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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왜 이순신이죠-32화 (32/290)

내가 왜 이순신이죠? 32화

11. 다섯 개의 연기(2)

“박차를 가해라! 최대한 빠르게 달린다!”

내가 외쳤다.

이전과는 다른 딱딱한 명령조. 의도한 바는 아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여진족이었고 모두가 알 수 있도록 여진어로 말했을 뿐이다.

박차가 가해지자 말이 히힝! 하고 울며 돌진했다. 말발굽이 대지를 때렸고 바람은 내 얼굴을 때렸다.

쉭쉭. 주변의 경관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운두봉 봉수가 빠르게 다가왔다.

“판관나리, 저길 보십시오!”

석탈리가 다급히 외쳤다.

그의 손끝에 운두봉이 있었다. 연기가 새카맣게 피어올랐던 봉수는 이제 평화로웠다. 늘상 보이던 한 개의 연기 기둥마저 보이지 않았다.

‘함락?’

그럴 수는 없다.

운두봉 봉수는 산꼭대기에 있었고 길목에는 소규모이나 군사 주둔지인 볼하진이 있다.

대병(大兵)이 쳐들어왔다면 모르겠으나 그만한 움직임을 볼하진에서 미리 감지해내지 못했겠는가.

나는 볼하진을 한 번 다녀왔다. 거기에는 높은 누각이 있었고 강 너머가 다 보였다.

우회기동의 가능성?

전혀.

회령이 있는 육진 지역은 봉수, 수호처(순찰지), 후망(육상 관측지점), 해망(해상 관측지점)으로 빼곡하게 도배되어 있다.

당장 볼하진 서쪽만 해도 무산 소속의 풍산진이 있고 동쪽에는 산봉우리 봉수인 고연대가 있다. 육진 지역에는 우회란 게 불가능하다.

“판관나리, 사람 한둘을 떼서 회령으로 보낼까요?”

“아니……, 아니!”

첫 번째 부정은 보내지 말라는 부정이었고, 두 번째 부정은 첫 번째 부정을 부정하는 부정이었다.

“보내시오! 하지만 다섯 개의 봉화 자체는 오신호일 가능성이 높아. 부사께서 경거망동하지 않으시도록 신중을 요청하게.”

“오신호요?”

“다섯 개의 봉연(烽煙)이 올랐으나 고작 두 각도 되지 않아 끊겼소. 대군이 침공했다면 가능한 일이지만, 볼하진이라면 진즉 적병의 움직임을 감지했을 거요. 처음부터 다섯 개의 봉연이 오를 수는 없단 뜻이요.”

“음!”

“남봉 봉수와 송봉 봉수에도 사람을 보내시오. 오신호가 확산되면 함경도 전체는 물론 도성까지도 동요하게 될 수 있으니!”

“알겠습니다!”

석탈리는 배후의 사람들에게 명했다.

“다들 판관의 말씀 들었겠지!”

“예!”

“이란, 아툰은 회령으로 가서 부사께 판관의 말씀을 전해라! 닌추커시, 고론! 각각 남봉과 송봉으로 달려 오신호의 확산을 막아라!”

“옛!”

네 명의 기수들이 마치 가지처럼 뻗어나가 호선을 그렸다. 그리고 각자의 목적지로 향해 달려 나갔다.

“판관나리, 이제 수하는 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산비탈에 진입하면 말을 끌고 갈 수 없는데, 잃어버릴 걸 각오하고서 부하와 함께 볼하진에 진입할까요?”

“한 사람만 남깁시다. 만일을 대비해서!”

들어갈 때의 상황도 대비해야겠지만 나갈 때의 상황도 대비해야 했다. 말을 잃으면 네 명이 들어가서 한 명도 나오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럇!”

“이랴!”

말이 거품을 뿜을 정도가 되어서야, 우리는 볼하진 아래에 도착했다.

다들 말에서 펄쩍펄쩍 뛰어내리니 석탈리가 말했다.

“히탄, 네가 말을 맡아라. 키무나, 따라와라! 만일의 사태가 발생하면 판관을 최대한 보호해야 한다!”

석탈리의 명령에 두 여진족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세 사람은 산비탈을 올랐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칼부터 뽑아들었다.

어쩌면 단순 헤프닝일지도 모른다. 쌓아둔 목재에 불이 옮겨 붙었다던가, 하는.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다.

경중의 범위는 넓다.

운이 나쁘면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을 수도 있다. 내분이라던가……. 그 쪽이 적침보다 더 심각한 상황이다.

산비탈을 오르며 고생하는 건 발인데 땀은 손에서 났다. 가죽으로 겉을 매듭지은 손잡이가 축축했다.

시야는 분명한데 사고는 맑지 못하다. 두려움이 불쾌감을 만들어내고, 불쾌함이 두려움을 만들어냈다.

이제 우리는 볼하진에 도착했다.

“판관.”

볼하진의 관문은 닫혀 있었다. 그러나 주변으로 시신 몇 개가 보였다.

시신들의 굳센 얼굴들과 털가죽 옷을 보면 정체는 분명했다. 여진족. 그들의 습격이 있었던 게 분명했다.

“볼하진이 당한 걸까요?”

“이 정도 공격으로 당할 볼하진이 아니에요. 내부를 확인합시다. ……굳이 인기척을 낼 필요는 없겠지만.”

정말, 어쩌면 여진족들이 볼하진을 점거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

돌다리도 짚어가며 건너라 했다.

볼하진 입구에 도착한 나는, 삭아 틈이 벌어진 대문 안쪽을 살폈다. 몇 명의 병사들이 보였다. 조선의 방어구인 엄심갑(掩心甲)을 착용하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쿵, 쿵.

나는 대문을 두드렸다. 의외로 대답은 금방 돌아오지 않았다. 약간의 뜸을 들인 뒤에야 경계어린 목소리가 돌아왔다.

“누, 누구냐?!”

익숙한 목소리였다.

나에게 볼하진 내부를 안내해주었던 갑사, 박 사직(司直)이었다.

“접니다, 신임 판관.”

박 사직은 나의 목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곧 볼하진의 입구가 열렸고 내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초췌한 인상의 병사 몇 명과 박 사직. 나머지는 보이지 않았다. 숙소에서 전투 직후의 피로를 다스리고 있겠지.

“판관나리. ……그리고 이쪽은.”

박 사직의 시선이 석탈리에게 향했다.

“미안합니다, 사직. 먼저 의사를 타진하고 싶었지만 봉화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봤습니다. 지체할 수 없어 감부와 함께 오게 됐습니다.”

“그렇군요. 이런 상황에서까지 굳이 알력 다툼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모두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나는 예를 갖추려는 병사들을 만류했다. 지친 기색이 가득한데 상관에 대한 예우 따위로 귀찮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교전이 있었던 겁니까?”

“예. 반 시진 전, 스물 안팎의 여진족 무리가 급작스럽게 볼하진을 습격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성벽이 있어 수비에는 성공했습니다만, 그 과정에서 병사 한 명이 죽었고 두 명이 다쳤습니다.”

“이런.”

누군가가 죽었다는 소식에 기분이 침울해졌다. 나는 내심 전사한 이를 애도하고는 물었다.

“공격한 자들은 누구입니까?”

“여진족이라는 것밖에는…….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일대에는 독자적인 여진족 세력이 너무나도 많지요. 적병을 심문하지 않고서야 소속을 확정하긴 힘들겠지요.”

“하지만, 무언가가 수상합니다. 회령 안팎의 여진족들은 대체로 규모가 작습니다. 가호(家戶) 수가 열 안팎의 소규모 무리가 흔한데 이번에 습격한 자들은 스물이 넘었습니다.”

그 점은 나도 수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게다가 공략할 거라면 철저하게 공략을 해야지, 오십 명 인원이 상주하는 볼하진-운두봉 봉수를 고작 스물 남짓으로 공격한다고?

게다가 볼하진은 유성, 그러니까 성이 있는 주둔지다.

비록 상주 인원을 겨우 수용할 정도로 작고, 자연석으로 성벽을 세웠다지만 높이는 반 장(丈)이 넘었다. 사람 키만했으니까.

그런데 이런 곳을 열세의 병력으로 습격한다고?

“분명 저의가 있겠군요. 배후가 누구이건 간에 말입니다.”

“여진족들에게 저의랄 게 있겠나 싶기도 합니다만…….”

박 사직이 말했다.

막상 여진족의 이상행동에 의문을 느끼면서도, 현실부정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다.

그동안 박 사직이 겪어온 여진족이란 야만적이고 미개한 족속이었으며 강 너머의 여진족들은 한층 더 야만적이고 미개했으니까.

저의 따위를 품을 지성 자체를 의심하는 것이었다.

그런 놈들이라면 조선에 대해 잘 모르고서 변경을 침략하려다 실패했다는 편이 더 자연스러웠으니까.

“감부, 우리 일행이 가져온 술과 고기를 나눠줍시다. 마침 방어전에 승리하였으니 공을 치하해야지요.”

“예? 술과 고기를 가져오셨습니까?”

“원래 의도는 소소한 연회를 열어 볼하진에서 수고하는 갑사분들과 병사들을 다독여주려던 것인데, 명분 없는 연회보다야 치하가 더 낫지 않겠습니까.”

“아. 병사들이 많이 좋아할 겁니다.”

생사가 오가던 전투를 갓 탈피한 상황이었다.

딱히 입맛이 생길 만한 시점은 아니었지만, 피로한 몸은 양질의 식사를 요구했고 취기는 스트레스를 피할 좋은 도피처였다.

“다들 나오게! 판관 나리께서 자네들 공을 치하하기 위해 술과 고기를 가져오셨어!”

술과 고기 운운에 숙소에서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다들 지친 얼굴인데도 낯빛에는 기쁨이 만연했다.

박 사직이 준비를 명하자 병사들은 너나할 것 없이 서둘러 도구와 자리를 마련했다. 그동안 나는 박 사직을 향해 말했다.

“그동안 저와 사직은 보다 자세한 전투의 정황을 파악합시다. 부사께 보고서를 올려야 할 테니까요.”

“예.”

일행은 볼하진 밖으로 바로 나왔다.

박 사직은 전투 당시의 상황을 묘사했다.

“급습은 잠입해온 여진족들이 화살을 날린 것으로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일제히 고성을 지르더니 성으로 달려들더군요. 휴식하고 있던 병사들이 즉시 무장하고서 분전한 덕에, 어느 한 놈도 성을 넘어오지 못했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 그동안 박 사직께서 볼하진의 병사들을 잘 훈련해오셨군요.”

“하하.”

박 사직은 멋쩍은 웃음으로 부끄러움을 드러냈다. 노골적인 칭찬이긴 했지만, 볼하진을 잘 지켜냈으니 오히려 몇 마디 칭찬으로는 부족했다.

의심쩍은 구석은 있었다.

“그런데 강을 넘어온 여진족들이 진심으로 습격할 생각이었던 걸까요?”

“무슨 뜻이신지?”

“미리 탐지되지 않도록 극도로 조심해서 산을 넘어온 자들입니다. 그런데 볼하진 바로 앞에서 고함을 치며 공격을 알렸다고요?”

“흠…….”

“열세의 병력으로 성이 있는 주둔지를 공격하고, 앞뒤 안 맞는 행동을 한다라.”

“원래 여진족들은 종잡을 수 없는 족속입니다. 어떤 행보를 보이더라도 놀라울 것은 없지요. 판관께서 너무 깊게 생각하시는 건 아닐는지.”

“어쩌면 사직의 말씀이 옳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현장을 더 확인하고 부사와 논의를 해봐야 알 일이었다.

“그리고 사직께서 가지신 생각을 저라고 모르는 건 아닙니다만, 이 자리는 물론 볼하진에도 여진족은 많습니다. 그리고 여기 계신 감부는 조선어에도 능합니다.”

“아.”

박 사직이 탄식을 흘렸다. 들으라는 듯 면전에서 여진족이 어쩌고저쩌고 떠들어댔으니 말이다.

“술과 고기로 볼하진의 군사들을 위로해주자는 것도 제가 주장한 것이 아니라, 여기 계신 감부께서 저에게 청한 것입니다. 좋은 의도로 찾아오신 분이에요.”

“소, 송구합니다.”

“감부는 아량이 넓은 사람이니 실수 하나로 사직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의 회령에서는 흔한 광경이니까요. 하지만 양 출신의 화합을 도모하고 싶어 하는 만큼, 앞으로는 처신에 보다 주의해주세요.”

“명심하겠습니다.”

박 사직이 묵례를 올렸다.

현장 검증은 조금 더 이어졌다. 마지막으로는 시신들을 확인했다. 사직은 회의적이었지만 나로서는 어떤 단서가 있을지 몰랐으니까.

“털옷이야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이고, 호박과 색돌로 엮어 만든 장식이라. 흐음. 이 역시 여진족 사람들에게서는 흔한 장식인데.”

기대와는 달리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이에 석탈리가 조언했다.

“털옷은 몰라도 장식품들은 회수해두는 게 좋겠습니다.”

“전리품 차원에서요?”

“물론 부사께 전공을 증명할 전리품으로 쓸 수도 있겠지만, 여진족마다 고수하는 양식이 다릅니다. 거기서 거기지만 한 곳에 모아놓으면 특징을 찾을 수도 있겠지요.”

“좋은 계책입니다.”

나는 일행들과 함께 시신에게서 장신구들을 회수했다. 일대 문화에 대해서는 까막눈인 나로서는 일관적인 특징을 찾을 수 없었지만 말이다.

“이제 돌아들 갑시다. 병사들이 주연을 목이 빠지도록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그러자 일행 모두가 반겼다. 뭐가 됐건 공무란 항상 지겨운 법이며, 근무가 끝난 직후의 술과 고기란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낙이었다.

하지만 나의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뭔가가 있어. 뭔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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