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36화
13. 여진족 군주(2)
우리는 대청에 모여 있었다.
판관인 나와 회령부사인 장필무, 방어사 소흡, 그리고 종사관 정철.
나와 정철은 인사를 나눌 시간도 없었다. 단지 짧게 묵례만 올린 뒤, 장필무와 소흡에 의해 이번 원정에 대한 논의가 시작됐다.
상황을 주도하는 건 나였다.
장필무는 항상 나의 의견을 물어보았고 소흡은 이번 공세에 주력이 될 여진족 지원군에 대해 깊은 관심을 드러냈다. 덕분에 내가 할 말이 많아졌다.
“경하드립니다, 방어사. 부사의 인가와 안배 덕으로 저는 볼하진 사태의 진정한 원흉을 밝혀낼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원흉?”
소흡이 물을 동안 장필무는 의아하단 표정을 지었다. 내가 강을 넘는 것을 인가하긴 했지만, 배후 조사에 대해서는 특별히 해놓은 말이 없었다.
그런데 무슨 안배를 했단 말인가.
그러나 나는 소흡과의 대화부터 이어나갔다.
“진정한 원흉은 두만강 상류에 위치한 올량합 부족입니다.”
“어떻게 안 건가?”
“소관은 볼하진 습격자들이 소지하고 있던 장식을 챙겨, 알아보는 자들을 수소문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오늘 아침 그런 자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랬군!”
“이제 볼하진 습격의 원흉을 알아냈으니, 놈들을 처단하고 수급을 조정에 바치는 일만 남았습니다. 당초 조정이 바라던 일보다 더 많은 성취를 이루게 되었으니 당상대신들에게 염치란 게 있다면 두둑한 포상을 받을 수 있겠지요.”
“음, 음! 맞아! 흉적들을 발본색원해 처단했으니 응당 그 노고를 치하해줘야지. 판관, 그리고 부사 영감. 두 분 덕분에 이 사람이 면이 서게 되었습니다.”
소흡이 감사를 표하자 장필무는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이 사람이 한 일이 뭐가 있습니까. 직접 발로 뛴 사람은 판관 아닙니까.”
“흠, 사실 어젯밤 판관을 보고서도 좋은 견해를 많이 접했는데 그새 판관이 공을 또 세웠을 줄은 몰랐습니다. 볼수록 장래가 기대되는군요.”
“필시 나라의 동량이 될 겁니다. 지금 조정 대신들보단 더 큰 일을 해내겠지요.”
장필무와 소흡은 주거니 받거니 내 칭찬을 해댔다.
항상 기대 이상의 성과를 가져다주고 자신의 공은 선선히 나눠주니 싫을 리가 없었다. 질투라는 원초적 감정이 일어나기에는 받아먹는 이익이 컸다.
보라.
“부사와 방어사께서 험지에서 노고가 많으시니, 그 노고를 조정이 조금이라도 더 깨달을 수 있다면 소관은 만족할 따름입니다.”
“하하하…….”
“하하.”
두 사람은 만족스럽게 웃었고 나는 말을 이었다.
“일대의 번호들은 외부의 존재가 조선군을 이용해 자신을 제거하려 했다는 사실에 매우 분개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해주겠군.”
“그렇습니다. 이전에는 살기 위해 협력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올량합에게 보복하고 싶어 하니까요. 굳이 소모적으로 쓰지 않아도 전투에 적극적으로 임할 겁니다.”
“또 다른 좋은 소식이로군.”
“괜찮다면, 지원군은 제가 지휘하고 싶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들은 사실관계를 밝혀준 저에게 호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라면 어떤 위험한 작전이라도 따라줄 겁니다.”
“흠……. 놈들과는 일면식도 없는 녀석에게 지휘를 맡기느니 자네가 나서주는 편이 좋긴 하지. 하지만 전선에 넣기에는 조금 꺼림칙하군.”
소흡은 이순신을 알게 된 지 고작 이틀째였지만, 이순신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필경 여진족들은 올량합에 대한 적의에 힘입어 적극적으로 싸울 터였다. 안 그래도 야만적인 녀석들이 전의까지 불태우고 있으니 전투의 양상이 어떨지는 불 보듯 뻔했다.
그런 놈들의 지휘관으로 이순신을 쓰는 건 위험했다. 앞길 창창한 녀석이 어쩌면 유시에 맞아 여기에서 명을 마감할지도 몰랐으니까.
“사람 목숨을 괜히 천명(天命)이라고 하겠습니까? 죽을 사람은 아무리 살려 해도 죽기 마련이고, 살 사람은 아무리 험하게 살아도 살기 마련입니다.”
“뭐…….”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네. 자네가 정 원한다면.”
소흡은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장필무를 향해 말했다.
“부사께는 불가피하게 병력 징발을 요청하겠습니다. 지휘는 여진족 지원군과 함께 판관에게 맡겨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병력을 빼놓도록 하지요.”
곧 협조적인 현지인이 합류하는 만큼, 진격로와 공격계획 수립은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
중요한 얘기가 끝나자 장필무는 관노들에게 일러 술상을 마련하게 했다. 각자의 앞에 술상이 놓이자 분위기는 단숨에 술자리 분위기가 되었다.
주거나 받거니 하며 대담을 나누니 시간은 훌쩍 흘러가버렸고, 소흡과 정철은 거나하게 취한 뒤 주둔지로 돌아갔다.
날이 늦었으므로 나 역시 모두에게 인사를 올린 뒤 관청 맞은편의 저택으로 향했다. 못 다한 잠이 있어서인지 단숨에 잠들었다.
* * *
-저벅, 저벅, 저벅…….
수많은 발소리가 대지를 울렸다.
천 명이 조금 넘는 병력이 강 너머에 포진했다. 총사령관을 겸하는 방어사는 번호 족장들의 조언을 받아 작전을 수립했다.
여진족 자체가 조선군과의 교전을 회피하는 성향이 있으므로 큰 줄기는 달라지지 않았다.
조선군은 기동력 높은 기마갑사와 여진족 지원군을 주력으로 율호를 유린할 생각이었다. 여진족은 하나하나가 전사인 만큼 무장하고 조직될 여지를 주어서는 안 됐다.
이제 나는 공격할 시기만을 가늠하고 있었다.
하늘은 우중충했으며 습도는 높았다. 비가 와서 땅이 질척해진다면 기병의 기동이 불리해진다. 전투는 속전속결로 끝내야 했다.
조선군 기병 몇 기가 다가와 알렸다.
“방어사께서 일 각 안에 공격을 시행하시랍니다.”
“알겠다고 전해주세요.”
“예. 그럼.”
기병들은 묵례를 올린 뒤 곧장 기수를 돌렸다. 그리고 신호기를 펄럭이며 본대로 돌아갔다.
이번 공세의 시작은 여진족 지원군이 맡게 됐다. 그 혼란 사이에서 조선 기병이 후진입하면서 혼란을 가중시킬 계획이었다.
“판관나리, 너무 앞서지 마십시오.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곁에서 신립이 조언했다.
“충분히 조심할 겁니다, 신 갑사. 단지 지휘관으로서 병사들만 앞에 내세운 채 싸우려는 겁쟁이가 될 생각이 없을 뿐이에요.”
이해관계가 복잡한 여진족 부족이 여럿 모였으나 이들 모두가 한 가지 점만큼은 뜻을 공유했다.
오직 뛰어난 전사만이 지배할 수 있다는 것. 나는 그들이 바라는 지휘관상에 부합해줄 의무가 있었다.
“판관나리!”
때마침 당보군(塘報軍, 척후병)이 돌아왔다.
그는 묵례를 올리며 보고했다.
“율호의 부족에서는 이렇다 할 특징적인 모습이 없었습니다. 우군이 당도한 것을 전혀 파악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다행이로군요. 쉬고 계십시오.”
“예.”
나는 제장들에게 말했다.
“보고에 따르면 율호는 무방비 상태라고 합니다. 하지만 기만책일 가능성이 있는 만큼, 어떤 상황이라도 벌어질 수 있음을 인지해두고 침착하게 싸우십시오. 우리 뒤에는 조선군이 있습니다.”
그러니 동요할 필요 없다.
그 점을 상기시킨 나는 환도를 뽑아들었다. 조정의 하사품이었다. 매끄럽게 잘 빠진 도신에 입을 맞춘 나는 신립에게 말했다.
“돌격이 시작되면 효시(嚆矢, 신호용 화살)를 쏴 올리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나는 가볍게 말허리를 박찼다. 말발굽이 차근차근 움직였고 이백의 여진족 기병이 나를 뒤따랐다.
언덕에 다다르자 율호의 부족이 펼쳐졌다. 방대한 평지에 나무집과 천막집이 어지러이 설치되어 있었다.
놈들도 우리를 본 것일까? 경계어린 외침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고 율호의 부족은 금세 부산해졌다. 나는 화답하듯 외쳤다.
“돌격!”
-휘이이이이잉!
효시의 울음소리가 마치 매의 울음소리 같았다. 나와 여진족 기수들은 언덕 아래로 돌진했다. 그리고 바람을 가로질렀다.
-두두두두두!
돌격하는 기수들 머리 위로 화살이 쏘아졌다. 저 멀리에서 등을 보이던 율호의 부족민들이 차례차례 고꾸라졌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모두 활을 내리고 칼을 뽑았다. 촤차창, 차창, 하는 금속음이 저릿한 고양감을 안겨주었다.
우리는 율호의 부족에게 진입했다.
-쾅! 콰광! 꽝!
곳곳에서 폭음이 터져 나왔다. 천막집과 어설프게 설치된 기물들이 박살났다. 비명과 고함이 어지러이 섞인 가운데 여진족 기수들은 양떼 사이의 늑대로 변모했다.
그 한복판에서 나의 역할도 다르지 않았다. 화살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가운데, 단창으로 무장한 적병이 우군에게 달려들고 있었다.
나는 녀석에게로 기수를 돌린 뒤 말허리를 박찼다. 적은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에 뒤늦게 몸을 돌렸으나 늦었다. 허공으로 사람 머리가 날았다.
인체를 훑은 환도에는 피도 거의 묻지 않았다. 벼락같은 일격이었다.
우군은 나에게 묵례로 감사를 표한 뒤 자신의 본분을 이어나갔다. 율호의 부족은 유린되고 있었다.
곧.
부족민들의 비명 속에서 병장기 소리가 늘어났다. 성공한 습격이라기에는 적의 반응이 빨랐다. 역시 방비를 해두고 있었다.
적병들은 이미 갖가지 무장을 한 채였다.
“분전하라! 원군이 오고 있다!”
나의 입에서 여진어가 터져 나왔다. 우군들은 조선군의 존재를 인식하고 기세가 등등해졌다. 율호의 부족이 아무리 방비를 잘 했어도 일천의 조선군 정병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전장이 무르익고 교전은 심화됐다. 부족민이 아닌 전사의 단말마가 터져 나올 때, 조선군 기마갑사들은 지척에서 말발굽 소리를 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짓쳐들어올 태세다. 이쯤이면 빠져줘야 했다. 저들 눈에는 다 같은 여진족이었고 팔에 흰 천을 감는다고 피아 구분이 되는 게 아니었다.
“이탈하라! 이탈하라!”
나는 전장을 돌며 외쳤다. 여진족 지원군들은 즉시 기수를 돌렸다. 율호의 전사들은 추적하지 못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원색의 갑주로 무장한 2파가 달려들고 있었다.
나와 전사들은 율호의 부족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재정비했다. 말들은 거품을 흘려댔고 전사들은 시뻘겋게 상기된 눈으로 거칠게 호흡했다.
김자강은 털모자를 벗으며 이마를 닦아냈다.
“우군의 손실을 확인해주십시오.”
“열일곱이 귀환하지 못했습니다.”
1할에 가까운 타격이었다. 생존자가 두엇 있을지도 모르지만 생환은 보장할 수 없었다.
“피해가 막심하군요.”
“감수했던 일입니다. 직접 율호의 목을 베지 못한 게 통한일 뿐입니다. 누구, 율호를 본 적 없나?!”
김자강이 주변을 향해 외쳤다.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김자강이 경멸어린 어조로 말했다.
“내뺀 모양입니다.”
율호의 부족은 병사들을 숨겨두고 있었다. 이는 조선군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뜻이다.
녀석은 적극적으로 매복을 준비할 수 있었지만 대응은 볼품없었다. 개방된 초원에서 펼칠 수 있는 전략 자체가 제한적이지만 부족 내부에는 기물이 많으니 보다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도 있었을 거다.
율호는 그리 하지 않았다.
달리 말해 이곳을 진심으로 지킬 생각이 없었다는 뜻이다. 늦었지만 추격을 해야 하나? 이 이상은 족장들에게도 생소한 지역이었다. 섣부르게 공격했다간 역공을 당할 거다.
“아쉽게 됐습니다.”
“저 역시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미련을 가지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언젠가 율호는 돌아올 테니까요. 자신의 재기를 증명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빼돌린 병력이 많다면 군소부족 몇 개는 충분히 정복할 수 있었다. 조선을 이용하려 든 오만한 성정을 보아, 감자강 말마따나 율호는 자신의 재기를 증명하려 들 테지.
그때가 되어서 다시 놓치지만 않으면 될 뿐이다.
언덕 아래로 조선군 보병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승기에 쐐기를 박을 자들이었다. 산발적으로 변한 병장기 소리를 보아 율호의 부족은 이미 진압된 모양이지만.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우리는 승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