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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35화 (35/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35화

13. 여진족 군주(1)

비단을 조심스럽게 걷어내니, 내용물의 자태가 드러났다.

환도!

검집과 손잡이는 어피(魚皮, 상어 가죽)와 황동장식으로 마감했고 홍조수아(紅條穗兒, 칼잡이에 꿰어 늘어뜨리는 끈)와 장식줄이 치렁치렁했다.

일반적인 환도에 비해 확실히 손이 많이 들어간 물건이었다. 곧 죽어도 하사품이라 이건가?

사인검 등의 격조 높은 의장용 무구에 비할 수는 없지만, 한평생 칼이나 활 한 자루 못 받는 사람이 수두룩하니 이 정도면 우대였다.

“볼하진을 수비해내고 발 빠른 조처로 오신호가 확산되는 것을 막은 것에 대한 포상일세. 공문도 있으니 가져가게.”

방어사 소흡은 함 안에 권자를 넣었다. 뻔한 내용이라 굳이 볼 가치는 없나보다.

“감사합니다.”

“나에게 감사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 주면 고맙지. 날이 늦었으니 급한 볼일만 없다면 쉬다 가게. 회령에는 내일 밤 도착할 걸세. 늦으면 새벽이 될 수도 있겠지만.”

“후의는 감사하오나, 족장들에게 대감의 뜻을 전해드려야 하니 먼저 출발하는 게 옳을 듯합니다.”

“그렇다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먼저 일어나보겠습니다.”

함을 챙기고 일어나자 소흡이 말했다.

“잠깐. 날이 늦었으니 단신으로 회령으로 돌아가는 건 좋지 않네. 사람 몇 붙여줄 테니 함께 가게.”

“감사합니다.”

“기다리게.”

소흡은 자리에서 일어나 또 막사를 비웠다. 사람을 시키는 대신 직접 움직이는 것을 보면, 나에게 호의가 생긴 게 분명했다.

실로 다행이었다.

원래의 이순신은 상관과의 불화로 자주 부당한 대우를 당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내가 그동안 걸어온 길은 진짜 이순신과 많이 다르구나.’

진짜 이순신은 무과를 원했고 우직하게 시험을 쳐서 정구품 권관으로 부임했다.

하지만 나는 문과를 지망했으며 시험을 쳐보기도 전에 특채되어 정육품 수 회령판관으로 부임했다. 공통점이라곤 첫 근무지가 함경도라는 것뿐이다.

내가 이뤄야하는 건 진짜 이순신의 업적과 다르지 않은데 첫 단추부터 다르게 꿰었다. 물론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그만이다. 그렇게 안 될 것 같아 걱정이지.

‘접근 방법을 다르게 해야 하나?’

임진왜란을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만이 아니다.

나는 미래의 지식을 알고 있으니 보다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거다.

오히려, 능력과 뚝심만으로 정직하게 모든 난관을 박살 내고 국난까지 극복하는 건 진짜 이순신에게나 어울리는 일이다.

여기 있는 이순신은 진짜 이순신과는 능력도 뚝심도 달랐으니까.

“들어오게.”

“예.”

방어사 소흡과 함께한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나에게는 익숙한 사람이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소관 신립이라 합니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바로 이거.

이 인간이 왜 여기 있냐?

그런 나의 생각이 신립에게 전해졌는지, 그가 말했다.

“판관께서 임지로 떠나시기 전에 저 역시 따라가겠다고 말씀 드린 적이 있는데, 기억이 안 나십니까?”

“아, 아. 나네요. 그런데 정말로 따라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동안 기회가 없었다가 이번에 원정군을 모집한다기에 자원했습니다. 간만에 판관의 존안이나 한 번 보려고요.”

그리 오랜 시간 떨어져있었던 것도 아닌데 신립은 인상이 달라져 있었다.

이전에는 경박하기만 했던 청년이었는데 지금은 진짜 무사 같다. 무용이 특출난 사람이니 어쩌면 자신이 있을 곳에 왔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둘이 아는 사이인가?”

“알다 뿐이겠습니까, 영감. 여기 계신 판관께서는 약관을 넘기고도 철이 없었던 저를 일깨워주었습니다.”

“호오.”

소흡은 재미있다는 듯 반응했다.

“마침 인연이 닿았다니 다행이로군. 이것도 다 하늘의 뜻일지도 모르지. 판관. 신(申, 신립)은 자네에게 맡겨두겠네. 원정 기간 동안 곁에 두고 쓰게.”

“배려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보지. 신 갑사, 판관을 잘 모시게.”

나와 신립은 소흡에게 예를 올린 뒤 처소를 빠져나왔다.

선선한 공기와 함께 나를 맞아준 것은 또 다른 의외의 소식이었다.

“여기에는 종사관으로 정 좌랑도 있습니다.”

“정 좌랑이라면, 혹시 송강 말입니까?”

“예! 인사라도 한 번 나누고 가심이 어떻습니까?”

“그러고 싶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신 갑사와의 회포를 즐기고 싶군요. 종사관은 다음에 뵙지요.”

“하핫, 소관은 괜찮습니다.”

“제가 안 괜찮아 그럽니다. 그럼, 회령으로 가면서 그동안의 소식이나 나눠볼까요?”

“알겠습니다.”

말단인줄 알았던 신 갑사는 어느새 나름의 위치를 갖췄는지, 부하 기병들을 몇 데려왔다. 다들 굳센 것이 믿음직했다.

나는 그들과 인사를 나눈 뒤 회령으로 출발했다.

늦은 시각에 안 자고 움직여서인지 피곤했지만, 좋은 인연이 있어서인지 시간 가는 줄 몰랐고 금방 회령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자님, 이제 오셨습니까요?

저택에 도착하자 을룡이 나를 반겨주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신립과도 인사를 나누었다. 신립은 과거 나에게 무예를 가르쳐주고자 주기적으로 찾아왔고, 을룡과 충분히 안면이 있었다.

그들 나름대로 회포를 풀 동안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분홍색 하늘에서 새벽별이 빛나고 있었다. 지형이 어지러워 그렇지 해가 지평선에서 모습을 드러낼 시점이었다.

“신 갑사, 그리고 다른 분들. 늦은 시각에 저 때문에 노고가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신립은 고개를 저으며 극구 부정했지만 피곤한 기색을 다 감추지는 못했다. 그는 도성에서 감무를 지내며 야간순찰을 할 때에도 밤새도록 말을 타지는 않았다.

“다들 들어가서 쉬세요. 방은 많으니 골라잡으시면 됩니다. 을룡아, 불 좀 넣어드려라. 아직 북방에 익숙치들 않아서 추우실 거다.”

“예.”

“판관께서는요?”

“부사께서 기침하셨을 겁니다. 방어사 영감과 나눈 말이 있으니 보고를 해야지요. 그 다음에는 강도 넘어야 합니다.”

“안 주무십니까?”

“하……. 입에서 단내가 나긴 합니다만 어쩌겠습니까. 지금 바쁘지 않으면 앞으로는 이 일로 바쁘고 싶어도 못 바쁠 텐데. 많은 목숨이 걸려 있으니 휴식은 미뤄야지요.”

“음.”

신립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괜히 나만 고생하는 것이 미안하다는 듯 말이다.

“저는 괜찮습니다. 신 갑사께서는 개의치 말고 쉬세요. 그래야 다른 분들도 마음 놓고 쉬실 수 있습니다.”

내 말에 신립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여기까지 신립과 함께 나를 호위해온 병사들이 있었다. 그나마 체력이 강하고 야간근무의 경험이 많은 신립과는 달리, 다들 눈이 새빨개져서 비몽사몽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만약 신립의 허락만 떨어진다면 당장 이 흙바닥에도 드러누워 잘 기세였다.

“끙.”

결국 신립은 억지를 포기하고서 나에게 허리를 숙였다.

“염치불구하고 소관은 먼저 자겠습니다, 공자님.”

“하하…….”

공자님이라.

“그럼 나중에 뵙도록 합시다.”

“예.”

신립과 그의 부하들이 나에게 인사를 올렸다. 나는 피곤할 그들을 더 세워두고 싶지 않았으므로 서둘러 저택을 빠져나왔다.

내가 다음으로 찾은 곳은 강 너머였다. 김자강과 일대의 부족장들은 그새 병력을 규합한 채 나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모두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내가 전할 소식에 따라 운명이 결정될 자들이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군. 가급적이면 그대를 배려하고 싶지만 우리들이 남 걱정할 처지는 아니라서. 가급적이면 희소식을 가져왔으면 좋겠군.”

“다행스럽게도 희소식입니다.”

“아.”

김자강이 안도했다. 주위의 다른 족장들과 함께.

“우려스러운 점은, 전투 과정에서 손실을 강요받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방어사 입장에서는 자들의 병사를 전면으로 내세울 이유가 하등 없으니까요.”

“감수해야 할 대우지. 적어도 우리가 부족의 존속을 보장 받는 한.”

방어사가 어부지리를 일으킨 다음 토사구팽할 가능성이 있었다.

여진족들로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상황. 단물만 다 빨린 다음 처분되느니 차라리 조선군을 상대로 산화하는 편이 나았다.

그런 여진족의 입장을 나라고 모르지는 않는다. 내가 방어사 소흡이 아닌 이상 무엇도 약속할 수 없으나, 위안거리 정도는 말할 수 있겠지.

“방어사에게 족장들에 대한 예우와 대응을 일임 받았습니다. 우려하시는 일은 벌어지지 않도록 최대한 애쓰겠습니다.”

“뭐, 자네라면 응당 그리하겠지.”

그동안 회령에 부임해온 조선인들의 태도는 획일적이었다. 여진족을 멸시하고 경계했다. 나아가 경멸하고 혐오를 내비치는 자들도 흔했다.

어려서부터 부친의 대를 이어 강 너머의 존재들을 인식하고, 그들과는 가까워질 수도 없지만 멀어질 수도 없음을 알게 된 김자강으로서는 놀랄 일이었다.

그런데 신임 판관은 김자강이 겪어온 어떤 조선인들과도 달랐다. 선하지만 순진하지만은 않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는 단지 소속이나 출신을 그다지 연연하지 않는지도 몰랐다.

한 단어로 축약하자면 ‘별종’쯤 되리라.

적어도 김자강이나 다른 여진족 족장들의 입장에서는 신뢰할 말한.

“저번에 나에게 보여준 장식을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보여주었으면 좋겠군. 어쩌면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

나는 기꺼이 김자강의 제안을 따랐다.

마침 혹시라도 알아볼 사람을 위해 장식을 차고 있었으니까. 허리춤에서 떼어내 건네니 족장들이 이리저리 돌려봤다.

대부분은 고개를 저으며 곁으로 넘길 뿐이었다. 호박과 색돌을 엮어 만든 장식은 여진족 문명에서 흔한 것이었으며, 지역적 특색은 있을지라도 제작지를 특정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별한 안목을 가진 자가 있는 게 아닌 이상…….

“이거, 올량합(兀良哈) 양식 아닌가?”

족장 하나가 툭 던지듯 말했다.

그러자 다른 족장들이 앞 다투어 긍정했다.

“확실히.”

“올량합 쪽 물건이 맞는 것 같군.”

“거기는 여기랑 거리가 좀 있지 않나?”

“고작 반나절 거리긴 하지만…….”

회령부 일대의 부족은 알타리(斡朶里) 계였다. 두 부족 모두 여진족의 하부 분류였지만, 차이는 명백했다.

알타리는 건주여진의 주류 세력으로 두만강에서 송화강, 흑룡강까지의 방대한 영역에 분포되어 있었다. 고려 때부터 밀접한 관계가 있었고 이성계에게 충성을 약속했던 자들도 알타리였다.

그에 반해 올량합은 몽골계 부족이었다. 칭기즈 칸의 몽골 제국에서 큰 비중을 가졌던 분파이며, 때문에 전 세계적으로 분포했고 조선 근처에는 두만강 상류에 세를 갖추고 있었다.

“어디서 난 건가? 여기 주위에는 올량합이 없는데.”

“볼하진 습격자들에게서 회수했습니다.”

“……!”

여진족 족장들의 얼굴이 대번에 굳었다.

그들 모두 약소하나 일개 집단을 이끄는 지도자였다. 그만한 자리를 유지하려면 최소한의 판단력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었다.

“잠깐, 볼하진의 습격자들이 올량합에서 왔다고?”

김자강이 의문을 표하기 무섭게 다른 족장들도 의문을 표했다.

“그놈들이 볼하진을 공격할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어떤 머저리 같은 놈이 감히 조선을 도발할 생각을 했나 싶었는데…….”

“올량합 버러지들이 조선을 도발했군.”

“우리들을 없애려고!”

족장들이 차례차례 퍼즐을 맞춰갔다.

하지만 아직 결론에는 닿지 못했다. 우리는 볼하진 습격자들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들의 의도 역시 피상적으로 이해했으나, 중요한 건 그 숨은 의도였다.

“그동안 올량합 부족들과 분쟁이라도 있었습니까?”

“아직은. 하지만 우리 모두 근심하고 있던 차였네. 놈들 중에서 율호라는 자가 매우 강성해지고 있었거든.”

“놈이 이번 일을 사주했을까요?”

“가능성을 무시할 순 없네. 다만 놈에게는 자신보다 더 강한 경쟁자가 가까이에 있으니까. 변수를 창출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겠지.”

“조선을 이용해 일대의 여진족을 공격해 일소시킨 뒤, 무주공산이 된 땅과 흩어진 부족민들을 차지하려 했다?”

“아마도.”

물증은 없었으나 이외에 올량합의 행위를 설명할 수는 없다. 김자강과 여진족 족장들 역시 분노에 찬 얼굴로 확신하고 있었다.

나 역시도.

이런 험지에서 생존을 위한 계략은 어쩌면 불가피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다고 내가 당해주는 쪽일 이유는 없다.

율호는 볼하진을 공격했으며, 조선 조정을 도발했다. 그리고 조선군을 이용해 무고한 여진족 부족을 제거하려 했다.

이들은 회령에겐 호전적인 적호들 사이에서 완충 역할을 하는 자들이었다.

“만일 올량합의 율호라는 자가 어부지리를 노려 조선과 번호들 사이에 싸움을 붙이려 했다면, 쓰게 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맞네. 놈들 덕분에 영문도 모른 채 공격을 당할 뻔했잖나! 간악한 놈. 이런 수작을 꾸미다니……. 반드시 복수해야 해.”

김자강이 이를 부득 갈았다.

그러나 율호의 부족은 강대했다. 일대의 부족이 모두 모여도 율호를 상대할 수 없었다. 놈은 강했고 이쪽은 약했다.

어쩌면 놈에 대한 복수가 요원할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김자강과 족장들의 얼굴은 마냥 밝지 못했다.

이러한 족장들의 우려를 읽은 내가 말했다.

“다행스러운 점은 족장들 곁에 조선군이 함께할 거란 점입니다. 해당 사건의 범인이 명확해졌으니, 방어사도 방향성 없이 칼을 휘두르려 하진 않겠지요.”

전말을 밝혀내서 범인을 발본색원해 처단했다……. 장계에 써놓기 좋은 내용인 만큼, 방어사 소흡은 적극적으로 율호를 처단하려 들 터였다.

“그렇군! ……우리는 아직 해준 것도 없는데 빚만 더 지고 말았군. 이런 태도도 이제는 옳지 않겠어. 다시 인사드리고 싶네. 완전히 새로운 관계로.”

김자강과 족장들은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내 앞에 모여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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