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45화
16. 하늘을 울게 만들(4)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나의 비격진천뢰에 대한 소식은 없었으며, 그 시간이 꽤나 되었으므로 반쯤은 잊은 채였다.
개발도 중요했지만 전국의 무구를 관리하는 일은 쉽지만은 않았고 마음이 콩밭에 있어서는 그 일을 제때 처리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던 어느 날.
군기시정 심의겸이 승정원으로 거처를 옮기게 됐다.
승정원이란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관청. 힘이 미약한 궁인들을 제외하면 왕의 바로 곁에서 일하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었다.
반대로, 신하들이 올리는 공문들 역시 승정원을 거쳐 왕에게로 전달된다. 때문에 승정원은 구조상 그 누구보다 조정의 흐름을 잘 읽을 수 있었고, 그래서 몸값이 높아지는 자리이기도 했다.
“경하드립니다, 우승지 영감.”
“하하하…….”
내가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심의겸은 만족한 듯 웃음을 흘렸다.
그는 기꺼이 자신의 기쁨을 군기시 식구들과 공유했다. 기방을 통째로 전세 낸 뒤 말단 아전들까지 불러 모은 것이었다.
하지만 상석에 모인 사람들은 전부 참상들이었다. 군기시에서만 아니라 조정에서도 발언력이 조금씩은 있는 자들.
다른 참하관들이나 아전들과 동석하기에는 자리도 좁았을 뿐만 아니라 격이 맞지 않았다. 지고한 우승지 영감께서 주재하시는 자리에 어떻게 미천한 녀석들이 합좌할 수 있겠는가.
심의겸이 입을 열었다.
“그동안 출신 때문에 핍박도 많이 받고, 이런저런 고생도 많았는데 마침내 이 심의겸이가 우승지가 되어 승정원으로 가게 됐네.”
심의겸은 과거 몰락한 훈구파 거두인 심통원과 같은 청송 심씨였다.
아니, 따지고 보면 집안만 같은 정도가 아니다. 심통원은 심의겸에게 종조부가 되는 사람이다. 할아버지의 형제라는 뜻이다.
미래라면 할아버지의 형제쯤이야 반쯤 남이지만 요즘 시대에서는 아니었다. 사돈의 팔촌까지 한 가족인 조선시대에서 심의겸의 출신과 혈연관계는 묵직한 족쇄였으리라. 그가 자신의 능력을 증명할 공훈에 목말라했던 것도 이유가 다 있었다.
“다 나와 함께 고생해 준 사람들 덕이네. 애써준 사람들도 많고……. 큰 도움을 준 사람도 있지.”
심의겸은 잠깐 나와 눈을 마주쳤다.
화약 가공법 코닝의 전래 이후 조정에서 군기시가 많이 언급됐다. 여기에 비격진천뢰도 한몫 거들었고 덕분에 군기시정이었던 심의겸은 존재감이 부쩍 늘어났다.
그래서인지 심의겸은 자신이 영전한 계기를 나에게서 찾고 있었다.
“도리 상 감사를 표하지 않을 수 없어 이렇게 불러 모으게 되었네. 빠지는 사람 하나 없어서 정말 고맙게 생각하고, 오늘은 한 번 반 죽어보는 심정으로 놀아보세.”
“이를 말이겠습니까?”
“자!”
심의겸이 도자기 잔을 들었다.
더 이상의 말은 필요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잔을 들었다. 심의겸이 술잔을 살짝 내민 뒤 입으로 가져가자, 모두들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한평생 어르신들 옆에서 비위를 맞춰온 기방의 기녀들도 마침 연주를 시작했다. 뚱땅뚱땅 가야금 소리가 방을 울렸다.
두어 마디의 덕담이 오간 뒤 모두들 삼삼오오 시선을 모으고 잡담을 시작했다. 술맛도 좋았지만 술자리의 맛은 술이 아니라 사람에 있는 법.
나는 평소 나를 잘 챙겨주었던 심의겸과 어울렸다.
“자네, 그동안 준비해오던 일에 진전이 없어서 실망이 많겠군.”
“비격진천뢰 말입니까?”
“그래.”
“아쉽기는 하지만 그러려니 싶기도 합니다. 비격진천뢰가 뛰어난 무기이긴 하지만, 현 상황에서는 그리 주목 받을 수 있는 무기는 아니지요.”
비격진천뢰는 공, 수성 전에 최적화된 무기다. 그 다음의 용도가 있다면 해전 정도일까.
조선이 경계하는 여진족과 왜구들과의 전투 양상은 소규모 접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어울리는 건 창이나 활과 같은 범용성 높은 무기이지, 반쯤 공성 무기인 비격진천뢰가 아니다.
아쉽지만…….
한 번 조명은 되었으니 조정이 필요성을 느끼면 언제든지 기용될 거다. 나는 그 씨앗을 심은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흠, 흠. 의외로 냉정하게 생각하는군. 비격진천뢰를 고안하느라 고생했을 텐데.”
“아닙니다. 고생이랄 것은 없었지요. 오히려 제 시답잖은 일을 도와주시느라 우승지께서 노고가 많으셨지요.”
“하하하……. 사람이 좋긴 한데, 나이에 걸맞지 않게 패기가 없군. 조금은 더 당당해져도 될 걸세.”
“이미 어른 아닙니까. 조정에 입성했으니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일해야지요.”
평범한 환경에서는 나이를 고려해줄 수 있다. 어려서 어린 사람처럼 행동하는데 책망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조정은 다르다. 왕과 문무백관은 천만 백성의 명운을 쥐고 있었고, 자신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다.
나이가 적다고 봐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그렇긴 하지만, 자네는 아직 안사람도 없지 않나? 원래 어른이라 함은 지킬 가정이 있는 사람을 뜻하는 거야.”
“깔끔하게 인정하겠습니다.”
원래 지킬 게 있어야 사람이 원숙해지기 마련이니까.
그런 차원에서 나는 지킬 사람이 없었다. 인연은 많지만 다들 나보다 잘난 사람들인지라, 오히려 눈치가 보일 정도니까.
“어때, 내가 좋은 사람 소개시켜줄까?”
“하하하. 마음만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직 역사를 이루기에는 어린 나이 아닙니까.”
조선시대 기준으로는 어른이 맞았다. 사실 어른 된지도 몇 년은 지났지. 헛상투를 튼 지도 까마득했다.
하지만 나는 조선시대 출신이 아니거든. 애들 둘 모여서 몸을 비비고 싶지는 않았다. 딱히 가정을 만들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고려조만 해도 자네 나이라면 애가 둘은 있었어. 혼사를 하루 이틀 미루다가 총각귀신 된 사람 많으니까, 거기에 끼고 싶지 않으면 혼처 알아보게.”
“예, 우승지께서 이렇게까지 저를 생각해주시는데 받들어야지요.”
“그리고…….”
심의겸은 잠깐 뜸들이더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까 얘기하건 비격진천뢰와 관련해서 말인데, 첨정에게 좋은 소식이 하나 있네.”
“설마……?”
“조정에서 허락과 함께 예산이 내려왔네. 시제품을 몇 개 만들어서 성능 시험을 해보라는군. 물론 총괄은 자네야.”
한동안 소식이 없어서 영영 잊힌 줄 알았더니.
결국 통과가 됐구나. 별로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던 병조판서 박영준이 정작 뒤에서는 마음을 써준 모양이었다.
일전에 이이랑 만났을 때는 병조판서가 또 자기 상관이었을 때 굉장히 꼰대라고 뒷담을 해대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반전이었다.
드러난 걸 보니 박영준은 나름 괜찮은 사람이었고 이이는 폐급 사이코였다.
일전에 박영준이 이이가 있는 홍문관에 기대승이 들어간다는 소식을 알려주며 재밌겠다고 말을 흘린 적이 있었는데, 그 결과?
달포 만에 기대승이 사직소를 올렸다.
애먼 영의정 이준경을 찔러 낙마시킨 탓에 주변의 시선이 안 좋아진 탓도 있었겠지만, 그런 와중에 밑에 이이 같은 사람이 있다고 해보라.
누구도 못 버티는 게 당연하다.
“이제야 일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됐군요. 그동안 말이 없어서 잊힌 줄 알았는데, 좋은 소식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한 것도 없는데 감사할 것까지야.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체직을 미뤄달라고 했을 걸세. 비격진천뢰의 끝을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으니까.”
“시연할 때 꼭 불러드리겠습니다.”
“그래, 잊지 말게.”
심의겸은 괜히 배가 아프다는 듯 술잔을 비웠다.
나는 직접 술병을 기울여 그의 잔을 채워주었고, 심의겸 역시 나의 잔을 채워주었다. 자리는 차차 무르익었고 해가 떨어질 즈음이 되어서야 훈훈하게 파했다.
* * *
차기 군기시정은 노수신(盧守愼)이었다.
나이가 환갑에 다다른 까마득한 사람이었는데, 선조의 즉위로 득을 많이 본 사람이었다.
과거 노수신은 명종 시절 이조좌랑을 지내고 있었다. 당시는 외척이 권세를 장악하고 있었던 때였고, 옳은 소리는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때 노수신은 몇 없는 의기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정의로운 사람은 항상 쓰디쓴 시험을 받기 마련이었다.
노수신은 동료들과 함께 파직, 유배되었으며 나아가 양재역 벽서 사건에도 연루되어 무려 20년 세월을 귀양으로 지냈다.
그러다 선조가 즉위하고 을사사화의 희생자들을 복권시키면서 노수신 역시 사면되어 조정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그런 노수신이 마련한 신참례는 간소했다.
한강변에 설치된 정자에서 좋은 풍경을 뒤로한 채 하나씩 검소한 주안상을 받은 것이었다.
“이해들 해주게.”
노수신이 노회한 목소리로 양해를 구했다.
“군기시정의 의기는 모두가 잘 알고 있는 바인데, 이런 영광된 자리에서 책잡으려 드는 이는 있을 수 없지요.”
물론 내 말과는 달리 몇몇 철부지 같은 녀석들은 얼굴에 불만을 드러냈다. 아무리 장관이고 반백의 늙은이래도 신래는 신래인데 이렇게 어물쩍 넘어가도 되냐는 투였다.
하지만 군기시 부정이 공석이 되면서 최근 나는 넘버 투가 됐다. 그리고 넘버 원인 노수신은 신입이었니 이 순간만큼은 내가 대빵이었다.
그러니 어쩌겠나?
상관은 하늘같은 존재다. 내 말을 정면으로 거스를 놈은 없었다. 물론 조직의 분위기를 생각하면 따로 아랫놈들을 불러 기방에서 한 잔씩 먹여줘야겠지만, 그 정도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첨정께서 그리 말씀을 해주시니 신래인 이 사람이 고맙네.”
“음, 군기시정을 신래 취급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원하신다면 오늘 하루 정도는 제가 선배님 노릇을 해드리지요.”
“그래주겠나? 이 사람도 눈치는 보여서 말이지.”
노수신이 흐릿하게 웃었다.
그의 귀환은 그야말로 금의환향이었다. 선조는 그가 배소에서 보낸 시간을 제대로 쳐주겠다는 듯 빠르게 품계와 관직을 올려주었다.
홍문관 교리에서 동부승지로, 동부승지에서 직제학으로. 그리고 부제학에다 대사간, 대사헌까지.
고작 삼사년 사이에 삼사의 장관직을 통달하였으나 노수신은 매번 사직소를 올렸고, 선조가 다시 불러들이면서 나날이 직품이 높아졌다.
몇몇 사람들은 노수신의 이러한 행동을 오만방자하다고 평했다. 선조가 자신을 기어코 기용하겠다는 뜻을 알고서, 일부러 몸값을 올리고자 빈번히 사직하여 왕을 능멸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직접 마주한 노수신은 그런 평가를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고고한 사람이었다. 몸은 노쇠했으나 눈빛은 살아있었으며, 경박한 기색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었다.
첫눈에 반한다고 해야 하나? 나는 노수신이 썩 마음에 들었다. 초면인 할배라도 말이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군기시정.”
“이 사람도 잘 부탁하네. 이렇게 좋은 인연이 생겼으니 오래도록 가고 싶지만……, 음. 아무래도 그러기는 힘들 것 같아 벌써부터 아쉽네.”
“이제 만나서 처음으로 자리를 가졌는데 벌써부터 그런 소리를 하셔도 되는 겁니까?”
“미안하게 생각하네. 나도 바라는 일은 아니야.”
노수신이 씁쓸하게 말했다.
과연 최근 그의 역사는 사직과 승진의 반복이었다. 그리고 선조의 최근 행보를 보아 노수시은 군기시 같은 속아문에서 오래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뻔한 감도 있었다.
최근 비격진천뢰의 시험 생산과 시연이 확정됐다. 예산도 내려왔고 프로젝트는 이미 가동 중이었다.
이 시점에서 귀신같이 심의겸이 빠지고 노수신이 들어왔다는 건, 노수신에게 이 공을 먹인 뒤 더 높은 자리에 배치하려는 안배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럴 이유가 아니고서야 삼사 장관까지 다 해본 사람이 군기시에는 왜 온단 말인가?
“이해합니다. 그동안 고생 많으셨겠군요.”
“뭐……. 하하하.”
노수신은 멋쩍게 웃었다.
선조 덕분에 그동안 수많은 관청을 전전했을 그였다.
자기 역할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승진 명목으로 다른 곳으로 빠졌으니, 결국 동료들도 노수신을 일원보다는 간판만 딴 채 흘러갈 외부인으로 보았겠지.
파도처럼 몰아치는 영전. 좋아할 사람은 좋아하겠지만 관직생활이 진심인 사람이라면 도저히 좋아할 수 없는 환경이었다.
이는 선조가 인재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다는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