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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46화 (46/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46화

16. 하늘을 울게 만들(5)

아이디어를 실체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당장 형상을 갖추는 데만 규격, 재질, 두께 등 수많은 변수가 있다. 미안하지만 그런 것들까지 내가 일일이 구체화할 수는 없었다.

그럼 누가 대신 구체화한단 말인가?

뻔하지.

원래 디자이너가 똥을, 아니 아이디어를 내면 그 뒷감당은 공돌이가 하게 되어 있다. 나의 비격진천뢰 실현을 위해 수많은 조선시대 공돌이의 피와 땀이 투입됐다.

군기시에서는 나의 프로젝트를 전적으로 밀어주었다. 그 외에는 딱히 진행되는 일이 없기도 했고, 조정에서도 나름 관심을 가진다는 점에서 당연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흘러…….

“자!”

나는 자랑스럽게 비격진천뢰를 소개할 수 있었다.

농구공 크기의 새카만 무쇠 공. 둔탁하기 짝이 없는 형상이지만 그 진정한 힘은 내부에 감춰져 있었다.

쉽게 부서져 폭발과 함께 비산하는 겉면과 함께, 내부에는 화약과 마름쇠가 채워져 있었다. 이런 게 군중 사이로 떨어진다면 폭심지에 있던 희생자는 형상도 남지 않을 터였다.

실로 무시무시한 무기였고 과장 조금 보태면 비인륜적이기도 했지만, 죽이지 못하면 죽어야만 하는 전장에서 그런 것들은 논의 대상이 아니었다.

“다 완성된 것입니까?”

군기시 하관(下官) 중 하나가 물었다.

“물론입니다. 원한다면 당장 불 붙여도 이 자리에서 폭발할 겁니다. 한 번 붙여볼까요?”

“아, 아니요.”

하관은 손을 저으며 적극 사양했다.

폭발물을 군기시 관리 전원이 모인 자리에서 불을 붙이겠다니, 농담이라도 간이 서늘해질 소리였다.

이에 군기시정 노수신이 말했다.

“벌써 완성한 겐가?”

“그렇습니다. 다 군기시정과 다른 분들이 힘써주신 덕이지요. 특히 화약장과 화포장들의 노고가 많았습니다.”

대충 만들자면 어렵지 않게 실현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최상의 비격진천뢰를 원했다. 그래서 하루가 멀다 하고 장인들과 모여 논의에 논의를 거듭했다.

당연히 나만 피곤한 일정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장인들은 각자가 축적한 지식을 아낌없이 발휘했고 적극적으로 프로젝트에 기여했다.

“시연이 가능한 상황이라면 조정에 알려 일정을 잡겠네.”

“그렇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좋아. 공문을 올리겠네. 고생했네, 첨정. 하지만 우리들끼리 먼저 시연을 해볼 수 있으면 좋겠군. 그래야 성능에 맞춰서 정식 시연을 준비할 수 있지 않겠나.”

“물론입니다.”

이미 성능 시험은 몇 번이고 해봤다.

위력은 짧게 말해 ‘끝장난다.’ 수준이었다. 30장(丈), 그러니까 120m 반경이 폭발과 마름쇠에 휩쓸렸으니까.

몇 가지 재질의 더미를 이용한 결과 15장 반경 내에서는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그 이상이라도 전투력을 상실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대체될 구형 무기인 질려포나 대신기전 발화통과 비교해도 서너 배가 넘는 화력이다. 양산할 생각이 있건 없건 시연에 참석한 구경꾼들에겐 신선한 충격이 되어주겠지.

* * *

정식 시연은 무려 달포 뒤에야 열렸다

군기시 내부 시연에 보름, 정식 시연에 또 보름.

이번 자리에는 참석을 약속했던 전 군기시정 우승지 심의겸뿐만 아니라, 여러 당상대신들이 참석했다.

가장 압권은 왕도 직접 친림했다는 점이리라.

나와 나이 차이도 별반 나지도 않는 선조는 무척이나 딱딱한 얼굴로 주변을 훑었다. 그러더니 인사를 올리는 신하들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무기 시연인 만큼 번잡한 절차는 따로 필요하지 않았다. 이런 자리에는 으레 있는 짧은 예식과 함께 곧바로 시연이 준비됐다.

이제 명령만 떨어지면 되는 순간.

우승지 심의겸이 다가왔다.

“이보게, 첨정.”

“우승지 영감?”

“전하께서 보자 하시네.”

“아…….”

선조를 코앞에서 마주하라니.

심히 부담됐지만 승낙 외의 선택지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따라오게.”

심의겸의 안내를 받아 당상대신들 자리를 파고드니, 붉은색 비단 장막 속에 자리한 선조가 눈에 들어왔다.

선조는 이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특채되어 관직에 오른 직후였다. 하지만 그때는 먼발치에서 슬쩍 본 게 전부였다.

그런데 지금은 고작 몇 미터 거리에서 선조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는 나를 이미 발견했지만, 심의겸이 형식상 입을 열었다.

“전하. 군기시 첨정 이순신 대령했사옵니다.”

“물러가게.”

“예.”

심의겸이 뒷걸음질로 종종 물어나자 선조가 입을 열었다.

“두 해 전에 잠깐 봤던 것 이후로 간만에 보는구려, 이 첨정.”

“…….”

“이번 자리를 준비한 사람이 사실상 이 첨정이라지.”

“예. 하오나 신의 역할은 크지 않사옵니다. 전하를 위시한 많은 분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이번 시연을 준비할 수 없었을 것이옵니다.”

“점잔 빼지 않아도 되네. 자네의 심성이 어떤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이 가진 자질이지.”

선조가 딱딱하게 말했다.

그가 유능한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그렇게 기용된 유능한 사람들의 대접이 어땠던가?

지금의 내 태도가 선조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나는 더더욱 이런 태도를 지킬 생각이었다.

“소신의 자질이 어떠한지는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하나……. 언제나 맡은 바 최선을 다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옵니다.”

선조는 나의 반응이 영 재미없었다는 듯 살짝 눈살을 찌푸리더니, 툭 던지듯 말했다.

“내가 일전에 그대를 사복시 첨정으로 불렀는데, 그때는 어째서 오지 않았나.”

“회령에 판관으로 부임한 지 고작 한 해밖에 안 되어 벌여놓고 수습하지 못한 일이 많았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새 판관이 들어선다면 흐지부지되리란 우려가 들어, 불가피하게 임기까지 있을 수밖에 없었사옵니다.”

“흐음……. 이번에 만회하게.”

“예.”

선조는 이만하면 됐다는 듯 물러나라 턱짓했다. 나는 허리를 꾸벅 숙인 뒤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현장으로 돌아오니 이미 시연 준비는 끝난 뒤였다.

그동안 책임자가 없어져서인지 하관과 병사들은 맹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뒤늦게 나를 발견하고는 자세를 바로 했다.

“첨정 나리.”

“시작하세.”

“예.”

나의 명령에 하관이 당상대신들에게로 나아갔다.

그는 비격진천뢰에 대한 약간의 정보와 시연의 시작을 알렸다. 모두들 눈에 긴장한 기색이 가득했다. 오히려 구경꾼들이 현장의 사람보다 더했다.

그 인파 중에는 나에게 비격진천뢰를 인가한 병조판서 박영준도 있었다. 그는 자신의 판단에 의심은 없는지 담담한 얼굴로 시연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관의 명령에 따라 병사들이 비격진천뢰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완구의 아귀에 맞춘 뒤,

“발포하라!”

-펑!

폭음과 함께 시커먼 쇠공이 허공을 날았다.

코앞에 툭 떨어질 것만 같았던 비격진천뢰는 저 멀리 날아가 듬성듬성 심어진 허수아비 사이로 떨어졌다.

가상의 적병이었다. 다들 두정갑을 입고 있어 어중간한 폭발로는 내부의 지푸라기 하나 꺾을 수 없을 터였다.

그러나…….

-콰과과광!

일사불란한 폭음과 함께 새카만 연기와 흙먼지가 비산했다. 폭발과 파편에 대비해 까마득한 거리에 있는 시연장에서는 폭심지의 상황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이내 구경꾼들을 위해 병사들이 허수아비 인형들을 수거해 왔다.

가상의 적병은 모두 처참한 몰골이 되어 있었다.

허수아비에 일일이 씌워놓았던 원추형 철투구는 몇 개를 제외하고는 거의 회수되지도 않았으며, 두정갑은 찢기고 터져나가 걸레짝으로 전락했다.

외피가 벗겨져 훤히 드러난 철판들은 모두 찌그러지고 찢어진 채 볼품없이 늘어졌다.

“오…….”

“으음!”

여기저기에서 감탄과 침음이 흘러나왔다. 창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실로 무시무시한 결과물들.

가상의 적병이 아니라 진짜 적병이었다면 그들은 폭발과 함께 곤죽만을 남겼을 터였다. 철판을 엮어 만든 두정갑마저 무사할 수 없는데 하물며 사람의 인체가 멀쩡하겠는가.

그 인파 사이에서 예리하게 현장을 구경하고 있던 선조의 눈빛 역시 달라졌다. 그는 썩 만족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들었다가, 곁에 다가온 대신을 상대했다.

폭발은 한참 전에 있었지만 그 여파는 아직까지도 시연장에 남아있었다. 어수선한 분위기가 만들어졌지만 전혀 나쁘지 않았다.

-짝, 짝, 짝…….

어딘가에서 박수 소리가 났다. 살짝 보니 우승지 심의겸이었다.

그는 이 자리에서의 군기시정이 자신이 아니라 아쉽다는 얼굴을 했으나, 그럼에도 기꺼이 나의 성공이 더 돋보이도록 박수를 친 것이었다.

적어도 이번 시연이 성공했다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도 차차 박수를 치기 시작했으니까.

당상대신들도 몇 마디 긍정적인 반응을 툭툭 던졌다.

“군기시에서 이번에 고생을 많이 하는데.”

“저번 일도 그렇고 다 이 첨정이 진행한 일 아닌가?”

“간만에 사람 났군.”

군기시정 노수신은 이번 일로 덕은 보겠지만, 그가 이번 일을 발판삼아 다른 곳으로 빠지리란 건 모두가 알고 있었다.

노수신 역시 그 스스로 이번 시연에는 낄 사람이 아니라는 듯 얼굴도 드러내지 않았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시선이 모였다.

덕분에 당상대신들에게 얼굴도장 하나는 제대로 찍었다. 비격진천뢰도 좋은 결과가 있겠지.

자리가 파해질 분위기가 되자 심의겸이 다시 찾아왔다.

“이야……, 이 첨정! 나도 자네가 하는 일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성능이 좋을 줄은 몰랐네. 노 군기시정이 부러울 정도야.”

“정 부러우시면 소관이 적을 옮기기 전에 군기시에 다시 부임하시면 됩니다.”

“그럴까? 하하!”

“안쪽에서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다들 좋아서 난리 났지. 특히 병조판서 대감께서 좋아하셨네.”

비격진천뢰를 최종적으로 인가한 사람은 병조판서 박영준이었다. 달리 말해 결정권은 그에게 있었다는 뜻.

만일 이번 시연에서 비격진천뢰의 성능이 볼품없었다면 병조판서도 민망할 뻔했다. 그런데 대성공했으니 자신의 안목을 증명한 셈이었다.

“점수 땄겠군요.”

“그뿐이겠나? 어르신들에게 눈도장도 제대로 찍었는데 앞길이 창창하지. 야만적인 여진족도 잘 다루겠다, 지방관으로서의 재능도 충분하겠다. 싸움도 잘 하고 무기에도 조예가 있으니 팔방미인이나 다름없지.”

“그럼 큰일인데요.”

“왜?”

“미인은 박명한다지 않습니까.”

“추녀로 백년을 사는 것보단 미인으로 단명하는 게 나아.”

심의겸이 한 마디 던지기가 무섭게, 묵직한 목소리 하나가 다가왔다.

“미인으로 오래 사는 게 제일이지.”

나와 심의겸 모두 고개가 돌아갔다. 그곳에 병조판서 박영준이 있었다. 그는 여전히 무뚝뚝한 인상이었으나, 풍기는 분위기는 호의적이었다.

“병조판서 대감.”

“대감.”

인사를 올리자 박영준이 말했다.

“고개들 들게.”

“예.”

“그리고 이 첨정.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여기서 증명해보였군.”

“덕분입니다.”

“……자네 같은 사람이 내 밑에 있어줘야 하는데.”

박영준은 약간 아쉽다는 어조로 말했다.

그래도 정철 역시 못난 사람은 아닌데 말이야. 뭐, 정철 역시 조만간 병조에서 빠질 몸이기는 했다. 세워놓은 공이 많아서.

“다음 조회에서 비격진천뢰의 양산을 주문하겠네. 이만한 수준의 무기라면, 쓸 일은 많지 않더라도 가지고는 있어볼만 하지.”

마치 핵무기처럼 말이다.

실제로 쓸 일은 많지 않더라도, 압도적인 파괴력을 가진 무기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전쟁 억제력을 가진다.

비격진천뢰 역시 마찬가지였다. 핵과 비할 수는 없겠지만 상대방이 이런 무기를 가지고 있다면, 굳이 시비 붙일 생각은 없어질 테니까.

“일이 성사되면 양산은 자네가 전담하게. 다른 사람들에게 양보하지 말고. 혹시나 방해하는 자가 있으면 나에게 직접 얘기하게.”

“……!”

그 말에 나보다 심의겸이 더 놀랐다.

하기야 박영준의 발언은 보통이 아니었다. 뒷배를 봐주겠다는 뜻이었으니까. 게다가 판서의 비호를 받는 자는 흔치 않았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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