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48화
17. 인맥갑 이순신(2)
나를 아낀다는 말을 수시로 해대며, 공인 미친놈이자 내가 봐도 개노답 폐급이며, 이번에 정철과도 두터운 면을 가지게 된…….
그분!
이이!
나보다 정철이 먼저 반응했다.
“이거 이 교리 목소리 아닌가?”
“그러게요. 오늘 은근히 손님이 많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김성일과의 만남 뒤로, 나는 예전처럼 저녁마다 스승의 집을 방문해 함께 빡공했다.
두 시진 정도 공부하면 통금을 알리는 인정이 치기 때문에 집으로 돌아가서 잤으며, 새벽에 눈을 뜨면 출근했다.
이게 내 평소의 일과였다.
그러다 오늘처럼 휴일 같은 경우에는 별다른 일정 없이 쉬었다. 김성일은 완급 조절이 중요하다고 했다. 쉬지 않고 무식하게 공부만 하면 그것이 몸에 익지 않고 행동만 남는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나는 기꺼이 스승의 방식을 따랐다.
놀게 많은 400년 뒤 출신이라 애초에 고3 때에도 무식하게 코피 흘리면서 공부한 적은 없는 나였으니까.
암, 완급조절. 그거 중요하지.
그래서 완급조절…… 하고 있었는데 뜬금없이 손님들의 방문 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누구 하나 연락 없이 찾아오고 있어서,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다시 양해 한 번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번에는 안으로 꼭 들이게!”
“알겠습니다.”
나는 정철의 응원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과연 이번 손님은 이이였다.
“어이, 동생. 반응이 늦어?”
“송구합니다. 마침 안에 손님이 계셔서요.”
“흠. 내가 때를 잘못 맞춰서 찾아온 건가?”
“아닙니다. 마침 손님께서도 교리의 방문을 기뻐하고 계시거든요.”
“누군데?”
“교리님 동기입니다. 정 교리요.”
“아, 그 친구?”
이이는 금세 친근감을 드러냈다.
“그새 많이 친해지셨나 봅니다.”
“동생 덕분에 이전부터 알고는 있었지. 그런데 같은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 있으니 말을 나눌 기회도 많아지고…… 마음도 꽤 맞더라고.”
“좋은 친우를 얻으셨다니 다행입니다.”
“다 동생 덕이지.”
들어오라는 말은 없었지만 이이는 안쪽을 향해 팔을 뻗었다. 그리고 내 등을 안은 채 먼저 안으로 들어섰다. 말로만 동생, 동생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동생 집이라도 방문한 기색이었다.
16세기 인싸인가?
“이 교리.”
열린 방문 너머로 정철이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정 교리. 여기 있을 줄 알았어. 거리에서부터 술 냄새가 아주 진동하더라고.”
“그렇게 코 좋은 사람이 어찌 진즉 찾아오지 않고 이제 찾아오셨나?”
“선배가 후배보다 먼저 등장할 수야 있나.”
이이는 건들거리며 나와 함께 방으로 들어섰다. 나는 을룡에게 술상을 하나 더 내오게 했다.
세 사람이 모여서일까. 자연스럽게 모두의 관심사가 화두에 올랐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이이였다.
“이번에 자네, 식년시 치른다면서?”
“그렇긴 합니다만……. 다들 도대체 어디서 듣고 알게 된 겁니까?”
“나야 정 교리가 말해줬지.”
나와 이이의 시선이 정철에게로 향했다.
“나는 김 봉교에게 들었지.”
“언제요?”
“본인 승진했으니 와서 술 한 잔 하라던데? 나야 술 마다하는 사람은 아니니, 한 번 만났지.”
“스승님께서 입이 싸셨군요.”
“술 마시고도 입 닫고 있으라고? 그러면 사람이 재미없지.”
사람이 재미있는 것도 좋은데, 덕분에 내가 인기인이 됐다고.
정철에, 방금 다녀간 이산해에 이이까지. 모두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더니 옛말 치고 틀린 말 하나 없었다.
그래도 다 나 좋으라고 찾아온 사람들이라 입맛만 다시고 있으니, 정철이 이이를 향해 말했다.
“이 교리께서는 첨정에게 무슨 도움을 주려고 찾아오셨는가? 염치도 없이 그냥 찾아오지는 않으셨을 테고.”
“어허. 그럼 자네는 얼마나 대단한 도움을 줬다고?”
“내가 쓰던 물건을 줬지. 서안에, 문방사우까지. 대과 급제할 때 써놓고 신줏단지처럼 모셔두고 있던 걸세.”
“에이.”
이이는 별것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기운이라도 깃들었다고 말하실 셈이신가? 낡은 옛날 물건들 좋게 포장해서 처분하려는 건 아니고?”
“어허. 이 사람아. 나를 평소에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못난 술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자넨 모두가 알아주는 미치광이 아닌가.”
“이래서 어르신들이 홍문관이 망했다는 소리를 하시는 걸세, 하하하.”
이이는 호방하게 웃고는 길쭉한 함을 내밀었다. 그러더니 정철을 향해 말했다.
“첨정을 응원할 생각이라면 이 정도는 주어야지.”
“무엇인데 그렇게 배짱을 부리시는 건가?”
“구도장원공이 쓴 붓.”
“……!”
정철도 놀랐고, 나도 놀랐다.
대과를 준비할 때 썼던 물건, 시험 칠 당시의 물건도 보통은 아니었다.
선비는 괴력난신을 믿지 않는다고 하지만, 요즘 시대에 상징이 가진 힘은 작지 않았다.
400년 뒤의 세상에서도 서울대생이 난 집이라면 의문의 프리미엄이 붙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조선시대에 구도장원공이 썼던 붓이라고? 정말 부르는 게 값인 물건이었다. 설령 신령스런 기운이 깃들어있지 않더라도, 유일무이라는 희소성만큼은 확실했으니까.
그런데 이이는 그걸 나에게 주겠다고 했다. 그라고 자식들 생각을 안 하는 건 아닐진대 말이다.
이산해는 적어도 세월에 따라 학문이 달라진다는 이유라도 있었지.
“이런 건 제가 선뜻 받기 힘듭니다.”
“내가 다 동생 잘 되라고 주는 거야. 나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으면 당당하게 합격하면 그만 아니야?”
이이는 간직하라는 듯 붓이 담긴 함을 나의 손에 꽉 쥐어주었다.
“스읍……. 혹시라도 낙방한다면 인당수에 몸을 던져서 사죄하겠습니다.”
“자네가 무슨 심청이인가? 인당수에 몸을 던지게. 부담 갖지 말아. 고작 반년 공부해서 대과에 급제할 것 같으면 개나 소나 다 급제했지.”
“위안 감사합니다.”
“위안이 아니라 그게 당연하니 그래.”
이이는 정말 동생 달래주듯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정말 귀한 물건도 주고……. 좋은 사람이다. 미친 사람인데 좋은 사람.
“감사합니다.”
“자, 자. 부담감 드는 이야기는 이만하면 됐어. 간만에 셋이서 모인 김에 술이나 마시세.”
술을 언급하는 건 마침 심통 난 정철을 도발하기 딱 좋은 행동이었다. 자신이 썼던 물건을 모조리 꼴뚜기로 만들어버리는 이이의 구도장원공 붓!
그래서인지 정철은 이렇게라도 자존심을 회복해야겠다는 듯 미소를 띠며 말했다.
“오늘 한 번 죽어볼까?”
술 잘 마시는 사람이 가진 최후의 보루는……, 다름 아닌 주량!
하지만 이이는 정철의 꾐에 넘어갈 생각이 없었다.
“자네만 죽게. 나는 적당히 마시다가 빠질 거야.”
철벽 방어였다.
본인이 싫다는데 꾸역꾸역 권할 수야 있나. 정철은 입맛만 쩝 다시며 나에게 말했다.
“나를 달래줄 사람은 역시 첨정밖에 없구만.”
“…….”
덕분에 나만 죽게 생겼다.
* * *
점심 즈음이 되어.
다들 소반을 하나씩 받고 쩝쩝대며 허기를 달래는데 누군가 찾아왔다. 여러 사람들의 시선이 모인 가운데 그가 입을 열었다.
“병조좌랑 김 가(家)입니다. 혹시, 이 첨정 계십니까?”
이번에는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마치 여기 있는 사람이 이 첨정이라는 듯.
그러자 병조좌랑 김 가가 나를 향해 말했다.
“병조에서 왔습니다. 전해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아, 그래요?”
마침 병조에서 소식이 있을 때가 됐다. 비격진천뢰에 사업에 대한 진척도가 올라갔으니, 달다 쓰다 응답이 있어야지.
예상보다 진도가 빨라서 좋은 반응을 기대하고 있었으니까, 나는 당당하게 물었다.
“말씀하시지요. 듣겠습니다.”
원래 칭찬은 남들 앞에서 들어야 하는 법!
하지만 병조좌랑 김 가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개인적으로 드려야 하는 말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나는 동료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윗선인 병조에서 왔다는데 누가 어쩌겠나.
소반을 밀어내고 밖으로 나오니 김 가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음……. 갑자기 이런 말씀을 드려봐야 놀라우실 뿐이겠지만.”
김 가는 흠흠, 점잖을 떨며 말을 이었다.
“병조판서께서 이번 대과에 필히 급제하라 하십니다. 그리고 이 물건을 드리라 하시더군요.”
도대체 무슨 또 급제 기원 선물이냐……, 싶었다. 게다가 병조판서라니. 이전에 심상찮은 말을 한 마디 하더니 정말로 나를 찍어둔 모양이었다.
김 가는 봉투를 건넸다. 약간 두툼했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물건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여기서 까볼 수는 없으므로 나는 감사부터 표했다.
“감사합니다. 병조판서 대감께 꼭 이번 대과에 합격하겠다고 전해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김 가는 자기 볼일은 다 봤다는 듯 곧바로 발을 돌렸다. 애초에 나와 면이 있던 사람도 아니었으니, 심부름 거리가 끝났으면 갈 뿐이었다.
그거 떠난 뒤 나는 슬쩍 봉투 안을 열어봤다.
붉은 천 조각이었다.
“흠?”
손바닥에 툭 털어보니, 조각이 아니라 주머니였다. 안에 동전 느낌의 작고 딱딱한 덩어리가 두 개 있었다.
뭔가, 싶었는데 꺼내보니 바로 알 수 있었다.
관자(冠者). 망건을 고정하는 물건이었는데 관리는 품계에 따라 쓸 수 있는 재질이 정해져 있었다.
당하관들은 대모, 마노, 호박 등의 보석류를 썼고 그보다 낮은 사람은 뼈나 뿔 등의 적당히 단단한 재질을 썼다.
그에 반해 당상관은 오직 두 가지의 재질만을 썼다.
하나는 금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옥.
3품 관리는 조각이 된 옥관자를 사용했으며, 2품 관리는 금으로 된 관자를 사용했다. 그리고 1품 관리는 최고급 옥을 가공한 소형 관자를 사용했다.
그리고 병조판서가 나에게 선물한 관자는 옥으로 되어 있으며, 조각이 되어 있었다.
‘이번 과거에 반드시 합격해서 당상관직에 오르라는 뜻…….’
참으로 부담스러운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안 그래도 김성일을 상대로 도발까지 해놓은 참이다.
안 되면 노력을 덜 했거나 재주가 부족한 탓이라고. 농이기도 했지만 농담은 농담이 아닐 때 가장 재미없는 법이었다.
그래서 시험을 본 뒤에도 재미있을 수 있도록 스스로를 향한 다짐이기도 했는데, 정철에다 이산해에다 이이까지 찾아오며 크고 작은 선물을 건네며 합격을 기원해줬다.
이 정도만 해도 부담스러운데 이제는 병조판서까지?
‘이 인간들이 나를 부담감에 말려 죽이려고 입이라도 맞췄나?’
정말로 합격하지 못하면 인당수에 몸이라도 던져야 할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물론 꼭 부담감을 가질 필요는 없으리라. 나에게 전해진 선물과 기원 모두 응원이었지 압박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사람이 염치가 있지, 이렇게까지 받아두고 과락을 해버리면 고개를 들 낯이 없어진다.
“진짜 빡세게 공부해야겠다…….”
* * *
확실히 입을 맞춘 게 분명해.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을 테니까!
나를 상대로 공자님 운운하는 두 인간이 있다. 을룡과 신립이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자신들의 공통점을 강조하듯 똑같은 선물을 내놓았다.
먼젓번 방문했던 신립은 원정의 공으로 금의환향해, 오위도총부로 적을 옮긴 채였다.
나야 그가 고생했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 그러려니 싶었다. 그런데 신립은 그 공을 나에게 옮기고 있었다.
덕분에 영전의 은혜를 누릴 수 있었다나?
그러면서 은혜를 갚을 기회만 보고 있었는데 이번에 작은 성의를 마련했다면서 부적을 건넸다.
‘비단에 금실로 떡 병(餠)이었고 다른 하나는 엿 이(飴)를 새겨둔 부적이었지.’
둘 다 시험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주전부리였다. 떡은 떡하니 붙으라는 의미였고, 엿은 합격에 찐득하니 붙으라는 뜻이었다.
나는 신립의 마음에 감사를 표하며 짧게 술자리를 가졌다.
그리고 오늘.
을룡 역시 내게 비슷한 부적을 건넸다. 부적, 하면 흔히 생각나는 노란 괴횡지에 붉은 경면주사로 글자를 그린 그것.
“음사(淫祀, 무속)의 물건이라 공자님께 잘 맞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저택의 사람들과 베 짜는 사람들이 마음을 모았습니다.”
“모두에게 고맙다 전해줘.”
“알겠습니다.”
아는 사람이라면 죄 나에게 합격을 기원하고 있었다.
의문의 인싸…….
이순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