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31화
11. 다섯 개의 연기(1)
조정에서 보내왔다는 고기는 드라이 에이징도 아니었으며, 염장한 고기도 아니었다.
단지 암적색으로 변색된 보통의 고기.
상한 냄새는 나지 않았다. 내 마음은 상했지만 말이다.
‘내 드라이 에이징…….’
말이 조정의 하사지, 경성부 즈음에서 적당히 채워넣은 것이 분명했다.
나는 성의 없는 조정의 하사품은 쪽마루에 올려둔 뒤, 고대하던 라스말라이나 만들었다.
데운 말젖에 식초를 부어 유단백을 응고시키고, 덩어리를 건져 반죽한다. 이걸 경단 모양으로 나누어 빚으면 ‘체나’가 된다.
체나를 꿀물에 끓여 단맛을 배게 한 뒤, 건져내고 꿀물에 말젖을 부어 데웠다. 이렇게 달콤 고소해진 말젖에 체나를 얹으면 라스말라이 완성.
기술이나 특별한 도구가 필요하지 않은 간단한 후식이다. 집에서 해먹을 수 있고…… 참 쉽죠?
“사프란이나 카다멈 있었으면 뿌리는 건데.”
물론 이 가혹한 북방 영토에 사프란이나 카다멈 같은 향신료는 없다. 아, 부추는 있더라. 여기에 들어갈 물건은 못 되지만 말이다.
“을룡아, 네가 한 번 먹어봐라.”
“공자님 먼저 드시지 않고요?”
“나야 당연히 맛있을 줄 알고 있지. 누구 손으로 만든 건데?”
“원래 이렇게 뻔뻔한 분이셨습니까?”
“자존심은 유능한 요리사의 첫 번째 덕목이지. 잔말 말고 맛이나 봐. 네가 괜찮으면 다른 사람에게도 권할 수 있으니까.”
압축된 유단백이 만드는 고소함과 꿀의 단맛은 호불호가 있을 수 없는 맛이다.
그러나 이 동네 사람들에게 라스말라이는 생소한 음식이다. 현대인처럼 자극적인 맛에 익숙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하기 전에, 순도 100% 16세기 조선 사람인 을룡이 입맛으로 시험해볼 필요가 있었다.
“알겠습니다…….”
을룡은 체나 하나를 건져 입에 넣었다. 그러자 눈이 번쩍 뜨이는 게 아닌가.
“어때?”
을룡은 대답을 서두르지 않았다. 대신 입안의 라스말라이에 집중했다. 꿀꺽. 입에 담긴 것이 넘어가자 을룡은 감탄을 토해냈다.
“와…….”
“와, 뭐?”
“공자님.”
“왜?!”
“이건 천상의 맛입니다……!”
을룡은 혼이 빨린 사람처럼 말했다.
과장일 수는 있어도 가식일 수는 없다. 을룡이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더 떠서 먹어도 되겠습니까?”
“그래, 그래. 다 먹지만 마라.”
허락이 떨어지자 을룡은 국자를 들었다. 그리고 체나 몇 개를 떠서 접시에 덜었다.
그리고 하나를 집어 먹더니 와, 하는 감탄과 함께 몸을 떨었다. 어지간히도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하하하……. 네가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다. 이제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눠줘야겠다.”
“부사나리요?”
“그래. 부사도 챙겨드려야지. 양이 많지 않으니까, 너랑 나까지 먹고 나면 한 접시 겨우 남겠다.”
우유의 수분함량은 88%. 고형분으로 만들면 중량으로는 고작 1/10만 남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한 동이 말젖을 다 써도 만들 수 있는 라스말라이의 양은 제한적이다.
“다른 한 분에게 나눠줄 수 있다면 역시 감부가 아니겠습니까?”
감부 석탈리.
평소 도움을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였다. 최근까지도 여진어를 배우기 위해 그의 저택을 자주 찾아 친분도 나날이 증진되고 있었다.
“감부에게는 가져다주지 말고, 와서 식사나 같이 하자고 하자. 라스말라이는 후식이니까 제대로 대접하려면 식사도 같이 해야지.”
겸사겸사 나눌 말도 있었다.
볼하진!
내가 판관 부임과 함께 처음으로 찾아간 곳이다.
진보가 말을 타고도 반 시진 거리에, 산 중턱에 있다보니 부사는 물론 담당인 나의 손에도 잘 닿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격리된 볼하진에서 질서란 언제나 불안한 것.
장교 섞인 소수의 조선 출신과 다수를 이룬 여진족 병사의 알력이 팽팽했다. 나를 안내해준 갑사가 석탈리의 방문에 불편을 드러낼 정도였고 말이다.
이대로 방치했다간 무슨 일이건 벌어지고 만다.
어떻게든 해야지.
석탈리는 초청에 응해주었다.
솟을대문을 넘어선 그는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마치 신기한 광경이라도 본다는 듯 말이다.
“판관?”
“아, 감부! 때마침 잘 찾아오셨습니다.”
화로 위에서 고기가 익어가고 있었다. 조정에서 하사한 그 고기다.
마음에 썩 들지는 않았지만 하사품인데 버릴 수는 없잖은가. 그래도 하사품 명목이 장식만은 아니었는지, 고기 익는 냄새 하나는 기똥찼다.
“직접 구우시는 겁니까?”
“예. 준비한 게 마땅치 않으면 정성이라도 들어가야지 않겠습니까.”
“일전에도 크게 대접을 받았는데, 또 대접을 받으려니 죄송하군요.”
“부담 갖지 마십시오. 대접은 제가 더 받았으니까요. 여기 앉으시지요.”
나는 맞은편의 의자를 가리켰다.
석탈리는 기꺼이 자리했다. 마다할 이유도 없었지만, 고기가 직화로 익어가는 냄새는 강한 마력이 있었다.
“무슨 고기입니까?”
“조정에서 저에게 보내준 고기입니다.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부위를 보면 하사품이라는 간판 값은 겨우 하고 있군요.”
“보면 바로 아시는 겁니까?”
“어림짐작이야 못하겠습니까, 하하.”
예상하는 부위는 채끝살.
600kg짜리 육우를 도축하면 고작 8kg 나오는 고급 부위.
원래는 굉장히 부드럽고 기름진 부위지만, 조선시대의 소는 품종개량이 안 되어서 덩치도 작은데다 전환율이 낮아서 기름도 적었다.
미래에서 온 나에게는 짭끝살인 셈이지.
“어사주도 같이 있으니 반주 삼아 들지요.”
“어사주요? 그런 하사품까지 저와 나누셔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일전의 공훈을 치하하고자 조정에서 내린 하사품이니까요. 당연히 감부와 나눠야 도리 아니겠습니까.”
이렇게 사담을 나누는 것도 좋았지만, 나에게는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이만하면 본론을 꺼내도 되겠지.
“일전에 방문하신 진을 기억하십니까?”
“볼하진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당연히 기억하지요.”
“그곳 갑사가 진을 안내해주면서 저에게 한 말이 있습니다. 감부의 방문을 달갑게 여기지 않더군요.”
“흠. 놀랍지도 않습니다. 일 년 전 방문했을 때도 좋은 시선은 받지 못했으니까요. 그사이 생각이 바뀌었다면 오히려 놀랄 일이지요.”
“회령에서의 분위기는 조금 바뀌었는데.”
나는 김자강에서 받은 배상금을 석탈리에게 맡겼다. 나 대신 피해자들에게 새 소를 사다주라는 이유에서였다.
덕분에 석탈리는 조선 사람들에게서 좋은 평판을 얻었다. 출신에 따른 갈등도 조금은 가라앉았다.
“하지만 볼하진은 고립되어 있지요.”
석탈리가 씁쓸하게 말했다.
“맞습니다.”
혈기왕성한 남자들이 사회와 가정에서 격리되어 산 한복판의 진에 갇혔다.
그리고 내가 400년 뒤 똑같은 처지에 놓이고서 깨달은 건, 이런 환경에서는 모든 사람이 쉽게 빡친다는 것이다.
이전부터 만연하던 출신에 따른 갈등은 쉽게 계기와 명분이 된다.
“볼하진은 제 관할이고, 또 감부와 제가 하는 일에서 상징성이 큰 만큼 분쟁의 소지가 있으면 미리 제거해야 합니다. 부디 감부께서도 저를 다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그런 일이라면야 언제든지 환영이지요. 볼하진의 군관과 군사들이 부담스러워 하지 않을 방도를 고안해봅시다.”
“어쩌면 공통의 적을 만들어주는 것도 방도가 될 수 있겠습니다만, 하하하.”
원래 같이 씹을 놈이 있으면 철천지원수도 친해지는 법이다.
만약 건전한 방법으로 분쟁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내가 다크 나이트라도 자처하는 수밖에.
‘서로 갈구는 거 보니까 힘이 남아도나보네? 눈 올 때 대비해서 제설 훈련 같은 거 해볼까?’
단숨에 개새끼 등극하고 볼하진 일치단결 쌉가능인데…….
하지만 굳이 개새끼가 될 필요는 없다. 다른 방법도 있을 테니까.
아마도.
마침 고기도 익었다. 이럴 때 중요한 건 내뱉는 게 아니라 넣는 거다.
고기를 큼지막하게 썰어두고 잔에는 어사주를 부으니, 차린 건 단출해도 그럴싸한 그림이 나왔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잔을 맞부딪혔다.
-짠.
“드시죠.”
“예. 판관께서도.”
나는 끄덕이곤 고기 한 점을 쿡 찍어 입 안에 넣었다.
맛? 갓 구운 고기가 맛없을 수가 있나?
나와 석탈리는 경쟁적으로 젓가락을 놀렸다. 만족스러운 식사가 이루어졌고, 나는 조금 아쉬워하는 석탈리에게 라스말라이를 내놓았다.
내 비장의 한 수였다.
“이건 무엇입니까?”
“오늘 아침에 말젖을 부탁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걸로 만든 요리입니다.”
“그렇군요.”
석탈리는 그릇을 받아들더니 문득 동요했다.
평소 미동 없이 벽돌 같은 얼굴을 한 채, 험악한 어조로 대화를 이어나가는 석탈리. 그런 그가 당혹하는 건 흔한 광경이 아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아니요. 이 정도로 짙은 고소함은 접해본 적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도대체 무슨 음식입니까?”
“머나먼 이국에서 식사를 마친 뒤 입가심으로 먹는 간식입니다. 제가 편의에 맞춰 변형했지만, 본판과 맛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흠!”
석탈리는 잔뜩 긴장한 채 체나 한 덩이를 입에 넣었다.
그러더니 깜짝 놀라 말했다.
“이걸 정말 말젖으로 만드셨단 말입니까? 어떻게 이런 식감이 나올 수 있는지…….”
“먹을 만합니까?”
“먹을 만한 정도가 아닙니다. 어떻게 만드는지 방법을 알려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물론이지요. 어렵지도 않습니다.”
석탈리는 안도하며 서둘러 숟가락을 놀렸다.
그는 정말로 순식간에 라스말라이를 끝장냈다. 마지막에는 한 방울마저 놓치기 싫다는 듯 대접까지 기울였다.
“이 맛은 정말로 놀랍습니다. 판관 덕분에 정말 놀라운 경험을 하는군요.”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입니다. 식사도 다 했겠다, 그럼 하던 이야기나 이어갈까요?”
“물론입니다. 식사도 했으니 이제 밥값을 해야지요. 하지만 두 출신 사이의 싸움은 하루아침에 일단락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래도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겁니다.”
이후로 논의가 이어졌다.
곪아가는 볼하진을 어떻게 잘 다스릴 것인가? 여러 사람들에 강제, 또는 반 강제로 붙들려 좁아터진 산 중턱에 묶여 살아가는데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나올 리 없었다.
다들 당연히 스트레스를 잔뜩 받았을 테고……, 의외로 이걸 해결하는 방법은 단순했다.
상관의 방문을 반기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지만, 술과 고기를 잔뜩 챙겨온 상관의 방문마저 마다하는 사람은 없었다.
* * *
나와 석탈리는 볼하진으로 향했다. 산비탈 아래에서 묶어둘 말을 지켜둘 사람 몇과 함께 말이다.
이외의 짐도 있었다. 그동안 볼하진에서의 반 감금 근무로 폭발 직전일 병사들을 다스려줄, 판관의 초특급 배려였다.
하지만 기대 가득했던 첫 출발은 중간 지점에 이르러 분위기가 돌변했다.
연기 하나만 피우던 운두봉이 갑자기 다섯 개의 연기를 피웠다.
다섯 개의 연기!
봉수에서 피울 수 있는 최대한의 연기 개수인 다섯 개는, 다음과 같은 상황에서 피워진다.
‘더 이상 봉수가 존속할 수 없는 최대한의 위급상황.’
즉, 봉수 함락의 위험이 발생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