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이순신이죠? 30화
10. 변방의 일(5)
“흐음…….”
선조는 보고를 받았다.
회령부사의 장계가 있었다. 두만강 너머의 여진족이 소 한 마리를 훔쳤는데 신임 판관이 해결했다는 것이었다.
그깟 소 한 마리의 일. 왕에게까지 일일이 닿을 일은 아니다.
……판관이라는 자가 직접 강을 넘어가, 범인들의 수급과 부족의 족장에게서 보상금까지 뜯어내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먼저 장계를 접한 영의정 이준경이 말했다.
“회령부사의 장계는 실로 놀랍습니다. 그가 장계에서 말한 신임 판관 이순신은 올해 초 열여섯의 나이로 갓 관문에 들어선 자이옵니다.”
이준경.
선조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이준경을 제거할 방책을 모색해왔다. 하지만 이준경은 아직까지도 영의정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불쾌한 일이었다. 하물며 그가 자신을 상대로 ‘새 왕은 명철하나 그릇이 큰 인물은 아니다. 예의는 바르지만 절대 겸손한 성품은 아니다.’와 같은 평을 했다면 더더욱 말이다.
실로 오만방자한 역적의 발언이었다. 하지만 이외에는 약점이 없는 자였다.
그는 철저하고 청렴했으며 과거에 했던 말 한 마디로 책잡아 제거하기에는 영의정의 자리와 평소 보여준 행실이 너무나도 탄탄했다.
물론 마음속에서는 몇 번이나 흉수의 목을 직접 참수했지만…….
“그렇소. 이순신의 행적은 오래전 나에게 큰 감명을 주어 아직까지도 기억하고 있는데, 그가 회령에서 소임을 다 해냈다니 지극히 만족스러운 소식이오.”
진심이었다.
선조는 대사헌 박응남을 향해 말을 이었다.
“이순신이 판관에 제수될 때 사헌부에서는 말이 많았는데, 보아하니 나의 식견이 틀리지는 않았던 모양이외다. 대사헌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오?”
“……전하의 안목에 거듭 놀랐사옵니다.”
박응남은 기운 없이 답했다.
그러나 선조는 이대로 끝내줄 생각이 없었다.
지난 특채로 많은 사람이 요직에 올랐다.
대부분은 참하관이었으나 몇몇 사람들은 참상에 올랐고 그중에서도 이순신은 손에 꼽힐 정도로 높은 위치에 올랐다.
종오품 관직인 회령판관.
그러나 품계는 정육품이다. 그중에서도 낮은 승훈랑으로, 회령판관이 될 수 있는 최저의 위치이기도 했다.
이는 뒷배 없는 이순신을 회령판관에 올려놓기 위한 최대한의 타협이었으나, 그럼에도 사헌부에서는 끔찍이도 반대했었다.
이제 상황은 반전됐다.
“신임 판관인 이순신이 이만한 업적을 세운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분명 회령부사가 이순신을 지원해주지 않았다면 이런 성과도 없었겠지.”
회령부사 장필무.
최근 선조는 적극적으로 인사에 개입하고 있었다. 장필무는 그 과정에서 선조의 눈에 들었던 자로, 종이품 품계인 가선대부로 증직되었다.
이 과정에서 극렬하게 반발한 무리가 삼사의 간관들이었다. ‘왕언(王言)이 한 번 나오면 사방에 전포되니, 반드시 침착해야 한다.’고 했던가?
건방진 놈들이다. 왕이 침착하지 않고 경망스럽게 행동했다는 말이니까.
그런 차원에서 이순신은 그야말로 굴러 들어온 복덩이였다. 마침 장필무 밑에서 그만한 공훈을 낼 줄은 예상도 못했다.
선조에게 반전이란 불쾌한 것이었지만 이런 반전이라면 언제라도 놀라줄 수 있었다. 덕분에 장필무 건도 똑같이 합리화할 수 있었다.
“이전에 삼사에서 이순신뿐만 아니라 장필무의 자질에 대해서도 문제 삼은 적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
“당시 전한이 문제를 삼았던 것은 장필무의 자질이 아니오라, 특진에 비해 놀랄만한 업적이 없었다는 것으로…….”
“이보시오, 대사헌.”
“…….”
“그대는 삼사의 대표요. 아랫사람이 잘못을 한다면 그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고, 이렇게 공연히 전한을 들먹이며 그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좋은 처신처럼 보이지는 않소이다.”
“송구하옵나이다.”
선조는 차오르는 만족감을 느꼈다.
대사헌과 전한 사이에 이간질도 하고, 동시에 책망도 하고, 물론 전한도 이번 일로 기세가 한풀 꺾이겠지.
홍문관 전한 기대승.
이전부터 을사사화 희생자들의 복권과 함께 조광조의 추증을 강력하게 주장하던 놈이었다.
덕분에 명종 시대를 풍미했던 훈구파 놈들을 관짝에 처박는 데는 도움이 되었지만, 성공한 명분놀이를 등에 업은 기대승의 입지가 너무 커졌다.
더 건방져지기 전에 언젠가는 꺾어둬야 했는데, 이번 일이 계기가 되어줄 터였다.
“이번 일로 부사 장필무가 가선대부로 증직된 것에는 이견이 없어질 걸로 생각하고, 이순신의 판관 제수도 마찬가지로 생각하오. 하지만 두 사람이 공훈을 세운 것은 자신의 자리를 정당화하기 위함이 아니라 전적으로 나랏일에 공헌하고 헌신한 것인 만큼, 별도의 포상이 논의되어야 할 것이오.”
이견은 없었다.
있을 수도 없고.
선조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전부터 몇몇 신하들이 나의 사람 쓰는 안목을 믿지 않았는데, 이렇게라도 증명이 되었으니 다행이라 생각하오. 이후에도 나의 인선에 도를 넘을 정도로 왈가왈부하는 자가 있다면, 다른 저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겠소이다.”
간만에 참으로 만족스러운 조회였다.
* * *
회령.
절기로는 분명 봄기운도 원숙해지고 여름도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러나 북방은 여전히 쌀쌀하고 추웠다.
처음 부임했을 때와 비교해서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 눈은 안 오고 맛대가리 없는 고기찜도 익숙해졌다는 정도다.
내가 미각을 상실했다거나, 미식을 포기한 건 아니다. 단지 불가피한 상황에 대한 인내심이 보다 늘었을 뿐.
그리고 사람은 불편해지면 변화를 시도한다던가?
“감부에게 말젖 얻어왔습니다.”
을룡이 나무통을 내려놓았다. 안에는 새하얀 말젖이 찰랑찰랑 흔들리고 있었다.
“이야, 많이 줬는데?”
말은 소와 달랐고, 소는 미래의 젖소와도 달랐다. 미래의 우유 1.5L 한 통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젖이 나오는 한 무리의 암컷 말들이 필요했다.
그러니 한 동이 정도면 정말 많이 준 셈이었다.
“공자님께서 대접도 크게 해주셨으니 당연히 이 정도는 줘야지 않겠습니까?”
“그거야 내가 두만강 너머로 갔을 때 힘 써준 대가로 당연히 해줘야 할 일이고……, 그리고 사람은 받은 것만 기억해야지 해준 것만 기억하면 안 된다.”
“남들도 다 그러면 저라고 안 그러겠습니까.”
을룡은 한 차례 투덜거리곤 대맥초(大麥醋)도 한 동이 가져왔다. 미리 얻어온 것으로, 조선시대에서 쓰는 식초 중 하나였다.
“이거 한 번에 성공 못 하면 곤란해지는데.”
“말젖이랑 식초로 뭘 만들려 하십니까?”
“알려주면 이해나 하냐?”
“알려나 주시고 말씀하시죠.”
“라스말라이.”
“예?”
라스말라이.
인도 일대에서 먹는 후식이었다.
소젖에 레몬즙를 넣어 응고시켜 빚은 ‘체나’를 설탕 시럽에 끓인 뒤, 데운 젖에 담가두었다가 먹는다.
대한민국에서 잠깐 유명해진 적이 있는데 깡통으로 수입해온 건 수세미를 설탕물에 적셔놓은 물건이고, 진짜 라스말라이는 급이 다르다.
물론 여기서는 소젖이나 레몬즙을 구하기 힘드니 말젖과 식초, 그리고 설탕 대신 꿀을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 라스 뭐시기……, 하는 건 왜 만들어 드시려는 겁니까?”
“잘 먹고 잘 싸려고 그런다, 이놈아.”
생활의 삼대요소를 흔히 의식주(衣食住)라고 한다.
각기 입을 것, 먹을 것, 살아갈 곳을 뜻한다. 하지만 입을 것이 없으면 헐벗으면 그만이고 살아갈 곳이 없으면 동굴에 들어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먹을 것이 없으면? 꼼짝없이 굶어죽는 수밖에 없다.
결국에는 잘 먹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회령에서의 삶은 가장 중요한 음식, 식사, 그리고 나의 미식에 대한 철학을 파괴해왔다.
어이, 거기 을룡이. 라스말라이 있으면 하나만 줘라. 갈 때 가더라도 라스말라이 하나 정도는 괜찮잖아?
-쿵, 쿵.
대문 두드리는 소리였다.
“뭐냐?”
오늘은 선약도 없었고, 휴일이라 일도 없었다. 찾아올 사람 하나 없는데 누가 내 집을 방문한단 말인가.
누군지는 몰라도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교양이 부족한 사람임은 확실했다.
을룡이 나를 대신해 대문으로 나섰다.
교양이 부족한 사람? 부사 장필무였다.
“부사나리.”
그는 금빛 두루마리와 함께 나무함을 들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부사가 직접 행차한 걸 보니 작은 일은 아니었다.
장필무는 대답 대신 물통을 보며 물었다.
“저 하얀 건 뭔가?”
“말젖입니다.”
“쉰내가 나는 걸 보니 상한 모양이로군. 귀한 건데, 아깝게 됐어.”
“아닙니다. 이건 대맥초 냄새입니다.”
나는 옆으로 물러서며 마루에 놓인 또 다른 물통을 가리켰다.
“흠?”
“음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자네가?”
“예.”
“잘 되면 나도 한 번 맛보세. 아니리면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고.”
“물론입니다.”
장필무는 나무로 된 함부터 건넸다. 묵직했다.
“이건 뭡니까?”
“술과 고기. 조정에서 보낸 걸세. 품계도 봉훈랑(奉訓郞)으로 가자고 한다는군. 이전 품계가 뭐였기에 이제 종오품이 된 건가?”
장필무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봉훈랑은 종오품 중에서도 아래. 판관이 원래 종오품 관직임을 감안한다면 의아한 일이었다.
종오품 관원이 종오품 품계에 오른 것이 승진이라 할 수 있나?
“원래는 종육품 승훈랑이었습니다.”
“아. 하기야, 첫 관직치고 종오품은 높았지. 이제야 제 자리에 올라섰군.”
“덕분입니다. 저는 공훈을 부사께서 차지하실 줄 알았습니다.”
“내가 왜?”
장필무가 태연히 물었다.
“장계는 부사께서 작성하신다고 하셨으니까요. 당연히 부사께서 공을 차지하시겠다는 뜻인 줄 알았습니다.”
“굳이 거짓 공문으로 위험을 감수하기엔 여진족 수급 몇 개는 매력적이지 않군. 게다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자네를 시험하기 위함이었으니까.”
“시험이라니요?”
“입바른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이익을 걸고도 그럴 수 있느냐지. 다행스럽게도 자네는 나를 실망시키진 않았네. 그런 사람에겐 기회 한 번쯤은 줘볼만도 하지.”
그래서 내가 강을 넘는 것을 허락해주었군.
“감사합니다.”
“축하하네. 이 말 해주려고 왔으니, 이만 돌아가겠네.”
장필무는 권자를 건넨 뒤 즉시 발을 돌렸고, 나는 그를 배웅하기 위해 함께 마당을 가로질렀다.
사실 김자강의 일을 해결한 공훈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는데, 부사가 선선히 공훈을 인정해줄 줄은 모르고 있었다.
의외의 반전이었고 이전에 건방지게 굴었던 것이 미안해졌다.
장필무가 문간을 나서자 나는 그를 향해 말했다.
“송구합니다. 그 자리에서 부사나리의 마음도 모르고 경거망동하게 행동했습니다.”
장필무가 답했다.
“아니! 내가 자네에게 더 미안하지. 왜냐하면 나는 유능한 부하를 썩혀둘 생각이 없거든. 앞으로는 고생을 더 많이 할 테니 각오해 두는게 좋을 걸세.”
“그걸로 사죄드릴 수 있다면 열심히 사죄드리겠습니다.”
“기대하지.”
장필무는 그대로 맞은편의 관아로 들어갔다.
저택으로 들어온 나는 함으로 다가갔다.
조정에서 내린 술과 고기라……. 도성에서 회령까지 거리가 하루 이틀이 아닌데, 술은 몰라도 고기는 멀쩡할 것 같지는 않았다.
드라이 에이징인가?