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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41화 (41/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41화

15. 사소한 혁명(2)

화약.

도교의 도사들이 불로장생의 약을 만들기 위해 연단술을 하던 중 우연히 발견한 혼합물이었다.

비율도, 정해진 재료도 없었던 초기의 화약의 성능은 실로 볼품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폭발력을 주목 받았고 상용화되었다는 점에서 누군가의 손목 하나쯤은 날려버렸을 것이 분명했다.

그로부터 천 년이 지나 고려 무신 최무선은 화약무기의 적극적인 도입을 추진했다.

비협조적인 도평의사사의 시선 아래 화통도감을 설치한 최무선은 화약이 날려버릴 수 있는 것은 비단 재수 없는 이의 손목만이 아님을 입증했다.

1388년, 가을에 삼백여 척의 왜구 대선단이 전라도 진포로 침입했고 고려 조정은 도원수 심덕부와 부원수 최무선을 위시로 백여 척의 해군을 파견했다.

이전까지는 우세의 병력을 가지고도 왜구에게 빈번히 패한 고려였고 어쩌면 도평의사사 역시 희소식은 기대하지 않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진포에서 최무선은 자신의 주장이 옳았음을 증명해냈다. 폭음과 함께 매캐한 연기 속에서 쏘아진 쇠공은 왜구의 빈약한 몸뚱이는 물론 그들이 타고 있던 배까지 박살냈다.

진포 대첩은 일방적인 승리였으며 그 근간은 명백히 화포무기에 있었다. 고려는 즉시 화포를 적극적으로 도입해 무기체계를 완전히 새로 썼다.

고려를 이은 조선의 입장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태종은 화약감조청을 신설했으며 세종은 사표국을 설치해 염초를 공급했다.

한 해 화약 소모는 팔천 근에 달했다.

그러나 차오른 달은 지는 법.

조선의 영화로운 시기가 지나면서 찬탈자 왕인 세조가 등극했다. 그는 즉위 과정으로 인한 복잡한 정치상황에 당면해 있었으며 외치(外治)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결국 세조는 화약무기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병사들인 총통위를 혁파했다. 한평생 검은 가루만 만져왔던 화포장, 포수, 총통수들에게는 창과 활이 쥐어졌으며 진포대첩 이후 백 년 가까이 보전되고 개량되어온 지식들은 흩어지고 잊혀졌다.

그로부터 다시 백 년이 흐른 지금…….

군기시.

몇 명의 화약장들이 모인 가운데.

첨정인 내가 재료들을 확인하고 있었다. 주위사람들은 반신반의한 표정이었다. 높은 사람이 무언가 한다니 따르기는 한다만, 확신이 없는 기색이었다.

“과연 불순물을 넣는 것이 약제의 연소에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화약장 중 하나가 말했다.

늘어놓은 재료는 단순했다. 화약, 녹말, 처음 내린 소주.

화약을 가공하려는 것이니 화약은 당연히 필요했다. 그런데 녹말이랑 소주는 어디에다 쓴단 말인가? 이번 가공의 목적과 어울리지 않았다.

신입 첨정 이순신은 부임 첫날부터 당차게 화약을 가공하겠다는 뜻을 천명했다. 오래 묵어 성능이 떨어진 화약을 되살리겠다나?

터무니없었을 뿐만 아니라 첫 날 부임한 사람이 이런다니 모두의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군기시정 심의겸만큼은 기꺼이 재료와 협조해줄 화약장들을 붙여주었다.

몇몇 사람들은 군기시정에게 믿는 구석이 있나보다, 싶었으나 반대로 신입 첨정이 스스로 코를 꺾도록 군기시정이 일부로 도와준 게 아니냐는 말이 돌았다.

아직 어느 쪽이 옳았는가는 밝혀지지 않은 상태였다. 다만 협조를 위해 붙은 화약장들은 후자로 기울고 있었다.

“오래 묵은 화약을 재사용하겠다면 여러 번 흔들어준 뒤 일광건조를 시켜주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수습이 됩니다만…….”

다른 화약장도 그 말에 긍정했다.

“그러니 굳이 또 다른 절차가 필요한 건지 의문입니다. 게다가 녹말은 몰라도 소주, 그것도 한 번 내린 소주는 꽤 귀한 물건이 아닙니까?”

비슷한 결과를 낸다면 굳이 돈 더 들여서 색다른 방법을 고안할 필요가 없었다. 적어도 화약장들의 입장은 이러했다.

첨정은 불신어린 시선을 보내는 화약장들을 향해 말했다.

“정확한 결과는 시험해봐야 알겠으나, 어쩌면 기존의 방법과는 완전히 다른 결과를 낼 수도 있습니다.”

“으음…….”

침음 속에서 나는 화약과 녹말 한 숟갈, 그리고 한 번 내린 소주를 한데 부었다.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사람들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가만히 입맛만 다시는 인간도 있는 걸 보면 말이다.

나는 한데 모인 재료들을 섞어 반죽했다. 곧 한 덩이 떡진 화약이 만들어졌고, 나는 이 덩어리를 체에 문질러 작게 조각냈다.

오래지 않아 한 접시의 화약이 만들어졌다. 작업 시간은 길지 않았으나 70도에 달하는 ‘한 번 내린 소주’는 순식간에 말랐다. 화약 조각을 만지니 사각사각 건조한 소리가 났다.

“이게 끝입니까?”

화약장 하나가 물었다.

준비해둔 재료도 얼마 없긴 했지만 고작 화약을 반죽해서 흩뿌려놓았을 뿐이었다. 화약은 여전히 화약이었고 뭉쳤다는 점을 제외한다면 달라진 점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나 나의 대답은 명백했다.

“끝입니다. 이대로도 쓸 수 있겠지만 일광건조한 뒤 잘게 부수면 더 좋겠지요.”

“어, 으음. 이런다고 달라지는 게 있습니까?”

“말로 말씀드리는 것보다야 직접 실험해보는 게 낫지요. 시답잖은 결과가 나온다면 눈요기라도 되었으니 그만이고, 만일 의외의 결과가 나온다면 그야말로 대발견이 아니겠습니까?”

“그야…….”

나는 가공된 화약을 가지고 볕으로 나왔다. 연말이라 햇빛은 약한 편이었다. 화약이 마를 동안 화포장들은 흩어져서 제 볼일이나 하러 갔다.

그로부터 반 시진 뒤.

나는 가공된 화약을 빻아 가루 낸 뒤 군기시정 심의겸에게 가져갔다. 문서업무를 보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고 심의겸이 자신의 감상을 말했다.

“내가 보기에는 달라진 게 하나도 없네만…….”

“한 번 시험해보시지요.”

“그러지.”

심의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굳이 다른 사람이 필요하지는 않다는 듯, 주변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자네들은 하던 일 마저 하게. 금방 끝날 터이니.”

“알겠습니다.”

참관을 명복으로 뺑끼나 한 번 쳐보려던 관리들은 실망한 얼굴을 한 채 본업으로 돌아갔다. 그동안 심의겸은 나를 대동한 채 밖으로 나왔다.

손에는 가공된 화약을 든 채로 말이다.

“사실, 이전에 자네가 워낙 자신 있게 말한 탓에 기회는 줘보았네만 그리 신용이 가지는 않는군. 약간의 녹말과 소주로 화약을 개량할 수 있다면 누구나 해내지 않았겠나?”

“언제 그렇게 해본 적은 있었답니까?”

“……없네만.”

그렇다면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터무니없지만 그럼에도 전혀 인상적이지 못한 재료와 과정을 거쳐 가공된 화약이었지만, 어떻게 바뀌었는지 알려면 직접 실험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곧 마당에 자리가 마련되었다. 묵어서 관리가 필요한 화약 한 줌이 뿌려졌다. 비교할 대상이 필요했으니까.

“불을 붙이게.”

심의겸이 명을 내리자 화약장이 달아오른 부지깽이를 화약에 들이밀었다. 새빨간 열기가 전해지자 화약은 불이 붙더니 츠즈즈즈……. 하는 맥없는 소리와 함께 연소했다.

오래 묵어 쓸 수 없게 된 화약의 전형적인 반응이었다. 흔들어 섞은 뒤 건조하면 다시 쓸만해지지만 말이다.

“그럼 자네 화약은…….”

심의겸은 화약장에게 시선을 보냈다. 이번에는 부지깽이가 나의 화약으로 향했다.

새빨간 열기가 닿는 그 순간.

-팡!

“헉.”

심의겸은 숨을 들이켰고 화포장도 깜짝 놀라 물러섰다. 적은 양의 화약이었기에 다칠 사람도 없었지만 문제는 확연히 달라진 반응이었다.

그야말로 쾌속의 연소. 부지깽이가 닿는 그 순간 폭음과 함께 눈 깜짝할 사이에 화약이 연소됐다. 시뻘건 불똥이 튀기던 단 한순간의 인상만 남긴 채로 말이다.

“도대체…….”

심의겸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화약장에게 물었다.

“자네 생각은 어떻나? 일반적인 가공에 비해 첨정의 가공은 어떠한가?”

“그동안 소인은 여러 화약을 겪어왔으나, 이렇게까지 맹렬하게 타오르는 화약은 본 적이 없었사옵니다!”

“그 정도인가?”

“예. 갓 만든 화약보다 위력이 좋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째서?”

화약장은 답하지 못했다.

그로서도 기상천외한 일이었다. 한평생 화약을 만져 헐어버린 손에서 검은 물이 빠질 날이 없었으나 약간의 녹말과 소주로 위력이 증대되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신입 첨정은 어떻게…….

‘코닝(corning)은 처음이라 긴가민가했는데 성공했구나.’

화약은 언뜻 생각하면 거창하지만, 단지 숯과 황 초석의 혼합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세 가지 원료를 섞는 것만으로도 화약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이처럼 단순하게 만들어지는 화약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원료들은 저마다의 밀도가 달랐고, 오랜 기간 방치해두면 자연스레 층이 나뉘며 분리된다.

문제는 화약이란 이 원료들이 각기 역할을 다할 때 제 성능을 낼 수 있다는 점이었다.

초석은 산소를 공급하고 숯은 연소하며 황은 낮은 온도에서 화학작용이 일어나도록 촉진한다. 서로 떨어진 채로는 화약으로서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오래 묵어 원료가 분리된 화약의 성능이 떨어지는 것이다.

원인이 단순한 만큼, 흔들어서 다시 원료를 섞고 수분을 말려주는 것만으로도 성능을 회복할 수 있었지만 결국은 다시 분리되게 된다.

이를 방지하는 기술이 바로 코닝이었다.

‘물에 녹은 초산은 건조되면서 자연스럽게 다른 원료에 부착된다. 반죽을 만들어 굳힌 건 분리를 방지하기 위함이지.’

때문에 코닝을 거친 화약은 화력과 보존성이 늘어난다. 매우 고운 가루보다는 약간 덩이진 알갱이 상태가 연소도 더 잘 되고, 때문에 탄매(화약 찌꺼기)도 적게 발생했다.

코닝 과정에서 도수 높은 소주를 이용한 것은 빠르게 건조시켜 성능을 서둘러 보여주기 위함일 뿐이다. 보통의 물을 써도 잘 건조해준다면 무방했다.

‘실험이 잘 되어서 다행이다. 가장 쉽게 적용할 수 있지만 얻는 이익은 매우 크다. 이렇게 차차 내 능력을 인정받으면…….’

조선의 무기체계에 개입할 여지도 넓어질 거다.

16세기 말엽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조선은 너무 오랫동안 평화에 젖어 있었다. 관리되지 않으면 녹슬어가는 것은 무구만이 아니었다.

왕이나 관리들의 태도는 야만적인 전근대에 맞지 않게 태만했으며, 이는 일선 장군들과 병사들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전쟁이 난다는 소식에 긴장감은 생겼으나 정작 겉도는 마음만 그러할 뿐, 진심으로 전쟁을 각오하지는 않았던 거다.

그러니 다짜고짜 목숨 걸고 싸우라는데 도망치지 않고 분전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지금의 나는 성토의 목소리를 내기에는 너무나도 어리고 입지도 좁았다. 자칫 유언비어를 살포한다는 이유로 중벌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군기시의 첨정이었다.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이 분명 있었다. 영웅들의 공로를 지워버리는 대가로 개혁을 결심한 나다. 할 수 있는 건 해야지 않겠는가?

“첨정, 믿지 못해서 미안했네. 자네의 자질은 내 생각 이상이로군.”

“별것 아닙니다.”

“이런 건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건가?”

미래에서 알았다고 할 수는 없으니…….

“변방은 필요한 군수물자가 많은 데 비해 보급 상황은 여의치 않습니다. 특히 화약은 소모량이 많은 데 비해, 생산량은 적어 더더욱 물자 관리에 난항이 있었지요. 그래서 개선했습니다.”

“음!”

심의겸은 감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변방의 상황은 절실했다. 그러나 문제를 느끼면서도 개선을 시도하는 경우는 많지 않다. 관원들이 수동적인 탓이지만, 이건 그렇게 길들여진 탓이었다.

누구나 처음 관리가 됐을 때는 열정적이고 적극적이다. 그러나 조정과 사회는 호락호락한 조직이 아니었으며 세상만사란 뜻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관리들은 해가 갈수록 소극적으로 변한다.

반면 이순신은 경력이 오래되지 않았으니……, 화약 가공법의 발견은 열정에 유능함이 갖춰진 덕이겠지.

“이번 일은 직접 전하께 상주 드리겠네. 곧 기존 화약들 역시 자네의 방식대로 가공하게 될 걸세.”

“감사합니다.”

“내가 더 고맙지.”

심의겸은 행정가였지 무기 전문가가 아니었다. 선왕 대에 군기시정으로 제수되었지만 여태껏 어떠한 공도 내지 못한 그였다.

하지만 첨정이 굴러 들어오자마자 공훈을 내주었으니 적어도 경력에 한 줄 자랑거리는 생긴 셈이었다.

그런 심의겸에게, 내가 뒤이어 한 말은 기분 좋은 반전이었다.

“마음에 드셨다면 다행입니다. 소관에게 아직 몇 가지 생각이 있는데, 도와주시겠습니까?”

“이를 말인가! 내 자네가 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도와주겠네. 말만 하게!”

“그렇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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