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39화
14. 배웅을 받으며(2)
경기도 금천현.
고향에 도착한 나는 즉시 부모님 댁부터 들렀다. 나의 귀환소식을 전해들었는지 부모님께선 놀라지 않고 반갑게 맞아주셨다.
“못 본 사이에 많이 컸구나.”
딱딱하기만 했던 아버지께서 인자하게 말씀하셨다. 확실히 나는 도성을 떠날 때에 비해 건장해졌다. 몸 쓸 일도 많아서인지 근육도 많이 붙었다.
사내에게는 성장과 발전의 증거건만 어머니께서는 다르게 보셨다.
“얼마나 많이 고생했으면…….”
음, 고생을 안 한 건 아니지.
상처도 몇 개 생겼다. 아문 지 오래건만 흉터는 사라지지 않았다. 평생 가겠지. 어머니는 그 흔적 하나하나를 훑어보시곤 한숨을 내쉬었다.
귀한 자식이 오지에서 몸 고생만 하고 돌아왔다니 근심밖에 안 드시는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 회령에서 좋은 경험 많이 했습니다. 다들 잘 해주셨고요.”
“큰일 나지 않고 성히 돌아왔으니 일단은 다행이다. 그래도 다음에는 변방의 위험한 곳에는 자원하지 말거라.”
우려를 표하시는 어머니 곁에서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어허. 순신이 사내대장부로 태어나 재상노릇 한 번 해보겠다고 험지를 자처한 것인데 초를 쳐서야 되겠소?”
“그래도…….”
“순신아. 나와 네 어미는 괜찮으니 너는 최선만 다하거라.”
사실, 군기시 첨정에 제수되면서 고민이 많았다.
군기시란 국가의 무구를 전담하는 관청.
즉 내가 원한다면 나는 조선군의 무기체계를 바꿀 수 있다. 물론 채용은 윗사람들의 선택이지만 기회라도 만드는 게 어디인가?
내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만큼 역사 역시 크게 바뀌겠지. 영웅들의 공로와 분전의 역사는 선진 무기의 보급으로 묻히고 잊힐 거다.
과연 이런 역사를 덧씌우는 것이 합당한가?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영웅들이라면 자신의 공을 위해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희생하지 않겠지.
나는 나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약속드리겠습니다.”
확신 있는 대답에 아버지께서는 안도하신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어머니를 바라보시니,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분의 눈에 나는 여전히 어리고 순박한 아이였지만 종사품 품계와 관직은 나의 장성과 재주를 나라마저 인정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군기시 첨정에 제수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약관도 되지 않아 벌써 종사품이라니……. 믿기지가 않는구나. 언젠가 함께 조부님의 묘소를 찾아 제를 드리자꾸나. 조부님께서도 기뻐하실 게다.”
우리 가문은 조부 대에 들어서면서 종친의 지위를 상실했다.
옅게나마 왕의 피가 흐른다는 점은 영광이었으나 이제 자신의 가치는 스스로 증명해야 했다. 이 점을 잘 알고 계셨던 조부님과 아버지께서는 무던히도 노력하셨다.
하지만 관문을 넘어선다는 지극한 특권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았다.
조부님은 소과는 급제하셨으나 대과에는 거듭 낙방하면서 관원의 길을 포기했다. 왕족 끄트머리에 위치한 증조부는 대부(大夫, 사품 이상의 품계)의 반열에 있었다. 그 자식이라는 자가 고생해서 증명해낸 것이라곤 그릇이 종구품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으니, 조부님은 아예 외면하기로 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조부님의 낙담을 만회시켜드리기 위해 학문에 전념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소과에도 합격하지 못하면서, 도리어 오명만 얻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이순신의 등장은 그야말로 독보적인 사건이었다.
장원에 준하는 정육품 품계로 관직을 시작해, 임지인 회령으로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종오품이 되었고 임기를 다한 뒤에는 종사품이 되어 귀환했다.
이 모든 게 약관도 되지 않아 이뤄진 일이었다. 원숙한 나이가 되면 필경 재상의 반열에 이르리라. 모두가 꿈꾸는 당상의 자리도 이순신에겐 이제 고작 두 단계만 앞둔 채였다.
실로 가문과 집안의 홍복이었다.
모임에서 아무개 아들이 대과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마음에도 없는 남 칭찬을 내뱉어야 했던 아버지는 이제 누구보다도 당당했다.
“길일만 정해주신다면 바로 달려가겠습니다.”
“그래, 그래. 약간 말미를 둔 뒤에 날짜를 정해 알려주마. 너도 군기시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할 터이니.”
“예.”
“이번이 조정에서의 첫 관직생활인데 필요한 지원은 없느냐? 내 알기로 여러 사람들이 신참례 때문에 부담이 많다 하더구나.”
“정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
“부담 갖지 말고 꼭 연락하려무나.”
“알겠습니다.”
나는 부모님과의 인사를 마친 뒤 하룻밤을 묵었다. 그리고 다음날이 되어 도성으로 떠났다.
근무를 시작할 때까지 며칠 여유는 있었지만 만나야 할 사람도 여럿 있었고, 미뤄둔 집안일도 있었다.
저택으로 돌아오니 그동안 보지 못했던 머슴과 식모들이 간만에 모습을 드러낸 상전을 반겼다. 다들 몰라보게 훤칠해졌다며 칭찬 일색이었다.
나는 저택 식구들에게 하나하나 인사한 뒤, 그동안 비어있었던 사랑방을 찾았다. 꼬박 두 해 만의 방문이건만 식구들이 잘 관리해둔 덕에 내부는 깔끔했다.
“한숨 때리고 싶구나.”
연말이 되어 귀환했지만 솔직히 말해 도성의 겨울은 도리어 포근했다. 회령은 농담 조금 보태서 밖에서 소피보다간 오줌이 실시간으로 얼어버릴 정도였으니까.
그동안 강추위와 살을 에는 칼바람으로 단련된 나의 몸에 도성의 겨울이란 선선한 정도였고, 배 까고 한숨 자기 딱 좋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아직 집안일이 끝나지 않았다.
방구석에 장부가 하나 있었다.
집안의 재산을 기록한 장부였는데 그새 많이 낡아있었다. 회령으로 뜨기 전에 본 것이 마지막이었으니까. 누구에게 따로 관리를 부탁하지도 않았다.
딱히 식객을 둔 것도 아니었고 내가 아는 사람들은 모두 나보다 지위가 높았으니까. 백수 상태인 형들이 있었지만 박탈감이 들까봐 일부러 모른 척했다.
어쨌거나 오래된 장부였고 갱신이 필요했다.
“음?!”
장부를 펼친 나는 깜짝 놀랐다.
누가 손을 댄 것인지 띄엄띄엄 결산이 되어 있었다.
더 놀라운 점은 그새 많은 재산이 쌓였다는 점이다. 뭐, 두 해 소출이 있었고 쓰는 사람은 없었으니 당연한 현상이지만 말이다.
베 짜는 아저씨들이 그동안 모아둔 재산도 놀라웠다.
무려 오승포 삼백 필.
쌀로 환전하면 백오십 섬. 도성에서 기와집을 몇 채 사고도 남았다.
물론 집값, 땅값이 싼 세상이긴 하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일감이 없어 굶어가던 사람들이 고작 두 해 만에 해낸 일치고는 놀라웠다.
“다행스럽게도 재산이 많아 선배 관리들 대접은 걱정 없겠네. 베 짜는 아저씨들에게는 달리 재산을 쓸 데가 없다면 좋은 데 써보자고 해야겠다.”
지금보다 훨씬 많은 사람에게 기회를 줄 수 있을 거다.
“의향은 물어보지 않아도 무방할 겁니다.”
마침 지나가던 을룡의 말이었다.
“네가 어찌 알고?”
“베 짜는 사람들의 사정을 생각해보면 당연하지요. 다들 몸 쓰는 일을 하지 못해 유랑, 걸식하던 사람들 아니었습니까?”
“그게 어떻다고.”
“자기 재산을 챙겨 독립한대도 지금처럼 베를 짜야 한다는 건 달라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집 마련해야지, 몸 성치 않은 자기 돌봐줄 사람 구해야지, 다 함께 먹고 살 곡식까지 구해야 하고…… 고생거리만 늘지 않겠습니까.”
내가 마련해준 거처에서 머물면 그런 고생도, 그럴 근심도 없었다.
거처는 번듯한 저택이었으며 힘 쓸 일은 머슴이 대신 해주었다. 여기에 밥은 식모들이 꼬박꼬박 해주니 상전노릇이 따로 없었다.
게다가 바깥으로 다녀봐야 병신이라고 놀려대는 인간들뿐이다. 처지 비슷한 동료들이 주변에 있는 지금의 환경이 베 짜는 이들에겐 극락이었다.
“앞뒤 분간 못하고 고작 베 몇 필로 욕심 부릴 정도로 멍청한 사람은 거기 없습니다. 그럴 싹수가 있는 인간들은 처음부터 베 짜는 고생을 견디지도 못했으니까요.”
과연 장부에는 세금 명목 외의 지출은 없었다. 누군가 독립을 원했다면 자기 지분을 가지고서 나갔을 텐데 말이다.
“맞는 말이네. 그래도 인간적으로 의향은 물어봐야지. 남의 돈 쓰는 일인데.”
이 점은 차치하고 궁금한 게 있었다.
“그런데 장부는 누가 관리한 거지?”
“……다른 사람에게 아니 맡겨두셨습니까?”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은 모두 나보다 웃전인데 임기 동안 장부관리 대신 해달라고는 못 하지.”
“그러다 부정이라도 생기면요?”
“도둑이 그런 거 봐가면서 훔치겠냐? 있는 대로 들고 날랐지.”
알음알음 삥땅치는 케이스라면 장부를 쓴대도 잡아내기 어려울 테고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맡겨둔 사람도 없는데 누가 장부를 대신 관리해줬다니 정말 예상치 못한 반전이다. 이 집에 숨어든 우렁각시라도 있는 건 아닐 테고…….”
골뱅이를 좋아하는 나다. 우렁각시들의 살생부에 이름이 올라갔으면 올라갔지 도움 받을 일은 없었다.
“아시는 분 중에 한 분이 대신 관리해준 게 아닐까요?”
“그럴 가능성이 제일 높긴 한데, 결국은 누가 해줬냐는 거지.”
당연한 추측이기도 했다.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내 장부를 대신 관리해주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런데 내 주변에 그만큼 배려심 과잉인 사람이 있을까? 이건 어쩌면 부담스러울 정도의 집착이기도 했다.
내 장부를 대신 관리해줬다는 것은, 달리 말해 내가 장부를 맡겨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그건 나만 알고 있었단 말이지. 당장 나를 수발 드는 을룡도 생소하다는 듯 물어볼 정도니까.
‘어떤 사이코가…….’
-쿵, 쿵!
밖에서 누가 대문을 두드렸다.
오늘 만날 사람이 있었던가? 없었다. 회령에서 돌아온 지 이제 이틀째다. 첫날은 고향에서 지냈고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지만 내 귀환이 도성에 퍼지기에는 이른 감이 있었다.
그런데도 당당하게 내 저택을 찾아오다니.
‘지금 문 앞에 있는 사람이 내가 고대하던 사이코일 가능성이 십중팔구로군. 호랑이도 부르면 온다더니.’
내가 을룡에게 턱짓하자, 녀석도 충분히 짐작이 갔는지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문으로 나아갔다.
두근두근.
을룡은 대문 밖 손님과 잠깐 말을 나누더니 대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나에게는 익숙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자네 그새 돌아왔나? 나에게 통기라도 하나 넣어두지 않고.”
사이코는 굉장히 아쉽다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다.
“좌랑…….”
좌랑.
이조좌랑, 이이.
그는 내 손에 들린 장부를 보더니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칭찬이라도 기다리는 사람처럼 말이다. 언제 이 표정을 한 번 봤던 것 같은데…….
“좌랑께서 제 장부를 대신 관리해주셨습니까?”
“그러엄.”
“왜, 왜요?!”
정말 당혹스러웠다.
장부를 대신 관리해준 건 고마운 일이다. 문제는 기묘한 집착이었다. 내가 달리 맡겨둔 사람이 없다는 건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자네 저택에 식객이 하나도 없잖나. 아는 사람들은 죄다 높은 사람들뿐이지. 선뜻 맡겨둘 사람도 없는 마당이지만, 그렇다고 크게 신경 쓸 것 같지도 않아서 관리 안 할 줄 알았지.”
“그래서 우렁각시처럼 제 누택을 방문하시면서 대신 관리를 해주셨습니까…….”
“우렁각시라니 기분이 조금 묘하군. 어쨌거나, 맞네. 걱정이 사실로 밝혀지자 선심 좀 쓰는 셈치고 관리 좀 해주었지.”
“감사합니다…….”
조금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이이는 태연했다. 전혀 문제될 것 없다는 태도였다. 그리고 나에게는 익숙한 시절을 떠올리게 만들어주었다.
“내가 자네 아끼는 거 알지?”
“…….”
이미 터무니없었지만, 이이가 뒤이어 꺼낸 말은 나의 어이를 승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