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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33화 (33/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33화

12. 유일한 변수(1)

회령에서 북서쪽으로 약 1백 35리 거리에 떨어진 무을계(無乙界).

고작 백 년 전만 하더라도 작은 촌락에 지나지 않았던 이곳은, 최근 추장으로 등극한 율호에 의해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사오십 남짓했던 가호 수는 열 배가 되었으며 장정의 수는 일천이 넘었다. 주위의 군소 부족들은 율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인질을 보냈다.

충성맹세에 응하지 않으면 철저하게 유린당하고 파괴당해 죽거나 노예로 전락했으니까.

이렇게 일대의 패자로 부상한 율호였으나 그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다. 이보다 더 부상하겠다는 야욕 때문은 아니다.

생존의 문제지.

율호는 생각했다.

‘근래에 들어 강성한 여진족 부족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어…….’

율호에게는 일천 장정과 자신에게 충성을 맹세한 몇 개의 하위 부족이 있었지만, 이건 최고의 경지가 아니었다.

주위에서 가장 위협적인 부족을 꼽자면 북쪽의 효정, 동북쪽의 율보리가 있었다. 각기 이천과 삼천의 장정을 가지고 십여 부족의 충성을 약조 받았다.

‘만일 지금처럼 여진족들이 점점 응집하게 된다면, 나는 그 무리의 주인으로 설 수 없다. 당장 율보리는 몰라도 효정은 넘어서야 돼.’

북쪽의 효정 부족은 머리를 짓누르는 쇳덩이였다.

율호와 효정 모두 덩치가 있다 보니 서로 싸움은 피하고 있었다. 누가 이기더라도 본전 찾기는 힘들 테고, 하위 부족에게만 좋은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성장을 이어나가다 보면 결국 일대의 패권을 두고서 한 판 붙게 될 터였다. 그러나 율호의 부족은 효정에 비해 열세에 있었고 성장세도 둔화됐다.

획기적인 변수가 필요했다.

“음, 음, 으음…….”

율호는 술대접을 쥔 채 원을 그렸다. 고심으로 달아오르는 머리를 술로 식혔지만, 술이 다 그렇듯이 도리어 열기만 나왔다.

“제길.”

머리는 복잡했고 얼굴을 뜨거웠으며 지성은 흐려졌다. 스스로를 천재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별 볼일 없었던 부족을 지금의 반석 위로 올려둔 것은 율호 그였다.

적어도 어디 가서 꿀릴 사람은 아니었지만 이번 벽은 넘기 어려웠다. 비상한 방책이 하늘에도 툭, 떨어졌으면 좋으련만 그럴 일은 당연히 없다.

“어째서 내 머리는 이렇게 협조적이지 않은 게냐. 스스로를 살리고 싶다면 좋은 계책 하나 툭 던져볼 만도 하지 않느냐?!”

율호는 자책과 함께 술대접을 기울였다.

하지만 마음이 편치 않아서인지 더 이상 술은 달지 않았다. 천박한 쓴맛만 불쾌하게 감돌 뿐. 율호는 신경질적으로 술대접을 던졌다.

-파삭!

술대접이 작살나며 파편이 튀었다. 말젖을 발효시켜 만든 술이 바닥을 적셨다. 그 주위에는 이전에 술이 뿌려졌던 얼룩이 즐비했다.

“이대로는 절대 효정을 능가할 수 없어! 그렇다고 놈이 무서워서 조선에게 머리라도 조아려야 한단 말이냐? 내가? 율호가?!”

조선인들은 한결같이 유약했으며 전사의 풍모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겁쟁이들이었다.

운수가 좋아 큰 나라를 건국하고 발전된 무구로 무장했지만, 조선을 구성하는 족속들의 정체는 자신들보다 머리 반 개는 작고 덩치도 비쩍 마른 약골이었다.

만일 놈들과 동일한 무구를 갖게 된다면 조선을 정복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러니 놈들에게 머리를 숙인다는 건 지극히 치욕적인 일이었다.

전사란 모름지기 자신보다 약한 자에게는 머리 숙이지 않는 법이니까.

조선도 그걸 아는 게 분명했다. 최근 들어 율호를 견제하고 있었으니까. 과거, 부족의 규모가 작았을 때는 경성부의 무역소(貿易所)에서 소금과 농기구를 수입할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자신이 보내는 사절마다 문전박대하며 수백 마리의 말을 헛되이 움직이게 만들었다.

다 견제의 일환이다. 더 성장하는 것을 막으려는.

“제기랄, 조선 놈들.”

율호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러다 문득 계책이 떠올랐다. 조선, 조선 하다 보니 든 생각이었다.

놈들은 여진족을 두려워했고 이따금 고양이를 무는 쥐새끼처럼 행동했다. 누가 크게 발호하면 경제적으로 견제하다가, 그마저도 어려우면 군사를 파견했다.

그렇게 쇠락하고, 분열되고, 파괴당해 멸망한 부족이 한둘이 아니었다. 놈들이 여진족에게 가진 두려움은 가공할 정도라 도리어 공격성을 드러내게 만들었다.

놈들의 이 예민함을 어쩌면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율호의 머릿속에서 추상적인 영감이 점차 계획으로 변해갔다. 그리고 곧, 율호는 만족한 얼굴로 대소했다.

* * *

회령부.

“자네 생각도 일리는 있어.”

나는 장필무에게 볼하진의 습격을 보고했다.

장필무는 운두봉 봉화의 신호가 쓸데없이 확산되는 것을 막은 것, 그리고 관할인 볼하진에서 적습을 막아낸 것을 크게 치하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부사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게 일반적으로 있는 일입니까?”

“아니. 몇 번의 산발적인 분쟁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적극적인 습격은 정말 간만이야. 게다가 내 알기로 볼하진은 개설 이후로 습격을 받은 적이 없네. 특이하긴 하지.”

“분명한 의도가 있다는 뜻입니다. 아무리 야만적이고 미개한 자들이라고 생각마저 없겠습니까?”

나의 주장에 장필무가 물었다.

“자네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건가?”

“조정에 알리지 않는 게 나을 듯합니다.”

“어째서? 다 자네 공인데.”

다섯 개 봉연이 피어오른 극단적인 상황을 빠르게 수습해 자칫 조정에 전해질 혼란을 무마했고, 관할 주둔지에서는 적병을 물리쳤다.

능동적으로나 수동적으로나 묵과할 수 없는 공훈이다.

두만강을 넘어가 큰 공을 세웠다고는 하나 이제 정오품 관직에 맞는 정오품 관품을 가진 신임 판관. 그러나 신임 판관은 이 이상의 직품과 관품을 가질 자격과 자질을 가졌다.

보라.

“소관은 영전하려고 공무를 하는 게 아니라 나라에 이익이 되고자 공무를 행한 것입니다. 만일 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지 않은 편이 나라에 이롭다면, 알량한 공훈이야 없어도 그만입니다.”

“그래. 자네 말이 맞아. 하지만 나에게는 자네 같은 사람의 공훈을 명명백백히 밝히는 것이 나라의 이익을 실현할 방도이지. 자네가 나라면 안 그랬겠나?”

“…….”

이순신은 벽지의 판관으로 썩기에는 재주와 자질이 아까웠다.

물론 최전방인 육진 지역도 이순신의 능력이 절실하긴 하지만, 그는 육진보다 조정에서 일하는 편이 더 나라에 이로울 터였다.

가급적이면 높은 관직을 가진 채로 말이다.

“하지만, 부사나리.”

“만일 일이 잘못된다면 지금 판단을 잘못한 내가 책임질 일이지, 자네가 책임질 일은 아니야. 게다가 자네가 말하는 분명한 의도란 지금으로서는 확인할 수 없어. 증좌가 없으니까.”

“…….”

“그렇다면 지금 최선은 자네 공훈을 증명하는 것이지. 내 말이 틀렸나?”

장필무의 말이 옳았다.

내 모든 우려는 어디까지나 심증일 뿐이다. 어쩌면 배후가 정말 있을지도 몰랐지만, 지금은 증거가 없었다.

“게다가 볼하진에서의 전투는 곧 공공연하게 알려질 텐데, 내가 보고를 안 할 수 있겠나? 현장 사람들을 꽤 아끼는 것 같은데, 그럼 그 사람들의 논공행상도 생각해줘야지.”

“……알겠습니다.”

“영 불안하다면 짬 내서 조사해보게. 그 과정에서 필요한 인가가 있다면 최대한 도와줄 테니까.”

“감사합니다.”

“그래. 가서 쉬게.”

나는 장필무에게 꾸벅 허리를 숙인 뒤 물러났다.

해놓은 일이 있어서인지 더 이상의 공무는 없었다. 나는 맞은편의 저택으로 향했다.

“다녀오셨습니까.”

“잘 있었냐.”

“저야 항상 잘 있지요. 고생이야 공자님께서 다 하지 않으십니까?”

을룡이 빙글빙글 웃었다.

일단 몸종 비슷하게 데려온 을룡이었지만 정작 하는 일은 많지 않았다. 잡일과 식사준비는 공노비들이 다 해결해줬으니까.

이따금 다른 사람에게 연통을 넣을 때 나 대신 전해주는 게 을룡이 하는 일의 전부였다.

“물 좀 데워둬라. 오늘 심신이 많이 피곤해서 몸 좀 지져야겠다.”

“알겠습니다. 아주 뜨끈하게 데워서 백숙으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그래라. 물에다 대추랑 파도 좀 썰어놓고.”

* * *

“예?”

“조정에서 보낸 방어사와 휘하 군사들이 경성에 도착했으니 미리 맞을 준비를 하라 하였네.”

장필무의 대답이었다.

“방어사라니요?”

예상치 못한 손님이다.

달포 전 볼하진이 소속 불명의 여진족에게 습격 당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방어는 성공적이었다. 방어사가 군대를 끌고 올만한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적이 없는데 무엇을 방어한단 말인가?

부사 장필무라고 생각이 다르지는 않을 텐데,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조정이 볼하진에서의 전투를 크게 의식한 모양이군. 자세한 정황은 방어사가 가져올 교지를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원래 조선은 적호(賊胡, 적대적 부족)의 발호를 예민하게 경계해왔네.”

“방어를 명분삼아 여진족을 치겠다는 거군요. 누가 볼하진의 배후인 줄 알고요?”

“쥐를 잡을 땐 어느 놈이 곡식을 갉았는지 고려하지 않는 법이네.”

“…….”

나라고 조선의 대여진족 입장을 모르는 건 아니다. 규합된 기마민족의 저력은 치명적이다.

거란족은 요나라를 세웠고 여진족은 금나라를 세웠으며 몽골족은 몽골제국을 일으켰다. 그럴 때마다 중원과 한반도의 국가는 존망을 시험받았다.

이제 명나라와 조선은 기마민족에 대해서만큼은 동일한 입장을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여진족이 볼하진을 공격했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사유가 무엇이 됐건, 기어오른다는 것은 힘과 여유가 생겼다는 뜻이니까. 그렇다면 조선이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때마침 왕인 선조 역시 입지와 권위에 집착하는 자다. 그에게 북방원정의 성공은 인상적인 업적이 될 터였다.

‘하지만…….’

탐탁지 않았다.

일전에 김자강을 찾아간 적이 있다. 볼하진 습격의 배후를 알아내기 위해서.

김자강은 내가 가져온 장식품의 양식이 일대의 여진족과 다르다는 것만 확인해주었다.

나는 그 이상의 정보가 필요했지만 김자강에게도 한계는 있었다.

두만강 이북은 방대했고 수백 수천의 부족이 독자적으로 놀았다. 회령 일대에만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부족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고작 장식품 몇 개로 배후를 찾는다는 건 누구라도 불가능했다.

이제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한 가지만은 확실해졌다.

누가 배후인지는 몰라도, 놈들은 조선과 회령 일대 여진족 사이에 분쟁을 원하고 있었다.

“강 너머에는 우호적인 부족도 많습니다. 그들을 타격하는 건 충성을 배신하는 것이며, 적호에게 힘과 명분을 실어주게 될 겁니다.”

나는 나름 진지했으나 장필무는 태연했다.

“그렇겠지.”

“방어사를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방어사는 조정의 명을 받들어 온 사람이야. 자네 생각을 이해시킬 수는 있겠지만 직무를 행하는 것까지 어쩌지는 못할 걸세.”

“지금이라도 조정에 연통을 넣는 것은…….”

“물론 조정이 명령을 번복한다면 방어사의 발을 돌릴 수는 있겠지. 하지만 군사를 일으키는 과정은 많은 사람을 귀찮게 하네. 겨우 칼을 뽑았는데 무라도 베어야지 않겠나?”

나의 호소에도 장필무는 끄떡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게 경륜일지도 모른다. 사사건건 감정적으로 동요하면 냉정하게 대응할 수 없다. 그러나 수많은 사람의 목숨이 억울하게 희생되기 직전인 지금, 나라도 동요해야 했다.

“방어사와 그의 군사들이 베려는 것은 무가 아닙니다. 사람이지요. 이번 사건에는 무고한, 사람들 말입니다.”

“왕과 조정의 명령은 지엄해야 하네. 손바닥 뒤집듯 막 내렸던 명령을 취소해댄다면 권위를 갖출 수 있겠나?”

“어찌 체면 따위를 살리고자 사람의 목숨을 허비한단 말입니까? 게다가 강 너머에는 우호적인 부족도 많습니다. 그들을 타격하는 건 충성을 배신하는 것이며, 적호에게 힘과 명분을 실어주게 될 겁니다.”

“저 멀리 떨어진 오지에서 무고한 목숨과 국익이 희생되는 것보다는, 내 체면 상하는 일이 더 와닿는 법이지.”

장필무는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만일 자네가 조정의 미련한 행보에 애꿎은 여진족이 희생되는 게 불쾌하다면, 지금 해야 할 일은 성토가 아니네.”

“하지만 방어사와 조정의 입장이 변하지 않는다면…….”

“흠. 방어사는 이제 경성부를 떠났고 조정은 여기에서 멀군. 자네에게는 다행스러운 상황인 것 같은데.”

그 말에 나는 장필무의 진의를 알 수 있었다.

경직된 조직인 조정과 명령 이행만을 위해 파견된 방어사의 입장은 변할 수 없다. 그렇다면 누가 이 흐름에서 변수가 될 수 있나?

바로 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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