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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34화 (34/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34화

12. 유일한 변수(2)

강 너머.

“요즘 많이 보는군, 판관.”

김자강이 심드렁하게 맞아주었다.

그에게 나와의 볼일이란 오래전 끝났다.

숙청된 자들의 빈자리는 빠르게 메워졌으며 질서는 회복됐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의 변수는 필요하지 않았다.

“어째서 찾아온 거지?”

“비보가 있습니다.”

“자네에게? 아니면 나에게인가?”

“모두에게 비보입니다. 조정에서 방어사를 회령으로 파견했습니다. 경성을 떠났다는 소식이 도착했으니 지금쯤이면 부령 근처에 있겠군요.”

김자강의 눈썹이 올라갔다.

“방어사?”

“달포 전 볼하진이 습격당했습니다. 조정에서는 그 일을 명분으로 방어사와 병사들을 파견했지요. 최종적으로 일천 안팎의 군대가 완성될 겁니다.”

경갑사 사백에, 경성부와 부령부 그리고 회령부에서 징집병 이백씩.

좋았던 옛 시절 동원되었던 수만 단위의 원정군에 비해서는 초라했으나 일대 여진족을 쓸어버리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습격자들의 소속이 밝혀진 건가?”

“아니요.”

“……그럼?”

“최악의 경우입니다.”

조정의 입장은 명백했다.

배후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들이 원하는 것은 볼하진 습격의 보복 따위가 아니었다.

감히 국경을 넘어 적대행위를 할 정도로 건방져진 여진족들의 뼈에 다시 공포를 새기겠다는 것이다.

곧 중갑과 화약무기로 무장한 조선군이 회령 일대를 유린할 거다. 여진족은 강했지만 무장 수준과 조직력은 조선군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런.”

김자강의 얼굴이 흙빛이 됐다.

주위의 여진족들과 연합을 맺어야 하나? 아니. 어느 누구도 감히 조선과 맞서 싸우지 못할 거다.

전투는 일방적일 테고 단 한 번의 패배로 수십 부족이 멸망하겠지. 차라리 도망치는 편이 나았다. 많은 것을 잃게 되겠지만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알려주어서 고맙군. 이 배려는 다음에 꼭 값을 터이니 이만 돌아가게. 나는 주민들의 피신을 준비해야겠으니까.”

“그동안 살아온 집과 이제 막 파종을 끝낸 논밭을 버리려 하십니까? 부족민들의 상실감은 어떻게 달래시려고요.”

“나라고 다른 수가 있겠나?”

“예. 있습니다. 고작 도망치는 것이 최선이라면 제가 찾아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나의 자신감에 김자강이 보챘다.

“방책이 있다면 빨리 말해보게.”

“병력을 징발해 방어사와 합류하면 됩니다.”

“무어라?”

방어사는 여진족을 쳐죽이기 위해 찾아왔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에게 합류하란 말인가?

김자강으로서는 납득하기 힘든 해답이었다. 설령 판관의 조언대로 합류를 요청하더라도, 방어사가 납득할지 의문이었다.

“조정도 그러하듯 방어사는 자신이 베려는 이들의 소속이란 아무래도 무방할 것입니다. 단지 여진족이기만 하면 그만이지요.”

“그래서 문제 아닌가!”

“아닙니다. 오히려 다행입니다. 방어사가 원하는 것은 여진족의 목이지, 꼭 족장이나 여기 주민들의 목이 아니지 않습니까?”

김자강은 침을 삼켰다.

“다른 여진족을 희생시키자는 게로군.”

“예.”

일대의 부족들은 오랫동안 회령부의 질서에 굴복해왔다. 그리고 그들 너머에 자리 잡은 호전적인 부족들을 상대로 완충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다.

예로부터 순망치한(脣亡齒寒)이라 했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이다. 무언가를 잘라야 한다면 굳이 자기 입술을 자를 필요는 없다.

“좋아. 판관의 제안을 따르지.”

“감사합니다. 다른 족장들에게도 저의 뜻을 전해주십시오. 유의미한 병력이 생기면, 제가 방어사를 설득하기가 쉬워질 겁니다.”

조직된 여진족을 아군으로 편입시킬 수 있는데 굳이 적으로 돌릴 필요는 없다. 여러모로 쓸모가 있으니까.

“알겠네. 내 최대한 뜻이 맞는 사람들을 모아 규합할 터이니, 부사와 방어사에게 우리의 진의를 잘 전해주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고맙네. 그동안 어떤 조선의 관리도 우리들을 이렇게까지 생각해주지는 않았네. 다른 이들 모두를 대신해 감사를 표하지.”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래.”

김자강과의 면담을 끝낸 나는 회령에서 말을 얻은 뒤 남쪽으로 달렸다.

방어사가 회령에 도착할 때까지 무식하게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밤이 되어 부령에 도착하니 성 바깥에 자리 잡은 군영을 볼 수 있었다. 수십 개의 화등잔이 주변을 밝히고 있었고 병사들이 외곽을 지키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로 나아갔다.

“누구시오?”

보초가 말했다.

“회령부 판관 이순신입니다. 방어사와 논의드릴 일이 있어 방문했습니다.”

“따라오시지요.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보초는 창을 거둔 채 나를 안내했다.

군영 내부는 조용했으며, 간간히 오가는 순찰은 외부인인 나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았다. 짧은 이동이 있었고 보초는 커다란 군막 앞에 섰다.

“여기가 방어사 영감의 거처입니다.”

“안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럼.”

보초는 묵례를 올린 뒤 물러났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방어사를 직접 뵈는 것이다.

내가 그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곤 소흡이라는 듣도 보도 못한 이름과 경상도에서 병마절도사를 지낸 자라는 점이다.

이번에 임기가 다해 물러나는 함경북도 병마절도사를 대체한다는데, 그렇다면 내 상관이 되는 셈이다. 부디 말귀가 통하는 인간이어야 할 텐데.

나는 조심스럽게 장막을 들췄다.

“회령판관 이순신입니다.”

“회령판관?”

안에 있던 장년인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바로 방어사 소흡이겠지.

마른 얼굴에 눈이 찢어진 자였다. 첫 인상이 별로 좋아보이지는 않았다.

“회령부의 판관이 여기엔 무슨 일이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자리하게.”

방어사 소흡이 맞은편의 자리를 권했다.

책상에는 회령부의 지도가 펼쳐져 있었다. 등고선도 없고 지형지물도 표현되지 않아 전술적 효용은 없어보였지만 말이다.

피아의 배치현황을 나타내기 위한 나무말도 있었지만 쓰이지 않고 있었다. 졸지에 인테리어 소품으로 전락한 것이다.

소흡이 말했다.

“다음날이면 회령에 도착할 텐데, 자네가 찾아온 것을 보니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나보군. 급한 일인가?”

“다행스럽게도 불미스럽거나 급한 일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

“예.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찾아온 이유는 변방의 상황에 대해 알려드리기 위함입니다.”

“마침 잘 되었네. 내가 데리고 있는 사람들은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었거든.”

형식적인 지도와 방치된 나무 말들이 그것을 증명해주고 있었다.

“회령 변방의 번호들은 볼하진에서의 일에 깊은 우려를 표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충성을 맹세한 조선이 공격당한 것에 분노를 드러냈습니다.”

“응당 그래야지. 하지만 진심처럼 느껴지지는 않는군. 당장 목에 칼이 들어오게 생겼으니까.”

“맞는 말씀이십니다.”

소흡의 첫 인상은 꼬장꼬장했다.

내 안목이 틀리지만 않았다면 단순히 옳고 그름만을 따져서는 소흡을 설득할 수 없었다. 상대하기 힘든 케이스지만 전형적인 인간상이기도 했다.

“소관이 생각하기에, 여진족들이 진심으로 조선에 충성하느냐 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째서지?”

“오랑캐에게 충이나 효와 같은 가치를 기대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건 그래.”

소흡은 단호하게 긍정했다.

“그렇다면 조선이 여진족에게 기대할 수 있는 건 사리를 판단할 수 있느냐가 아니겠습니까? 일부 부족은 판단력을 갖추어 조선의 질서에 순응합니다. 그들이 원컨, 원치 않건.”

“흠.”

“이번 볼하진 사건은 그런 최소한의 판단력조차 갖추지 못한 적호들에 의해 발생했습니다. 방어사 영감께서는 그런 자들을 징치하기 위해 일군을 이끌고 친히 행차하셨지요.”

“덕분에 나만 귀찮게 됐네. 어차피 북병사로 내정되어는 있었지만 이번 일을 성공시키지 못하면 임기 두 해를 헛되이 낭비할 테니까.”

“신중함은 권장되는 덕목이지만, 다행스러운 점은 방어사께서 대감 소리를 들을 때가 머지않았다는 점입니다.”

“나는 아부는 좋아하지 않아.”

소흡이 딱딱하게 말했다.

그는 경상병사의 임기를 다하고 함경북도에 재배치되었지만 품계는 오르지 않았다. 대신 조정은 자질을 시험하겠다는 듯 원정이라는 까다로운 일을 떠맡겼다.

그러나 밑에 있는 수하라는 놈들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들 북방을 경험한 적이 없으니 기대할 가치도 없었지만, 소흡에게는 무능력이란 이유 불문 허용대상이 아니었다.

그는 진실로 대감의 지위를 원하고 있었다.

“아부가 아닙니다. 다행스럽게도 모든 정황이 방어사께 유리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최근, 사리판단이 가능한 여진족들이 방어사의 행차 소식에 구명도생을 위해 애쓰고 있습니다.”

“자비라도 구걸한단 말인가?”

“그것보다는 적극적입니다. 자신들의 전사를 방어사께 바치길 원합니다. 동족의 덜떨어진 행동에 사과하고 그들을 징치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됨으로써 용서받으려는 것이지요.”

“내가 놈들을 믿어야 하나?”

“놈들의 진심이란, 앞서 말씀드렸듯 아무래도 무방한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대감께 살아있는 방패가 생겼다는 점이지요.”

“살아있는 방패라……. 맞아. 놈들을 이용한다면 굳이 내 병사들을 희생시킬 필요가 없겠군!”

“맞습니다. 설령 승전을 가져오더라도 전장에서의 과한 손실은 문책의 대상이 됩니다. 만일 녀석들을 적극적으로 운영해 아군을 보전한다면 크게 치하 받으실 겁니다. 이래도 대감 소리가 마냥 아부입니까?”

“……아니겠지.”

소흡이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게다가 이건 좋게 포장도 가능한 일입니다. 대감의 엄포에 여진족 족장들이 죄를 뉘우치고 재차 충성을 약속했으며, 방어사께서는 그들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여진족 사이에 자중지란을 일으켜 일대 세력의 약화를 유도함과 동시에 우군도 보전함으로써 조정의 명령을 성공적으로 완수할 수 있었다…… 라는 식으로 장계가 올라간다면 논공이 품계 한두 단계 오르는 걸로는 끝나지 않을 겁니다.”

“맞아, 맞아!”

“노골적으로 소모시키려 든다는 인상만 주지 않고, 상황이 끝난 다음에 약간의 부스러기와 자비를 약속해주는 것만으로도 놈들은 크게 만족할 겁니다.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저들이 어쩌겠습니까?”

“그래!”

소흡은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희희낙락했다.

어쩌면 그는 여진족 일부가 합류를 원하다는 소식만으로는 심드렁했을지도 모른다. 살기를 원하는 미개인들의 발악일 뿐이니까.

그러나 나는 이를 훌륭히 포장해냈으며 소흡은 만족했다. 마침 현지의 병력으로 소흡에게는 절실했던 정보원이자 길잡이가 되어줄 거라는 점도 한몫했겠지.

“판관의 전언이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겠군. 나를 대신해 여진족 놈들을 잘 다독여주게!”

“물론입니다.”

이제 족장들에 대한 처우 결정권은 나에게로 넘어왔다. 적어도 그들이 무의미하게 학살당하는 일은 없어졌다.

나는 원래의 소기를 달성했으니 이제 돌아갈 생각이었으나, 소흡은 그렇지 않은 듯했다.

“덕분에 원정이 쉬워졌어! 대감 소리를 들을 날도 머지않았군! 특별히 여기까지 와서 나에게 희소식을 전해준 자네에게 내가 치하를 안 해줄 수는 없겠지. 원하는 게 뭔가?”

“소관은 회령의 판관으로, 변방의 여진족 놈들의 보잘 것 없는 발악이 대감의 대자비에 쓸모가 있게 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사실, 녀석들이 없어지면 회령 입장에서도 완충제가 사라지는 셈이니 곤란할 뻔했지요.”

“아, 그런 속셈이 있었군. 하지만 그건 자네의 이익과는 무관한 일이잖나? 내 마침 자네에게 전해줄 것도 있었지만 그것과는 달리 개인적으로 고마움을 표할 수 있으면 좋겠군.”

마침 전해줄 것이 있었다고?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곧 알게 되겠지. 지금은 중요한 것은 소흡에게 산 호감으로 무엇을 얻어낼 수 있느냐다.

나는 짧은 고민 끝에 답을 내놓았다.

“이쁘게 봐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만일 그 정도로는 부족하시다면, 조정에 올라갈 보고에 제가 한 역할도 써주십시오.”

“그래, 그래. 내 신경 써줘야지! 아는 놈 하나 없는 함경북도에 병마절도사로 부임하게 돼서 깝깝하던 차였는데 자네를 알게 돼서 참으로 다행이야!”

소흡은 짧게 대소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정에서 자네를 예쁘게 생각하는 이유도 알만 해. 자네에게 갈 물건이 나에게 있는데, 만난 김에 직접 전해주도록 하지. 여기서 기다리게.”

“예, 대감.”

소흡은 장막을 들추고 나갔다.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그는 기다란 함 하나를 가져와 내 앞에 놓았다.

“이게 무엇입니까?”

“조정의 하사품일세. 직접 확인해 보게.”

“예.”

나는 조심스럽게 함을 개봉했다. 안에 담긴 물건은 비단으로 포장되어 있었다. 드러나는 형상은 길쭉한 무언가였다.

비단을 조심스럽게 걷어내니 내용물의 자태가 드러났다.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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