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40화
15. 사소한 혁명(1)
“첨정께서는 이번이 조정에서 첫 관직이니 신참례도 처음이겠군.”
이이가 빙글빙글 웃었다.
마치 맹수가 먹잇감이라도 발견한 표정이었다. 하필 이이는 신참례에 관해 큰 이슈를 가진 유명인이었으니…….
“자네는 신참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
“내키지는 않지만 그러려니 합니다.”
“허어.”
이이는 탄식을 흘렸다.
“소위 신참례란 고려 때 가문의 후광을 입어 쉽게 관문에 올라선 자들의 기를 죽이는 전통이 이어진 것이라지만…… 이미 왕조와 국가가 바뀌었는데 전조의 폐습이 남아있다는 건 정상이 아니지.”
같은 집단에 소속된 사람들끼리 결속력을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신고식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다만 너무 극단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소위 신고식이라는 명분으로 온갖 기상천외한 학대가 저질러졌다. 소속을 증명하고 구성원의 유대감을 증진시킬 방법은 학대 외에도 많고 많음에도 말이다.
“알지만 어쩌겠습니까. 좋게 말한다고 받아들일 사람이 있었다면 신참례가 지금 같지는 않았겠지요.”
“그래서 가만히 앉아 당해주겠다?”
“꼭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러려니 받아주면 끝이 없네! 도리어 업신여김을 당할 거야. 조정은 변방과는 달라.”
이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부당한 경우를 당한다면 반드시 강하게 의사를 표현해야 해. 섣불리 내 심사를 건드리면 쓴맛을 보여주겠다! 그런 느낌을 주지 않으면 두고두고 만만하게 보일 거야.”
“솔직히 서로 똥 보는 심정으로 피한다면 저도 편하지요. 제가 말단이었다면 좌랑의 말씀을 들었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군기시 첨정이다. 해당 관청에서 세 번째로 높은 존재다. 이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붕 떠있으면 일이 돌아갈 수 없다.
“새로 부임한 첨정이 밉상으로 찍혀서야 되겠습니까?”
“밉상이면 어때서? 전부 나보다 아래인 놈들인데 저들이 어떻게 생각하건 상관없지.”
이이가 이죽거렸다.
음. 나는 내가 무능력자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독보적으로 뛰어난 사람이라 생각하는 것도 아니다.
만약 내가 이이의 말대로 행동한다면 100% 만용이겠지. 이게 가능한 사람은 오직 장원을 아홉 번 함으로써 능력을 증명한 이이뿐이었다.
그리고 나는 이이에게 그에게만 가능한 대처법을 물어본 게 아니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신참례는 부드럽게 넘어가고 싶습니다. 군기시에서 하루 이틀 일할 것도 아니고, 도움도 많이 필요할 테니까요.”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이이는 재차 입을 열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손바닥을 내밀어 나의 의향을 확인시켜 주었다.
“제가 없을 동안 대신 장부도 관리해주시고, 이렇게 조언도 해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하지만 신참례에 대한 입장은 달라지지 않을 겁니다.”
“내 진심을 알고서도 고집 부리겠단 건가?”
“그렇습니다. 원래 고집이란 직접 당해봐야 쉽게 꺾이는 것이니까요. 어쩌면 이번 일 덕분에 나중에 있을 더 중요한 일에서 좌랑의 말씀을 들을지도 모르지요.”
“으음…….”
이이는 더 따지지 않았다.
내 고집을 확인해서인지, 아니면 설득되어서인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적어도 꾸역꾸역 자신의 말을 들으라며 강요하지는 않았으니까. 이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는 사람이었다.
“……알겠네. 자네의 의중이 정 그러하다면 나도 더 왈가왈부할 수는 없겠지.”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결론은 났지만 뒷맛은 찝찝했다. 이런 거 하나하나가 나중에는 크게 번지는 법이므로, 나는 좋게 갈무리하고 싶었다.
“기왕 방문해주신 김에, 처음으로 제 손님이 되어주시겠습니까? 나중에 여러 사람들을 불러 모아 다시 인사드려야겠지만 이번 기회에 좌랑께 은혜를 보답하고 싶습니다.”
“능청맞기는…….”
* * *
며칠 뒤.
이이의 개입으로 졸지에 군기시의 인기 짱(안 좋은 쪽으로)이 될 뻔했으나,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대신 나는 선배 관리들을 대접해야 했다. 기방 전체를 대절하느라 지출이 많았지만, 쌓아둔 재산이 있어 부담은 없었다.
상석에는 군기시 정인 심의겸(沈義謙)이 자리했다.
어쩐지 익숙한 이름이었다. 약간의 고민 끝에 나는 심의겸이 을해당론(乙亥黨論)의 요주인물이라는 걸 기억해낼 수 있었다.
을해당론이 뭐냐? 이전부터 흔들려왔던 사림 내부가 동서 양당으로 쪼개져 서로에 대한 적의를 드러내게 된 사건이다.
언젠가 동인의 유명인이었던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추천되자, 당시 이조참의로 있던 심의겸이 김효원의 품성을 지적하며 임용을 반대한 적이 있었다.
문제는 심의겸이 김효원과는 정 반대인 서인의 유명인이라는 점이었다. 이전부터 동서 양당은 분쟁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는데, 김효원은 이를 당색을 이유로 꼬투리를 잡는다고 생각하게 됐다.
때마침 놓인 이조정랑의 자리는 관리들의 출세 고속도로인 청요직을 선발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어 그 위세가 당상에 버금가는 자리였다.
나아가 자기 당파의 후진을 성장시킬 수 있는 핵심 관직이었던 만큼, 김효원이 이조정랑에 발탁되느냐 마느냐는 매우 민감한 일이었고 이 일에 심의겸이 개입하면서 당쟁이 극단적으로 번진 것이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미래의 일이었다. 유의는 해둬야겠지만 당장 부담 가질 필요는 없다는 뜻.
마침 심의겸도 나를 무척이나 살갑게 맞아주었다.
“이조정랑에게 말 많이 들었네. 신경 많이 써주라고 하던데, 보아하니 내가 굳이 걱정을 해야 할 정도로 부족함이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고…… 정랑처럼 갑갑한 인사도 아니라 다행이군.”
사실 그와 나는 친해질 여지가 무척이나 많았다. 심의겸은 당색과는 달리 이황의 제자였는데 마침 내 스승인 김성일도 이황의 제자였다.
따지자면 심의겸은 나에게 사백(師伯, 스승의 사형)되는 사람이었고, 또 절친한 사이인 이이와도 두터운 친분이 있었다.
하지만 여지가 많아도 마음이 동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법. 그러나 심의겸은 그 스스로부터 나에게 호감이 있어보였다.
“만약 군기시정의 말씀을 정랑이 알게 되면 속상해하지 않겠습니까?”
“음, 나도 정랑이 대단한 사람이고 또 올곧은 성품을 가졌다는 건 알지만…… 너무 마른 대나무 같기도 해서.”
대나무는 사군자 중 하나로, 휘지 않겠다는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기도 했다.
그런 대나무가 마르면 얼마나 더 뻣뻣하겠나? 이이가 꼭 그랬다. 타협하지 않는 태도는 존경스럽지만 덕분에 주위사람이 피곤한 게 문제였다.
“소관이 정랑의 말을 듣지 않아서 다행이로군요.”
“그래. 세상일이라는 것도 밥과 다르지 않아서, 기름칠이라도 한 듯 잘 넘어가야 탈이 없는 법이야. 자네가 이렇게까지 해줬는데도 불만이 있으면 문제 있는 놈이지.”
심의겸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들으라는 듯 주변을 훑으며 말했다. 다들 의식하는 기색은 없었지만 장관인 군기시정의 말씀이다.
“조언은 각골명심하겠습니다.”
덕분에 관직생활 와중에 가장 피곤한 것은 덜어냈다. 바로 대인관계. 평소에는 얼굴 한 번 안 볼 사람들과 알력다툼을 하는 건 무척이나 귀찮은 일이었다.
만일 심의겸이 지금처럼 나에게 힘을 실어준다면 적어도 면전에서 툴툴대는 놈은 없을 거다.
어쩌면 심의겸도 조직 기강을 위해서 일부러 나에게 이러는지도 모르겠다. 단순 호감보다 그 편이 나았다.
공사 분간을 한다는 뜻이니까.
“자, 자. 우리 신래가 거금을 들여서 마련한 자리야! 즐기지 않으면 죄 짓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걸 모르는가?!”
양편에서 기생들이 프로정신을 발휘하는 가운데에도 분위기를 맞춰가는 심의겸이었다. 그가 잔을 내밀자 다른 관리들도 함께 잔을 내밀었다.
있는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한 자리인 만큼 모두의 잔에는 투명한 청주가 출렁였다. 도수가 얼마나 높은지 냄새만으로도 취할 정도였으나 약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주거니 받거니 순배가 돌아가자 선배 관리들은 너나할 것 없이 취해갔다. 다들 시뻘개진 얼굴이 되어서는 절반이 졸았고 절반은 비몽사몽한 상태가 되었다.
그러던 중 한 사람이 입을 열었다. 군기시에서 직장 노릇을 하는 박 가(家)였다.
“신래야.”
“예.”
“네가 처음 부정으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솔직한 심정으로 기분이 마냥 좋지는 않았다.”
“이해합니다. 선배 관리들에 비해 저는 아직 새파랗게 어린 녀석이고, 대과에도 급제하지 못하지 않았습니까?”
“스스로도 알고 있으니 다행이다.”
내가 자신이 할 말을 미리 다 해서인지, 박 가는 더 입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충족되지 않은 기색은 여전했다. 나잇값 못하고 삐친 아저씨라니.
그래도 솔직해서 좋았다.
“저 스스로 생각해도 아직 갈 길이 멀었습니다. 배울 것도 많고, 경험해야 할 것도 많지요. 부디 직장께서는 저를 좋은 운수를 감당하기 위해 애쓰는 동생 정도로 생각해주십시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뭐어……. 자네가 그리 부탁한다면 내가 못 들어줄 것도 없지.”
“감사합니다.”
그 말에 심의겸이 옆에서 속삭였다.
“저 깝깝한 놈을 벌써 구슬리다니. 자네, 능력이 좋군?”
“하하. 단지 첨정 노릇을 잘 하고 싶을 뿐입니다.”
“분명 잘 해낼 걸세.”
“저를 믿으십니까?”
뜬금없는 물음처럼 느껴졌을까.
물론 잘 해낼 거라는 말에 나를 믿느냐, 하는 말이 나올 수는 있다. 단지 상대가 진심이냐고 굳이 물어볼 필요가 있을까?
실로 심의겸에게는 의아한 물음이었다. 적어도 그가 접한 신입 첨정은 의심으로 똘똘 뭉쳐 일일이 진의를 파악하려는 자는 아니었다.
“그런 건 왜 물어보는 건가.”
“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내가 도와줘야 하는 일인가? 군기시에서?”
“예.”
“흠.”
심의겸은 짧게 콧바람을 내쉬었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돌하게 물어보는 걸 보니 적어도 문제될만한 일을 하려는 건 아닐 테고. 그렇다면 내가 판 정도는 깔아줄 수 있지. 무얼 원하는 건가?”
“화약을 좀 써봤으면 합니다.”
“화약?”
“예. 몇 번 시험발사를 할 정도의 양이면 충분하겠습니다.”
“무슨 일을 하려는데 화약이 필요하단 말인가? 뭐, 정 자네가 쓰겠다면 불허할 이유는 없지만 화약이란 게 워낙 귀해서 말이야. 사유 정도는 알려주었으면 하네.”
심의겸의 말대로 화약은 무척이나 귀한 군수물품이었다.
다른 재료는 차치하더라도 초석 수급이 어려운 탓이었다. 군기시 밑에는 독자적인 군대가 있었는데, 편성의 9할이 취토군(取土軍)이었다.
취토군이란 그 이름대로 흙을 모으는 자들이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흙을 모으는 것은 아니고, 딱 처마 밑과 화장실 주변의 흙만 모았다.
초석의 원료가 바로 그런 흙들인 까닭이었다.
취토군들이 집들을 돌며 어렵사리 몇 줌 흙들을 모으고 모아 한 수레 분량이 생기면 화약장들이 정제 작업에 들어갔다.
복잡한 과정을 여러 차례 걸친 뒤에야 화약장들은 한 수레 분량의 흙에서 한 종지 분량의 흰 가루를 추출해낸다. 바로 화약의 주 재료인 초석(硝石)이었다.
이처럼 화약의 재료 수급이 제한적인 만큼 화약은 무척이나 귀했다. 줄 땐 주더라도 용처는 반드시 알아야 했다. 나아가 화약이 무척이나 위험한 물질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더욱 말이다.
“별것 아니라면 또 별것 아니겠지만…….”
어쩌면 이건 혁명일 수도, 사소한 발견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모든 일은 첫 걸음에서부터 시작되고 이 일은 첫 걸음이 되어줄 수 있었다.
내가 몇 마디 설명을 늘어놓자 심의겸의 얼굴이 꽤나 진지하게 변했다.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인 취기는 여전했지만 눈빛은 생생하고 날카로웠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
“이 자리에서 확답을 드리긴 힘들 것 같습니다. 시험을 해봐야 분명해질 테고, 그래서 군기시정께 부탁드린 것입니다.”
“음!”
심의겸은 침음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라면 내가 도와줘야지. 사람들에게 말해놓을 터이니 필요한 만큼 가져가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