德)의 직계 제자였다. 서경덕은 기(氣)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주기론의 신봉자였으며, 박순이 그 영향을 안 받을 수는 없었겠지.
하지만 대책에서 논하는 건 동양철학에 대한 입장이 아니었다. 학맥, 당파를 편 가르기 제일 좋은 짓이었으니까.
박순에게서 특기할만한 사항이 있다면, 을사사화의 여러 희생자들과 마찬가지로 의기를 보였다는 점이겠지.
그는 을사사화의 원흉이었던 임백령이 죽자 시호를 짓게 되었는데, 시호에 충(忠)을 넣지 않아 즉시 관직을 빼앗기고 낙향하게 되었다.
조정으로 복귀한 뒤에는 소윤의 거두였던 윤원형 척결에 앞장섰으니, 그의 성격이란 뻔한 것이기도 했다.
‘타협하지 않고, 옳다고 생각하면 그대로 밀어붙이는 사람이다.’
눈치가 보인다고 종장의 주제에 따라 애매한 입장을 취하는 건 도리어 점수가 깎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과장을 해서라도 강경한 태도를 보이는 편이 시선을 끌기 좋겠지.
어느새 시간이 흘러 중장의 시간도 끝나고, 종장의 시간이 왔다.
다시 한 번 등장한 박순은 연이은 시험으로 지친 사내들을 향해 엄히 물었다.
“종장의 주제는 대책(對策)으로, 내가 하는 말을 유심히 들은 뒤 입장을 써서 제출하면 되네. ……시경에서 이르기를, 문왕은 훌륭한 선비들을 통해 편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대체로 나라가 편안한 것은 많은 선비들이 훌륭한 덕이다. 무릇 성군은 인재를 좋아하고, 나라의 보배로 생각하여 하루라도 없어서는 안 될 것으로 생각하였으니, 우리나라는 조종의 때로부터 능통하고 박식한 선비와 깊이 있고 단아한 인재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다만 근래 사이에 사림이 화가 참혹하여 선비가 학문하는 데 힘쓰지 않고, 느껴 떨치고 일어나는 일이 없어져 뭇 사람들이 우려하는 바가 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려면 반드시 인재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어떻게 사람을 가려 인재를 선발할 수 있겠는가?”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굳었다.
난해한 질문이었다.
물론 인재를 선발하는 법에 대한 질문이야 수백 번도 더 나왔다. 당연히 대답 역시, 어느 정도 정형화되어 있었다.
만약 출제자가 특별한 이력이 없는 사람이라면 적당주의로 뻔한 질문을 했을 수도 있다. 뻔한 대답들 사이에서 차별화될 수 있는 약간의 재치가 가미된다면 쉽게 점수를 받을 수 있었겠지.
하지만 박순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삶에 굴곡이 있었던 자였고 선비들의 가져야 할 덕목이라는 절개와 의기를 비쳤음에도 도리어 찍혀 나간 이력이 있는 자였다.
그런 그의 처지를 생각한다면 답변의 방향성은 정해져 있겠으나, 변수는 그와 처지가 비슷한 자들이 비합리적인 과정을 거쳐 빠르게 치고 올라오고 있다는 점이다.
나와 접점이 있었던 노수신, 그리고 유희춘이 대표적으로 그러했다.
이 시대에서 소위 인재로 평가되는 자들이다.
이들 후발주자들은 박순과 처지가 비슷했으나 동정의 여지조차 불쾌해질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과연 박순은 이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나는 그 점을 명확하게 찔러야 했다. 그래야만 한성시를 번듯하게 합격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