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37화
13. 여진족 군주(3)
율호의 부족을 점거한 방어사 소흡은 뒷정리를 명령했다.
병사들은 널브러진 시신에게서 수급을 취했으며, 싹이 올라온 논밭은 기병들에 의해 진창으로 전락했다.
수백 채의 가옥이 불타오르는 가운데 주인이 없어진 수십 필의 말과 전리품이 담긴 수레 몇 개가 조선군의 인도를 받았다.
그동안 지휘부는 막사에 모여 있었다.
“경하드립니다, 방어사 영감.”
“경하드립니다.”
뭇 사람들이 올릴 인사는 정해져 있었다. 조선군은 완벽한 승리를 일궈냈다. 적잖은 사람이 죽고 다쳤지만 여진족 지원군에게만 국한되는 이야기였다.
소흡은 체면치레를 했다.
“아닐세. 여기 있는 제장들의 공이 컸지. 특히, 회령판관의 노고가 컸네.”
“망극합니다.”
“이른 감이 있지만 식사를 준비해도 좋을 것 같군. 술과 고기를 풀어 병사들을 달래도록 하고, 너무 병사들을 풀어두지는 말게. 우리는 아직 위험한 곳에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뭇 사람들이 답하자 소흡이 나를 향해 말했다.
“여진족들은 어떻게 다루면 좋겠나?”
“율호의 부족민들을 나눠주십시오. 포로들이 율호의 이름 아래 재결합하는 것을 막을 수 있고, 나아가 우리가 그들에게 기꺼이 넘겨줄 수 있는 삯이기도 합니다.”
전통적으로 전쟁 후 발생된 포로들은 노비로 편입된다. 그러나 여진족은 말도 통하지 않을뿐더러 호전적이라 노비로 적합하지 않았다.
물론 몇몇 녀석들은 도성으로 이송해 공훈을 증명하고, 공개적인 처형을 통해 백성들의 지지도를 이끌어낼 수 있을 거다.
하지만 퍼포먼스에 필요한 포로는 몇 명이면 충분했다. 나머지는? 쓸모가 없다.
조선군에게는 계륵이었지만 여진족에게는 절실한 노동력이었다. 그들은 잠재력 있는 토지를 일구기 위해 항상 농기구와 노동력을 갈구했다.
“그 정도면 놈들도 만족할 것 같군. 포로 인도는 자네가 전담하게. 도성으로 데려갈 급 있는 몇몇 놈들은 남겨두도록 하고.”
“알겠습니다.”
“다들 병사들과 함께 쉬도록 하게. 나도 쉴 터이니. 이만 해산하도록.”
소흡이 일어나자 제장들도 뒤따라 일어났다.
최고 지휘관은 휴식을 명령했지만 밑에 사람들은 아직 볼일이 많았다. 나 역시 막 일감이 생긴 참이었다. 이래서 위아래로 치인다고 하나보다.
밖에서는 이미 배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고기는 대충 삶아놓은 것을 뭉텅 썰어놓은 것이었고, 술도 한 대접씩이 전부였다.
군대 느낌 물씬 나는 포상이었다. 몇 없는 화병(火兵, 취사병)이 바로 준비할 수 있는 건 이게 한계였다.
그럼에도 병사들은 기뻐했다. 희희낙락한 병사들을 헤치고 내 담당인 여진족 주둔지에 이르니 전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식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판관나리.”
김자강과 여러 족장들이 일어나 예를 올렸다.
“아직 식사가 나오지 않았나보군요.”
“예. 몇몇 전사들이 동요하고 있습니다.”
뻔했다. 판을 깔아준 사람들은 자신들인데 왜 조선인 병사들만 먼저 대접받느냐 그거겠지. 불합리한 대우와 박탈감만큼 치욕적인 건 없었다.
“빨리 해결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방어사께서 여진족 포로들은 족장들에게 나눠주겠다 하십니다. 본보기는 삼아야 하니 급 높은 몇몇 녀석들만 남겨 주십시오.”
“오!”
김자강과 족장들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사실 이번 전투로 손실만 입을 것도 각오하고 있었다. 족장들이 마주한 방어사 소흡은 전형적인 조선인 관료로서 무척이나 오만하였으며, 지원군을 자처하였음에도 여진족을 깔봤다.
썩 불쾌한 대접이었으나 족장들은 참을 수밖에 없었다. 부족민과 부족의 재산을 건사할 방도는 이 길밖에는 없었으니까.
어떠한 보상도 약속되지 않았으나 조선 조정의 호감이 절실한 상황이었다. 언제 또 지금처럼 조선군이 쳐들어올지 몰랐으니까.
때문에 족장들은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자 그 누구보다 기뻐하였으며, 부족민들과 전사들이 율호를 향해 전의를 불태우도록 선동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조선군을 지키기 위해 먼저 칼받이 노릇한 것을 합리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판관은 소흡을 대신해 정당한 대가를 제공해주고 있었다. 공을 세운 자들과 전상자들에겐 노예들이 배분될 것이며 족장으로서 자신의 선택이 옳았다는 체면을 세울 수 있게 됐다.
전리품에는 그만한 힘이 있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판관의 노고를 알리면 전사들의 분노도 수그러들 겁니다.”
“제가 보급관을 타박할 동안 잘들 이야기 해주십시오. 이번 전투에서 용맹한 전사가 하늘의 품으로 갔지만, 남은 이들이 그들을 잊지 않도록 말입니다.”
“물론입니다.”
나는 묵례하는 김자강과 족장들을 두고 발길을 돌렸다.
보급관은 의도적으로 여진족에 대한 식사를 누락시키고 있었다. 조선인 먹을 것도 부족한데 강 너머의 야만족들 먹일 게 무어가 있냐는 거였다.
하지만 말단 보급관 따위가 무슨 힘이 있겠나? 방어사가 총애하고 종사관과 친밀하다. 원정군 실세를 꽉 잡고 있는 판관님이 한 마디 하시니 보급관은 깨갱하며 여진족에게 술과 고기를 돌렸다.
어수선하나 나쁘지만은 않았던 분위기가 밤까지 이어졌다. 병사와 군관들은 하나둘 잠들었으며 초병들은 투덜거리며 외곽에 번을 섰다.
그 가운데 나 역시 한참이나 밤하늘을 바라보다 잠들었다.
다음날 새벽이 되어, 방어사 소흡은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됐다. 피로에 절어 있었던 군관과 병사들 모두의 낯빛이 대번에 밝아졌다.
절반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함경북도의 사람들이었지만, 전장이란 언제나 두려운 곳이었으며 군에 소속되는 것은 기가 빨리는 일이었다.
누가 재촉할 필요도 없이 빠르게 군장이 정리됐다. 일대에 설치되었던 군막이 차례차례 접혔고 병사들은 담당 군관의 인솔에 삼삼오오 대열을 갖췄다.
“행군하라.”
소흡의 명령이 가볍게 떨어졌다.
선두의 기병들이 조심스럽게 말허리를 두드렸고, 기백의 기수들이 선두가 되어 나아갔다. 그 와중에 소흡은 간단히 하달사항을 간부들에게 내렸다.
혹시라도 이탈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 떨어지는 물건이 없는지 확인하라, 주변을 경계하라 등의 기본적인 숙지사항이었다.
여진족 지원군과 회령부 징발병들은 후미를 맡았으므로 그들의 지휘관인 나 역시 후미로 향했다. 그들 모두가 나의 등장을 반겼다.
조선군은 조선군대로 다친 사람이 없이 무사귀환해서 기뻐했고 여진족은 일대를 압박하던 강자가 없어져 기뻐했다. 물론 전리품 덕이기도 했다. 그리고 농기구 한 무더기도.
“성공적인 원정을 감축드립니다, 판관나리. 이번 원정에서 큰 역할을 해내셨으니 논공행상이 정당하게 이루어진다면 분명 지금보다 더 높은 자리에 오르실 겁니다.”
곁에서 김자강이 말했다.
“흠, 그래도 임기까지는 회령의 판관을 계속 지내고 싶습니다. 어렵사리 족장의 진심을 확인하고 여러 사람과 우애를 쌓았는데 하루아침에 떠나는 일은 싫군요.”
“듣던 중에 반가운 말씀이십니다. 사실 저희들 역시 판관께서 이번 일로 회령을 떠나시는 건 아닐까 우려하고 있었기 때문에…….”
김자강에게 이순신 판관은 가까스로 얻은 우군이었다. 여진족 질서는 야만적이고 위태했다. 힘을 합쳐 이 자리에 모인 족장들도 평소에는 서로를 백안시하는 자들이었다.
단지 부족의 존속이 풍전등화에 놓이고 공동의 적이 생겼기 때문에 한 깃발 아래에서 모였을 뿐. 앞으로 이만한 비상사태가 생기지 않으면 이들이 또 힘을 합칠 일은 없을 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힘과 함께 호의적인 태도를 갖춘 강자만큼 든든한 것은 없었다.
판관에게 충성을 맹세한 자들 사이에서는 동질감과 소속감이 생길 것이며, 분쟁은 최소화될 것이다. 그리고 조선과의 불미스러운 상황이 벌어졌을 때 판관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수하들을 비호해주겠지.
강 너머의 존재들은 지배자로서 군림하나 역할은 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판관의 존재는 더더욱 각별했다. 이순신은 능히 강 너머의 지배자가 될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이런 자가 하루아침에 떠나버리는 것은 김자강을 포함한 족장들 모두가 원치 않는 일이었다.
“……괜한 욕심입니다만, 저희들은 판관께서 계속 회령에서 지내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가능하다면 임기가 끝난 뒤에도 말입니다.”
“하하. 임기가 끝난 다음이라면 낙향할 때밖에 없지요. 이곳 역시 저에게는 또 다른 고향입니다만 첫 번째 고향은 따로 있어서.”
설령 낙향을 하더라도 회령에 올지는 미지수라는 뜻이었다.
회령은 춥고 척박했으며 가난했다. 누구라도 이런 곳은 원하지 않으리라. 김자강 역시 다른 선택지가 있다면 일단 회령을 떠날 터였다.
언젠가 그가 족장의 지위를 물려받기 전, 인질 겸 우대 차원에서 도성에서 반 년 갑사로 근무한 적이 있었다.
도성은 따스했으며 부유했고 문명의 중심지였다. 매일처럼 드나드는 곳이 궁궐이었으며 그곳에는 웅장한 건물이 빼곡하게 들어차 문명대국의 위세를 실감하게 해주었다.
그러니 김자강은 강요할 수 없었다. 그런 곳에서 살다 온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다시 도성으로 돌아가고 싶을 테니까.
“…….”
김자강이 착잡한 표정을 짓자, 나는 부드럽게 답했다.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게 여깁시다. 재회의 때는 헤어진 다음 바라는 게 이치 아니겠습니까?”
“맞습니다.”
그제야 주저하던 김자강과 족장들이 말을 재촉했다. 그로부터 오래지 않아 대열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여러 사람이 손끝으로 가리키는 곳에 언덕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 단 한 명의 사내가 말을 탄 채 우뚝 서 있었다.
거리 때문에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오만함과 적의가 한눈에 느껴졌다. 마치 나를 콕 집어 바라보는 것 같았다.
언제 본 적이라도 있었던가? 적어도 내 기억 속에서는 없었다.
“저기서 나를 노려보는 친구는 누구입니까?”
김자강이 되물었다.
“어디 말입니까?”
나는 사내가 있던 언덕을 바라보았으나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새 기수를 돌려버린 모양이다. 하지만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언젠가 다시 볼 운명이라고.
* * *
군대는 강을 넘었으며 회령부사 장필무는 승전을 가져온 방어사 소흡을 반겼다.
조촐한 연회자리가 마련되었다. 회령 출신의 병사들은 한껏 풀린 얼굴이었다. 잠깐이었지만 고향을 떠나 적지로 향했던 그들 모두 빠짐없이 돌아왔다.
이미 주변에는 가족을 찾는 친지들로 북적거렸다. 그 광경에 부령부와 경성부 출신의 병사들은 가벼운 시기와 기대감을 드러냈다.
다음에는 자신들의 차례일 터이니.
오직 갑사들만이 그저 그런 태도로 술잔을 기울일 뿐이었다. 그들이 최종적으로 해산될 도성은 아직 멀었으며 모두 도성 출신도 아니었으니까.
그래도 분위기는 전반적으로 좋은 편이었다.
화기애애한 가운데 정철이 다가왔다. 특별히 세운 군공은 없으나 승리한 군대에 종사관으로 복무했다는 것 자체가 큰 경력이었다. 그래서인지 정철은 불콰하게 취해 있었다.
뭐, 그라면 없는 사유도 만들어내서 취할 사람이지만…….
“좌랑.”
“판관.”
우리는 가볍게 인사했다. 직품 상으로는 내가 더 높았지만 나는 공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몸 성히 돌아올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덕분에 이렇게 술맛도 다시 보고…….”
잔을 가볍게 들며 말하자, 정철은 부정할 수 없다며 답했다.
“맞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마시는 술도 좋지만, 힘든 직무를 끝마친 뒤에 마시는 술만큼 각별한 것도 또 없지요.”
정철은 증명을 해보이겠다는 듯 술잔을 단숨에 기울였다. 입가로 술이 줄줄 흘러내렸지만 정철은 개의치 않았다. 반대 손에는 아예 술병까지 들고 있었으니까.
빈 잔을 단숨에 채운 정철이 말을 이었다.
“이 사람이 종사관으로 발탁되기 전에 전하께서 어전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무재 있는 관리를 발탁하라고 말입니다.”
“무재 있는 관리요?”
“그렇습니다.”
“흠.”
정철이 술은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술김에 헛소리나 할 위인은 아니었다.
정말로 선조는 무재 있는 관리를 키울 생각이었다. 어째서일까? 지금 시기는 임진왜란과는 까마득하게 멀었다.
볼하진 습격이 계기가 된 걸까? 보복성으로 원정까지 내보냈으니 가능성은 있었다. 하지만 볼하진의 습격자들은 소규모였으며 처참하게 실패했다. 고작 그 정도로 선조가 경각심을 가지려 하기엔 비약이 심했다.
그 사람 성격이라면 볼하진의 습격은 오히려 왕권을 강화시킬 명분으로만 보였을 테니까.
어쩌면 이번 발언은 신참 관리 특채에 이은 조정 물갈이의 연장선상에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파격적인 인사로 요직을 차차 비워가는 중인데 이게 기존 관리들의 순차적인 승진으로 메워진다면 고생의 의미가 없어진다.
선조에게도 명분이 필요했던 셈이지. 무공이란 문관이 세울 기회가 지극히 제한적이고, 군공 역시 절대적인 순차로 줄 세울 수 없는 만큼 선조가 개입할 여지도 많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 시기에 내가 딱 군공을 세워버렸다.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게 선조 라인을 타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